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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누가복음 6장37-42 /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by 【고동엽】 2022. 11. 19.
■2022년 11월11일(금)■
 
(누가복음 6장)
 
37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39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40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41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묵상/눅 6:37-42)


◆ 비판하지 말라


(37)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내 친구가 어느 신문사 기자로 있을 때, 목사들이 모이는 모임에 참가하게 되었다. 제법 잘 나가는 목사들이 모여서 한국 교회의 세속화를 걱정하면서, 이구동성으로 비판한 것이 목사들이 하나님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백 명이 모이면 백 명이 모두 비판만 하고 있으니 도대체 회개할 대상은 어디에 있는가?


사람들은 회개하기는 싫어하지만, 비판하는 것은 무척 즐긴다. 비판은 일종의 판사 놀이다. 법정에는 죄인과 판사로 나누어지는데, 비판하는 순간 자신은 판사석에 앉는 셈이니 구미가 당기지 않겠는가?


잠언에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18:8, 26:22)라는 말씀이 두 번 기록되어 있다. 솔로몬이 그것을 얼마나 실감했으면 두 번이나 중복해서 썼을까?


많은 사람이 '비판은 나의 목자시니 나를 높은 판사석으로 인도하리라'고 굳세게 믿고 있다.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신문에서도 온통 비판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인생의 목적이 비판인 것처럼 사는 사람도 있다.


대부분의 비판은 옳다. 그래서 더 문제다.
없는 것을 누명 씌우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비판하는 사람은 더욱 확신 가운데 광분하며 열을 올린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 선 내 자신이다. 하나님께서는 비판받는 대상과 비판하는 당신을 비교할 때 누구 편에 서실까? 누구에게 손뼉을 치실까?


세리의 탐욕보다 그것을 비판하는 바리새인의 교만과 고집이 하나님 앞에서는 더 역겨운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가? (눅 18:9-14)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는데(마 18:3), 어린아이의 가장 큰 특징은 남을 비판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선배가 있는데, 글이 날카롭고 깨달음이 제법 깊다. 감탄이 나올 적이 많다. 이분은 늘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지만, 이분 앞에서는 왠지 불편하다. 이분 앞에서 조금이라도 아는 체를 하면 즉시 거부감을 나타낸다. 무슨 말만 하면 잘난 체, 자랑하는 것으로 간주하니 불편할 따름이다.


또 다른 선배가 있는데, 이분은 어떤 판단도 하지 않기로 결심한 분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준다. 그래서 편하고 무엇이든 말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서로 판단하지 말 것을 말하고(롬 14:13),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고 하셨다(고전 4:5)


판단하지 않는 어린아이와 같은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래서 누구라도 나를 편하게 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판단과 분별


그런데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분별도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오는 늑대를 조심하라고 하셨는데(마 7:15), 이것은 전적으로 분별을 강조하신 말씀이다.


거짓 선지자와 우리를 속이려는 자를 분별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 목숨과 관계있다.


도대체 설교를 제대로 분별하지 않고 목사가 말하니 무조건 진리라고 믿는 자가 어떻게 천국에 무사히 갈 것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판단과 분별은 무슨 차이일까?


나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분별해야 한다. 받아들일 것인지, 거절할 것인지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오만한 죄성에 근거한다.


분별은 객관적이지만, 판단은 매우 주관적이다. 분별은 여러 가지 데이터가 종합되어야 결론을 내리는 데 반해, 판단은 한 두 가지 데이터로 자기 멋대로 결론 내린다.


상대방의 몸짓 하나만으로 상대방을 파악하기와 같은 책들이 제법 인기가 있지만, 그런 것이 인간관계를 얼마나 메마르게 하는지 아는가? 도대체 상대방의 말 한마디로  어떻게 그를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이 하나님인가?


서로 판단하는 사회는 지옥이다. 서로 받아주고 용납하는 사회가 천국이다.


형제가 자기 자랑을 할지라도 받아주는 것이 아름답다. 그것을 교만하다고 판단하면 안 된다. 그가 혹시 깊은 열등감이 있어서 그러는 것인 줄 누가 알겠는가?


너무나 많은 사람이 오만하고 성급한 판단에 상처받고, 희생되고 있다.


무엇이 분별이고 무엇이 판단인가?


분별은 지혜와 지식에서 비롯되고, 판단은 교만한 죄성에서 비롯된다. 나의 비판의 출처를 살펴라.


형제를 바로 세우기 위한 것은 지혜이지만, 그런 동기 없이 멋대로하는 평가는 교만이다.


성경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할 수 있다. 그런 분별도 없으면 어떡하는가? 그러나 나에게 실천 의지가 있는가를 살피고 그것이 없이 단지 비판하는 것뿐이라면 삼가라. 그것은 단지 교만한 죄성에서 비롯된 판단일 뿐이다.


주님,
저에게 분별과 판단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영을 분별하는 데는 날카롭게 하시되
형제를 판단하는 데는 무디게 해주십시오.


아, 주님,
판단하기 좋아하는 악한 습성에서 저를 건져주십시오. 그래서 어떤 형제라도 저를 편하게 대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출처 : https://cafe.daum.net/soongsari/WDob/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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