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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로마서 16장25-27 / 복음은 신비의 계시다

by 【고동엽】 2022. 11. 15.
■2022년3월 3일(목)■
 
(로마서 16장)
 
25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26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27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묵상/롬 16:25-27)


◆ 복음은 신비의 계시


(25)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26)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복음은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다.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다는 사실만 알아도, 그는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자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자기 상식선에서 복음을 받아들이니까, 엉터리 복음, 사이비 복음, 반쪽 복음이 된다.


복음은 신비의 계시다.
철학의 논리로 깨달아지는 저급한 인간의 사상이 아니다.
진정으로 복음을 깨달으려면, 내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사도가 전하는 말을 겸손한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


복음이 왜 신비의 계시인지 몇 가지를 짚어보자.


# 복음의 신비 1


이전에는 율법이 주어진 목적이 인간이 의롭게 살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등의 계명을 들여다 보라! 그것이 지키라고 주신 것이지 달리 무슨 목적이 있겠는가?


그런데 복음은 율법이 주어진 목적이 인간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롬 3:19). 그리고 이 목적이 인간이 율법을 지키는 것에 실패하니까 파생적으로 생긴 목적이 아니라, 애초에 율법이 주어질 때부터 세워진 궁극적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게 충격이다.


# 복음의 신비 2


이전에는 영생 얻는 여부가 내 의의 크기와 공로에 달려있었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합리적이다. 일부 사이비 종교를 뺀 세상의 모든 종교가 모두 그런 방식이다.


그런데 복음은 행위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이 은혜를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는다(롬 5:2). 이것을 어떻게 상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 복음의 신비 3


구원을 얻은 후에는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들은 구원은 은혜로 받지만, 구원을 유지하는 삶은 여전히 내 의와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구원은 믿음으로, 신앙생활은 율법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전히 자기 의에서 희망의 근거를 찾는다. 바울처럼 자기 의를 포기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선언을 하지 못한다(갈 2:20).


그런데 복음은 율법으로 살면 오히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져나간다고 경고한다(갈 5:4)
복음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갈 2:20).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하지 못한 자들은 어리석은 질문을 한다.
그러면 믿기만 하고, 세속적으로 살아도 상관이 없단 말인가?
신자들의 타락한 삶이 그런 헛된 이론에서 나오지 않았는가?
그리고 이러한 잘못된 결론을 내린다.
"신자들의 윤리적인 삶은 율법 외에는 대안이 없다. 올바르게 사는 길은 율법을 지키는 것만이 해답이다. "


삽질로는 무덤 하나 파기도 힘들다.
그런데 삽질로 어떻게 산을 옮기는가?
그래도 사람들은 가만있는 것보다는 삽질하는 것이 그나마 성과가 있으니 그것을 권장한다.
어떤 사람은 삽질로 제법 큰 무덤을 만들고는 자기 성과를 자랑한다. 인간의 자기 의란 삽질에 불과하다.
한쪽으로는 쌓으면서 한쪽으로는 더 큰 웅덩이를 만드는 모순덩어리다. 겸손하려고 노력하면서 한편으로는 자기의 겸손을 뻐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믿음으로 산을 옮기는 방법이 있음을 말씀하셨다.
믿음으로 산을 옮겨본 사람은 삽질을 권고하지 않는다. 산은 꼭 백두산, 한라산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 속에 우뚝 솟아있는 산도 무수하다. 나를 짓누르던 염려, 강박, 정욕, 죄책감...모두 내게는 거대한 산이다. 그게 믿음으로 사라지는 놀라운 경험을 해본 적 있는가?


믿음이 추상적이라고? 
아니다.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살아계시는데, 어떻게 추상적이 되겠는가? 베드로는 믿음으로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죽은 사람도 살렸다. 이게 어떻게 추상적인가?
우리는 그 정도는 아니어도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연인의 사랑이 공허한 말에 불과하다. 설명할 수도, 이해시킬 수도 없다. 그러나 연인의 사랑을 해본 사람은 사랑이 결코 공허한 것이 아니라 실제적임을 안다. 믿음도 마찬가지다. 믿음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서점에 갈 것이 아니라 골방에 가라. 거기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라. 


복음의 신비는 이외에도 열거할 것이 많다.
그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살 때 개인적으로 더 깊이 경험하게 될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복음에 반발하는 것이 오히려 반갑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가 복음을 제대로 전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저 고집 센 종교인들과 율법주의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가 알고 있는 바와 다를 바 없다고 한다면 내 복음은 가짜다. 아니면 저들이 양심을 속이고 있거나.


그러나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복음의 진리를 기뻐한다. 그동안 잘못된 복음이 마치 자기에게 안 맞는 옷처럼 느껴져서 힘들었는데, 복음의 진리를 접하는 순간 제대로 된 옷을 찾은 느낌이 든다.


복음의 온전한 지식을 정확하게 다 알아야 구원받는가? 그렇지 않다.  
복음은 평생을 걸쳐서 연구해도 끝에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다. 루터는 평생을 걸쳐서 복음을 연구했다.
그러나 기본적인 복음을 모르면, 그는 신앙생활 자체가 왜곡되기 시작할 것이다. 처음 믿을 때의 기쁨이 사라지고 점점 세속화되며, 결국 세상 사람보다 더 고집이 세고 교만한 종교인으로 전락할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강하게 경고했다(갈 5:24).


한번 자신을 돌아보라.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와 지금을 비교할 때, 더 예수님을 닮아있는가, 아니면 더 고집이 세고 교만해졌는가?
후자라면 당신은 신앙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종교생활을 한 것이다. 믿음으로 산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 산 것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 노력, 자기 의로 가득 차 있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는 믿음이 아니라 행동이 필요할 때다. 사실 그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는 자다. 진짜 믿음이 생기면 행동이 나오게 되어있다. 오히려 행동하지 않는 것이 더 힘들다.


복음은 공부해서 얻을 수있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다.
물론 당신은 이 복음을 지식으로만 받아들일 수도 있다. 심지어 교회에서 가르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지 않는다면 여전히 당신은 율법주의자며, 메마른 종교인에 불과할 것이다. 당신은 복음을 믿을 때 오는 기쁨과 능력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복음은 오직 믿는 자만이 경험할 수 있는 신비의 영역이다.


만일 사람이 진정으로 복음을 깨달았다면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이 있다.


자기 자랑을 멈추게 된다(롬 3:27, 엡 2:9).
예수님을 사랑하게 된다(벧전 1:8).
그리스도를 경외하게 된다(빌 2:10-11).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삶의 표준이 되신다(골 2:6).
믿음으로 사는 삶의 능력을 경험하면서, 믿음의 비밀을 아는 자가 된다(딤전 3:9).


바울처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고 싶지 않은가? (갈 2:20)
복음을 제대로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이 복음이 나를 견고하게 하며, 더욱 예수의 사람으로 이끌 것이다.


지혜로우신 하나님!
복되신 하나님!
복음의 신비를 더욱 깊이 깨닫게 해주시고, 영원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게 해주십시오.

출처 : https://cafe.daum.net/soongsari/WDob/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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