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한 자가 받는 복 (이사야33:13-16)
논 지 :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정직한 삶을 살며, 심판 때에 구원을 받습니다.
가. 하나님 경외와 정직
요즘에는 온 나라가 축구 얘기로 난리입니다. 어제 뉴스에 보니까 브라질 선수들이 중국에게 크게 이겼던데, 브라질 선수들의 발 재간이 얼마나 현란하고 능수능란하던지요. 그런데 지난 번에 브라질과 터키가 경기를 하는 중에 브라질의 히바우드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타 플레이어가 코너킥을 하려고 라인에 서 있었습니다. 터키 선수가 공을 건네주는데 세게 발로 찼습니다. 그러자 그 공을 맞고는 브라질 선수가 얼굴을 감싸고는 쓰러졌습니다. 그래서 심판으로부터 터키 선수가 퇴장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필름을 다시 돌려보니까 그 브라질 선수가 얼굴에 맞은 것이 아니라 다리에 맞았는데, 얼굴을 맞은 것처럼 거짓 쇼를 한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그 브라질 선수가 벌금을 크게 내게 되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난 다음에 그 사람을 보니까, 저 사람이 발 재간만 좋지 인간성이 제대로 안 된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스타 플레이어로서 명예가 실추된 것입니다. 또 그 사람뿐만 아니라 브라질이라는 나라의 이미지도 별로 안 좋게 생각이 되는 걸 볼 수가 있습니다. 정직하지 못한 것이 그 사람 개인에게나 그 나라에게나 엄청난 손해를 가져 오게 된 것입니다.
고대세계 중에 초 강대국인 앗수르라는 나라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했습니다. 영원히 위대한 나라, 강대한 나라로 지속될 것 같던 초 강대국 앗수르가 멸망했을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멸망을 보면서, ‘저런 나라가 다 멸망하니 이 세상에 멸망하지 않을 나라가 있겠는가?’ ‘우리도 과연 제대로 살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질문이 14절 말씀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선지자 이사야의 대답은 하나님을 경외하여 정직한 삶을 사는 사람은 심판 때에 멸망하지 않고 구원 받는다는 대답을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앗수르는 거짓과 부정 부패가 만연했기 때문에 멸망한 것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정직한 삶을 살아가면 멸망하지 않고 구원 받는다는 것입니다.
33장 6절 말씀에서도 “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6)”라고 이사야는 말합니다. 잠언 1장 7절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하고, 잠언 9장 10절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잠언의 가장 기초적인 주제입니다.
이사야는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필연적으로 멸망하게 되고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하시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게 되고 그래서 심판 때에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싫어하시는지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자기 탐욕과 자기 감정대로만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도 거침없이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될 수가 없고 심판 때에 멸망하게 됩니다.
미국의 네비게이토 선교회 사역자인 제리 화이트는 그의 책 [정직, 도덕 그리고 양심(Honesty, Morality and Conscience)] 에서 정직에 대한 다양한 이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일반적 이해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정직이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두번째는, 법률적 이해입니다. 정직이란 법을 잘 지키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법을 어기면 부정직한 사람이요, 법을 잘 지키면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세번째는 내면적 이해입니다. 정직은 각 개인의 양심의 문제라고 이해합니다. 양심에 거리끼지 않게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정직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네번째는 성서적 이해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정직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법이 정한 테두리 안에서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판단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법을 넘어서서 법 보다도 더 높은 수준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인정합니다.
여러분,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은 법과 양심을 뛰어 넘어서서 하나님의 말씀과 뜻, 하나님의 기준대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우리 그리스도인입니다. 법이나 양심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이해관계에 따라서 자기 편한 대로 자꾸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과 양심은 언제나 모든 사람들이 정직하게 살아가는 기준과 표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시대나 어떤 문화, 어떠한 상황 속에서 삶을 살아가든지 우리 성도들의 신앙과 생활에 있어서 변치 않는 유일한 기준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법이나 양심 같은 사람의 기준에 맞추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법과 양심을 뛰어 넘어서 하나님의 기준을 바라보고 그 기준에 맞추기 위해서 애를 쓰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에 맞춰서 정직한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정직하게 살아감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하시게 되고,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 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고 그래서 심판 때에 구원 받습니다.
나. 정직한 삶 (15)
오늘 15절 말씀에는 정직한 삶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5절 말씀을 보시면, “오직 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정직한 말 (15a)
이 15절 말씀을 세가지로 분류한다면, 첫번째는 말을 정직하게 해야 합니다. 거짓말은 도둑질보다 더 심각한 죄입니다. 도둑질은 물건 하나 훔쳐 가는 거지만, 거짓말은 그로 인해서 부정과 부패를 초래하기 때문에 거짓말이 더 큰 죄입니다. 거짓말을 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자신의 거룩한 성품을 훼손하고 자기 영혼을 파괴하며 자신의 존엄성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짓말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기 이전에 내 자신 스스로가 자신을 약화시키는 결과가 됩니다.
또 거짓말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신뢰를 깨뜨려버리므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신뢰가 바탕이 되지 않고는 유대감을 찾을 수 없고 친밀감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게 되면 신뢰가 파괴되고 관계가 깨어지게 됩니다. 가정에서 부부간에, 부모와 자녀 간에, 형제 간에 거짓말을 하게 되면 관계가 깨어지고 그 가정이 파괴됩니다. 부부의 신뢰는 사소한 거짓말에서 금이 가게 되고 깨어지게 됩니다. 직장에서도 개인적인 이익이나 편의를 얻기 위해서, 또는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게 될 때에 직장 속에서 신뢰관계가 파괴되고 그 직장사회는 서로 불신하는 사회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군인들이 군대에 있다가 집에 가고 싶으면 거짓말을 합니다. 친구한테 부탁해서 멀쩡하게 살아계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거짓 전보를 치게 해서 휴가를 받아 집에 가려고 합니다. 그렇게 거짓말 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집안엔 왜 그렇게 돌아가시는 분들이 많은지요. 그렇게 해서 이익을 본다고 해도 그는 자기 자신의 영혼과 존엄성을 파괴시키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그를 볼 때에 그 사람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어지게 됩니다.
정직한 말은 자기 영혼을 맑게 하고 자기 존엄성을 높여 주며, 사람과의 관계에 신뢰를 주고 친밀하게 하고 유대를 견고하게 하고 강화하게 합니다.
2. 정직한 재물(15b)
그 다음에는 재물을 정직하게 취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5절 중간에 보면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토색”은 권력을 이용하여 남에게 억압을 가하고 남의 것을 착취하고 빼앗는 것을 말합니다. “뇌물”은 권력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의 청탁을 들어주는 댓가로 재물을 받는 것입니다. 부정직한 방법으로 재물을 취하는 것들입니다. 우리 사회의 부정부패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사회는 얼마나 많은 부정부패가 만연되어 있습니까? 온갖 무슨무슨 게이트라는 이름으로 권력 주변에서 끊임없이 부정부패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어느 한가지 사건이 드러나면, 그 사건과 연결된 또 다른 추악한 사건들이 끊임없이 드러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한국 형사정책연구원(kic.re.kr)에서 우리나라의 각종 부패의 원인을 규명하였습니다.
1) 첫째로는 규제가 너무 많습니다. 공장 설립 승인을 받으려면, 농지법에서부터 국토이용관리법에 이르기까지 15개법 24개 조항과, 공장 건축 허가에 4개법 15개 조항을 통과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이 많은 법 조항을 거치는 동안 뇌물을 주지 않고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2) 공장을 세울 때에만 부정부패가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기업을 운영할 때에도 뇌물을 주어야 할 연관된 기관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관할 시군구청, 경찰서, 세무서, 환경부, 노동부, 소방서, 집권여당, 각종 사회단체 등 여러 곳에서 손을 내밀기 때문에 그런 모든 곳들에 돈을 주는 비율이 많다고 합니다.
3) 기업 쪽에서도 제도의 한계를 넘어서서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법을 지키기 보다는 뇌물을 주어서 쉽게 해결하려는 풍토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적당히 뇌물을 주고, 받는 관행이 우리 사회 속에 만연됨으로 인해서 우리 사회가 부정부패가 가득찬 사회가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뇌물과 토색을 미워하고, 단호히 거절하는 것이 정직한 삶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3. 정직한 관계(15c)
15절 끝부분에는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정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에는 눈과 귀를 막아서 가담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나라는 고소 사건 수가 일본의 53배이고, 사기 고소는 326배에 달한다고 합니다(조선일보 2002. 1. 7). 또 법정에서의 위증이 횡행하여 일본은 위증죄로 재판 받는 사람이 년 5명 미만인데 비해, 우리나라는 100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무고도 일본은 3명 미만이 기소되는데 우리는 200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일본을 미워하고 일본을 우습게 생각하지만, 일본사람이 우리들 보다 훨씬 더 정직하다는 말입니다. 부끄러운 일이지요.
사회에서만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도 남을 해치는 비방과 훼방이 횡행하고 있는 경우들을 너무나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저에게 와서 아무개가 이러이러하다더라는 소문을 전해 주기도 하고, 아무개가 이런 얘기들을 하고 다니는데 분하다고 와서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고, 또 어떤 분들은 목사가 이런 일이 있다고 하던데 사실이냐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얘기를 들을 때 마다 어이가 없어서 웃고 지나쳐 버리고 맙니다. 여러분, 그런데 거짓말로 남을 해치는 일이 만연되게 되면 사람들간의 관계가 파괴되고 맙니다. 그 사회가 거칠어지고 사나워지고 야만적인 사회가 되고 맙니다.
4. 정직해야 건전한 사회가 되고 국가 경쟁력이 높아진다. ]
정직한 사회가 건전한 사회이고 정직한 사회가 국가 경쟁력을 높이고 정직한 나라가 되야 그 나라가 살만한 나라가 될 수가 있게 됩니다. 우리나라는 산업화된 사회로써 산업이라는 분야에서 보면,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고 있지만, 부패지수는 낮아서 후진국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국제 투명성 기구(TI:Transparency International)가 국가 청렴도와 부패인지지수를 발표했는데, 우리나라는 91개 국가 중 48위이고, 10점 만점에 4.2입니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후진국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또 뇌물공여지수에서는 세계 주요 19개 수출국 가운데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국제교역을 하면서 뇌물을 많이 준 것으로 평가됐습니다(세계2위).
미국의 정치학자인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그의 책 [트러스트(Trust)] 에서 신뢰나 신용이 경제가치의 기본이 될 뿐 아니라, 사회자본이라고 말합니다. 무형자본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신뢰라는 자본이라는 것입니다. 즉, 신뢰, 신용은 곧 밑천입니다. 기업을 하는 사람은 밑천이 있어야 하는데 이 신뢰와 신용의 밑천이 떨어지면 사업이 끝나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 신뢰와 신용을 국가 경쟁력의 원천으로 보고 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신뢰와 신용이 얼마나 땅에 떨어져 있는지 국가 경쟁력이 형편없습니다.
결국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스스로 자기 영혼을 죽이는 것이며 자기 존엄성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또 거짓이 난무하는 사회는 거칠고 사나운 사회가 되고 인간관계가 깨어지는 사회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부정부패가 난무하는 나라는 국가 경쟁력이 떨어지고 결국에는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다. 정직한 자가 받는 복(14,16)
1. 여러분, 그런데 정직한 자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며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16절 말씀을 보면, “그는(정직한 자) 높은 곳에 거하리니 견고한 바위가 그 보장이 되며 그 양식은 공급되고 그 물은 끊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직한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14).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서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심판 때의 멸망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2. 또한 정직한 자는 하나님께서 높이십니다(16a).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한 백성으로, 거룩한 제사장으로 하나님께서 높이십니다. 정직한 자는 하나님께서 보호하십니다(16b). 견고한 바위가 되시고, 피난처가 되셔서 보호하십니다. 또한 정직한 자는 하나님께서 필요로 한 것들을 풍족하게 공급하십니다(16c).
여러분, 정직이라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양심의 문제가 아닙니다. 혹은 어떤 법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직의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 멸망하느냐 구원받느냐,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자는 양심과 법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서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구원과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정직한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출처/이철신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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