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사함 받는 복 (엡 1:7-12)
얼마 전 국무총리 임명을 놓고 국회에서 청문회가 있었습니다. 저명한 분들이 총회 서리로 임명을 받았지만, 그 동안 숨겨져 있던 사적인 여러 가지 일들이 드러나면서 결국 총리직을 수행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안타까운 모습을 보면서 우리 나라에는 털면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사회적으로 명망가일수록 그 인격과 도덕성에 거품이 많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 청문회를 지켜보면서 만일 하나님이 나를 세워놓고 털기 시작하면 내가 어떻게 될까? 사탄은 옆에서 남이 모르는 숨은 죄들을 다 밝히면서 고자질을 할 텐데, 하나님 앞에서 내가 청문회 식으로 죄 추궁을 받는다면 도대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막연한 공상만은 아닙니다. 세상 끝 날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실제로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전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각자 자신이 한 말이나 행동으로 인해 심판 받는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는 일점일획이라도 숨길 수 없고 모든 것이 다 드러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 청문회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를 믿지 않고 하나님이 누군지도 모르고 사는 사람들, 결국 그들이 그런 자리에 설 텐데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그 죄를 어떻게 다 변명하고 나설까? 토지 투기를 했다, 위장 전입을 했다 는 정도로 끝날 문제도 아닙니다. 모든 죄가 다 노출될 텐데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요? 청문회를 보면서, 정말 대단하겠다.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제 정신을 가지고 있을 사람이 아무도 없겠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가운데서 얼마를 선택하셔서 자신의 영광스러운 아들로 삼으실 것을 작정하셨습니다. 그것도 거룩하고 온전한 하나님처럼 흠과 티가 없는 아들로 삼으시기로 하셨습니다.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아들 되는 우리에게 다 주시기로 계획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 제일 먼저 넘어야 될 장벽이 하나 있습니다. 이것이 죄라는 문제입니다. 이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어떤 사람을 아들로 삼을 수도 없을 뿐만 아라 아들로 삼았다고 해도 하나님과의 진정한 부자와의 관계를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죄 문제는 반드시 처리하되 완전하게 처리를 해야 되는 것이 하나님의 입장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아담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함으로 그 뒤를 따라 이 세상에 태어난 전 인류가 타락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될 자격을 완전히 상실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인간을 만드실 때에 자유로운 도덕적 주체자로 만드셨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독자적으로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러한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도 있고, 거역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기로 작정할 수도 있고, 악을 행하기로 작정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러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어린 자녀가 두, 서너 살이 될 때까지는 어머니가 매일 방 청소를 하며 정리해 줍니다. 그러다가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면 아이를 불러놓고 너도 이제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으니까 앞으로 네 방 청소는 네가 하도록 하렴. 알겠지? 지금까지는 엄마가 해주었지만 말이야. 그 동안 엄마가 어떻게 청소하는지 잘 봤지? 책이랑 침대 정리할 때 엄마가 했던 것처럼 너도 그렇게 해보렴. 그러면 아이는 엄마, 알겠어요. 그렇게 할께요. 하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엄마가 아이에게 시킬 때는 아이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엄마 말을 순종할 수도 있고, 거역할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일을 시키는 것입니다. 어떤 날은 엄마가 시키는 대로 아이가 방 청소도 잘해 놓고, 모든 것을 깨끗이 정리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은 방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도 치우지 않고 그냥 가버릴 때도 있습니다. 사실 엄마는 아이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것을 내다보고 아이에게 시킨 것이 아닙니까? 왜냐하면 아이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처음에 창조하실 때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의 조상 아담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편을 택하지 않고, 거역하는 편으로 자유의지를 사용했습니다. 그 결과 모든 인류가 그와 함께 타락해버렸습니다. 타락했다는 말은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의지는 아주 약해지게 되고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는 의지는 강해졌다는 말입니다. 결국 인류는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에베소 2장 1절을 보면 우리는 아담을 따라 허물과 죄로 이미 죽어버린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쫓아 가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선을 행할 의지는 기능을 못하고 악을 행할 의지만 살아서, 공중의 권세 잡은 사탄이 시키는 대로 따라가는 자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어떻게 유혹합니까?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3절) 사탄은 우리의 육체의 정욕을 자극합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내 욕심대로 행하도록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사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로 이런 상황에 빠졌습니다. 곧 우리가 나라는 자아를 가장 우선시하고 중요시 여기는 존재가 되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좋은 자리에 나를 앉히려고 합니다. 제일 앞 자리에 항상 나를 들고 나옵니다. 제일 높은 자리에 항상 나를 세우려고 합니다. 바로 나 자신이 우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하려고 합니다.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이 삶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목표가 되었습니다. 이런 사탄의 유혹에 빠지게 된 것이 바로 타락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 앞에 피할 수 없는 죄인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 가운데에는 이 사실을 부인하는 분들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에게 물어도 그들은 대답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장 중요한 자리에 자기를 앉혀 놓고 살기 때문입니다. 가장 사랑하는 존재가 자기 자신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임을 모르므로 심각하게 여기지 않을 뿐, 실제로 그것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우상숭배의 죄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자리에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존재론적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이에 대해 가장 분명하고 지혜롭게 표현한 사람은 C.S. 루이스일 것입니다. 그의 말을 좀더 쉽게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선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악이 없습니다. 만일 절대 선이신 하나님이 이 우주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도 소망이 없습니다. 절대 악인 사탄이 다스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에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절대 선이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주를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원수가 되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날마다 죄를 범하며 살기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절대 선이신 하나님에게 원수, 대적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연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살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하나님 없이 살 수도 없는 아주 이상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유일한 위안이 되는 동시에, 가장 무서운 공포의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인 동시에, 제일 먼저 도망하고 싶은 존재가 되어버렸린 것입니다. 이것이 죄 속에 사는 우리의 딜레마입니다. 절대 선이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런 딜레마에서 자유 할 수 있는 길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언제든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그 품에 안길 수 있는 아름다운 부자관계로 회복되는 것, 이것만이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 힘으로 우리의 죄를 다룰 수 없습니다. 남보다 선하게 살아도, 고행을 하고, 수도를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히틀러가 특별히 신뢰하던 신복 중 하나인 알베르트 슈페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당시 제2차 대전을 치를 때, 독일 군이 승리할 수 있도록 독일의 모든 공장을 100% 가동시키는데 천재적인 지혜를 발휘했던 공학자였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전범 24명이 재판을 받았는데, 그 가운데 슈페르도 있었습니다. 다른 전범들은 모두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며 자신의 죄를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슈페르만이 자신의 죄를 법정에서 인정하여 20년 형을 언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감옥에서 형을 살고 나오자마자 여러 권을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유명 인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한 권의 책을 쓴 직후, 미국 ABC 방송 기자가 그와 함께 인터뷰를 한 일이 있습니다. 기자가 질문했습니다. 슈페르 씨, 당신이 초창기에 쓴 책을 보면, 나의 죄는 절대로 용서 받을 수도 없고, 용서 받아서도 안 된다.는 말이 있던데요.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까? 슈페르가 아주 슬픈 기색을 띠며 대답했습니다. 나는 내 죄값을 치르느라고 20년 형무소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죄 값을 다 치르고 석방이 되었습니다. 사실 나는 자유인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는 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범한 죄는 절대 용서 받을 수가 없다고, 그리고 용서 받아서도 안 되는 죄라고 생각합니다. 2차 대전 때, 희생당한 수백만의 사람들을 생각하면 내 죄는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그가 형무소에서 나오고 나서, 수십 년 동안 자신의 범죄를 철저하게 책임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처절하게 참회의 길을 찾고 있었지만, 죄책감에서 자유 할 수는 없었습니다. 자신 힘으로는 죄책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무섭고 잔인한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인터뷰를 끝내고 몇 일 지나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 죄에서 빠져 나올 수 있습니까? 죄를 범한 후 양심에 남아 있는 죄책감에서 벗어나 자유 할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그런 능력이 있습니까? 아무리 죄 문제를 내 스스로 처리하고 그것이 내 기억에서 사라졌다 해도 자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나에게 범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이웃에게 범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하나님에게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관계없이 내 스스로, 독립적으로 내가 죄 문제를 처리할 수 없습니다. 슈페르처럼 결국은 자기 죄책감을 안고 씨름 하다가 인생을 떠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도 우리의 죄를 깨끗이 용서하시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신 분이지만, 우리의 죄 문제를 용서하는 것은 단순하게 다룰 수 없었습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쉽게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는 한 마디에 빛이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웠습니다. 물과 물이 나누어지고, 육지가 드러나라. 그러자 육지가 드러났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웠습니다. 모든 자연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를 다루는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로는 안 되었습니다. 죄가 없어져라. 내가 용서하노라. 는 말로 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인간이 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당사자가 그 죄를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므로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로 사죄의 원칙을 정해 놓았습니다.(히9:22) 그것도 죄인이나 짐승의 피가 아닌 의인의 피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이시므로 피를 흘리실 수 없습니다.
죄를 범한 사람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거역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 죄 값도 무한한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무한한 죄 값을 짊어질 수 있습니까? 결국 죄 문제를 처리해주고 싶어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고 싶어도 하나님 편에서도 어려운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담당해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1장 7절을 다같이 읽어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죄 사함을 받는 길이 열렸습니다. 어떻게 이 길이 열렸습니까? 예수님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종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죄인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우리 죄를 담당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주셨습니다. 의로운 피입니다. 거룩한 피입니다. 그 피를 방울방울 흘려주셔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은 단순히 피를 흘리는 의미만은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의 죄의 대가라 할 수 있는 영원한 형벌을 받는 곳이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영원한 죽음입니다. 영원한 심판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시기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에게 구속의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구속은 옛날에 부자가 노예를 사서 자유를 주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값을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줌으로 지불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케 하셨습니다. 이것이 구속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모든 죄가 용서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은혜를 가장 잘 설명한 성경 본문이 고린도후서 5장 21절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을 죄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인이 되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루터는 이 본문의 내용을 가지고 자리바꿈을 하셨다는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자리에 우리를 세우고, 우리의 자리에 예수님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는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의는 더 이상 예수님의 것이 아니고,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인이 되어버리고, 우리는 의인이 되어버린 원칙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피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무조건 우리 죄를 예수님 안에서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죄를 다 씻어버리시고 죄 없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놀라운 일을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하셨습니다.
한번은 어떤 미국 목사님이 자신의 경험담을 써놓은 것을 봤습니다. 그분은 결혼해서 아름다운 신부와 함께 아주 더운 플로리다 지방으로 신혼 여행을 갔던가 봅니다. 여행 중 그 도시 근방에 있는 고급 컨츄리 클럽 식당에서 식사 예약이 되어 있었습니다. 신랑, 신부를 사랑하는 어느 분이 그 식당에 선물로 예약해 놓았던 것입니다.
한껏 기대에 부풀어서는 이제 시간이 되어 식당에 갔습니다. 그리고는 안으로 들어가려고 지배인을 찾아 예약 확인을 한 결과 예약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배인이 위, 아래로 훑어보더니 죄송합니다만 안되겠는데요.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정장을 안하고 오셨네요. 셔츠 차림으로는 못 들어갑니다. 순간 난감했습니다. 플로리다 같은 더운 지방에서 정장하고 가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무리 통사정을 해도 규칙상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옆에서 멋쩍게 서있는데 다른 분들은 다 정장을 하고는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약 30~40분이 지나자 예약석이 거의 가득 찼습니다. 다급한 마음에 지배인에게 마지막으로 사정했습니다. 우리가 신혼여행 중인데, 좀 봐주세요. 어떻게 좀 해주세요. 그러자 지배인이 한참 생각하더니, 외투보관소에 가서 양복 상의를 하나 구해왔습니다. 그래서 한번 입어 봤더니, 소매는 짧고 어깨는 끼는데다 색상까지 녹색이어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고는 안으로 들어가서 그날 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수님의 비유가 생각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이렇게 비유하셨습니다. 어떤 임금이 잔치를 차려놓고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빈 자리가 많자 사거리에 나가서 안 오겠다는 사람까지 강제로 끌어다가 자리를 채웠습니다. 천국은 원래 그런 곳입니다. 예수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까지도 끌어와 채웁니다. 이윽고 임금이 들어와서 자리를 둘러보는데, 모든 사람이 다 예복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은 것입니다. 친구여, 왜 예복을 입지 않았습니까? 그 친구는 유구무언이었다고 나옵니다.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왕이 신하를 불러서 말했습니다.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이 사람을 끌고 나가 바깥 어두운데 집어 던져 거기서 슬퍼하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22;13)
여기에서 예복이란 예수님의 옷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은 순간, 예수님 앞에 우리가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순간 우리의 모든 죄를 씻으시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의의 옷을 우리에게 입혀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한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고 히브리서 저자는 선언했습니다.(히10:14) 다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와 불법을 기억하지 못하신다고 선언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서 8장 33-3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셨기 때문에 아무도 우리를 정죄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죄 문제를 깨끗이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큰 축복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죄 용서의 복을 누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반응해야 할까요? 내가 예수 믿고 죄 용서 받았다는 것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의의 옷을 입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언제나 의인으로 설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다음 3가지 반응은 반드시 하나님께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항상 감격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죄 용서 받은 것을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일어나서 찬송할 수 있을 만큼 우리의 가슴이 감격으로 넘쳐야 됩니다. 저는 가끔 그럽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죄가 다 어디로 갔습니까? 하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나는 못 찾겠어. 다 잊었어. 아무리 뒤져도 없어. 여러분도 그런 음성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제가 자주 이야기하는 것이 있습니다. 옥한흠, 제 이름을 보십시오. 한문 뜻과 상관없이 풀어보자면, 한이 없이 흠이 많은 옥이었지만, 제가 예수 믿고 그분의 의의 옷을 입고 나서는 한 개의 흠도 없는 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이 사실 때문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와 같은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찬송가 189장에 보면 은혜로운 가사가 있습니다.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보배로 속죄함 받은 것 아니요. 거룩한 하나님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2절) 우리 가슴에서 이런 찬양이 항상 스며 나야 합니다. 어떤 때는 슬픈 때도 있고, 용서 받은 기쁨을 다 빼앗길 만큼 세상 살기가 힘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잠깐 우리가 겪게 되는 육신적인 고통에 불과합니다. 이 육신적인 한계를 조금만 뛰어넘으면 나 같은 것이 용서 받아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로 설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묵상할 때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하며 찬송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은혜를 우리가 회복해야 합니다.
아직도 믿지 않는 형제 자매들이 있다면 예수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주신 공로로 예수님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 없는 아들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축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시면, 우리에게 있는 남이 모르는 숨은 죄에서 어떻게 자유 함을 얻겠습니까? 누가 그 죄에 대한 대가를 대신 지불하겠습니까? 그러나 그 일을 주님께서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나를 죄 없는 자로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한때는 이런 놀라운 감격과 기쁨을 알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쏟아버린 사람이 있다면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이것은 죽을 때까지 잊어서는 안 되는 은혜입니다. 이 은혜에 날마다 감격하고 찬송하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됩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용서 해주신 거룩한 아들이므로 죄를 범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우리 성도들 중 가끔 죄 용서 받은 것을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티켓으로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살면서 죄를 범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곤 합니다. 또 용서 받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아주 무서운 병이 든 사람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용서를 아직 안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다시 말해 예수 안 믿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자기를 더럽히는 죄와 함부로 손 잡지 않습니다. 나를 지키려고 하는 거룩한 본능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용서함을 받았다고 믿으면, 죄를 멀리하고 거룩하게 살려면 삶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어쩌다가 잘못을 하면 하나님께 용서를 받으면 되지만, 고의적으로 또는 대수롭지 않게 죄와 연락한다면 근본적으로 잘못된 사람인 것입니다.
셋째는 죄 용서 받고 구원 받는 이 좋은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죄인으로 가득합니다. 그들은 저주 아래 있습니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그들은 죄 값을 지고 영원히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살아날 길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만큼 복된 소식이 어디 있습니까? 당신 죄 용서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만큼 그들에게 큰 소식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선언하셨습니다.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눅24:47-48)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곧 우리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온 세상에 전파됩니다. 지금 전파되고 있습니다. 그 복음을 듣는 모든 자들이 모든 죄로부터 회개하고 돌아와 용서 받는 축복이 오늘도 전 세계 도처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아직도 용서 받아야 할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 앞에 두 손 들고 나와야 될 죄인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우리끼리만 용서 받았다고 뛰고 찬양하면 안됩니다. 그들에게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 가정에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사람은 없습니까? 우리가 날마다 접촉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용서가 아니면 소망이 없어 보이는 사람은 없습니까? 오늘 이 나라 구석구석을 보십시오. 온통 죄악이 썩는 냄새가 나는 이 나라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변화 받아야 할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사람들에게 구속의 복음, 속죄의 복음, 죄 용서의 복음, 거룩한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큰 죄인이 될 수 있습니다. 대각성전도집회를 앞두고 우리가 정성과 열심을 다해서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은혜가 있길 바랍니다. 그래서 이번 대각성전도집회는 죄 용서함을 받은 자들이 이 자리에서 춤을 덩실덩실 추면서 하나님 앞에 영광과 찬양을 돌리는 생명의 대축제가 될 수 있길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합시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죄인 중의 괴수요,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버림받은 자와 같은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죄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 은혜를 주신 것 감사합니다. 우리의 죄는 예수님이 가져 가시고, 예수님의 의를 우리에게 옷 입혀 주셔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 되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영원토록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아무도 우리를 정죄할 자가 없도록 만들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여, 이 놀라운 은혜를 우리에게 주셨사오니 우리에게 기쁨을 주옵소서. 찬송을 주옵소서. 어떤 형편에서 살든지 간에 주님이 나를 용서하시고 의롭게 하신 이 놀라운 은혜만을 생각하면, 춤을 출 정도로 기쁨이 넘치는 거룩한 삶을 살게 해 주시옵소서. 뿐만 아니라 죄 용서함을 받아야 될 죄인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습니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영원히 자기 죄를 짊어지고 심판 받을 수 밖에 없는 우리 가족들이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그들을 꼭 전도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올 수 있도록 해 주시옵소서. 그들도 죄 용서함을 받고, 우리와 함께 주님을 찬양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인도해주시옵소서. 믿습니다. 이 시간 이 자리에 예배 드리는 형제 자매들 중에서 자신의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자유 하지 못하고 짓눌려있는 자들이 있사오니, 주님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다시 한번 자기의 죄를 고백하게 하옵시고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의 이름을 부르게 해 주시옵소서. 그럴 때 주여 그들을 버리지 마옵시고 그 죄를 씻으시고, 그로 하여금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출처/옥한흠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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