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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축복

하나님의 축복 받는 성도 (창세기 9장 20-27절)

by 【고동엽】 2022.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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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홍수 이후에 노아 가족에게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인간의 연약성을 보여 주고, 그처럼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기에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며, 그렇다면 하나님의 어떤 사람을 진정 돕기를 원하시며 어떤 존재가 축복 받는 존재가 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는 메시지를 3가지만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첫째 메시지 - 인간의 연약성
노아가 당대의 의인이라는 칭송을 받았지만
오늘 본문은 노아에 대해서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21절 말씀을 보십시오.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이 모습을 보면 당대의 의인이라는 말이 무색해집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홍수 이후에 노아가 갑자기 타락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런 모습이 노아의 원래의 모습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렇다면 무슨 말입니까?
노아도 상대적 의미에서 의인일 뿐, 그도 역시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이 장면을 통해서도 우리는 의인의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의인은 행위가 완벽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인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그처럼 인간은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렇다면 노아보다 훨씬 부족한 우리들은 서로 덮어 주면서 살기를 더욱 힘써야 할 것입니다.

2. 둘째 메시지 - 덮어 주는 삶의 중요성
함은 노아의 부끄러움을 덮어 주지 못해서 저주를 받습니다.
반면에 셈과 야벳은 그 부끄러움을 덮어주어서 축복을 받습니다. 이것은 덮어 주는 삶의 중요성을 말해 줍니다.

진정 축복된 존재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윗사람의 부끄러움을 덮어 줄 줄 알아야 합니다.
윗사람은 나의 존재의 연장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분을 부끄럽게 하면 나도 부끄러운 존재가 될 것입니다. 남을 부끄럽게 함으로 결코 내가 올라가지 않습니다. 영적으로는 더욱 그렇습니다. 특히 함은 더욱 그렇게 했어야 했습니다. 아버지 노아는 성경이 인정할 정도로 당대의 의인이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의인이었으면 그 많은 사람 중에서 유일하게 그의 가족만 구원받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포도주를 먹고 하체를 가리지 못한 것은 한 번의 실수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볼 때 전체를 보고 평가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 노아가 매일 백수건달처럼 술 먹고 행패를 부린 것이 아닙니다. 노아의 행위는 잠깐 한번 저지른 연약한 인간의 있을 수 있는 실수입니다. 그것을 전체적으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덮어주지 못한 것은 절대적으로 함의 잘못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야박한 정죄자를 저주하십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아버지 노아가 얼마나 희생적인 삶을 살았겠습니까?
함이 홍수에서 구원받은 것은 자신 때문에 아니었고 성경은 그의 아버지 노아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노아는 그에게 두 번 생명을 준 인생 최대의 은인입니다. 그렇다면 그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그는 아버지에게 그럴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의 가치가 어디에 있습니까? 은혜를 아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사실만 보고 모든 것을 나쁘게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은 함의 후예나 하는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행동으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은혜를 주셨습니까? 그런데 내가 원하는 그것 한 두개를 들어주지 않았다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고 불평한다면 있을 수 없는 불충입니다. 그것은 함의 행동이고, 참으로 저주받을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갓난아이를 키울 때 부모들이 얼마나 그들을 위해 애씁니까? 똥오줌 다 받아내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을 펼칩니다. 그러나 조그만 불평거리로 부모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부정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어린아이를 위해서도 똑같습니다. 어린아이라고 표현하면 어색하긴 하지만 초신자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수고와 눈물의 기도가 있었는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은 그러한 배후의 누군가의 사랑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었습니다. 그런 놀라운 은혜에 대한 열린 시야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한 마음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간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태도는 아무리 부족한 사람도 지켜야 할 인간의 기본 도리입니다. 성경을 보면 저주라는 것은 최소한의 기본 인간의 도리를 못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연장된 징벌적 성격이 매우 강합니다. 인간은 살면서 적어도 최소한의 기본 도리는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함은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봐도 그것은 좋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러자 당대의 의인 노아의 입에서 당장 저주가 선포됩니다.
이 모습을 보고, "노아는 너무 심한 사람이었다"라고 아무도 말을 못할 것입니다. 그만큼 그런 모습은 가장 기본적인 도리를 지키지 않은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샘과 야벳은 돌아서서 옷으로 아버지를 덮었습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면 파헤치려고 하지 말고 돌아서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옳고 그르냐 하는 것을 따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열을 내지만 다른 사람의 부족한 점이 드러났을 때 덮어주는 자세가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 공동체에는 약점을 보고 뒤로 돌아설 줄 아는 자가 필요합니다. 얼굴을 돌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옷을 벗어서 그를 덮어줄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물론 어떻게 보면 함이 크게 잘못한 것은 없습니다.
본 대로 사실대로 말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면서 그렇게 다 말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다 드러내고 따지고 살 수만은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가 한 것을 그대로 판단하셨다면 이곳에 앉아 있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앞에는 지옥의 불못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덮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따지고, 재고, 그것을 다 말하기로 한다면
아마 예수님처럼 말할 것이 많은 분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사야 53장에 기록된 대로 어떻게 하셨습니까?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처럼 입을 열지 않고 우리의 죄를 다 덮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면서도 불평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따지지 않고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절제된 말, 목적 있는 말만 간단히 몇 마디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얼마나 정당한 이유가 많이 있으셨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끝까지 입을 열어 변명하고 비판하지 않으십니다. 때로 우리들은 말해야 할 이유가 많이 있습니다.
정말 내 말을 뒷받침할 수 있는 당당한 이유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 말하고 다 털어놓고 살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내 입술을 부여잡고 뒷걸음쳐야 할 때가 훨씬 많습니다. 왜냐하면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서와 나의 인간됨을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겸손하고 온유한 심령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현재만 있다면 현재만 보고 다 말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을 참으면 속이 터져서 살지 못할 것입니다. 내일이 없는 사람에게는 당연히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왜 참아야 하고, 참을 수 있습니까? 내일은 잘 되리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서 침묵하실 수 있었습니까?
부활의 역사를 아시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라도의 조롱에도 말이 없으셨습니다. 바로 이러한 삶 속에 능력이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고방식을 따라야 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마 11:29)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나는 옳은데 너는 틀렸다" 하는 식으로 너무 얘기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함의 방식이고, 그 결말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부족한 자들입니다.
모두 허물이 있는 사람이기에 뒷걸음으로 고개를 돌리고 가야 합니다. 그리고 허물을 덮어주어야 합니다. 그 길만이 서로가 사는 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셈과 야벳의 축복과 은혜를 받는 길입니다. 보다 리얼하게 표현해 볼까요? 사실상 함의 마음은 사단의 마음입니다. 사단은 좋은 것은 감추고 나쁜 것은 키우고 허물을 드러내는 선수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들춰내는 것보다 덮어주는 것을 더욱 잘하는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덮어주는 것은 놀라운 은사입니다. 화를 내는 것보다 참는 것이 훨씬 어렵습니다. 남을 미워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몇십 배 어렵습니다. 남의 약점을 공개하는 것은 쉽지만 덮어주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23절의 셈과 야벳의 모습은 얼마나 소중합니까?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23절)
눈앞의 허물이 보이는데도 보지 않았습니다. 허물을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돌리는 것!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반대로 허물에 귀를 쫑끗하는 것! 이것은 사단이 준 마음입니다. 남의 허물을 보면서 솔직히 기분 좋을 수도 있습니다.
나의 바름과 나의 의를 확인하는 것과 같은 묘한 기분을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는 좋은 대로, 기분대로 살지 말고, 정말 축복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남의 허물을 말하는 대신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허물을 덮어 주십시오. 남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거든 얼굴을 돌리십시오. 때로 뒷걸음쳐야 한다고 여겨질 때는 뒷걸음질을 치십시오. 남의 말, 비판의 말, 불평의 말을 하고 싶을 때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십시오. 그 말을 옮기고, 전화를 통해서 옮기기보다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린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축복하시겠습니까? 사실 우리가 축복을 받느냐 받지 않느냐 하는 것은 조금만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우리의 마음을 함의 마음처럼 쓰느냐, 아니면 셈과 야벳의 마음처럼 쓰느냐 하는 것! 그것이 관건입니다. 셈과 야벳의 마음이 여러분들의 마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3. 셋째 메시지 - 축복과 저주의 계승
본문의 장면에서 노아가 함에게 어떤 저주를 내립니까? 25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이 구절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가나안은 누구를 말합니까? 함의 아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함을 저주하면서 가나안을 저주하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가졌을까요? 저주의 영향력이 후대에까지 미치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실상 이것이 함에게는 더 큰 고통입니다.
자녀를 둔 우리 모두는 이것을 비교적 쉽게 이해합니다.
내가 당하는 괴로움보다 자녀가 당하는 괴로움이 열배 백배 이상으로 부모에게는 큰 아픔을 가져옵니다. . 특히 자신의 잘못 때문에 자녀가 벌을 받는다는 것은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저주일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는 강력한 것입니다. 나에게 강한 은혜 추구가 있고 하나님께서 강하게 은혜로 덮어주시면 당대에도 저주의 기운은 틀림없이 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믿음이 주는 가장 큰 힘이요, 열매입니다. 그 주님의 은혜가이 아니면 그 저주의 기운을 끊을 길이 없습니다. 그만큼 저주란 것은 강력하기에 절대 그 기운이 엄습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최소한의 인간 도리는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녀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부모의 가장 큰 일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자녀를 사랑한다면 남의 허물을 덮어주는 자세가 꼭 필요합니다.
바로 그것이 자녀를 위해 가장 귀한 일입니다.
여러분! 자녀의 축복을 예비하는 신앙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자신도 하나님의 축복 받는 성도가 되기를 힘쓰십시오. 하나님은 용서받은 우리도 용서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에서 은혜를 원수를 갚는 삶이 있지 않기를 원합니다. 허물이 보이면 보지 않으려고 하고, 그 허물을 힘써 고하지 않으려고 하고, 비밀을 지켜 주고 뒷걸음치려고 하고, 더 나아가서 덮어주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도가 다 되어 셈의 축복과 야벳의 축복을 받아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도: 하나님! 저희들은 완벽한 존재가 되기를 힘쓰기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항상 바른 자가 되게 해주옵소서!
남의 허물을 비판하는 자 되기보다 덮어주는 자 되게 해주시고 오늘 주신 말씀대로 진정 실천하며 사는 자 되게 해주옵소서! 부족한 나그네 인생들이 서로 파헤치며 살면
서로의 나그네길은 더욱 피곤하고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 것을 알고, 허물을 덮어 주며 서로 용서하고 용납하며 살 수 있도록 하옵소서! 은혜에 대해서는 항상 열린 시야를 가지게 하시고, 감사했던 일은 오래도록 기억할 줄 아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윤리적으로 온전히 합당한 자가 된다고 자부하지는 못해도 인간의 기본 도리는 항상 기억할 줄 아는 성도가 될 수 있게 하옵소서! 자녀에게 다른 무엇을 주기보다 축복을 예비하는 부모가 되게 하시고, 나의 말 한마디가 자녀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생각하며 사랑과 희망이 넘치는 긍정적인 말을 하게 하시고, 우리 모두 비평가의 입술을 가지기보다는 목자의 입술을 가자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셈과 야벳의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넘쳐 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출처/이한규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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