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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의 문을 여는 열쇠 (누가복음 23:39-43)

by 【고동엽】 2022.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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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의 문을 여는 열쇠   (누가복음 23:39-43)

여러분들이 홍콩에 살면서 한번쯤 경험하는 일이 있습니다. 손님이 와서 배웅을 나간다거나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 그 잠깐 사이에 현관문이 잠기는 바람에 당황했던 일들을 한번쯤은 겪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열쇠 수리공을 불러서 멀쩡한 문을 부수고 새로 자물쇠를 해 달고 경제적으로 손해보고 남편에게 혹시 치매가 아니냐고 의심을 받는, 그런 일들이 가끔 있습니다. 자그마한 열쇠 하나, 그것이 없어서 당하는 일들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우리가 살고 죽는 것, 복을 받고 저주를 받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마음을 열 수 있는 열쇠를 가진 사람은 그 인생이 감사와 찬송으로 넘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을 여는 열쇠가 어떤 것인가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고 하나님의 축복의 문을 여는 열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로 인해 복을 받을 수도 있고 저주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땅 입구인 가데스바네아에 도착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먼저 12명의 정탐꾼을 뽑아서 가나안땅을 정탐하게 하였습니다. 40일 후에 돌아 온 정탐꾼들이 보고를 하는데 열 사람의 정탐꾼들은 가나안땅을 도저히 들어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울고불고 난리가 났습니다. 차라리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행하리니" 말씀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말한 사람은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얼마든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했던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그 말대로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이 중요합니다.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복을 받을 수도 있고 저주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당시에 십자가는 가장 참혹한 사형방법이었습니다. 죄인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지면 우선 가죽끈으로 만든 채찍으로 매를 때린 다음 성문밖에 있는 사형집행 장소로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땅위에 누워있는 십자가에 못을 박아서 세웁니다. 그러면 몸무게 때문에 손이 찢어지는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이런 상태로 점점 온 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고 기운이 다해서 죽게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고통이 너무나 참혹하기 때문에 웬만한 사람은 십자가에 못박지 않았습니다. 로마시민권을 가진 죄수들은 십자가형 대신에 참수형에 처해졌고, 죄인 중에서도 아주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만 십자가형에 처해졌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살펴보면 예수님 양쪽에 달려있던 죄인들은 아주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로 이야기하면 지존파나 막가파 같은 잔인하고 파렴치한 죄인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죄인 중에 한 사람은 구원을 받아 천국에 올라가고 또 한 사람은 저주를 받아 지옥에 떨어집니다. 두 사람은 똑같이 나쁜 짓만 골라 하던 사람들입니다. 십자가형을 받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여러 사람을 죽인 살인자였을 것입니다.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두 사람 다 마땅히 지옥에 떨어져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을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 한 마디 말 때문입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이 한 마디 말 때문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입을 열어 예수를 구주로 시인하는 사람에게 구원의 복을 주십니다. 로마서 10장의 말씀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마음으로 믿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입을 열어 그 믿음을 고백할 때에 그 믿음이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말 한마디 때문에 저주받아 죽은 사람이 있습니다. 한번은 아람이라는 나라가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를 포위한 적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사마리아성을 포위하는 바람에 성안에는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얼마나 먹을 것이 없었는가 하면 심지어는 자기 아들을 잡아먹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때에 엘리사선지자가 이렇게 예언을 합니다.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성에서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 복잡하게 말을 했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먹을 것이 넘치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런데 이때에 어떤 장관이 나서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창문을 내신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 그러자 엘리사는 "네가 그것을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먹지는 못하리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아람군대가 잠을 자려고 하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입니다. 자세히 들어보니 저 멀리서 아주 큰 군대가 말을 타고 달려오는 소리였습니다. 그러자 아람군대는 혼비백산해서 모든 것을 그대로 놓아둔 채 도망쳐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아람진영으로 달려가 아람군대가 남겨두고 간 식량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런데 단 한 사람 "하나님이 하늘에 창문을 내신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 이렇게 말했던 그 장관은 성문에서 사람들의 발에 밟혀 죽었습니다. 보기는 했지만 먹지는 못했습니다.

말 한마디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엘리사선지자가 "내일은 배불리 먹으리라" 할 때에 "아멘" 했으면 좋았을 것을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다가 저주를 받아 죽고 말았습니다. 말 한 마디에 축복을 받을 수도 있고 저주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여러분 입에서 나오는 말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듣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139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하나님은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을 다 알고 계십니다. 다 듣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말대로 갚아주십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과묵한 것을 미덕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도 한국사람을 만나면 말을 좀 하는 편이지만 홍콩 사람이나 미국 사람을 만나면 상당히 과묵하게 앉아있습니다. 한국인으로서의 미덕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일에는 과묵한 것이 결코 미덕이 아닙니다. 입을 열어 소리 높여 찬송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찬송과 감사가 넘치는 복을 주십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찬송을 부르실 때에도 어떤 분들은 입을 크게 벌리고 찬송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주일날 아침부터 한바탕 전쟁을 치르셨는지 입을 꽉 다물고 있는 분도 계십니다. 그러나 기쁨으로 입을 열어 찬송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 찬송대로 복을 주십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이렇게 찬송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큰사랑을 베푸십니다. 입을 닫고 우물우물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도 우물우물 넘어가십니다.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그대로 복을 받습니다.

역대하 20장에 이런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압이라는 나라가 주변의 몇 나라와 연합군을 편성해서 유다를 공격해 왔습니다. 이제 유다 백성들은 꼼짝없이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여호사밧왕은 노래하는 사람들을 택하여 군대 앞에 서서 찬송하게 하였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이 찬송을 부르며 전진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사람을 치게 하심으로 저희가 패하였으니"

전쟁을 앞에 두고 하나님께 찬송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군대를 보내셔서 대신 싸워주셨습니다. 찬송이 시작될 때에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하나님의 군대가 나타났습니다. 찬송에는 하나님의 군대를 움직이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받고 싶은 복이 있으면 거기에 해당되는 찬송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미래가 걱정되는 분은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이 찬송을 입에 달고 사세요. 죄의 문제로 고민하는 분은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이 찬송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마음속에 걱정과 불안이 있는 분은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이 찬송을 소리 높여 부르시기 바랍니다. 물질 때문에 걱정되는 분은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이 찬송을 크게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육신의 질병으로 고생하는 분은 "주여 나의 병든 몸을 지금 고쳐주소서" 이 찬송을 약을 복용하듯이 하루에 세 번씩 부르시기 바랍니다. 못된 성격 때문에 고민하는 분은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 예수를 닮기 원함이라" 이 찬송을 거울을 보면서 부르십시오. 이렇게 찬송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대로 갚아주실 줄로 믿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입을 열어 기도하는 사람에게 응답해 주십니다. 한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라는 곳에 기도하러 모였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을 공격해 왔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칼 한 자루 가진 것이 없습니다. 기도원에 기도하러 온 것입니다. 그런데 블레셋 군대가 공격을 해온 것입니다. 꼼짝없이 다 죽게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선지자가 하나님을 향해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천둥과 번개로 블레셋군대를 물리쳐주셨습니다. 이것을 사무엘상 8장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무엘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도다" 소리 높여 간절히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습니다.

성경에는 이처럼 우리가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겠다는 약속이 수도 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도다"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부르짖는 자에게 응답해 주십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에 있는 시골 동네에 문둥병자들이 모여 살고 있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문둥병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저주"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문둥병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가 사는 동네에 문둥병자들이 들어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문둥병자들은 마을과 마을의 경계선에 살았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국경지대에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예수님께서 그 동네를 지나가신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그러자 열 사람의 문둥병자가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다가 멀리 서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당시에 문둥병자는 일반인들과의 접촉이 금지되었습니다. 적어도 50미터 이상을 떨어져 있어야 했습니다. 50미터 떨어져서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무슨 말을 제대로 하겠습니까?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제사장에게 가는 도중에 자신들의 몸이 깨끗해진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 문둥병자들처럼 감히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더러운 죄인의 모습이 있습니까?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 자리에 서서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하나님께서 들어주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큰 은혜로 응답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입을 열어 "아멘"으로 화답하는 사람에게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복을 주십니다. 사실 우리 교회만큼 "아멘" 안 하는 교회가 전 세계적으로 없습니다. 저도 여러분에게 하라 말라 이야기한 기억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국 교회에서 "아멘"이라는 단어가 너무 남용되고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대부분은 부흥사들의 영향 때문인데 시도 때도 없이 "아멘"하는 것입니다. 대학에 다닐 때에 동네 교회에 강모목사님이라는 유명한 부흥사가 온 적이 있었습니다. 한 번 가보았는데 깜짝 놀랬습니다. 목사님이 막 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막 욕을 하는데 교인들이 전부 "아멘" 그러는 것입니다. 부흥사가 "너, 이 망할 XX들아" 그러면 다 "아멘" 그러고 "다 나가 죽어라" 그래도 "아멘"입니다. 그리고 설교를 하다가 말이 막히면 무조건 "아멘"이고 "할렐루야"입니다. 제 친구 중에도 유명한 부흥사가 있는데 이 친구는 말끝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죠" 이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건 아니다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어떤 통계를 보았는데 큰 소리로 "아멘"하는 교회는 반드시 성장하고 "아멘"이 없는 교회는 쇠퇴한다는 것입니다. 입을 열어 "아멘"하는 사람은 반드시 복을 받고 "아멘"이 없는 사람은 복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입니다. "아멘"이란 무슨 뜻입니까? "아멘"이란 "진실로 그렇습니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귀에 들려질 때 "진실로 그렇습니다. 그 말씀이 그대로 내게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이런 뜻으로 "아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이라는 마을에 가셨을 때에 어떤 백부장이 예수님을 찾아와서는 자기 종이 중풍병에 걸렸는데 고쳐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말씀하십니다. 이때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이 "아멘"입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이런 믿음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기뻐하시면서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올 때에 "아멘"으로 믿음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이 믿음을 입을 열어 "아멘"으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이 축복이 여러분의 것이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님의 축복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입을 닫고 있는 사람은 받을 복이 없습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셨습니다. 입을 넓게 열어야 합니다. 입을 열어 예수를 구주로 시인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입을 열어 찬송하는 사람은 그 찬송대로 복을 받습니다. 입을 열어 하나님께 부르짖는 사람은 응답을 받습니다. 입을 열어 "아멘"으로 화답하는 사람은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복을 받습니다. 여러분의 입을 통해 나오는 말이 하나님의 축복의 문을 활짝 여는 열쇠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요한일서 3:13-24)

우리 교회 홈페이지 청년회 사이트에 최근에 올라 온 유머 한 토막입니다. 어느 날 집에서 기르는 개가 이상한 물체를 물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자세히 보니 옆집 딸들이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하얀 토끼가 흙이 잔뜩 묻어 죽은 채 개의 입에 물려있었습니다. "아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나. 옆집 딸들이 그렇게 애지중지 하던 토끼를 죽여서 물고 왔으니" 그래서 완전범죄를 계획했습니다. 죽은 토끼를 들고 집안으로 들어와 목욕탕에서 털이 하얗게 될 때까지 씻은 다음 드라이기로 털을 뽀송뽀송하게 말렸습니다. 그리고 역시 흙이 묻은 노란 리본도 깨끗하게 빨아서 건조시킨 뒤에 토끼의 목에 묶어주었습니다. 이 정도면 누가 보아도 개에 물려 죽은 것이 아니라 자연사했다고 생각 할만 했습니다. 마침 옆집 뜰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담을 뛰어 넘어가 죽은 토끼를 토끼우리에 반듯하게 넣어두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얼마 있다가 예상대로 옆집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태연하게 담으로 고개를 내밀고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집 아저씨와 딸들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토끼가---, 토, 토끼가---" 하였습니다. 그래서 더욱 시치미를 떼고 "토끼가 어쨌단 말이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집주인이 대답했습니다. "아, 글쎄. 어제 우리 집 토끼가 죽어서 마당에다 묻었는데 누군가가 죽은 토끼를 도로 꺼내서 토끼장에 넣어놨어요. 그것도 깨끗하게 씻겨서 말입니다. 세상에 어떤 미친놈이"

이 이야기 속에는 개를 키우는 사람과 토끼를 키우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러면 왜 한 사람은 개를 키우고 한 사람은 토끼를 키우느냐,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서로 취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취향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개를 본능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좋고 싫은 것은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만있어도 저절로 그렇게 느끼는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일부러 좋아하려고 애를 쓴 것도 아닌데 그냥 좋다고 느껴지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그냥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별로 자주 만난 것도 아니고 나에게 무슨 해를 끼친 것도 아닌데 공연히 정이 안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본능적인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본능적인 취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본능적인 취향을 기준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얼마 전에 한국 TV 프로그램에서 날씬해지려고 굶어서 살을 빼다가 거식증에 걸리거나 폭식증에 걸린 사람들에 대한 리포트를 보았습니다. 젊은 여성에게 왜 그렇게 살을 빼려고 하느냐고 물었더니 전에 살이 쪘을 때는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는데 살을 빼고 난 다음부터는 사람 대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날씬한 사람만이 미인이라는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취향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동물의 왕국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지금부터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살쪘다고 흉을 보거든 동물의 왕국이나 열심히 보라고 하십시오.

사람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본능적인 취향을 기준으로 어떤 사람은 좋고 어떤 사람은 싫다고 해서는 안됩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좋아한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말입니다. 좋아한다는 것은 외모라든가 어떤 행동이나 태도와 같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인격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외적인 조건을 따지지 않습니다. 외적으로 아무리 부족하고 흠이 많은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여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외적인 조건을 보지 아니하시고 차별 없이 사랑하셨습니다. 로마서 10장의 말씀입니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나님은 외적인 조건을 보지 아니하셨습니다. 외적인 조건으로 따진다면 유대인은 구원을 받고 이방인은 멸망 받아 마땅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누구 신가를 알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제사도 드렸고 금식도 하고 기도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써 가지고 다니면서 외우고 청종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하나님이 계신지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제멋대로 죄를 짓고 살았습니다. 로마서 1장은 이방인들이 사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는데, 우상을 섬기는 일은 물론이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등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악된 모습으로 살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방인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외적인 조건으로 볼 때에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유대인이나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이방인인 헬라인이나 똑같이 구원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모든 사람에 대하여 차별이 없는 것이 사랑입니다. 본문 1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서 사랑을 알고" 이제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전에는 인간적인 본능에 따라 좋아하고 싫어하면서 살았습니다.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좋아했고 나를 괴롭히는 사람을 미워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랑이 무엇인지 압니다. 사랑이란 그 대상의 조건이라든가 인간적으로 좋고 싫음에 관계없이 반드시 이루어야만 하는 것임을 압니다. 그래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본문 14절부터 15절까지 말씀을 다시 한번 읽습니다. 집중해서 읽으시고 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추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우리가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것, 즉 우리가 구원을 받는 사람인 것을 알 수 있는 기준이 있는데 그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뒤집어 말하면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증거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공연히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싫어하는 마음을 극복하고 그 속으로 들어가서 그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내게 없다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증거일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의 마음속을 한번 들여다봅시다. 혹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싫어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미워하면 안됩니다. 싫어서 피해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미워하는 마음으로 헐뜯고 다녀서는 안됩니다. 아직도 내 마음속에 미워하는 마음, 시기하는 마음이 있다면 더 늦기 전에 회개해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기를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말씀했습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말씀했습니다.

내 속에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믿음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본문 24절을 보십시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그 마음속에 주님께서 들어오십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들어오는 순간 주님은 우리 마음을 떠나십니다. 그 다음에는 그 미워하는 마음이 나를 지배합니다. 잠을 못 자게 만들고 자나깨나 미워하는 마음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내 마음에서 떠나버리시면 그 다음에는 신앙생활이 제대로 될 수가 없습니다. 본문 22절부터 23절을 보십시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받나니" 말씀했습니다. 기도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조건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기도의 응답을 받는 비결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계명은 무엇입니까?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드리는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내 속에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는 아무리 금식하고 기도를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 아무개가 저에게 이렇게 피해를 입혔는데 쫄딱 망하게 해주세요" 이런 기도는 백 번을 드려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교회를 위하여 드리는 기도도, 가족들을 위하여 드리는 기도도 모두 소용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화목하지 못한 관계,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제물이 소용없습니다.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고 기도를 드려도 응답이 없습니다. 쓸데없는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 마음속에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번 주 안에 그 미워하는 마음을 깨끗이 씻어버리시기 바랍니다. 다음 주일에 교회에 나오실 때는 사랑에 가득 찬 마음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만약 다음 주일 아침에 일어났는데 아직도 미워하는 마음이 남아있다면 교회에 안나오셔도 됩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다 그러지 마시고 성경대로 삽시다.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는 예배를 드릴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한 주일 푹 쉬시고 또 한 주일 노력해 보시고 한 달 내내 그래도 안되면 "나는 가짜구나" 그러고 낚시나 하러 다니십시오.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은 교회에 나올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 마음속에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 시간에 성령께서 역사 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그 미워하는 마음을 깨끗이 몰아내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여러분 마음속에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계속해서 본문 17절부터 18절을 봅니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사랑은 말과 혀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것입니다. 온 세상을 다 구원하겠다고 큰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궁핍한 형제를 도와주는 작은 사랑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세 가지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열 처녀의 비유입니다. 열 처녀가 모두 등잔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여분으로 기름을 준비했고 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둘째는 달란트 비유입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과 두 달란트를 받은 종은 열심히 일을 해서 갑절로 남긴 반면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대로 땅 속에 묻어두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여기서 양은 구원을 받은 사람을 상징하고 염소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구원받지 못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이 세 가지 비유의 공통점이 하나있습니다. 그것은 작은 일을 소홀히 하는 자는 결국 그것 때문에 망한다는 것입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도 등잔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여분으로 필요한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큰 것은 준비했는데 작은 것을 놓쳤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도 작은 것이라고 해서 땅 속에 묻어두었습니다. 저주를 받아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도 작은 자 하나를 소홀히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작은 것이 소중함을 말씀합니다. 우리가 입술로는 큰 것을 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제 행동으로 작은 것을 실천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러면 이웃을 위해 작은 일을 실천하십시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말씀했습니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무엇인가 그것을 막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돈을 가지면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는데" 하면서 도로 손을 집어넣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거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도와줄 마음이 든다면 그 마음을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궁핍한 형제를 위해 사랑의 손길을 내미는 일에 주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미 넘치도록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질서 속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전에는 사망가운데 살았습니다. 거기는 자기의 욕심만을 사는 곳입니다.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하나라도 더 가지려고 남을 헐뜯고 짓밟으며 사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생명가운데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사는 것입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날마다 작은 사랑을 베풀며 살아감으로 여러분의 삶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타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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