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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밭과 농부(고린도전서 3:5-9)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을 하나의 농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 비유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농부의 세계로 돌아가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쌀 나무가 있어서 쌀이 열리는 것으로 알 정도로 농촌이나 농사일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다면, 오늘 이 말씀은 전혀 마음에 와 닿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더운 지방에 가면 양이라고는 단 한 마리도 없는 나라가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고 보니 양에 대한 지식은 물론 아예 양이라는 단어조차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이곳에서 복음을 전하던 선교사들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는 말씀을 번역하기 위하여 많은 고민을 한 끝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돼지새끼를 보라."라고 번역을 했다는 실화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돼지새끼라면 가까이서 보기도 하고 우상에게 드리는 제물로도 쓰여 왔기 때문에, 이해가 되는 동물이지만 양은 전혀 이해가 불가능한 동물이었던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큰 사업은 목축이며, 이를 위해 저들은 주로 유목민 생활을 하게 됩니다. 유목민이란 떠돌이 생활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농사를 짓는 일은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생활이 안정하게 정착이 되면 농사를 짓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스라엘사람들이 애굽에서 그렇게 살아야 했던 것은 유목민 생활로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애굽으로 보내어 농사일을 배우게 했다는 재미있는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사실 저들은 애굽에서 농사를 배워왔고 가나안에 이르러서는 안착을 하고 농사를 짓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유목민 생활고 안정된 농경 생활을 하는 사이에는 생활 자체의 커다란 차이뿐만 아니라 세계관이나 가치관에 있어서도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농사를 하는 농민에게는 우선 자연과 함께 지낸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들은 느긋하고 소박한 성품을 지니게 됩니다.
거기에 비해 자연을 잊어버리고 도회의 콘크리트 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은 영악스러우면서도 괜히 바쁘고 분주해하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면, 이제 농부가 갖추어야 할 바를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첫째 겸손해야 된다는 점입니다. 농부란 언제나 겸손하고 소박한 마음으로 일을 합니다. 내가 씨를 뿌리고 거름을 준다하여 내 마음대로 가꾸면 된다라는 생각을 감히 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자연 앞에서 초라한 모습으로 겸손하게 일하는 것이 농부의 자세요, 특징인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부지런해야 된다는 점입니다. 이 부지런은 특별히 계절의 변화에 순응하는 질서 속의 부지런함입니다. 내 마음대로 하겠다고 하여 가을에 씨를 뿌리고 봄에 거두어 드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봄에 뿌리라고 하였으면 봄에 뿌릴 것이고, 여름에는 가꾸라 하였으면 가꾸며, 가을에 가서는 제 때에 거두어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농부는 부지런하되 내 마음대로 자연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계절의 변화 속에 나를 순응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봄에는 봄대로 부지런하고, 여름은 여름대로 부지런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농부는 언제나 부지런해야 합니다.
다음 세 번째는 인내가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농부는 느긋하게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들은 그야말로 스피드(speed) 시대에 살고 있어서 매사를 급하게만 처리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아무리 시장하더라도 음식을 익히고 맛을 내는 동안은 도리 없이 기다려야했던 것인데, 요즈음은 1분, 3분 라면에다, 까스렌지, 전자렌지로 단숨에 만들어 냅니다. 하지만, 음식이란 그렇게 해서 맛을 내게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특별히 찌개 같은 것을 끓일 때에는 강하지 않는 불로 충분히 맛을 낼 수 있을 때까지 가능한 뚜껑을 열어보지 않고 불을 때야 제맛이 나는 것인데, 이것을 자꾸 열어보면서 까스렌지로 급하게 만들어 내어놓으니 맛이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만들어 먹는 카레라이스라는 음식도 그렇습니다. 그 본고장 인도나 파키스탄에서는 소의 배설물인 소똥을 긁어 바람벽에 붙여 놓았다가 말라 떨어지게 되면, 이것에 불을 붙여 카레라이스를 만들어 먹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카레라이스가 세계에서 제일 맛있는 카레라이스입니다. 저들의 말에 의하면, 카레라는 것은 가루가 아주 연하기 때문에 담배불과 같은 정도의 약한 불에서 천천히 끓여야 우러나면서 맛을 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되는 것을 우리는 까스렌지 위에서 볶아 버리니 맛이 쓰게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본래 카레라이스는 쓴맛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인도 사람들이 직접 만든 카레라이스를 먹어보면 그 맛이 구수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든 카레라이스는 쓴맛이 나고는 하니 이것이 다 성급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서 그런 것입니다. 무슨 음식이든 시간이 걸릴만큼 걸리면서 천천히 해야 제 맛을 낼 수가 있는 것을 요즈음은 전자렌지까지 등장하여 홱하고 몇 바퀴만 돌리면 되니 야단이고, 게다가 1분 라면까지 있으니 사람의 성격이 다 버려진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급하게 해서 안될 일이 보다 많은데, 아무 일이나 그렇게 급하게 하여도 되는 줄로 알고 있으니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는 한 인격 성장을 기대할 수는 없다고 하는 점입니다.
하지만, 농부는 어떤 경우에도 인내할 줄을 압니다. 농사일이란 서두른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씨앗을 심어놓고 기다리며 싹이 난 다음에도 줄곧 기다리다가 가을을 맞는 것입니다. 이삭이 빨리 자라지 않는다고 하여 잡아당기거나 뽑아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저 열매가 맺혀 완전히 익을 때까지 하루, 하루를 기다릴 뿐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농부의 인내이며, 우리가 배워야 할 인내인 것입니다.
그리고, 농부에게는 하늘을 향한 신앙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신앙은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하늘이 돕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농부의 마음입니다. 이는 아무리 좋은 씨앗을 뿌리고 때를 맞추어 거름을 준다하더라도 햇빛과 비, 바람, 습도 등 자연적인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자람도, 결실도 기대할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농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미신이라도 믿어야 하는 신앙적인 요소로 인해 기우제를 드리는 등이 제사 형식을 취하게 되는 것이 세계속에 똑같이 나타나고 있는 농민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농사 일을 하는 사람을 비유로 하여 분쟁의 문제를 안고 있는 고린도 교회를 가르치려고 합니다. 지금 고린도 교회내에서는 자신은 고린도 교회의 설립자인 바울에게 복음을 받았다며 바울을 앞세우는 바울파 교인이 있는가하면 나는 최근의 지도자인 아볼로에게 세례를 받았으니 아볼로파라는 교인들, 그리고 자신은 바울 보다 훨씬 앞선 예루살렘의 베드로에게서 은혜를 받고 세례를 받았다는 베드로파, 그런가 하면, 나는 직접 예수를 만나 보았다는 그리스도파 등이 있어서 각각 자기들의 신앙이 정통이요, 절대적이라며 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분쟁이란 언제나 자기 우월감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농부의 비유를 들어 권면과 충고의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 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바울이 맨 처음 고린도 교회를 세웠다는 것이며, 그 뒤를 이은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에 물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내가심을 수는 있지만 자라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물을 주지만 자라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라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모든 노력의 결실은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농부의 건강과 지식이며 지혜, 그리고 시간과 주어진 기회도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농사하는 사람들은 땀 흘려 수고를 하고도 가을에 가서는 하나님께 감사들 드리는 것입니다. 한 번은 외과의사인 장로님께서 웃는 말로 하는 이야기가 "내가 얼마나 많은 땀을 흘리면서 정성을 드려서 다선 시간, 여덟 시간 수술을 해서 다 죽어 가는 사람을 고쳐 놓으면, 자기한테는 인사도 하지 않고 감사 헌금은 교회에 갔다 내더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제가 있다가 "당신은 하나님 대신 꿰매었고 하나님은 붙이셨잖소?"라고 하면서 함께 웃었던 적이 있습니다. 내가 꿰맨다고 낫는 것이 아닙니다. 그 꿰매는 것을 옆에서 보노라면 참으로 한심합니다. 그야말로 적당히 마구 꿰매놓은 것을 하나님께서 붙이시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도 대구 동산병원에 집회 인도차 갔던 길에 심장 수술실에 들러 심장을 수술하는 장면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그 수술을 집도한 장로님에게 "그 수술 환자 괜찮습니까?"하고 물어 보았더니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한 마디 더 묻기를 "그렇게 마구 찢고 째어 놓았다가 꿰매 놓았는데 그게 다시 잘 붙습니까?"라고 하였더니 척척 가서 도로 다 붙는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놀란 것은 심장을 멈추어 놓고 수술을 하게 되는데 수술을 끝낸 다음에 한번 충격을 주어서 벌렁 벌렁 하면서 뛰면 다행이지만 뛰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개는 다 뛰어 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처음 그렇게 하여 뛰지 않으면 전기로 충격을 주게 되는데, 그러고도 뛰지 않으면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술 전에 먼저 만약의 경우심장이 다시 뛰지 않아도 이의가 없겠다는 약속을 받고 수술에 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의사 장로님의 말씀인즉 "수술은 사람이 하게 되어 있지만 하나님께서 영혼을 부르실 때까지는 심장이 뛰게 되어 있나봐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내가 심었다. 물을 주었다. 혹은 내가 수술을 했다며 별 소리를 다해도 그 모든 노력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내가 하는 일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흔히들 걱정이 많은데 그 이유를 저에게 묻는다면 그 대답은 "내가할 일은 하지 않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간섭하려하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자기가 무엇인데 무슨 권리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간섭을 하며 "왜 저 악한 자에게 벌을 내리지 않습니까?" 혹은 "왜 이 사람에게 복을 주시지 않습니까?"라며 타박이요 핀잔을 하느냔 말입니다. 그러고 있자니 걱정이 많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심판을 하는 일도, 복과 저주를 내리는 일도 모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어떤 때 보면, 심지어 남의 버릇까지 고치겠다며 나서는 사람이 있는데 그야말로 부질없는 짓입니다. 그 나이가 되도록 하나님께서도 못 고치신 버릇을 이제 와서 말 몇 마디로 고쳐질 것이겠느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 몇 십년을 같이 살아온 자기 남편, 자기 아내의 버릇은 고쳤으며, 더우기 자기 자신은 얼마나 바뀌어졌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감히 누구의 버릇을 고치겠다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내가 할 일만을 하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원수를 갚거나 저주하는 일은 내가 할 일이 아닙니다. 내가 할 일은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하며 협력해 나가는 것입니다. 괜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간섭하면서 스스로 걱정거리를 만들것이 아닙니다. 역사는 오직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그런데 마치하나님을 대신이라도 하듯이 하나님이 하실 일에 참견을 하고 있으니, 걱정을 사서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친히 하실 일을 인간에게 맡기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키우는 일도 그렇습니다. 어머니로서 젖을 먹일 수가 있고 입히고 먹이며 저들을 위해서 기도도 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 일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흔히 말하기를 "내가 겉으로 낳았지 속으로 낳았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낳으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마치 농사꾼이 땀흘려 수고를 하면서도 자신의 수고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경건과 겸손의 자세가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을 보면, 심는 자와 물주는 자의 수고를 펴가하기를 "심는 이나 물주는 이가 일반"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두 역할이 같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심었으니 내가 원조라든가, 혹은 내가 심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런 현재가 있겠는가라며 자기 과시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뒤에 물을 준 사람 또한 내가 물을 주지 않았다면 말라죽고 말았을 터인데, 심기만 해 놓으면 무슨 소용이냐고 할수 있는 일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피차에 타박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는 가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 돈을 벌어 온다고 하여 남편에게는 절대 권위가 있는 반면에, 아내는 마치 얻어먹고라도 사는 것처럼 죽어지내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잘 버는 것도 잘 버는 것이지만, 집에서 잘 쓰는 것도 잘 버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버는 자나 쓰는 자, 심는 자나 물주는 자가 일반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농사일을 함에는 심는 자도 필요하고, 물을 주며 가꾸는 자도 필요합니다.
이들 모두는 다 같은 피조물의 위치에서 제한된 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우월감이나 특별 대우 같은 것이 있을 수가 없으며 또한 그런 생각을 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다만 자기의 수고가 소중한 만큼 상대방의 수고도 동일하게 소중하다는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멀리 각각 자기의 기능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씨를 심는 기능이 있는가 하면 물을 주는 기능이 있고, 가꾸는 자의 기능이 있는가하면 거두는 자의 기능이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각자는 자기의 기능을 살려서 거기에 맞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은 우리가 자녀 교육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어머니가 대학 3학년인 외동아들이 자기와 말다툼을 한끝에 집을 나가버리자, 마음이 상해서는 상담자를 찾아와 어떻게 하면 좋은가를 의논해 왔습니다. 그 때에 이 상담자는 "아들이 집을 나갔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독립을 했다고 생각합시다."하고서는 이제 아들을 찾아가서 "너의 독립을 축하한다. 나는 네가 어린 아이인 줄 알았는데 벌써이만큼 컸구나! 그런데 네가 정신적으로는 독립을 했으나 아직 경제적으로는 독립을 못했으니 네가 경제적으로 독립을 할 때까지 내가 월급을 준다. 이것이 한 달 월급이다."라며 돈 봉투를 건네주고 나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그 어머니가 그대로 하였더니 며칠 후에 자기 발로 돌아오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흔히 자녀를 나의 소유물로 생각하여 그의 문제를 내 마음대로 처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비록 내가 낳은 자녀이긴 하지만 그는 분명 그로서의 독립된 인격이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 또 다른 자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라는 입장에서 지나치게 간섭할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지나친 간섭이 결국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할 일이 어디까지인가를 알아서 거기에 이르고 나면, 그 이후의 일은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일입니다. 그러고 나면 그 다음의 일은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자기 일에 충실치 못한 사람들이 남의 일에 간섭이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저 부모는 부모로서, 자녀는 자녀로서 또한 아내는 아내로서, 남편은 남편으로서의 몫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잘하고 못하고 하는 이후의 문제는 하나님께 맡길 것입니다. 그 누구도 내게 속한 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직 내게 맡겨진 일에만 충성할 뿐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오늘 본문 말씀에 기록된 대로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을 것이란 말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 자기의 상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물론 모든 수고들이 종합되어 가을이 오면 추수라고 하는 결실을 맺게 되겠지만, 그것은 이차적인 것으로 하고 풍년이 들고 안 들고, 추수가 많고 적고에 상관이 없이 심는 자로서 열심히 심었으면 자기의 일을 다한 것이며, 물주는 자로서 열심히 주었으면 또한 자기의 일을 다한 것이니 거기에 해당하는 자기 상을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25장에서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한 달란트 그대로를 주인에게 돌려줌으로 책망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책망을 받는 것은 한 달란트에 대한 충성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왜 그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놓았을까를 심리학적으로 생각해 보면, 아마도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주면서 자기에게는 한 달란트 밖에 주지 않는 것이 기분이 나빠서였던 것으로 보아집니다. 그러니까 주인이 자기를 무시하는 것에 대한 반항심이 작용한 셈이 됩니다. 아무튼 이 사람의 문제는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한 달란트이든 반 달란트이든 간에 주어진 대로 충성을 다했으면 그만인 것을 공연히 다른 생각을 하는 중에 주인을 가리켜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라며 긴 설명까지 하고있는 것입니다. 내 할 일을 다했으면 그만인 것을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이 필요한 것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문제는 자기 진실, 자기 충성에 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세 가지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첫째 얼마나 신앙적으로 했느냐 하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얼마나 협동을 잘하고 자기 기능에 충실했느냐는 것, 마지막 세 번째는 얼마나 자신에게 진실했느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따라서 상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심은 바를 얼마나 거두어 들였느냐하는 것에 따라서 상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네가 할 바 즉, 심는 자로서, 물주는 자로서, 가꾸는 자로서 열심히 했느냐에 따라서 상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요즈음 우리 교회의 증축 현장을 나가 보면 모든 것이 기능적으로 세분화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땅을 파는 사람은 땅만 파고는 가버리고, 세면을 붓는 사람은 세면을 붓는 일만 하고 가버립니다. 심지어 들보를 올리는 일도 전문가가 있어서 그 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두가 각각 자기의 일만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물론 예배당이 완공되고 나면 모두 함께 기뻐하며 축하를 하겠지만 그것은 다음 이야기이고, 상을 받는 문제에 있어서는 땅을 파는 사람은 땅만 잘 팠으면 상을 받을 것이고, 전기공사를 한 사람은 전기공사만을 잘했으면 그에 해당하는 상을 받는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자꾸만 결과를 의식하며 그 결과에 의해서 내 충실이 정당화되기를 바라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문제는 내가 취하고 있는 방법, 내가 하고 있는 개별적인 최선이 어떠한가에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상을 받는다하더라도 자기에 대한자기 충실이 없었다면 상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예배당이 크게 지어지고 아무리 큰 영광을 받는다하더라도 내가 할 일을 못한 사람은 상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 보다는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할 일은 내가 할뿐 누구에게고 미루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여기에 얼마나 기도를 받쳤고, 정성을 받쳤으며, 내 가진 바의 것으로 최선을 다했는가에 따라 그 만큼의 영광이 또한 나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심는 자이든, 물을 주는 자이든, 혹은 거두는 자이든 간에 모두농부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직 내게 맡겨진 기능을 따라 자기 충실을 다함으로 자라게 하시는 주님께서 자라게 하시고, 거두게 하시는 주님께서 거두게 하시는 그 날에 상 받는 자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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