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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사랑의 능력(요한일서 4장 16절~21절 )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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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사랑의 능력(요한일서 41621)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이스라엘사람의 지혜를 모아놓은 탈무드'열두 가지의 강한 것'이라는 제목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강한 열두 가지가 무엇인지 보십시다.

'돌은 강하다. 그러나 쇠에 깎인다. 쇠는 불에 녹는다. 그 불은 물로 끌 수 있다. 물은 증발하여 구름에 흡수당하고 만다. 구름은 바람에 날린다. 모든 것을 날려보내는 바람도 사람만은 날려보내지 못한다. 사람은 고민으로 파괴된다. 고민은 술로 달랜다. 잠은 술 보다 강하다. 잠도 죽음만큼은 이기지 못한다. 죽음은 강하다.

모든 것은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 가장 강하고 무서운 죽음, 그러나 그 죽음보다 더 강한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사랑이다. 그 붉은 마음, 그 열렬한 사랑은 죽음도 넘는다. 사랑은 죽음도 두렵지 않다. 생명까지 바칠 수 있는 것이 사랑이다' ---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사랑이 으뜸으로 강하다고 하는 결론입니다.

세상에는 갖가지 고통이 있습니다. 그 많은 고통 가운데 가장 큰 고통은 사랑과 관계되어 있는 것입니다. 첫째로, 사랑이 없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물질의 거래는 얼마든지 많습니다마는 사랑이 없습니다. 부부가 되어 평생을 함께 살아가면서도 정작 사랑은 없는 것을 봅니다. 저마다 많이 주었다고 서로들 내세웁니다마는 정작 사랑은 주지 않았습니다. 이러니 준 자도 평안하지 못하고 받은 자도 받은 것이 없습니다. 물질만 서로 주고받았지 사랑을 주고받지 않은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는 것만큼 무서운 슬픔도 없습니다. 둘째로, 사랑이 변해서 문제입니다. 셋째로, 사랑이 거짓되어서 문제입니다. 온통 거짓 사랑뿐입니다. 넷째로, 사랑에 오해가 많아서 문제입니다. 사랑의 소통이 없습니다. 내 사랑을 저쪽에 알릴 재간이 없습니다. 저쪽에서 내 사랑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사랑이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때로 열렬한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표현방법이 서툴어서 소통(communication) 이 되지 않는 경우를 봅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지 않습니다. 짝사랑입니다. 짝사랑에는 그래서 고통이 따르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사랑의 불신에 있습니다.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믿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무산되고 맙니다. 모든 고통의 근본 원인이 사랑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고통이요,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고통이요, 사랑을 믿지 않기 때문에 고통입니다.

여러분, 진실한 사랑이 무엇입니까? 가만히 보면 사람들마다 나름대로 사랑의 언어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의 젊은이들은 지나치게 화끈한 사랑을 해서 그런지 미치겠다느니, 너 아니면 죽어버리겠다느니 하는 말을 곧잘 합니다. 영어의 'I love You' 나 좀더 강한 표현인 'I need you'도 이제는 그 의미가 희석되어버린 느낌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겠습니까? 언젠가 저는 한 작은 모임에서 사도 바울의 말을 인용하여 참사랑을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217)……" 참사랑이란 지금 이대로 죽어도 좋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집에 가서 한 번씩들 말해보라고 권했습니다. 한 여집사님이 남편에게 그대로 했던 모양입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하고 결혼해서 사니 더없이 행복합니다. 이대로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남편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더니 그 역시 이렇게 한마디하더랍니다. "그 말을 들으니 나 역시 오늘 죽는다 해도 한이 없겠소." 사랑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말만 무성한 것이 우리네 사랑입니다. 이것이 불만이다, 저것을 해달라, 그것이 틀렸다 말이 많은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참사랑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생명까지 온전히 바쳐서 오늘 끝나도 한이 없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바른 언어를 가르쳐줍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18)" --- 빛이 있어 어두움이 물러가듯 참사랑으로 근심걱정이 물러간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왜 그리 걱정이 많아야 합니까? 무엇이 두려운 것입니까? 사랑이 변덕스럽고 증오심까지 섞이어 있습니다. 한번 원점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보십시다. 한마디로 참사랑이 아니어서입니다. 참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참사랑은 지금 이대로 더없이 행복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본질을 물어야 하겠습니다.

어느 철인(哲人)이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사랑은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참으로 일리 있는 말입니다. 일평생 마주보고 산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사랑입니까? 함께 하나의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한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의 진리를, 하나의 의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를 함께 생각하는 데서부터 사랑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는 일마다 상극이요 생각하는 것마다 뿔뿔이 엉뚱한 곳으로 치달으니 어디 사랑이 되겠습니까? 아무리 사랑을 부르짖어도 소용없습니다. 사랑하지도, 사랑 받지도 않은 것입니다. 세상에 슬픔이 존재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고통이 끊이지 않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 절규가 반항으로 나타난 것이 오늘의 이 무서운 폭력이라 하겠습니다. 참사랑이 없는 데서 오는 불의가 이것입니다. 지금은 온전한 사랑, 참사랑을 물어야 할 때입니다. 나아가 이 물음은 죽는 순간까지 계속 풀어야 할 일생일대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참사랑이 무엇입니까? 어렸을 때에는 받는 것이 사랑이요, 크면서는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 다음에는 칭찬 듣는 것이 사랑이요, 그 다음에는 칭찬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마지막에는 온전히 나를 불태우는 것이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사랑을 얼마만큼 공부했습니까? 사랑을 얼마나 안다고 생각하십니까? 본문에서 말씀하려는 것은 사랑의 의무가 아닙니다. 사랑의 철학이 아니요, 사랑의 윤리가 아닙니다. 사랑의 신학, 사랑의 복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동안 저는 신학대학에서 기독교 윤리를 강의하였습니다. 기독교 윤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다지 복잡한 것은 아닙니다. 가치나 의미를 따지자는 것이 아닙니다. 도덕이나 규범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뿌리, 곧 근본이 무엇이냐가 중요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20)"---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새로운 규범을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만큼 알고 있느냐입니다. 참사랑의 뜻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 그 안에서 나의 존재를 확실하게 발견했느냐, 그 사랑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느냐---이것만 바로 알면 이웃사랑은 자연히 이루어집니다. 문제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의 존재가 허무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보십시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므로 나의 존재는 소중한 것입니다. 그분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기에 나는 엄청난 값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분이 나를 위하여 지불한 엄청난 값으로 나는 참으로 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말썽 많은 자녀들을 사랑으로 키우는 것이 고통스럽습니까? 그 사랑이 힘드는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나의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을 생각해보십시다.

나의 자녀사랑에 대한 생각은 차치하고 내가 자녀 되어서 내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을 생각해보십시다.

제 집안 이야기라 죄송합니다마는 저는 어머니 생각을 곧잘 합니다. 저를 위하여 평생을 기도로 사시다가 돌아가신 그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늘상 기도하시고 제 잠자리 곁에서 성경을 읽어주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됩니다. 가끔씩 어머니께서 손톱깎던 장면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요즘 여성들은 예쁘게 보이려고 치장을 많이 합니다. 과다노출을 하는가 하면 귀걸이 코걸이까지 주렁주렁 달고 다닙니다. 남들에게 예쁘게 보이려는 것이기에 그리 나쁘게만 볼일은 아닌 것 같아 하고 싶은 대로 얼마든지 하라고 합니다마는 손톱 기르는 것만큼은 못 봐주겠습니다. 옛날 저의 어머니는 가위로 손톱의 양 귀퉁이만을 한번씩 뚝뚝 자르셨습니다. 가운데 부분은 평생을 통해 한 번도 자른 적이 없으셨다고 말하시곤 했습니다. 일을 많이 해서 닳아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까지도 손톱 긴 것만은 괜찮다고 봐주지 못합니다. 할 일이 얼마나 없으면 손톱이나 기르고 앉아 있느냐 싶어서 입니다. 내 편견이요 고집인 것을 저도 잘 압니다마는 여기에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옛날 우리네 어머니들은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에서 벗어날 때가 없었습니다. 집안 일에서 들일까지 모두 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기도하시고 귀한 사랑으로 자녀를 키우셨습니다. 그렇거늘 오늘날에 내 자식 사랑하는 것이 뭐가 그리 어렵다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생각해보십시다. 구제불능인 우리 인간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십자가로 사랑하셨습니다. 그 크신 사랑을 깊이 깨닫고 응답할 수만 있다면 누군들 사랑하지 못하겠습니까? 어떤 남편인들 어떤 자녀인들 사랑하지 못하겠습니까? 원수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뿌리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16)." 'God is love.'---헬라어 원문에서 보면 '호 테오스 아가페 에스틴'입니다.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성경 가운데 이렇듯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는 예는 오늘의 본문이 속한 요한일서에서 두 번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 여러분은 이렇게 고백해보셨습니까? 마음으로 느끼고 있습니까?

언젠가 한 청년이 제게 와서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무슨 사랑입니까? 무서운 하나님이요 증오의 하나님이요 벌하시는 하나님이요 진노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면 저의 사업이 잘되도록 넉넉한 자본을 주셨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야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겠느냐 합니다. "십자가만 쳐다보라는 것이 무슨 사랑입니까?"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저는 그 청년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며 함께 생각해보자고 하였습니다. "우선 나의 나됨을 생각해보세요. 어느 때에 겸손하고 진실하였는지, 어느 때에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었는지, 어느 때에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이었는지를. 과연 그때가 성공했을 때인가 실패했을 때인가, 건강했을 때인가 병들었을 때인가?" 그 청년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하건 가난하건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건강하여 오래 살건 약하여 앓아 누워 있건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것에는 별 흥미가 없으십니다. 얼마나 믿음으로 살며,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바로 알고 사는가----여기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고백하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깊은 곳으로부터 생각합니다----'하나님은 사랑이다.' 내가 깊이 회개하고 겸손할 때에 고백합니다----'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내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 때, 내가 하나님을 잊고 배반하였을 때에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이 지식, 이 고백에 도달하여야 나는 비로소 우주적으로 개인적으로 가장 강한 인격의 소유자가 될 것입니다. 이제는 어떤 일에도 낙심이 없습니다.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알리시고자 하십니다.

성경이, 역사 하심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사랑의 언어가 통하지 않기에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의 방법을 쓰십니다. 그 중 최고의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통하여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계시하십니다. 자기희생을 통하여 계시하십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의를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부하게 만드시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로 오래 살도록, 부귀영화를 누리도록 하시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합니다. 구속의 은혜를 생각합니다. 또한 회개를 통하여 오직 믿음과 겸손으로, 진실로 그 사랑을 영접하게 됩니다.

언제라야 그것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겠습니까? 하나님은 인간 25시에서 당신의 사랑을 계시하십니다. 인간은 인간 25시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비로소 깨닫고 고백하게 됩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평안할 때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부인해버립니다. 불신합니다. 이상하게도 가장 비참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깨닫게 됩니다. 비로소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테니스건 탁구건 어떠한 운동을 해보아도 마음먹은 것처럼 잘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코치가 있어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지혜로운 코치는 잘못하는 것을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그때마다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상대방의 자존심을 생각해서입니다. 그리고 늘 못하다가도 한 번쯤 제대로 때리면 잘했다고 칭찬을 합니다. '참 잘하셨습니다. 항상 그대로 하도록 힘쓰십시오'라고 치켜 세워줍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저는 '저 코치가 내게 설교를 하는구나'하고 속으로 웃었습니다마는 아주 귀중한 교육방법입니다. 못하는 것을 나무라면 점점 더 못하게 됩니다. 어쩌다 한 번 잘할 때, 그 때를 붙들어야 합니다. 그 잘한 것을 극대화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어떤 때에는 하나님이 한없이 두렵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두렵습니다. 어떤 때에는 하나님은 사랑이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느끼게 됩니다. 바로 그 순간입니다. 그 순간을 연장해야 합니다. 확대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십니다.

실례의 말씀입니다 마는 우리가 지금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의 쌀을 북녘 땅에 있는 동포들에게 보내주었습니다. 그러나 좋은 일이라고 하여 신문지상에 떠들어놓은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기분 나빠서 안 받겠다고 하며 다시 돌려보낸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어떤 분이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식량사정이 어려울 텐데 조용히 받을 것이지 왜 돌려보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기분 나빠서 안 받겠다는 것이 아닙니까? 주는 자의 이름만 자랑할 줄 알았지 받는 자의 자존심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는 자는 말이 없어야 합니다. 주는 자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면 받는 자의 자존심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받는 자의 의를 살려주어야 합니다. 명예를 살려주어야 합니다. 남의 명예를 짓밟아가면서 준다면 그 누가 군소리 없이 받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물질의 거래에 있는 것이 아니요, 그 사람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데에 있습니다. 받는 자의 마음을, 받는 자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돈 몇 푼 왔다 갔다고 사랑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주도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창조적으로 사랑하시고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이 자기희생, 그 속에 사랑의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17절에 보면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종말론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여러분,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에 나를 위로할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우리는 빈손으로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야 합니다. 그 순간에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에 가득 채우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심판 날에도 두려움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어쫓되 종말론적 두려움까지 물리치고 주님을 반가이 대할 수 있게 합니다.

사랑과 반대되는 것이 두려움입니다. 이 두 개념을 놓고 신학자 벵겔(Bengel)이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사랑도 두려움도 없는 사람은 무지한 사람이다. 사랑은 없고 두려움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율법주의자이다. 사랑과 두려움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사람은 갈등의 사람이다. 그러면 두려움은 없고 사랑만으로 충만한 사람은 누구이겠는가? 그리스도인이 바로 그 사람이다.' 사랑을 알고, 사랑 안에 거하고, 사랑에 바로 응답하는 그 순간에 모든 두려움과 공포와 근심이 우리에게서 물러갑니다. 이제는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원수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물질이 아니요 사랑입니다.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니요 사랑을 모르기에 문제입니다. 너무도 멀리 있기에 믿지 못해서 문제입니다. 믿지 못하는 데서 모든 문제가 시작됩니다.

십자가로 보증한 증거를 바로 받아들일 때에 우리는 모든 욕망에서 벗어나 깨끗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십자가 보혈을 바로 받아들일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사랑의 능력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오늘도 살아서 역사 하시고 계십니다.

여러분 모두가 날마다 그 은혜 안에서 충만한 생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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