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자료 18,185편 ◑/K자료 1,910편

은총을 아는 사람(사무엘하 9장 1절~8절)

by 【고동엽】 2024. 3. 19.

 

목차로 돌아가기

은총을 아는 사람(사무엘하 918)

 

다윗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사울의 종 하나가 있으니 그 이름은 시바라. 저를 다윗의 앞으로 부르매 왕이 저에게 묻되, 네가 시바냐. 가로되, 종이 그로소이다. 왕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시바가 왕께 고하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절뚝발이니이다. 왕이 저에게 묻되, 그가 어디 있느냐. 시바가 왕께 고하되,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나이다. 다윗 왕이 사람을 보내어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서 저를 데려오니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서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가로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대답하되, 주의 종이 여기 있나이다.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 저가 절하여 가로되,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은혜''은혜됨'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은혜라고 하여 모두 은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 되는 부분만이 은혜입니다. 같은 사건으로 나타날지라도 은혜를 은혜로 알 때에만 은혜가 됩니다.

은혜로 깨닫는 자에게만 은혜가 은혜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은혜로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는 엄연한 은혜도 은혜가 아닙니다. 그 사람과 은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은혜를 은혜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영원히 은혜를 모르고 살기 때문입니다. 가령 선물이라는 것을 놓고 생각해봅시다. 어떤 사람이 좋은 뜻으로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었습니다마는 받는 사람이 이 선물을 뇌물로 여겼습니다. 그러면 이 선물은 뇌물이 되는 것입니다. 좋은 뜻이 의미가 없어지고 맙니다. 또한 선물을 자신의 수고의 대가로 여긴다면 더욱 선물이 아닙니다. 게다가 기대치가 높아서 보다 큰 것을 원한다면 작은 선물은 오히려 모독이 됩니다. '나는 더 큰 것을 기대했는데 뭐 저따위 것을 주나'----나에 대한 모독이며 멸시라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선물이 선물되지 못하고 굴욕이 됩니다. 핵심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은혜 자체보다 은혜를 은혜로 깨닫는, '깨닫는 은혜'가 더 크고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본문말씀 가운데 '은총'이라는 말이 세 번나옵니다. 우리가 잘 쓰지는 않지만 대단히 중요한 용어입니다. 은총 ---- 사랑입니다.

그것도 특별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제가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높은 이로부터 받는 특별한 은혜와 사랑''은총'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높은 이가 낮은 이에게 베푸는, 하사하는 그 은혜와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사랑이 아닙니다.

본문에는 은총이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헤세드 엘로힘' ----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이 말은 수직적 사랑, 절대적 은혜의 관계를 일컫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9장 전반부입니다마는 5장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한번 살펴보기로 하십시다. 일련의 귀중한 사건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5장에 보면 다윗이 비로소 유대나라의 왕이 됩니다. 왕권이 확고해집니다. 6장에 보면 멀리 있던 하나님의 법궤를 다윗 성으로 모셔옵니다. 이어 7장에 보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계획을 세웁니다. 나단 선지자를 불러서 자신의 뜻을 밝힙니다. 그 밤에 하나님께서 나단에게 임하여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13)"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뜻을 받아들이시고 크게 기뻐하십니다. 큰복을 주십니다. 8장에 보면 다윗의 왕국이 승승장구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어 9장에 보면 오늘의 본문에서 보듯이 국내적으로, 은총을 베풀고, 10장에 보면 국외적으로 즉 이방에까지 은총을 베푸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윗, 그가 은총을 받고 은총을 누리고 은총을 베푸는 일련의 이야기가 5장으로 10장까지 죽 이어집니다.

은혜를 알고 은혜를 베푼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사람들은 일이 잘 풀려나갈 때에는 저마다 자신의 능력으로 믿고 교만해지기가 쉽습니다. 일이 잘되었을 때에 그것이 나의 공로가 아니라 은총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은총임을 깨닫고 다시 은총을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은총을 은총으로 받아들이는 마음, 그리고 베풀고자 하는 마음----이 모두가 아름다운 사건이요 은혜스러운 일입니다.

다윗은 마길의 집에 있는 므비보셋을 불러들이고 마치 왕자와 같이 대접합니다. 마길은 본디 사울의 사람으로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숨겨 키웠던 사람입니다. 이 은혜 베푸는 일에 감동을 해서 그는 다윗의 사람이 됩니다. 다윗이 피난길에들 있을 때에 그는 다윗 일행을 지극히 환대합니다. 사무엘하 1727절로 29절에 이 대목이 아름답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관계성 속에 던져진 존재로 태어납니다. 혼자 산 사람도 없고 앞으로 혼자 살 사람도 없습니다. 어떠한 집단 속의 한 일원이 되어서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을 한번 보십시다. 어떤 사람은 자식 하나 얻기 위하여 10년을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얻은 자식이니 얼마나 소중하겠습니까?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사랑합니다. 이렇게 태어나서 자라는가 하면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것이 굴욕입니다. 태어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좋을 뻔했습니다. 심지어 임신을 했을 때에조차 없애버리려고 갖은 방법을 다 쓰다가 부득이하게 낳았습니다. 굴욕적으로 태어났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미움을 당합니다. '너는 애초부터 낳고 싶기 않았던 존재다' '태어나긴 왜 태어나서 귀찮게 구느냐' ---- 천덕꾸러기가 되어 자라납니다. 한편 무관심 속에서 태어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태어나건 말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이제 보십시다. 사랑 속에서 태어나고 증오 속에서 태어나고 무관심 속에서 태어납니다. 그 관계 속에서 자라납니다. 어느 쪽에서건 자라납니다. 그러나 묘하게도 이 모든 것이 복합적입니다. 서로 연관되어 있고 얽혀 있습니다.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신하입니다. 왕과 충성된 신하라는 상하의 관계에 있지마는 왕의 인정을 받아서 왕의 딸인 미갈과 혼인을 하게 됩니다. 왕의 사위가 된 것입니다. 사울 왕은 다윗의 입장에서 보면 왕인 동시에 장인입니다. 사위도 자식이고 보면 부모 자식의 관계라고도 하겠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점차 백성들의 인기를 얻고 높임을 받게 되자 사울 왕이 질투를 합니다. 시기와 질투가 끓어오르기 시작하면 제정신을 잃게 마련입니다. 사람을 아예 미치게 합니다. 엄청난 악을 품게 합니다. 신하며 사위며 아들 같은 다윗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제 그 다윗을 죽이려 합니다. 하물며 간접적으로 죽이려는 것도 아닙니다. 다윗이 조용히 수금을 타고 있을 때에 사울이 정면에서 창을 던집니다. 왕년의 명장 사울이 두 번이나 창을 던졌건만 모두 빗나갑니다. 하는 수 없이 다윗은 도망을 해서 광야를 헤매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이제 왕이 아니라 원수입니다. 장인도 아닙니다. 천하에 용서할 수 없는 원수입니다. 패륜의 원수입니다. 자식을 죽이려고 하는 부모라니, 참으로 관계가 묘해지지 않습니까?

사울을 생각하면 원수입니다 마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다윗과 둘도 없이 가까운 친구지간입니다. 성경에서 아름다운 우정을 들라면 단연코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를 들 수 있습니다. 가장 모범적인 예표가 됩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사무엘상 183절에 보면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했다고 합니다. 요나단이 아버지 사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것이 당연하였지만 그는 왕위를 다윗에게 내어줍니다. 자신의 생명같이 사랑하는 다윗에게 왕위를 양보합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그토록 사랑했습니다. 다윗도 물론 요나단을 사랑했습니다. 그 아버지는 원수요 그 아들은 사랑하는 친구입니다. 관계가 아주 복잡합니다.

므비보셋도 그러합니다. 므비보셋은 사울 가문의 마지막 핏줄입니다. 사울 가문의 하나 남은 사람입니다. 그 역시 악의 씨앗입니다. 원수 사울로 보자면 불씨될 소지가 다분합니다. 제해버려야 당연하겠습니다마는 사랑하는 친구 요나단의 아들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처리하여야 옳겠습니까? 복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여기에 다윗의 위대함이 드러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을 택하겠습니까? 어떻게 생각해야 옳겠습니까? 긍정적으로 보느냐 부정적으로 보느냐, 신앙적이냐 불신앙적이냐---이것이 문제입니다.

다윗은 므비보셋을 결코 원수의 손자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친구의 아들로 생각했기에 므비보셋을 사랑하게 됩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 다니는 중에 얼마든지 대항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절호의 기회도 있었습니다.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순간도 있었습니다마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저주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입니까? 사울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종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쓰실지언정 내가 손을 댈 수는 없다 내가 미워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입니다. 그리하여 피해 다니면서도 끝까지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신앙적 관계로 대했습니다. 아들이 자신을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도 그러했습니다. 얼마든지 처치할 수 있었습니다. 숙청해버릴 수 있었습니다마는 하나님의 역사인 줄 알기에 그는 보좌를 뒤로하고 묵묵히 피난의 길을 떠납니다. 다윗에게는 신앙적 겸손이 있었습니다.

이제 므비보셋을 왕자와 같이 대접합니다. '요나단을 인하여' --- 중요한 대목입니다. 사울의 손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친구의 아들로 므비보셋을 대합니다. 이것이 은총입니다. 그는 본문에서 분명히 지적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다윗, 저는 한낱 베들레헴의 목동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다윗이 유대나라의 왕이 되기까지에는 파란곡절이 숱하게 많았습니다. 여러 번씩이나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습니다마는,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왕의 보좌에 앉게 됩니다. 참으로 감격스럽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베푼 은혜를 이제 므비보셋에게 베풀고자 합니다. 여러분, 은총을 아는 자만이 은총을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은총을 아는 가운데 베풀지 않으면 은총 자체는 무모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므비보셋은 절뚝발이입니다. 전혀 쓸모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은총을 그에게 베풀고자 합니다. 오로지 신앙적 행위였습니다. 은총을 아는 마음 --- 이로부터 진정 은총을 베푸는 사람이 됩니다.

세기적인 흑인 가수 마리안 앤더슨(Marian Anderson)에 얽힌 일화가 있습니다. 그녀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렵게 성장합니다. 노래를 잘 불렀으므로 교회에서 후원회를 조직하여 공부를 시킵니다. 마침내 가수가 되어 뉴욕의 맨해턴 홀 무대에 올라 처음으로 독창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독창회에 왔던 많은 백인들은 매스컴을 통하여 악평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여자의 목소리가 어째 남자 목소리 같다느니, 소프라노인지 알토인지 구분이 안 된다느니 하며 나쁘게 비평을 합니다. 사실 당시는 백인들이 흑인들을 아주 무시하던 때였습니다. 그렇듯 혹독한 비평을 받자 마리안 앤더슨은 실의에 빠졌습니다. 낙심하여 다시는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고 울부짖습니다. 그 때에 그녀의 어머니가 위로하며 해준 말이 있습니다. '은혜가 위대함보다 먼저 있어야 한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라.' 위대해지기 전에 은혜를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너는 왜 칭찬만 받으려고 하느냐?' '너를 나쁘게 평한 사람들보다 칭찬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있단다' --- 이러한 말도 물론 하였습니다마는 '은혜가 위대함보다 먼저 있다'---귀중한 이 말을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앤더슨은 이에 용기를 얻고 다시 일어났습니다. 마침내는 백년에 하나 있을까말까 하다는 세기적인 가수가 되었습니다.

위대함보다 은총이 먼저입니다. 모름지기 은혜부터 알아야 합니다. 은혜를 은혜로 모르는 사람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사람입니다. 므비보셋의 입장을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므비보셋 자신은 본디 원수의 씨앗입니다. 원수의 자손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또한 쓸모도 없는 사람입니다. 두 다리를 절어서 일도 시킬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여기로부터 시작됩니다. 무자격한 가운데서 시작됩니다. 그래야 은혜가 은혜 될 수 있습니다.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순간부터 그는 율법주의자가 되고 맙니다. 여러분은 쓸모가 있는 사람입니까? 스스로 쓸모가 있다고 여긴다면 자기만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입니다. '나는 아무 쓸모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에 비로소 은혜가 은혜 되는 것입니다.

자동차를 직접 운전하고 다니다보면 당연히 앞차를 유심히 보게 됩니다. 앞차가 어떻게 어디로 가는지를 잘 보아야 내 차가 바로 갈 수 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보는 일이 있습니다. 고급 자동차 속에서 반쯤 태운 담배꽁초가 불이 붙은 채로 길 위에 툭 내던져집니다. 이 모습을 보면 마음이 유쾌하지가 않습니다. '저런 사람은 고급 자동차를 탈 자격이 없는데'하는 생각이 듭니다.

요새 우리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건, 곧 비리와 부정을 가만히 보십시다. 우리에게 오늘의 이 부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과연 그러한 자격이 있는 것입니까? 정말 한심합니다. 그러기에 은총인 것입니다. 무자격한 가운데서 이러한 자유를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자격이 없음에도 이렇듯 엄청난 복을 누리고 삽니다.

부부간에도 그렇습니다. 서로 묘하게 얽혀 있습니다. 나는 잘났는데 아내가 못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늘 상대방을 무시합니다. 불행한 사람입니다. 적자계산을 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흑자계산을 하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나는 무자격하고 쓸모 없는 인간인데 아내가 나보다 나는 덕에 잘산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계산을 똑바로 하십시다. 제가 아는 분 가운데 김박사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선친과 막역했던 터라 제가 어른으로 모시고 있는 분입니다. 가끔 만나 뵙고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하고 문안하면 대답하는 말씀이 재미있습니다. '처덕에 잘사네'라고 하십니다. 처덕에 잘산다고 말하면 팔불출(八不出)에 든다고나 생각하는 남편들이 없지도 않은데 이분은 스스로 처덕에 잘살고 있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씀합니다. 몇 번을 듣고 나서 궁금하던 차에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처덕에 잘산다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진실한 내 고백일세마는 자네도 알다시피 내 성깔이 못됐기로 유명하지 않은가." 사실 고집이 세기로 유명한 분이었습니다. 한번 화가 났다 하면 아무 것도 용납하지 못합니다. "이런 내 성깔로는 복을 받을 수가 없는데 집에 들어가 보면 아내가 참 사람이 좋아. 그 사람 앞에서는 화도 낼 수 없고 났던 화도 풀어져서 마음이 평안해지거든. 그러니 내가 처덕에 잘사는 거지 뭔가?" 하나님께서 그 아내를 봐서 자신에게 복을 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말 복 많은 분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항상 부족합니다' '나는 자격이 없습니다' '나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이렇게 자기평가를 할 수 있을 때에 모든 것이 은혜가 됩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다. '나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와 같으며 죄인의 괴수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은혜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은총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므비보셋은 생각합니다. '이는 모두 아버지의 덕이다. 아버지 요나단 때문에 내게 이 은총이 주어지는 것이다.' 감사하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에 보면 그가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8)"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더러운 저를 어찌하여 이렇게 사랑하시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감격하고 있습니다. 한번 상황을 뒤집어놓고 생각해보십시다. 므비보셋 이 사람도 따지고 보면 할말이 많은 사람입니다. 다윗만 아니었다면 아버지 요나단이 왕이 되었을 것이고 그 뒤를 이어 자신이 왕위에 올랐을 것입니다. 그가 절뚝발이가 된 것도 돌이켜보면 그 연유가 다윗과도 얽혀 있습니다. 사무엘하 44절을 보십시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절뚝발이 아들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므비보셋이라. 전에 사울과 요나단의 죽은 소식이 이스라엘에서 올 때에 그 나이 다섯 살이었는데 그 유모가 안고 도망하더니 급히 도망하므로 아이가 떨어져 절게 되었더라." 사울과 요나단이 함께 죽은 것에도 사실은 다윗과의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었습니다. 그러니 감사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를 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그를 은총으로 대했듯이 므비보셋 역시 은총으로 받아들입니다.

죽은 개 같은 나를 어찌하여 이렇게 대해주십니까?----여기에 은총이 있습니다. 은총을 아는 자에게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중생하지 못한 자는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합니다. 원한과 불만과 증오로밖에는 해석할 줄 모릅니다. 여러분, 아직도 고민이 많습니까?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유명한 랍비 발셈 도프는 제자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진리는 길바닥의 자갈돌처럼 흔한 것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제자가 묻습니다. "길바닥의 자갈돌처럼 흔하다면 주우면 될 것이 아닙니까?" "그것을 주우려면 허리를 굽혀야 하는데 허리 굽히기가 싫어서 진리를 얻지 못하는 것이다." 한번만 더 허리를 굽혀보십시오. 거기에 해결의 길이 있습니다. 고개 한번 숙이기가 싫어서 평생을 불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받은 은혜가 부족합니까? 나만이 은혜에서 제외되고 있습니까? 그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입니까, 그 누구 때문입니까? 은총을 은총으로 알지 못하고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교만---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나를 완전히 낮추어서 십자가에 못박아버릴 때에 모든 것이 은혜됩니다. 그 순간에 나도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25절로 9절에서 말씀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 모든 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이름에 무릎꿇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니 ---- 여기에 진정한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