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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자의 윤리(마태복음 5:21-26)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私和)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官)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예배가 끝나자 어떤 작가가 목사님을 찾아 이렇게 질문합니다. "목사님, 제가 교회에 나오고 싶지 않을 때에도 반드시 나와야 하는 것입니까? 목사님 설교가 영 시원치 않다거나 기분이 아주 좋지 않을 때에도 교회에 나와야 합니까? 교회에 올 마음이 전혀 내키지 않는데도 교회에 출석하는 것은 위선이지 않습니까?" 이 뚱딴지같은 질문에 목사님은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침착하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은 가게에서 물건을 살 때에 돈을 내지 않고 그냥 나옵니까? 집세를 낼 때에는 집주인에게 늘 기분 좋은 마음으로 냅니까?"
여러분, 아무리 식욕이 없을지라도 음식은 때에 맞춰 먹어야 하는 법입니다. 건강비결 제 1조가 바로 이것입니다. 입맛이 좋다고 해서 많이 먹지도 말 것이고 입맛이 없다고 해서 끼니를 거르지도 말 것입니다. 제때에 먹는 적당한 양의 식사가 제일 가는 건강비결입니다. 어떻게 항상 입맛이 좋기만 하겠습니까? 또 음식을 만들 때에도 어떻게 항상 새롭고 좋은 음식만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건강한 사람은 언제나 맛있게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입맛을 잃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그 사람은 이미 절반은 병들었다는 것이 됩니다. 건강한 사람은 아무 때에든지 어떤 음식이든지 맛있게 먹을 수 있게 마련입니다. 내가 탈나서 입맛 떨어진 줄은 모르고 차려다놓은 음식만 타박하는 사람은 참으로 사람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입맛이 없다고 음식을 거른다면 그는 정말로 중병에 걸립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언젠가 저는 국악을 전공하는 교수와 얘기를 나눠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방면으로는 문외한이라서 깊은 이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싱거운 질문을 해보았지요. "교수님, 제가 주로 즐겨 듣는 음악이 클래식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국악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국악을 즐겨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 교수는 가만히 생각해보더니 매우 뜻 있고 재미있는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국악은 우리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에 들을 때에는 좀 마음에 안 들더라도 자꾸 들어보십시오. 자꾸 듣다보면 좋아질 것입니다." 그 말이 진리입니다. 제가 그렇게 해보았습니다. 과연 자꾸 들어보니까 차츰 국악이 좋아지더라고요. 오케스트라가 빚어내는 클래식만 좋은 것이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여러분, 별로 마음에 안 드는 음식이라도 부지런히 잡수세요. 입맛이 동하게 될 것입니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더욱 열심히 만나세요. 옛말에 '미운 사람 떡 하나 더 준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제가 그 속담을 좀 바꾸어 말씀드리겠습니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한번 더 만나라.' 그렇습니다. 만나면 되는 것입니다.
철천지원수라도 한 감방 안에서 사흘만 같이 지내면 친구가 된답니다. 그런데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해서 그 사람을 기피한다면 자꾸 자꾸 멀어집니다. 영영 못 만나게 됩니다. 정말로 원수가 되어버립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옵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뵙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싫어졌다면 Something wrong입니다. 어딘가 병이 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더더욱 하나님과 만나는 것을 꺼려하고 주저하게 된다면 정말로 깊이 병들고 맙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사실 예배는 우리 인간의 감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가 갚아야 하는 무거운 빛일 따름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감성과 우리들의 기분과는 관계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만 하는 무거운 의무를 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가 부모 대하는 것이 기분에 관한 것입니까? 사람이 어찌 기분대로만 살아갈 수 있습니까? 마치 자기 기분과 감성을 벗어나는 것이 위선인 것처럼, 기분대로 사는 것이 진실인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가짐이 기분보다 앞서야 할 것입니다. 예배자의 마음에 은혜와 감격이 없다면 그 자체가 큰 문제입니다. 더욱이 그렇다고 해서 예배가 없다면 마침내는 완전히 깊은 수렁에 빠져 헤어날 수조차 없게 될 것입니다.
디제이 버럴드 리라고 하는 사람이 예배에 관하여 비유한 재미있는 글이 있기에 소개해보겠습니다. '예배는 영혼이 그 대상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가뭄이 든 땅이 비를 부르는 소리와 같습니다. 한 인간이 우뢰 속에서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광야 한복판에서 길 잃은 양 한 마리가 한시바삐 선한 목자가 와서 구해주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한 영혼이 우주의 신비를 바라보며 경외감에 사로잡혀 서 있는 것입니다. 한 시인이 일출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있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던 노동자가 문득 음악의 선율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갈급한 마음이 사랑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는 한 인간이 하나님께 다다르는 계단을 하나하나 기어올라가는 행위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란 이런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가진다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 대한 인간의 진실한 응답이 바로 예배이다. 예배는 곧 total response to God--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응답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세계를 알게 되고, 예배를 드리면서 자신을 알게 되고,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안에 있는 나 자신을 재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의 영혼이 바로 설 수 없습니다.
본문은 예배자의 윤리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4절도 예배자의 절대조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화평'을 소유하여야 합니다. 화목함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자(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는 먼저 그 마음과 행위에 화평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아무 거리낌이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라고 친히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어떤 의나 선이나 굉장한 공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가장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예배자의 윤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뜻은 아주 간단합니다. 남을 원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혹 원망을 들을만한 일이 있어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동생으로 태어난 것이 불평이요 불만이었습니다. 마침내는 간사하게도 팥죽 한 그릇에 형이 가진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맙니다. 결국 야곱은 고향에서 쫓겨나고, 형과 원수지간이 되어 등진 채 20년을 살게 됩니다.
그의 심경은 결코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20년이 흐른 후에 야곱은 다시 얍복강을 건너와서 형과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화평한 가운데서 형과 동생이 만나 서로 끌어안고 입을 맞춥니다. 그 때에 야곱은 이렇게 간증합니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창 33:10)"----형과 화해하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뵌 것 같은 감격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족히 그러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하는 자라면 남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결코 원망하지 말 것입니다.
여러분,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했습니다. 그 광야생활 동안에 저지른 죄는 한마디로 '원망죄'입니다. 환경이나 이유가 어떠했든 간에 원망은 바로 불 신앙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욕되는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원망하는 마음으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조금 깊이 생각해보면, 원망이란 자기불행의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내가 가난한 것은 부자 때문이고, 내가 실패한 것은 세상 때문이고,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은 다 누구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남편 때문에 신세 망쳤다는 사람, 아내 때문에 일생을 실패해버렸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잘못된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고 그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 귀속시키다보면 원망은 절로 생기게 마련입니다. 여러분, 이제 분명히 아십시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는 하나님께 나올 수가 없습니다. 남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한 결코 하나님의 얼굴을 뵐 수가 없습니다. 원망하는 동안에는 마음에 평안이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의 본문말씀은 남을 원망하지 말라는 깊은 뜻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남을 원망하지 말라----모든 책임을 나 자신이 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책임은 전적으로 내가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어떻게 말했든지 간에, 부부싸움을 하면서 내가 어떻게 행동했든지 간에 적어도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는 '잘못의 책임은 다 내게 있습니다'라는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자의 마음은 이렇습니다. 내가 불행한 것도 내 책임이요, 당신을 불행하게 만든 것도 바로 내 책임이요, 세상이 잘못되는 것도 내 책임입니다. 모든 불행의 원인이 모두 나 자신에게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오직 이러한 마음으로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때에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23절)"이라고 말씀합니다. '원망을 듣지도 말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남들에게 원망을 듣게 되었습니까? 누군가가 나를 원망하고 있다면 나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언젠가 어떤 교인 가정을 심방하려고 했을 때의 일입니다. 그 집 문에 들어서기 바로 직전에 저보다 한발 먼저 찾아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보아하니 무엇을 좀 얻으러 온 사람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려도 안 열어줍니다. 집안에 사람이 있는 것은 분명한데도, 얻으러 온 사람인 줄 미리 알고 안 열어 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 할수 없이 돌아서면서 있는 대로 욕을 합디다. "분명히 아까 사람이 들어가는 것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문을 두드렸는데 내다보지도 않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그러다가 설상가상으로 우연히 대문에 붙어 있는 교회 팻말을 본 모양입니다. "흥! 꼴에 교회에도 나가시는가보구만. 그래서 천당에 갈 수 있나 어디 두고 보자"하며 어찌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지, 먼발치에서 보는 제가 낯이 뜨거워 혼났습니다. 저는 그 사람이 돌아간 다음이라 곧바로 들어가면 안될 것 같아서 밖에서 한참을 기다렸다가 문을 두드렸지요. 그랬더니 그제야 문을 열어주더군요. 분명히 안에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그 집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보세요. 다른 사람의 원망을 듣게 되면 내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남을 원망하지 말 뿐더러 내가 원망들어서도 안됩니다.
여러분, 왜 남에게 원망을 듣게 되는 것입니까? 내가 저를 원망했기 때문입니다. 혹 여러분 가정에서도 자녀들을 키우면서 아이들에게 이렇게 원망할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네 아버지나 나나 가난해도 어떻게든 공부하고, 그렇게 애쓴 덕분에 이만큼 성공하지 않았느냐. 말 그대로 고생 고생하여 자수성가한 것이야.
그런데 너희들은 도대체 뭐 하는 것이냐? 하라는 공부도 제대로 못하지 않느냐"하고 한참을 늘어놓습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할말이 있습니다. "누가 저를 낳아달라고 했어요? 왜 낳아서 이 고생을 시키십니까? 그리고 제자식 자기가 키우면서 뭐가 그렇게 말이 많아요?"하며 도리어 대듭니다. 이것이 또 문제입니다. 또 남편을 원망해보세요. 남편도 나름대로 할말이 있습니다. 아내를 원망해보세요. 아내도 할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원망은 원망을 불러일으킵니다. 굳이 아이들에게 말을 하려거든 이렇게 하십시오. "그저 너희들에게 미안하구나. 내가 돈을 못 벌어서 용돈도 제대로 못 주고 하니 말이다. 또 내가 이 모양으로 못생겼으니 부모 닳은 너도 잘나고 싶은들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성형수술이라도 해서 미남미녀로 만들어주지 못하니 미안하다." 그렇게 먼저 미안하다고 말해보세요. 저쪽에서도 '죄송합니다'하고 나올 것입니다. 이쪽에서 고맙다고 하면 저쪽에서도 고맙다고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나는 남을 원망하면서 정작 남에게는 나에게 감사하라고 합니다. 앞뒤가 통하는 얘기입니까?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원망을 듣는 것은 이미 그 전에 내가 저들을 원망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 앞에 감사하고 고맙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그 사람들도 내게 고마워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원망을 듣지 말아야 합니다. 원망을 듣는 사람이 되지 말 것입니다.
좀더 나아가, 오늘의 본문은 귀한 것을 가르쳐줍니다.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이라고 말씀합니다. 원망들을 만한 일은 언젠가는 생각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자 할 때에는 누군가가 나를 원망하고 있다는 것이 생각날 것입니다. 그럴 때에 성경은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라고 말씀합니다. "내 잘못이오, 내가 잘못했소"라고 먼저 가서 사과하고 용서하고 화해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윤리입니다.
간혹 우리는 어떤 분의 임종을 지켜볼 때가 있습니다. 온 집안 식구가 둘러앉아서 마지막 유언을 듣습니다. 저는 많은 임종을 지켜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기억나는 분이 한 사람 있습니다. 임종을 지키기 위하여 온 가족이 모여 있는데 그분이 다른 사랑은 다 방에서 나가고 부인만 남으라고 했습니다. 뭐라고 얘기했을까 참으로 궁금했습니다. 부인이 방에서 나온 다음에 제가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래, 무슨 말씀을 하시던가요?" "오직 이 한마디만 말씀하셨어요. '당신, 나 때문에 일생동안 고생 많이 했소. 참으로 미안하오'라고요. 그래서 저도 '아니요, 오히려 나 때문에 당신이 고생을 많이 했지요'라고 대답했지요." 당연히 그랬을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죽는 순간까지 '너 때문에 나만 고생했다'고 하겠습니까? 비록 마지막 시간이지만 미안하다는 이 말 한마디를 제대로 하고야 하나님 앞에 갈 수가 있습니다. 그 때만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자의 마음은 시간 시간 매일매일 예배할 때마다 늘 그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즉시 가서 내가 잘못했노라 사과하고 화해하고 와서 예배를 드리세요. 그러한 자세가 아니기 때문에 예배가 예배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에는 오로지 깨끗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언젠가「건강 다이제스트」지에서 이런 얘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화를 낼 때에는 자기도 모르게 입김이 세어지고 거품도 생기지 않습니까? 그러한 사람의 입김을 받아서 영하 100도로 급랭을 시키면 침륜체가 된다고 합니다. 그 침륜체를 가지고 액체를 만들 수 있는데, 같은 방법으로 웃는 사람의 입김도 침륜액으로 만들어보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화를 낸 사람의 것과 웃는 사람의 것이 같지 않고 달랐다는 것입니다. 화를 낸 사람의 침륜액은 고동색이나 검은색을 띠는 반면에 기쁨으로 활짝 웃는 사람의 입김으로 만든 침륜액은 푸른색이나 흰색을 띤다고 합니다. 그리고 두 침륜액을 각각 실험용 쥐한테 주사해보았더니 화를 낸 사람의 침륜액을 주사한 쥐는 2시간만에 죽어버리고, 기쁘게 웃는 사람의 침륜액을 주사한 쥐는 더 활력 있고 생기 있게 지내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늘상 화를 내고 있으니 대기의 공기인들 무사하겠습니까? 또한 그 공기를 다시 사람이 마시고 사니 오래 살수가 있겠습니까? 과학이 증명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마저 원한에 사무쳐 몸부림을 치며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기도가 어떻게 하나님께 상달될 수 있겠습니까? 이유야 어쨌든, 누구의 잘못이든 시비를 가리지 말 것입니다. 원망하지도 말고 원망 듣지도 말고, 서로 화해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올 것입니다. 그래야 예배는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입니다.
베이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에게는 나쁜 습관이 문제이지만 나쁜 사고는 더더욱 문제가 된다.' 이어서 나쁜 사고의 유형으로는 이러이러한 것이 있다고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종속적 사고가 있다. 집단의 인습에 매여 거기에서 도저히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둘째로, 동굴적 사고가 있다. 이것은 마치 동굴에 갇힌 사람처럼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사고의 노예가 되고 있다. 셋째로, 항상 타산적으로 생각하는 시장적 사고가 있다. 넷째로, 극장적 사고가 있다.
이것은 비실제적인 것을 실제인 양 여기며 향락적인 생활로 기울어지는 것이다. 다섯째로, 학교적 사고가 있다. 이것은 자기가 배운 것, 그것만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 이같은 편견들로 말미암아 사람의 마음이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이 같은 생각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평화로운 마음자세를 가질 때에 비로소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가 있습니다. 참 예배가 가능해집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배자의 절대조건입니다.
예배자는 용서와 화해와 사랑, 거리낌없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누구를 원망하지도 않고 누구에게 원망 듣지도 않아야 합니다. 화해를 뒤로 미루거나 기피하지 않고 당장 행동으로 옮기는 적극적인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배자된 바른 자세입니다.
찰스 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의 권능이 무의식 상태로 가라앉을 때에 그 영혼은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다.' 그렇습니다. 내 마음이 참으로 깨끗하게 비어질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을 바로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예배에 은혜가 없고, 왜 예배가 힘이 들고, 왜 예배가 무기력해지는 것입니까? 우리의 생활 전체가 왜 이렇게 무기력해졌습니까? 바른 예배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이 점점 시들어가고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만남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배자된 바른 윤리를 찾으십시오. 바른 예배가 이루어질 때에, 하나님과의 바른 만남이 이루어질 때에 내 영혼은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건강할 때에 내 정신도 건강해지고, 내 정신이 건강할 때에 내 육신도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내 인간관계나 사회생활은 물론 내 존재 자체가 새로운 활력과 새로운 생명력과 새로운 창조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과 늘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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