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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하시는 하나님(고린도전서 2:6-11)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 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 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아랍사람들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철저한 바보다. 그를 피하라. 자기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단순한 사람이다. 그를 가르치라. 자기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잠자는 사람이다. 그를 깨우라. 자기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를 따르라.' 매우 지혜로운 교훈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 맞추어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을 좀 바꾸어서 달리 설명해보겠습니다. 자신이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철저하게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구제불능입니다. 자신이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고독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위로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사는 사람은 탕자입니다. 집에 있든 밖에 있든 가출해 있든 어디에 있든 상관없이 이 사람은 탕자입니다. 방랑자입니다. 그런고로 이 사람은 깨우쳐주어야 합니다. 많은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어느 자식이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있지 않겠습니까?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식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행합니다. 슬퍼하고 탄식하고 고독해하고 절망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와 사랑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런데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한에는 계속 불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혹 그런 사람이 있다면 깨우쳐주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사랑 받고 있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또한 자기가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 그리고 그 사랑에 대한 바른 깨달음, 바른 응답, 바른 자세를 가지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요, 인간다운 사람이요, 은혜를 아는 사람이요,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내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요, 내가 은혜 가운데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요, 내가 하나님의 엄청난 보우(保佑)하심과 긍휼과 사랑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시간시간 간증하며 시간시간 새롭게 깨닫는 사람입니다. 그 사랑을 확증하며 사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언젠가「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흔히들 아이큐(IQ)가 높고 똑똑한 사람이 성공하는 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상당한 연구 끝에 내린 결론은 전혀 상식 밖의 것이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아주 똑똑한 사람이 출세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자기가 남보다 더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남보다 더 실패하더라는 것입니다. 똑똑한 사람이 왜 실패하는지 그 이유를 몇 가지로 열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오만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결심하고, 하려고만 한다면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이 오만함 때문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어리석기 짝이 없지요.
둘째는, 오만하므로 남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고립하기 때문입니다. 경험을 배제하고 자기 머리에만 의존합니다.
사실 '무엇을 안다'는 것은 그리 대수로운 것이 못됩니다. 누가 경험했든 간에 어쨌든 미리 경험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남의 경험을 내가 수용할 줄 아는 겸허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경험과 그가 깨달은 지식에 대해서는 전혀 무시합니다. '그거야 다 멍청한 사람들이 경험한 것이니까 신경쓸 필요 없고, 내가 생각한 것이라야 돼'라고 합니다. 이렇듯 남의 경험보다 내 생각이 더 앞선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노릇입니다. 이를테면 부모나 선배들이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실수를 했다고 합시다. 거기서 얻은 경험이 있어 "인생은 이렇더라……"라고 말해줍니다. 그럴 때에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습니까?"하며 최소한 절반은 받아들여야 하는데 '멍청한 사람들이니까 그렇게 경험했지, 똑똑한 나는 절대 안그래'하고 자신합니다. 그 사람, 언뜻 보면 똑똑한 것 같아도 그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셋째는, 무모하기 때문입니다. '내게는 다 계략이 있어'하고 늘 자기 행동에 대해서 미리 생각을 해놓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 현실과 맞아떨어지지 않습니다. 또 그렇게만 생각하는 줄 아십니까? 장차 일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예감까지도 자기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이 역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결국은 한도를 초과하게 됩니다.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한 가지씩은 재능을 가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을, 어떤 사람은 지혜를 가졌습니다.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도, 다 할 수도 없습니다. 운동선수는 운동선수대로, 공부하는 사람은 공부하는 대로, 돈버는 사람은 돈버는 대로 각각 나름대로 가진 바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남의 일 보듯 수수방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남의 얘기가 아닙니다. 사업하는 사람은 열심히 사업을 하고 교육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남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남을 가르친다는 사람이 정치한다고 나서고, 돈만 벌던 사람이 다른 것을 해보겠다고 나섭니다. 다른 것도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한도 초과'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바가 있습니다. 그것에 충성할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다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데에 오만불손함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는 어리석은 것이지요. 남보다 똑똑한 것이 아니라 남보다 더 멍청한 것입니다. 실패한 것입니다.
칼 바르트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의 행동에 언제나 선행(先行)하신다.' 여러분, 내가 먼저 무엇을 어떻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아시고 저렇게 인도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 생각과 내 행동, 내 존재에 앞서서 행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언제나 내 존재, 내 행동, 내 결단보다 먼저입니다. 하나님 안에 내가 있고, 하나님의 경륜 안에 내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예외적 존재도 아니요, 고립된 존재도 아니요, 홀로 남은 존재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잠언 3장 5, 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잘난 체하지 마십시오. 나의 명철을 의지하지 마세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세요. 하나님께서 먼저 아시고, 하나님께서 먼저 뜻하시고, 그 안에 내가 있는 것입니다. 범사에, 모든 행동에, 모든 생각에, 온유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인정하는 믿음이 그 중심부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9절)"이라고 말씀합니다.「공동번역성서」에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해주셨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셨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가운데에 우리가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미래를 예비하시고 우리는 그 미래를 향하여 살아가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능력의 초윌성을 말씀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를 말씀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우리는 불확실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불확실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미궁에 빠져버린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미궁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른 채 답답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시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계십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지난날의 일을 생각해보세요. 나는 아무 것도 모른 채 그저 암담하게만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돌이켜보니, 어쩌면 그렇게 모든 일이 계획적인 것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늘의 나를 위하여 완벽한 작품을 만들어놓으신 것입니다. 예외적인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존재 그 자체와 그 성격, 운명을 다 아시고 인도하시고 계십니다.
욥은 고백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보세요. 그는 엄청난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가족을 잃었고, 건강을 잃었고, 명예를 잃었고, 의를 잃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운명은 오직 그가 아시나니'----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진 고생을 다 겪고 단련된 후에 정금과 같이 되리라고 합니다. 욥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약속된 미래를 그렇게 믿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참고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비하십니다. 그 예비하심이 인간의 차원에서 볼 때에는 미스터리입니다. 아주 신비로운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말씀합니다.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9절)." 그렇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계획을 몰랐습니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나는 미처 생각지도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계셨습니다. 과거에 그러하셨듯이 현재와 미래에도 그러하십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 없고 우리의 귀에 들리는 것 없습니다만 믿음의 눈으로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아시고 당신의 길로 인도하시고 계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늘 현재적 경험에 매입니다. 우리의 나약성에 매입니다. 경험이라는 것이 소중하지만 그 경험으로 말미암아 고집이 생깁니다. 지식이라는 것이 소중하지만 그 지식에 집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는 데에 큰 어려움이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신비로운 세계를 받아들이는 데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보세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일백 세에야 얻은 소중한 아들입니다. 어떤 아들입니까? 하나님께서 분명히 저 아들을 통해서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알같이 자손을 번성케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바 언약의 아들인 것입니다. 아직 장가도 못 보냈고 달리 손자를 본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느닷없이 이 아들을 바치라 하시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군말 없이 순종합니다. 이삭을 데리고 사흘 길을 걸어 모리아 산에 이릅니다.
제단에 이삭을 올려놓고 칼로 찌르려 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말리십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줄을 아시고 그것으로 족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문득 아브라함이 뒤를 돌아다보니 그 곳에 수양 한 마리가 수풀에 뿔이 걸려 버둥거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제물까지 준비해두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제야 아브라함은 진정으로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명명합니다. '여호와 이레'---하나님께서 예비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듯 예비해놓으시고 나를 부르셨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 동안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초조하고 불안했던가?' '여호와 이레'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새롭게 깨달으면서 간증하는 고백인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시간입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얼마나 경험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순간순간, 이 순간을 하나님께서 이미 예비하시고 계셨다는 것을 새롭게새롭게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탑니다. 그런데 도중에 풍랑을 만납니다. 요나는 잘못을 깨닫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욘 1 : 12)." 하나님 앞에 진실을 찾는 순간입니다. 사람들은 요나를 바다에 내버리고, 큰 물고기가 그를 삼킵니다. 그러나 삼일 후에 다시 육지에 토해버립니다. 결국 그는 니느웨땅으로 직행하여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욘 1:17)"라고 말씀합니다.
풍랑이 심한 어느날, 아프리카의 어느 해변에 난파선 한 척이 나타났습니다. 어떻게든 육지로 가까이 오려고 애를 썼지만 해변가의 암초에 부딪혀서 그만 배가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배를 탔던 많은 사람들이 물에서 허우적거립니다. 이것을 멀리서 본 주민들이 구명선을 내어 그 풍랑 속으로 노를 저어갔습니다.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을 한사람한사람 건져냈습니다. 배는 금새 구조된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런데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제 마지막 한 사람을 건지려고 하는데 배의 정원이 가득찬 것입니다. 그 사람까지 마저 태우면 배가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가라앉을 판입니다. 주민들은 할 수 없이 그 사람을 놓아두고 육지로 돌아왔습니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다 구해내지 못하여 안타까웠지만, 무사히 살아 돌아온 것에 모두가 기뻐하고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한 청년은 두고 온 사람이 자꾸만 생각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 다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갈 채비를 하였습니다.
풍랑은 점점 더 심해지는데 이제 또 나간다면 당신까지 죽게 될 것이라며 모두들 극구 말렸습니다. 어머니도 그를 붙잡고 울며 사정합니다. "얘야, 네 아버지도 몇년 전에 바다에 나가서 돌아가셨고 네 형도 며칠 전에 바다에 가더니 죽었는지 살았는지 여지껏 아무 소식도 없지 않느냐. 이제 너까지 바다에 나가서 행여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이 어미는 어떻게 살아간단 말이냐?" 아들은 "어머니, 그 마지막 한 사람이 마음에 걸려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요"하며 간신히 어머니를 달래놓고 용감하게 풍랑 속으로 배를 저어가서 거의 실신하다시피 한 그 사람을 건져내어 육지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청년의 어머니가 가만히 살펴보니,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그 사람이 바로 자기 아들이더랍니다. 며칠 전에 실종된 형을 그 동생이 살려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때때로 어떤 일에 부딪혀 난감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비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세계를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 아시고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가끔씩 컴퓨터의 기능에 대해서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옛날 귀신도 놀랄 정도입니다. 얼마나 재미있고 얼마나 놀랍고 얼마나 빠르게 작동을 하는지 모두들 무척이나 신비롭고 신기해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신비하다 해도 그것은 어떤 사람이 프로그램을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프로그램 그대로 기계가 작동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의 프로그램 속에 내가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굉장해하고 신비해하고 놀라워하고 절망도 해보고, 그리고 별소리를 다 해보아도 결국은 하나님의 프로그램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이것을 모른다는 것에 있습니다.
탕자가 집을 나갑니다. 그러나 방탕하여 그 많던 재산을 다 허비했기 때문에 집에 돌아올 면목이 없어졌습니다. 집에 돌아오고 싶어도 못 돌아옵니다. 그러다가 정 배고파서 죽을 신세가 되니까 할 수 없이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를 다시 아들로 영접하고 잔치를 베풉니다. 비록 염치도 없고 마음은 괴로웠지만 아들은 이 잔치를 받아들입니다. 저는 '그 순간 탕자는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라고 성경에도 언급 없는 탕자의 마음을 한번 짚어보았습니다. 꼭 '이럴 줄 알았더면 진작에 돌아올 것을……'했을 것만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버지께서 이렇게 나를 용서하실 줄 알았다면 진작 돌아왔을 텐데, 많은 날들을 공연히 고생했구나'라고 말입니다. 여호와 이레,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을 탕자는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도 많았고 고민도 많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벌써 아시고 미리 예비하시고 그 길을 인도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 예비하신 것을 몰랐었다는 데 있습니다. 이제는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논리적으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어린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이에 부모가 어린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고후 12:14)."---여러분, 부모는 자식을 압니다. 자식이 나날이 커가고 있음을 압니다. 그가 장차 어떻게 될 것이라고까지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자식을 위하여 예비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시고 계십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알고 이 믿음에 살아갔습니다. 그렇지만 종종 깨닫지 못하고 괴로워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감옥에 갑니다만 처음에는 왜 감옥에 가야 하는지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마침내는 깨닫고 고백합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빌 1:12)." 또한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를 줄기차게 괴롭히는 것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사도 바울의 육체적인 질병이라고 생각해봅시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는 무엇보다도 건강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건강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고통을 풀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항상 의사를 동반하게 하셨으면서도 병은 그대로 남겨두셨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깨닫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 12:9)"라는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가 내게 족합니다. 만족합니다'라고 다시 한번 깊이 깨닫습니다. 이 병으로 인하여 약할 때에 더욱 강할 수 있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더욱 성실할 수 있음을 그는 솔직히 고백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가 족하다는 이 깨달음과 함께 그는 새로운 세계에 살아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감취었던 것인데(7절)"라고 말씀합니다. 감취어 있었을 뿐이지 원래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모를 뿐이지 엄연한 사실입니다. 문제는 내가 이것을 얼마나 깨닫느냐, 얼마나 깨닫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10절)"라고 말씀합니다. 성령 안에서 이제 깨달은 것입니다. 보세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십자가로써 당신의 사랑을 확증해주셨습니다. 성령 안에서 이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세계에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프로그램을 전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다시 바라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요14:1, 2)"--여러분, 이 세상에서만이 아니라 저 내세에서까지 예비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오늘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부름에 바로 응답해야 할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의 근심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두려움은 어디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까? 여러분,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그 신비로운 역사와 그 능력과 지혜를 바로 깨닫고 바로 믿을 때에야 참으로 평안할 수 있으며 새로운 용기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땅에 씨를 뿌리는 것은 싹이 나는 것을 믿기 때문이요, 추수할 가을이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낙심하지 말고 씨를 뿌릴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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