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자료 18,185편 ◑/K자료 1,910편

오직 예수와 나 (마가복음 9장 2절~8절)

by 【고동엽】 2024. 3. 19.

 

목차로 돌아가기

오직 예수와 나 (마가복음 928)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나타나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이사야 2617,18절에 보면 해산하는 수고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비유의 말씀입니다. 인간이 치를 수 있는 고통 가운데 가장 크고 힘든 고통은 단연코 해산의 수고라 하겠습니다. 그 진통, 그 아픔은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여인들은 그 고통을 기쁨으로 참아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앞에 귀한 생명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여인이 해산의 고통을 다 치르고 아이를 낳았으나 바람 같았습니다. "잉태하고 고통 하였을지라도 낳은 것은 바람 같아서(2618)" ---- 바람을 낳아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죽은 아이를 낳은 것입니다. 그 때의 실망감, 그 상심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모름지기 고통이란 그 끝에 기쁨이 약속되어 있어야 참아낼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끝에 절망과 허무와 실의만이 기다리고 있다면 우리는 고통을 치르기도 전에 쓰러지고 맙니다. 현실이 그러합니다. 고통의 무게는 저울로 달 수 없습니다. 부피도 헤아리지 못합니다. 문제는 고통의 내용입니다. 즉 고통의 가치요 의미입니다. 생명의 문제, 약속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앞에 닥친 이 고통이 분명 소망적이요 생명적인 약속으로 이어져 있다면, 그것을 확실하게 믿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어떠한 고통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소망의 문제요 약속의 문제입니다. 실제적인 문제입니다. 사실로 굳게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다면 어떻겠습니까? 사실적이며 실제적일 때에만 참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마태복음 713.14절에 보면 두 문에 대한 비유의 말씀이 있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14)" ---- 그 길에 고통과 고난이 함께 할지라도 영생으로 통하는 길이기에 참아낼 가치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13)" ---- 그러나 그 길의 끝은 사망이다, 사망으로 통하는 길이기에 절망적이라고 하십니다. 방탕이 그러하고 안일이 그러하고 게으름이 그러합니다. 또한 부도덕함이 그러합니다. 넓고 편안한 길처럼 보이지만 사망으로 통하는 길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이렇게 비유해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장차 다가올 천국의 영광을 행동으로 보여주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 중 특히 베드로, 야고보, 요한의 세 사람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기도하신 다음에 당신의 몸을 변형시키셨습니다.

"변형되사(2)"-헬라 원문으로는 '메테모르포테'입니다.

영어로 번역하면 'transformation' 혹은 'transfiguration'이 됩니다.

즉 변화한 모습을 일컫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그 변화한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3)."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는 놀답고도 영광된 모습이 바로 이러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생각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외적인 변화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우러나는 변화였다는 사실입니다.

외형적인 변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내부에 자리하고 있던 본질적인 것이 밖으로 표출되면서 드러나는 변화입니다. 소중한 것이 감추어져 있다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감추어져 있던 보화가 있다고 칩시다. 거기에 묻어 있던 먼지와 때를 닦으면 짐차로 그 본래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광채가 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광채가 새로 생긴 것입니까? 본래 있었던 것입니다. 본래 있었던 그 본질이 이제와서 나타나는 것----'메테모르포테'입니다.

이러한 개념으로 미루어 여기서 변형이라 함은 이렇게 보는 것이 오히려 옳을 것 같습니다.'감추어진 영광의 계시' ---- 감추어져 있던 영광이 이제야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는 본질적인 것과 함께 미래적인 모습을 앞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본래적이요 미래적입니다. 예수님 본래의 모습이셨습니다. 본래 영광된 분이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지마는 장차 영광된 모습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가운데 33년 동안 육체를 입고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알아야 합니다. "변형 되사"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본래 모습과 미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셨습니다. 영광된 세계를 미리 계시하셨습니다. 여러분, 그 순간에 우리가 거기에 있었다면 과연 어떤 감격이 있었겠습니까? 예수님과의 만남, 그 만남의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참모습을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9장의 전반절입니다마는 8장의 후반절부터 연결해서 읽어야 합니다. 8장의 후반절에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예고하십니다. 31절의 말씀을 보십시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그러하기에 34절에서 이어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여러분, 십자가의 고난이 목전에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때에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본래적인 모습을 보여주시고 미래에 있을 사실을 앞서 보여주십니다. 변화산에서의 모습입니다.

기독교는 영광 없는 고난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고난이 없는 영광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또한 십자가 없는 부활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고난의 메시야, 영광의 메시야 ---- 기독교에서 매우 중요한 교리입니다. 예수님을 대하던 많은 사람들은 영광의 메시야만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면 나라가 회복될 것이다' '로마군대들이 전멸하고 다윗 왕국처럼 천하를 호령할 나라가 세워질 것이다' '이제 우리는 태평성대를 누릴 것이다' ---- 이렇게들 생각했습니다. 영광의 메시야만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 실망하고 급기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심지어 제자들까지도 영광의 메시야만을 생각하고 따르던 나머지 그만 실망하고 맙니다. ', 그 능력 많으신 예수님께서 어찌 이리도 무력하게 돌아가시나'하고 입을 모읍니다. 제자들의 실망하는 모습이 누가복음 2413절 이하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두 제자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뒤에 엠마오로 내려가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나란히 걸으십니다. 그들의 대화에 끼십니다. 그들은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21)"라고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26)"하시며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십니다.

메시야가 고난을 받으리라고 성경에서 미리 말씀하지 않았느냐, 왜 고난의 메시야를 이해하지 못하느냐----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고난의 메시야, 영광의 메시야, 그 둘의 의미를 함께 이해하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바로 그 의미입니다. 마태복음 16장과 마가복음 8장에서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바른 신앙고백을 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기대하셨던 귀한 고백의 말씀이 베드로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메시야이십니다' ---- 기쁘고 대견하게 받아들이셨습니다마는 이제 돌이켜서 당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핍박을 당하고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영광의 순간에 십자가를 말씀하십니다. 또한 십자가를 말씀하시면서 그 앞에 있을 영광도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고난의 메시야와 영광의 메시야를 함께 이해하여야 합니다. 고난 없는 영광, 인정하지 않습니다. 영광 없는 고난 그것도 진리가 아닙니다.

고난과 영광을 함께 받아들이고 현재와 미래를 함께 이해하는 데에 진정한 기독교적 진리가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칼 바르트(Karl Barth)의 신학을 가리켜 이른바 '크리스마스 신학'이라고 합니다. 이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요한복음 114절의 말씀을 너무 중시하고 거기에 근거를 두어 신학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하면 마르틴 루터의 신학을 가리켜서는 '십자가 신학'이라고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십자가에 중심을 두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해서입니다. 제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1960년대 초, 프린스턴대학에 유학하고 있을 때에 첫 한 학기 동안 루터 신학을 공부한바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에 관하여 많은 책을 읽어야 했는데 처음에는 매우 힘이 들었습니다. 학기말이 되어 시험을 치른다고 하니 걱정부터 앞섭니다. '미국에서의 첫 시험인데 어떻게 치를 것인가?' '과연 어떤 문제가 나올 것인가?' 적이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마침내 학생들이 가슴 졸이며 기다리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교수가 들어와서 문제를 칠판에 씁니다. '루터 신학을 십자가 신학이라고 하는 이유를 쓰라.' 그리고는 시험지가 아닌 노트(blue book)를 한 권씩 돌립니다.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세 시간 동안에 그 노트에다 쓰라는 이야기입니다. 쓰기는 써야 하겠는데 도대체 세 시간에나 걸쳐 쓸 만한 할말이 없습니다. 더구나 내 견해가 아닌 루터 자신의 신학이었으니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아무튼 세 시간 동안을 땀에 범벅이 되어 씨름한 적이 있습니다.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 고사에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축록포수불견산(逐鹿砲手不見山)'---- '사슴을 좇는 사냥꾼은 산을 보지 못한다,' 즉 사슴에 초점을 맞추고 달려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슴을 좇아가면서 '경치 좋다'하며 이 산 저 산을 구경하다가는 사슴을 놓치고 맙니다. 사슴을 좇아가는 동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야 합니다. 오직 사슴만이 보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가를 생각해보십시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십자가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모든 문제가 따라서 해결됩니다. 여러분, 개인 문제건 가정 문제건, 정치경제사회문화 문제건 도덕 문제건, 그 해결은 십자가에 있습니다. 십자가의 바른 뜻을 이해할 때에 모든 문제가 사라집니다. 지금 복잡한 문제로 시달리고 있다면 아직 십자가의 의미를 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시한번 십자가에 우리의 초점을 맞춥시다.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신비롭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신비, 그 고난과 영광의 의미를 바로 이해할 때에 나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예수님을 생각해보십시오. 십자가를 지시기 전, 빌라도 법정, 가야바 법정으로 끌려다니시면서 재판을 받으십니다. 갖은 비난과 수욕을 받으시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십니다마는 끝내 초연하셨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라고 묻는 대제사장의 물음에 의연히 대답하십니다.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2664)." 고난 속에서도 예수님의 마음은 이미 세상 끝에 가 계셨습니다.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가야바가 이것을 알 리 없습니다.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도다. 십자가에 죽여라.' 이렇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저렇듯 의연한 모습은 어디로서 비롯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마음은 이미 그 영광에 가 계셨습니다. 고난과 영광을 함께 생각하신 것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빌라도를 불쌍히 여기셨고 당신을 죽이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실 수 있었습니다. 핍박하는 자를 오히려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 마음으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지시기 전에 변화산에서의 그 놀라운 영광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영광과 십자가, 우리는 이 둘을 동시에 이해해야 합니다. 영광을 모르는 자는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십자가가 없는 자는 영광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너희도 십자가 앞에서 영광을 생각하라---이것이 예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 재미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로 그 영광된 순간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아마도 졸았던 모양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 졸다가 눈을 번쩍 떠보니 눈앞에 엄청난 영광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나간 소리를 합니다. "저희가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6)." 본디 무심코 한 말 속에 진실이 있게 마련입니다. 베드로는 정신없는 와중에서 자신의 본모습을 그대로 노출시켜버렸습니다. 그러면서 한다는 소리가 무엇입니까?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지금이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행복이란 언제나 현재적입니다. 지금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마음이면 행복입니다.

놀라운 행복을 경험하면서 그대로 함께 오래 있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초막을 지어 모시겠다고 합니다. 초막 셋을 지어 예수님, 모세, 엘리야를 모시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천상적인 영광을 자신들의 초막에 가둘 수 있습니까? 영원한 영광을 자신들의 일시적인 신비 체험에 국한시킬 수야 없습니다. 참으로 한심스러운 생각입니다. 아무리 기쁘고 감격스럽다 해도 그것이 전부일 수는 없습니다. 거기에 머물러서도 안됩니다. 단지 신비 체험에 안주하려는 생각이요 사명을 망각하는 모습입니다. 영광을 체험해야 합니다. 미리 체험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신비 체험이 전부일 수는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사도 바울은 많은 고난을 치렀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끊기는 것만이 순교가 아니라 그의 일생이 전부 순교적 생활이었습니다. 순교적인 삶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넉넉히 이기었습니다. 로마서 8장에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7)."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의미를 바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말씀하는 바와 같이 하늘나라에 가본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삼층천(三層天)에 올라가 신비로운 환상을 체험했다고 합니다. 내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할까봐, 또한 내가 교만해질까 두려워서 말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 큰 은혜를 입은 것에 교만해질까 하여 하나님께서 내게 육체의 가시를 주어 겸손하게 하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놀라운 체험을 했기에 어떠한 고난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하늘나라 영광이 기록되어 있는 성경입니다. 말세에 있을 모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이 계시를 먼저 주셨겠습니까? 초대교회 시절, 일부 교회가 큰 핍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네로 황제의 핍박이 눈앞에 있었습니다. 수만 명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그 사건이 있기 전에 놀라운 환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먼저 보여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고난을 쉽게 이기도록 하십니다.

본문말씀을 자세히 보면 베드로가 자기 욕망에서 떠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하는데 그 중 자신들을 위한 초막은 없습니다. 참 기특합니다. 예수님, 모세, 엘리야를 모시겠다고 하면서 자신들도 머물겠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자기 욕망을 계산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결혼한 사람인데도 처자식 생각을 하지 않아요. 누가 이런 이야기를 합디다. '하늘나라에 가 살면서 이 세상에서 방탕하게 살아갈 아들딸 생각이나 자꾸 할 것이면 아예 하늘나라에 가지 않는 것이 낫다.' 그렇습니다. 미리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산밑에서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을 잊고 있습니다.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 그러나 여러분, 아무리 신비적인 체험이 좋고 귀하다 해도 사명을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7)." 예수님과 자기들뿐이었을 때,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려옵니다. 저의 말을 들으라 ---- 우리가 가야 할 남은 길을 말씀하심입니다.

우리나라가 낳은 위대한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은 왜정 말기 신사참배 문제로 5년 동안 감옥에서 고초 당하시다가 결국 순교를 합니다. 돌아가시기 직전에 쓰신 고난의 명상록이 이순겸 목사님께 전해져서 그 기록이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이제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리이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내가 당하는 수욕을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였느냐 물으신다면 나는 어떤 말로 대답하리이까?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십자가)을 어찌하였느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할 수 있으리이까?' ---- 여러분, 우리는 무슨 말로 대답하여야 합니까? 이리저리 고난은 다 피하다가 주님 앞에 가면 무슨 낯을 들겠습니까? 마이어(Meyer) 목사가 죽기 전에 사랑하는 친구한테 보낸 편지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내 생명이 몇 날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편지가 당신 손에 도착하기 전에 나는 벌써 천국에 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회답을 써 보내지 마십시오.

우리 부활의 새 아침에 천국에서 만나십시다.'

우리의 궁극 목표는 어디에 있습니까? 고난에 매여 낙심하지도 말며 영광의 환상에 매여 사명을 잊어서도 안됩니다. 십자가를 보면서 주님 앞에 있는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영광의 체험과 기도 속에서 항상 주님을 새롭게 만나는 행복을 누리면서 이에 따르는 소중한 사명을 오늘도 지켜가야 할 것입니다. 오직 예수, 오직 나 ---- 예수님과 나의 바른 관계 안에서 십자가의 능력을 새롭게 체험해야 할 것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