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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생산성(고린도후서 6장 1절~10절)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 왔다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은혜의 생산성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일단 일을 시작하려면 적어도 네 가지의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 자본이 있어야 하고 둘째, 지식이 있어야 하고 셋째, 경험이 있어야 하고 넷째,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본적인 상식입니다. 세상에 돈이 따르지 않는 일은 없습니다. 자본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또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돈이 아무리 많으면 무엇합니까? 알아야 합니다. 그 아는 것도 나의 경험으로 얻어서 아는 것이라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다 갖추었어도 노력이 없으면 되지 않습니다. 진실한 노력, 충실한 노력이 따라야 합니다. 이 네 가지 요소 위에 가장 근본적인 것이 또하나 있습니다. 바로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됩니다. 아울러 우리에게 평안이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에 기쁨이 없으면 되는 일이 없는 법입니다.
건강에도 3대 요건이 있습니다. 첫째, 적당한 영양을 섭취해야 합니다. 많이 먹어서도 안되고 편식을 해서도 안됩니다. 모든 음식을 골고루 알맞게 섭취해야 합니다. 둘째, 적당한 운동을 해야 합니다. 먹고 가만히 누워만 있으면 건강하지 못합니다. 운동을 해야 합니다. 가만히 보면 젊은 사람들은 대개 늦잠을 자고 노인들은 새벽부터 공원에 나가서 열심히 운동을 합니다. 운동과 일은 다릅니다. 적당한 운동을 꾸준하게 해야 합니다. 셋째, 마음이 편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정신적인 평안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평안하지 못하면 절대로 건강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운동도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경쟁심이 강하게 작용하면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게다가 힘에 부치는 데도 살겠다고 억지로 운동을 해보십시오. 피곤하게 됩니다. 모름지기 기뻐야 합니다. 만사가 즐거워야 합니다. 음식도 기쁜 마음으로 먹어야 몸에 이롭습니다. 기쁜 마음, 즐거운 마음이 건강의 근본입니다. 그러면 이 기쁨은 어디서 오는 것이겠습니까?
바른 목적과 바른 가치관과 바른 도덕성에 기쁨이 있습니다.
혼자서는 기쁠 수 없습니다. 더불어 기뻐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울리고서 내가 기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기쁨의 원리가 그렇습니다. 또한 이 기쁨은 양심의 성원을 받아야 합니다. 내 양심이 나를 정죄하는데 내가 기쁘겠습니까? 도덕적 성원이 기쁨의 원리입니다. 더욱이 약속된 미래에 대한 확실한 보장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종교입니다. 오늘 아무리 기쁜 일이 있다 해도 내일 일이 캄캄하면 소용없습니다. 그런데 그 내일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문제는 완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로서 약속을 받아야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서양사람들은 성공의 비결로 3P를 꼽는다고 합니다. 첫째로, 'practice'--노력하고 수고하는 실천력과 추진력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patience'--인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던하게 참아내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peace'--평화입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평화가 있고야 성공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보십시오. 자본도 있고 지식도 있고 기술도 있습니다만, 정작 있어야 할 기쁨이 없습니다.
D똕TXT?소유하면 될 줄 알았는데, 막상 손에 넣고보니 별것 아닙니다. 성취하고서 오히려 불안합니다. 명예와 인기, 얻고나서 더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인 소위 스타들, 화려한 무대 위에 서서 관중들의 우레같은 박수를 받을 때에 보면 참으로 굉장합니다. 성공했다 싶습니다. 그러나 고달픈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언젠가는 인기가 떨어질 것이고, 그것을 생각하면 괴롭고 불안합니다. 그래서 술을 마시고 환각제를 쓰고 ----- 요즈음 그것이 사회문제화하고 있습디다. 가만히 보면 연예인들은 고생이 많습니다. 인기를 좇아 기울이는 노력과 수고가 얼마나 엄청난지 말로 다 못합니다. 그렇게 해서 어느 정도 인기를 얻어놓으면 이제는 그것을 지키느라 더 고생입니다.
불안과 공포에 싸여 기쁨이 없습니다. 남을 기쁘게 하면서 정작 본인은 기쁘지 못합니다. 죽을 지경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왜 그렇습니까? 기쁨의 진리를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쁨은 은혜입니다. 그러면 이 은혜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은혜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기쁨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기뻐하는 자는 모든 일에 기뻐할 수 있고 불평하는 자는 매사에 불평뿐입니다. 이제 성경에서 말씀하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보십시다.
먼저, 은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보호,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돌보심 ------- 여기에 기쁨의 근본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계와 바른 관계를 맺지 않고는 절대로 내 마음에 기쁨이 없습니다. 일찍이 아우구스티누스도 '당신 안에서 받는 위로를 떠나서는 아무런 위로도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나님께 고백하였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절대필요가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께로서 오는 은총에 은혜와 기쁨이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인간적이고 근본적인 것입니다.
둘째, 은혜는 무자격한 가운데 얻어집니다. 나는 자격이 없습니다--여기에서 은혜가 오는 것입니다. 나를 높이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에게는 영원히 은혜가 없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추어서 마침내 나는 아무 자격이 없다고 하는 마음을 가지는 사람에게만 진정한 은혜가 있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면서 한가지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대체로 똑똑한 사람들에게 기쁨이 없습디다. 이것저것 따져보면 내가 제일 잘났는데, 그것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또 주위를 가만히 보니 변변치 않은 사람들도 잘살고 있는데, 잘난 나는 죽을 지경입니다. 이러한 마음자세가 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잘나고 똑똑한 사람일수록 기쁨이 없이 평생 불안과 불만과 짜증으로 살아갑니다. 그런가하면 누가 보나 별로 시원치 않은 사람이 예상 밖으로 기쁨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자식을 놓고도 그러합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의 부모가 오히려 문제입니다. 그만하면 잘한다 싶은데 넌 누굴 닮아서 그 모양이냐느니, 종자가 잘못된 것 같다느니 하는 소리를 합니다. 듣는 자식도 괴롭고, 불평하는 부모도 고통스럽습니다. 반면에 어떤 집 아이는 공부를 잘 못합니다. 누가 보아도 그런데 그 부모는 태평합니다. 그래서 한번 물어보았더니 이렇게 말합디다. "우리 집안에서는 그만하면 잘하는 것입니다. 최고예요." 자기 집안에서 제일이라는데 누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부모는 자식을 괴롭히지 않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시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자식만 들볶고 앉았습니다. 겸손하게 낮추고 또 낮추어 '나는 무자격합니다'라고 고백하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와 같고, 하나님과 원수 되었고, 교회를 핍박했고, 미물의 때만도 못하고,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작은 사람이라는 마음에서만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원리입니다. 오만한 사람은 어떠한 여건에서도 진정한 기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은혜도 감사도 없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자격이 없습니다----여기에 진정한 기쁨과 감사가 있습니다. 또한 여기에 행복이 깃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 받은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은혜를 받고 살아도 깨닫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받은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항상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어느 시점에서 깨닫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이상하게도 배가 부르면 코가 둔해집니다. 배고픈 사람일수록 코가 예민합니다. 행복에 대한 감지력도 그렇습니다. 부한 사람보다 가난한 사람이 예민합니다. 부잣집 아이들은 아무리 많은 용돈을 주어도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가난한 집 아이들은 단 몇 푼만 주어도 눈물을 홀리며 고맙게 받습니다. 배고픈 사람의 코가 예민합니다. 또한 건강할 때에는 깨달음이 부족합니다. 병들고야 비로소 깨닫습니다. 건강할 수 있었던 그 귀한 은혜를 잊고 살아왔습니다만, 병들고 나니 그 건강이 얼마나 큰 은혜이었는가를 뒤늦게 알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순간에 가서야 비로소 은혜를 깨닫게 되더라는 말입니다. 깨닫는 일은 그리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이 나옵니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눈을 뜨게 됩니다. 생각하면 40년 동안 소경으로 산 것이 억울합니다. 뉘 죄 때문이냐고 따지고들자면 할말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는 눈을 떴습니다. 이것저것 복잡한 문제는 다 접어두고 오직 하나, 예수님께서 내 눈을 뜨게 하셨다고 감격하고 있습니다. 이 단순한 마음, 이 깨달음--거기에 기쁨이 있었습니다. 깨달음이나 기쁨, 평화는 어원적으로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카리스'나 '샬롬'은 헬라어와 히브리어라는 언어적 표현의 차이가 있을 뿐, 내용적으로는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기뻐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고 모든 사람과 화목하는 가운데 평화를 이루게 됩니다. 이것이 샬롬입니다. 새로운 은혜의 세계관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모든 것을 은혜로 깨닫고 은혜로 보게 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은혜입니다.
이제 오늘의 본문 가운데 강조되고 있는 몇 구절을 보십시다.
2절에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지금'이라는 말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의 은혜를 알고 있습니다만, 이미 지난 이야기입니다. 앞에 축복을 약속 받고 있습니다만, 인내해서 미래에나 얻어질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입니다. 돈으로 기뻐하는 사람은 돈이 없어졌을 때에 기쁨도 잃어버릴 것입니다. 건강으로 기뻐하는 사람은 건강을 잃었을 때에 기쁨도 잃어버릴 것입니다. 내게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면 병들어 죽을 때에 하나님을 원망하며 죽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기쁨의 근본요건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현재성이 중요합니다. 지금이 바로 은혜받을만한 때입니다. 건강하건 병들었건, 성공했건 실패했건 지금 이 상태에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은혜의 요건입니다. 오늘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주시고자 오늘 여기에 내가 있는 것입니다. 은혜의 현장, 그것이 내 현실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경륜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꾸만 내일을 생각하려 합니다. 내일이 은혜의 날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이 환경이 아닌 다른 환경 안에 은혜가 있을 것 같습니다만, 그것도 아닙니다. 오늘이 은혜의 날이라고 성경은 누누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16절에 사도 바울의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세월을 아끼라"----세월을 속량 하라는 말씀입니다. 'redeem the time.' 이 말씀의 깊은 뜻을 여러 가지로 해석합니다만, 저는 이렇게 이해합니다. '오늘'이라고 하는 바로 이 시간, 이 결정적인 시간을 최선의 기회로 만들라, 어제도 아니요 내일도 아닌 오늘, 이 현재의 시간을 'the best opportunity'----선을 위한 최선의 기회로, 은혜 받을 수 있는 최선의 기회로, 축복받을 수 있는 최선의 기회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잘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물질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좋은 일이 생길 때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환난과 핍박 속에 있는 초대교회를 향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처한 이대로의 이 현장이 은혜 받을만한 때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는 다분히 종말론적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이 다시없는 기회입니다. 시간은 나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오늘을 은혜의 기회로 생각하여야 합니다.
또한 이 귀한 은혜를 깨닫고 감격하면서 스스로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게 됩니다. 자원하여 하나님의 일꾼으로 일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생산성이 있습니다. 가끔 학생들이나 노동자들이 시위하는 장면을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봅니다. 민주주의 국가라면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또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머리에 두른 띠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쟁취'니 '투쟁'이니 하는 말들이 씌어진 띠를 머리에 질끈 동여매고 시위를 합니다. 가슴이 섬뜩합니다. 제가 직접 경험한 일이 아니더라도 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투쟁해서 얻은 것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쟁취해서 얻어낸 것에는 절대로 평화가 없습니다.
순간적인 기쁨이 있을 뿐입니다. 행복도 없습니다. 내가 쟁취해서 얻은 것이기에 고마움도 없습니다. 고마운 마음이 없으니 기쁨이 있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만 점점 강팔져갑니다.
하나를 얻고 열을 잃는 일이니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회주의가 무너지는 것을 두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무너지는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제가 그 현장에서 근 40여년 간 고생해온 주교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이렇습니다. 사회주의가 사람들을 평등케 하는 데에는 성공했습니다. 부한 자와 가난한 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구별이 없어졌습니다. 사실 못 가진 자의 입장에서 보면 아니꼬운 것이 하나둘이 아닙니다. 괴롭습니다. 나는 힘들게 걸어가는데 남은 좋은 차를 타고 편안히 갑니다. 배알이 뒤틀립니다. 불편한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평등케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사회주의에서는 이처럼 평등을 제일로 꼽습니다. 모두 똑같게 만들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평등에는 일단 성공을 했습니다마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자원성이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당연히 생산성이 떨어지고 사람들은 가난해졌습니다. 누구든 가리지 않고 똑같이 댓가를 지불하니 열심으로 일하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북경대학에 다니는 한 학생이 이렇게 말합디다. "우리는 철밥통을 가지고 산다." 밥만큼은 절대 굶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또 졸업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취직이 될 것이기에 걱정이 없다며 태평합디다. 입학을 하면 성적에 관계없이 졸업을 하게 되고, 자동적으로 취직이 되면 일을 잘하건 못하건 똑같은 댓가를 받게 됩니다. 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여기에는 심각한 문제가 따릅니다. 공부도 안하고 일도 안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맙니다. 농군들은 새벽부터 일어나서 일해도 시원치 않을 터인데 9시가 되어서야 어슬렁어슬렁 집단농장으로 나갑니다. 대충 시간을 때우고는 5시면 돌아옵니다. 이러니 농사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면 자발적으로 일할까 하여 생각해낸 것이 이데올로기 교육이었습니다. 소위 이념교육이니 사상훈련이니 교양이니 하는 것들입니다. 마침내는 문화혁명까지 시도하게 되었습니다만, 그렇게 하여도 안되고 말았습니다. 시간을 정해 일하게 할 수도 있었고 훈련을 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까지 기쁨을 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창의력을 이끌어낼 수도 없었고 자발적인 동기를 부여할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은 비생산적 이데올로기가 됨으로 오늘날에 와서 '세계의 거지'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현실이요 현장입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자원해서 일한다는 것이 생각처럼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자본주의는 자본주의대로 문제가 있습니다. 많이 일하면 많이 주고, 성과를 올리면 더 준다고 했더니 열심히 일하기는 합니다만,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다같이 목적의식을 잃어버렸습니다.
여러분, 무엇보다 은혜가 중요합니다. 은혜 받아서 기쁜 마음으로 자원해야 합니다. 가치와 의를 알고 확실한 목적으로 일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인간의 의지로 되지 않습니다. 은혜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남편이 바깥일을 하고 아내가 집안일 을 합니다. 사랑 안에서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하는데, 여기서 만일 사랑이 빠져나갔다고 해보십시다. 물론 형식적으로야 얼마든지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으로 직장생활이 원만하겠습니까? 음식에서 맛이 나겠습니까? 마음에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 창의력이 있고 자발성이 우러나게 됩니다. 사회주의가 바로 이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긴 시간을 일하게 할 수 있었지만 기쁜 마음으로 일하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능률이 떨어지고 생산성이 없었던 것입니다. 오직 은혜 안에서 생산적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도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갖은 고생을 다하지만, 그것의 마지막에 기쁨과 큰 생산성이 있음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포도원 농부를 들어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포도 수확기에는 시간이 몹시 촉박합니다. 일꾼이 모자랍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 시간대로 9시, 12시, 3시, 5시에 각각 사람을 포도원으로 들여보냅니다. 1시간을 남겨놓은 5시에 들어간 사람은 아마도 65세가 넘은 사람일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 비유에서 주님께서 뜻하시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따지고 보면 새벽부터 나가서 일해야 합니다. 9시에 나간 사람도 사실상 기회를 놓친 사람입니다. 12시에 나간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1시간밖에 안 남아 들어간 사람은 완전히 실패한 사람입니다. 세월 다 보낸 사람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몇 시간이건 그저 일하게 해준 것에 무조건 감사하는 마음으로 임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주인의 마음입니다. 일한 양에 따라 대가를 계산하겠다는 마음이 주인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요즈음도 그렇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무슨 일을 하건 감지덕지하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감사한 것뿐입니다.
여기에 자원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가 곧 생산성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8절로 10절에 역설적 진리가 나와 있습니다.
핍박을 당해도, 매맞아 부상을 당해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가난한 자 같으나 부하고, 죽은 자 같으나 살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기쁨은 신비로운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비밀입니다. 이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참되고 풍부하고 항상 신비로운 기쁨에 살아가게 됩니다. 목표를 기뻐하고 의미를 기뻐하고 소명을 기뻐하고 주님의 사랑을 기뻐합니다.
여러분, 은혜는 힘입니다. 지혜요 용기입니다. 감사는 또 다른 감사를 낳습니다. 은혜로운 사람이 또다른 은혜의 요소가 됩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은혜를 받고 증거하고 사역하는 가운데 더 큰 은혜를 받게 됩니다. 여기서 생산적인 믿음, 생산적인 역사가 나타납니다.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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