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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오직 그가 아십니다(욥기 23장 10~17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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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그가 아십니다(욥기 231017)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그의 앞에서 떨며 이를 생각하고 그를 두려워하는구나. 하나님이 나로 낙심케 하시며 전능자가 나로 두렵게 하시나니 이는 어두움으로 나를 끊지 아니하셨고 흑암으로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셨음이니라.

 

인간은 '욕망'의 존재입니다.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곤고하며, 욕망을 채워 행복하며, 욕망을 채우지 못하여 불평불만과 원망 속에서 살아갑니다. 무엇보다 인간은 육체적 욕망을 가졌습니다.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합니다. 이 욕망에 매여 나름대로 허덕이며 고생을 합니다. 또한 인간은 정신적 욕망을 가졌습니다. 먹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알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과거의 일이건 현재미래의 일이건 묻고 생각합니다. 인간에게는 알고자 하는 지적 욕망이 있습니다. 영적 욕망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하고 양심의 성원을 얻어야 합니다. 인간은 항상 사랑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며 살아가는 영적 욕망의 존재입니다.

마태복음 41절로 11절은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받으신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사건 속에 모든 일들이 자세하게 계시되어 있습니다. 문제와 그 문제의 해답이 아주 집약적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먹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가지고 싶은 욕망이 있고, 되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 위에 알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금식을 하셨습니다. 40일이나 굶으셨으니 얼마나 배가 고프셨겠습니까? 몹시 주린 끝이라 먹고 싶은 욕망이 간절합니다. 이것이 시험입니다. 또한 앞일을 위해서라면 명예도 인기도 필요했습니다.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져 무사히 살아남는, 놀라운 이적을 보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높이고 존경하고 추앙할 것입니다. 가지고 싶은 욕망입니다. 이어 마귀는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이면서 제게 엎드려 경배하면 그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합니다.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얻는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입니다. 먹고 싶은 욕망, 가지고 싶은 욕망, 되고 싶은 욕망---인간에게는 이러한 욕망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먹지는 못하지만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한 농부가 곡식이 누렇게 익은 가을 들녘을 지나간다고 해봅시다. 어른들이 흔히 말하듯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것입니다. 들녘에 가득한 곡식---보기만 해도 배가 부릅니다. 이런 느낌을 아는 사람이 여기 이 자리에는 별로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먹을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냉장고를 열어보고 느끼는 만족감과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사람은 먹지 않아도 가진 것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또한 되고 싶은 욕망을 채우면 가지지 못해도 만족합니다. 우리는 공부를 해서 석사도 되고 박사도 됩니다. 권력자도 되고 인격자도 됩니다. 무엇이 된다고 하는 것, 그것만으로 먹지 못해도 좋고 가지지 못해도 좋은 경우가 있습니다. 욕망의 충족과 정이 이러합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다. 먹지 못하고 가지지 못하고 되지 못해도 남은 한 가지, 아는 것으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다니느라면 참으로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지루해지면 집에 가자고 조릅니다. 조금 더 있다가 가자고 달랩니다마는 소용이 없습니다. 당장 가자고 소란을 피웁니다. 먹고 싶은 것을 달라고 해도 그렇습니다. 내일 주겠다---통하지 않습니다. 당장 입안에 넣어주어야만 가만히 있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오늘 가지지 못해도 내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면 됩니다.

10년 후에라도 된다는 것을 알면 충분히 참을 수 있고 충분히 기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지식입니다. 우리는 앞에 있는 약속, 앞에 있는 미래를 확실히 알기만 한다면 어떤 일이든 참을 수 있습니다.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지적 욕망이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 여러 방면으로 노력을 경주합니다마는 쉽게 채워지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는 욥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욥은 동방의 큰 부자였습니다 마는 하루아침에 재산을 다 빼앗기고 알거지가 됩니다. 열 남매나 되는 자녀는 맏형 집에서 잔치를 하던 중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몰사를 합니다. 살아남은 욥마저 온몸에 악창이 나서 기와조각으로 긁으며 잿더미에 뒹구는 비참한 신세가 됩니다. 동반자가 되어 일평생을 서로 돕고 이해하며 살아가야 할 아내마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하고는 집을 나가버립니다. 기막힌 사정입니다. 그뿐입니까? 친구도 하나 둘 떠나갑니다. 위로한다고 찾아와서는 고작 한다는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위로가 아니라 오히려 그를 괴롭히고 조롱하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기껏 한다는 소리가 '무슨 죄를 지었나 잘 생각해보라'입니다. 욥은 이런 소리 저런 소리가 다 귀찮기만 합니다. 친구도 잃었습니다. 명예까지 잃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추앙하고 존경하지 않습니다. 더욱 문제되는 것은 의까지 잃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이상하게도 잘살면 의인 대접받고 못살면 죄인 취급받습니다. 건강하면 의인이고 병들어 고통을 당하면 나나 남이나 정죄하려드는 것이 보통입니다. 욥에게서 의가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의롭다 진실하다는 말이 더는 통하지를 않습니다. 지금 욥은 마지막 의까지 버린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좀더 나아가 욥기 1324절에 보면 고난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시나이까." 하나님까지도 자신을 원수처럼 여기는 것으로 보이더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마지막 기대까지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짓누르고 심판하고 저주하는 것 같은, 하나님께서 나를 대적으로 여기시는 것 같은 영적 고통마저 느끼게 되었습니다. 더 어려웠던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저에게 이러한 고통을 주십니까?' --- 고난의 이유를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미국이 낳은 유명한 흑인 가수 마리안 앤더슨(Anderson, Marian)은 노래를 잘 불렀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음악학교 입학을 거절당했습니다. 그 슬픔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까지 뒤따랐습니다마는 교인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그러구러 공부를 마치고 스물세 살이 되던 해에 첫 독창회를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독창회에 왔던 많은 비평가들은 혹평을 서슴지 않습니다. 그가 흑인 가수였다는 것만으로 그리한 것입니다. 이 쓰라린 아픔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어서서 끝까지 노력합니다. 마침내 세계적인 가수가 됩니다. 세계적인 지휘자 토스카니니(Toscanini Arturo)는 협연을 마치고 나자 '백 년에 한번 나타날까말까한 아름다운 목소리의 소유자'라고 그를 극찬합니다. 모든 관중이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치고 앵콜송을 청합니다. 그는 엄숙한 자세로 유명한 흑인영가 하나를 부릅니다. '그 누가 나의 괴로움을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주밖에 누가 알아주랴. 영광, 할렐루야' -- 눈물을 흘리며 엄숙하게 부릅니다. 하나님 말고 누가 그 고통을 알 것입니까? 장내는 숙연해졌습니다. 이제는 아무도 박수치지 못합니다.

일전에 미국에서 음악회에 간 적이 있습니다. 백인들이 다니는 대학에서 흑인 대학생으로 구성된 합창단을 초청하여 연 음악회였습니다. 그들은 바로 그 노래 '그 누가 나의 괴롬을 알며'를 불렀습니다. 노래가 끝나자 관중 모두가 우레 같은 박수를 보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지휘자나 합창단원은 한 사람도 그에 대한 답례를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서 있는 것입니다. 그 순간 저는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영혼의 절규다. 당신들의 귀나 즐겁게 하고, 듣고 박수나 치라고 부른 노래가 아니다'----- 거부의 몸짓인 듯 싶었습니다. 여러분, 흑인 아니고는 그 누가 이 흑인들의 서러움을 알 것입니까? 그들의 크나큰 고통을 알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욥의 고통을 누가 알 것입니까? 나의 마음속에 자리한 고통, 그 중심을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그 고통의 의미조차 알 수 없습니다.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고통의 결과가 무엇이겠습니까? 고통 뒤에 어떤 일이 있게 될는지 모릅니다. 이제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결과와 보상도 모르는 채 고통 당하는 것이 더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의인의 고난, 그 미래 -- 불확실하고 미확정인 미래가 더 견딜 수 없는 고통입니다. 사람은 미래를 충분히 알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예지 능력이 있습니다. 생리적으로 보아도 그러합니다. 사람은 어떠한 음식이 자신의 몸에 이로운지를 압니다. 입맛이 그쪽으로 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먹고 싶은 것을 다이어트 한답시고 굶다가 죽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마는, 아무튼 사람은 자신의 몸의 상태를 잘 압니다. 하찮은 동물도 자신의 몸에 이로운 것을 찾아 먹고 배가 차면 먹기를 그만두지 않습니까? 육체도 미래를 압니다. 마치 후조(候鳥)가 기후에 따라 이동하는 것처럼 육체는 상당한 예지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신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과거를 알기에 미래를 예지합니다. 반복되는 사건의 연계 속에서 원리를 찾아, 즉 역사의 맥락을 따라서 미래를 전개합니다. 이것을 미래학(futurology)이라고 합니다. 우리 인간은 적어도 이만큼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에게는 객관적 사건을 주관화하여 자신의 운명을 깨닫는 능력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자동차 사고를 보고 나에게도 똑같은 사고가 날 수 있음을 걱정합니다. 다른 사람이 병든 것을 보고 나도 병들 것을 생각합니다. 죽는 것도 그렇습니다. 적어도 그만큼은 알고 있습니다. 도덕적 예지도 있습니다. 죄지으면 죽는다, 나쁜 짓 하면 못산다는 것쯤은 공부하지 않은 사람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죄짓고는 복받을 수 없지, 나쁘게 했는데 일이 잘될 수가 있나, 역천자(逆天者)는 망하고 순천자(順天者)는 흥한다--양심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래를 내다볼 때에는 언제나 도덕적 차원에서 판단하고 전망하게 됩니다.

합리적인 추구, 인과율적인 이해, 도덕적인 상식으로 미래를 전망하게 됩니다. 또한 종교적인 이해의 능력도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상을 받거나 벌을 받거나, 저주를 받거나 축복을 받거나 간에 양심이 반응합니다. 양심을 거역한 자는 미래를 보지 못합니다. 죄인은 영적으로 미래에 대한 장님이 되어버립니다. 가만히 보면 참으로 똑똑한 사람인데 어린아이도 하지 않을 실수를 하는 것을 봅니다. 총명이 흐려졌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미래에 대한 지식이 없습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영적 지능이 마비되고 맙니다.

그래서 그 같은 어리석은 짓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욥은 큰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마는 더 괴로운 것은 그 미래입니다.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이기에 오늘 이러한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면 그는 중요한 결론을 내립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10)"---하나님께서 아시는 것으로 만족하려 합니다. 제가 어떤 때에는 손주녀석의 손을 잡고 길을 나갑니다. 어린아이는 제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손목을 잡힌 채 만족해서 따라옵니다. 할아버지께서 인도해주실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아무 걱정이 없는 것입니다. 더는 알 필요도 생각할 필요도 질문할 필요도 없습니다. 욥은 말합니다. '오직 당신이 아십니다. 당신만이 내 운명을 아십니다. 그 동안의 제 삶을 당신은 알고 계십니다. 나의 최선을 알고 계십니다.' 자녀들이 잔치를 마친 뒤에 혹시 취중에서라도 죄를 지었을까 하여 하나님 앞에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욥이었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나의 자녀들까지도 성결하게 살기를 소원하고 그대로 행하던 사람입니다.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11-12)"---하나님의 말씀을 꼬박꼬박 지켜나갔다고 욥은 단적으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평가하시고 받아들이셨든 불만이 없습니다,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중심을 아십니다. 현재의 이 고통의 의미도 오직 당신만이 아십니다, 불투명하고 미확정적이고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많습니다마는 그래도 당신이 아십니다, 내가 지금 당하는 이 고통은 훈련인 것입니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올 것입니다----금과 같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고난은 쓸데없는 고난이 아닙니다.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생산적이요 교육적입니다.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기 위한 의미있는 고난으로 수용하고 있습니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순수하게, 강하게, 귀하게, 또한 깨닫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나의 부족함을 아시는 주님께서 다 채워주실 것입니다.

미래를 환히 알게 해주실 것입니다. 영화롭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알고 믿는 것입니다.

한 곤충학자가 누에고치 네 개를 가져다 책상 위에 놓고 실험을 합니다. 나비가 되어 누에고치를 뚫고 나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사실 나비가 나온 구멍을 보면 꼭 바늘구멍만 합니다. 어떻게 나비가 나왔나 싶을 정도로 조그마한 구멍입니다. 나오려고 애쓰는 것을 지켜보자니 참으로 대단합니다. 안에서 자꾸 두들겨 작은 구멍을 하나 뚫고는 조그마한 날갯죽지가 나옵니다. 하나 나오고 둘 나오고, 마지막으로 목이 나와 몸 전체가 다 나오게 되면 수습하고 온 힘을 다해 파닥거리면서 날으려고 애를 씁니다. 온종일 애를 쓰다가 팔랑 날아갑니다. 아주 힘든 고통을 치르면서 나비가 되어 나오는데 한 마리가 끝내 나오지 못하고 계속 애만 쓰고 있는 것입니다. 곤충학자는 생각합니다. '하나님도 참 이상하시구나. 왜 이리 고통스럽게 만드실까? 내가 긍휼을 베풀자'하며 가위로 잘라 구멍을 열어줍니다. 덕분에 나비는 쉽게 밖으로 나왔습니다. 마는 그만 힘을 얻지 못하고 몇 번 날개짓을 하더니만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곤충학자는 다시 연구를 해야 했습니다. 그 결과 나비가 안에서 밖으로 나오느라고 바둥거리며 애쓰는 동안 영양과 힘이 비로소 날개 끝까지 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안에서 힘을 얻고 강해져서 나와야만 새로운 환경속에서 살아남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이치를 모르고 도와준답시고 가위로 잘라준 것이 결국은 죽인 꼴이 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원망했던 것을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괴로움을 당합니다. 나의 생각으로는 아무 의미도 없는 고난 같으나 그 고난은 나에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 고난을 겪은 후에야 나는 비로소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능력의 사람이 되고 지혜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직 교만하기에 고난이 필요합니다. 내가 아직 나약하기에 환난이 필요합니다. 내가 아직 게으르기에 고통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가 그에게 반드시 필요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나는 모르나 하나님께서 알고 주신 것입니다. 욥은 고백합니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미래도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본문 14절에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의 용법대로 하자면 내게 향한 경륜---개인적 디스펜세이션(dispensation)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게 향한 경륜,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나의 자세에 달려 있습니다. 기뻐하면서 따르느냐, 투덜투덜 불평이나 하면서 따르느냐, 원망하면서 따르느냐---이 문제가 남아 있을 따름입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새롭게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의 지식적 욕망, 반납해버려야 합니다. 더 알고 싶은 것도 있을 것입니다 마는 더는 알 필요가 없습니다. 간혹 자신이 죽는 날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르는 것이 더 낫기에 모르게 한 것입니다. 아마 죽는 날을 미리 안다면 못된 사람들은 죽기 1시간 전까지 못된 짓을 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를 것은 모르는 것이 좋습니다. 더 알고 싶어하지 마십시다. 이제 그 욕망을 주님께 반납해버리십시다. '당신이 아시니 되었습니다. 당신의 뜻이라면 다 받아들이겠습니다. 당신이 인도하시는 길이라면 저는 생명을 걸고 전적으로 위탁하겠습니다. 그리고 즐거워하겠습니다'---이 마음이어야 합니다.

나의 의와 나의 명예까지도 다 위탁해버려야 합니다. '오직 당신께서 아십니다'---여기에 나의 믿음이 있고 나의 소망이 있고 나의 사랑이 있습니다. 나의 기쁨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에게 참평안과 능력과 용기와 지혜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고향과 친척을 떠나라' 하실 때에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그가 인도하시는 길을 기쁨으로 받아들입니다. 그가 아십니다. 그가 이 역사의 운명을 아십니다, 그가 나의 가는 길을 아십니다----여기에 진정한 평안과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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