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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의원과 신랑(마태복음 9 : 10 - 15)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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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과 신랑(마태복음 9 : 10 - 15)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비유에는 여러 가지 성향의 비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키는 비유가 있는가 하면,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는 방법을 가르치기도 하고, 또한 주님을 영접하는 우리의 자세를 가르치는 것 등, 비유에도 여러 가지의 성격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양한 성격의 비유 중에서도 가장 귀한 비유는 무엇보다도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시는 비유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뭐니 뭐니 하여도 예수님을 밝히 알고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 때문에 모든 귀한 말씀 중에서도 예수님 자신을 비유해서 말씀하신 그 비유는 어느 다른 비유보다도 우리에게는 소중한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길이다! 나는 빛이다! 등의 말씀들은 모두 다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신 말씀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의원과 신랑이라는 두 가지의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전부가 비유로 연결되는 것이고 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비유의 말씀을 모르고서는 그 의미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요, 이는 곧 예수님을 모른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속에서 두 가지의 질문을 받으시게 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나는 누구라는 것을 단순한 설명이 아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건과 상황에 대한 응답으로서, 그리고 거기로부터 출발되어지는 비유로써 저들에게 대답하시며 귀중한 진리를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받으신 첫 번째 질문은 당신은 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십니까?하는 것이고 두 번째 질문은 당신의 제자들은 왜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이 두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나는 곧 의사와 신랑과 같다는 비유로써 자기 자신을 계시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먼저 예수님께서 자신을 의사로 말씀하신 비유의 배경을 잠깐 생각해 볼까 합니다. 가만히 보면 저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그 교훈은 좋아하며 매력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메시야까지는 생각지 못했더라도 예수님은 어디를 보아도 틀림없이 비범한 사람이요, 훌륭한 랍비며,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란 말입니다. 거기까지는 생각이 되면서도 예수님을 전적으로 따를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은 여기에 걸림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먼저 따르고 있는 그 제자들이 못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는 믿고 싶은데 교인들이 보기 싫어서 교회에 못 나가겠다는 부류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 얼마나 교만한 이야기입니까? 이러한 생각, 이러한 사람들이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들 바리새인들의 생각으로는 예수님만 보아서는 꼭 따를 마음이 있는데 이 갈릴리 어부들이며, 세리라는 것들이 너절한 옷을 입고 다니면서 예수님 주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주 꼴불견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마음에 들지도 않고 따를 마음도 내키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 지금이라도 예수님께서 저 못난 제자들을 떼어버리시고 의젓하게 계신다면 나도 따를 마음이 있는데 하는 생각입니다.

여러분! 예나 지금이나 이런 마음이 있고, 못된 사람은 언제나 이러한 생각을 먼저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데 있어서도 사람을 보고, 예수님 주위에 관계된 것들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교만해지는 마음 때문에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는 거예요. 이를 두고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 질문을 던진 저들의 내용인즉 죄인들과 함께 한다는 것, 다시 말하면 죄인들과 사귀면서 죄인들의 생활에 동참하는 그것이 못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죄인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도 바리새인들은 죄인과 함께 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첫째, 내가 의임으로서 죄인들 속에 들어가 함께 지낸다는 것은 그 죄스러운 생활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심판해야 될 의인인 내가 오히려 그 속에 들어가 같이 뒹굴며 먹고 마신다는 것은 그 사람들의 더러운 생활을 정당화시키는 것이 되므로 함께 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죄인들과 함께 사귀면 죄에 대한 감각이 둔해진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 또한 이유가 될 만한 것도 사실입니다. 죄인들 속에서 계속 지내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죄에 대한 감각이 둔해져서는 전에는 이것도 죄고 저것도 죄라고 생각하였던 것이 이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속에서 동화가 되어 버리고, 판단 의식도 흐려지고 마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죄 가운데서 가장 무서운 죄는, 죄를 짓고 안 짓고의 문제나 그 상태의 경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감각이 둔하다는 것입니다. 무섭도록 죄에 대한 불감증 환자가 되어 버리고 말았어요. 그래서는 내가 지금 얼마나 끔찍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란 말입니다. 분명히 엄청난 잘못을 범하면서도 자기의 잘못이라고는 생각지 않은 채 그대로 꾹꾹 누르고만 있으니, 그 건방진 생각 때문에 끝끝내 속은 썩어 들어가고 마는 것이지요. 이제 잘못한 줄을 알았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돌이켜야 하겠는데 그러지 못하는 약점이 있단 말입니다. 그리하여 죄에 대한 감각은 점점 더 둔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탐정 소설이나 애정 소설 같은 것을 심취해 읽다가 보면 어느 사이에 나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그 줄거리에 동화되어가고 있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 결과 경우에 따라서는 행동은 해본 일도 없이 탕자가 되어 버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바리새인들이 죄인들과 같이 하는 것은 나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번째 이유는 결국은 죄에 동참하여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는 말이 있듯이 죄를 짓는 사람들과 가까이 사귀노라면 결국은 같은 죄를 짓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죄인들과 가까이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이에 잠언에도 보면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13:20)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무서운 것은 죄에 대하여 같은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매우 엄격한 규율로써 제지를 하고 있는데 첫째, 죄인들과 같이 먹지 말 것. 둘째, 죄인의 물건을 사지 말 것 그러니까 거래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셋째, 저들의 집에 들어가지 말 것, 이 세 가지의 법이 매우 엄격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방 사람들과는 음식을 나누어 먹어도 안되고, 물건을 사도 안되며, 그 집에 들어가서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이토록 엄격하게 관계를 끊고 보니 이제는 자기 자신이 점점 더 의롭게 여겨지고, 더우기 이와 같이 관계를 끊으며 사는 자체가 곧 의()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치 바리새인의 기도처럼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18 : 11)라는 말을 쉽게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저런 사람과는 같지 않다! 이처럼 자기를 점점 특별한 사람으로, 그리고 그 자체를 의로 간주하는 엄청난 과오를 범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곧 자신의 교만임은 물론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을 멸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매우 직설적인 표현으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한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아 먼저 긍휼을 배우라! 그러한 이후에 나에게로 와야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진작 배워야 할 긍휼은 배우지 못한 채 예수님을 따르려고 보니 이미 따르고 있는 예수님의 주위의 사람들이 못마땅하게 여겨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될 일은 자기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무서운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두고 생각하면 자기가 더 큰 죄인임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하겠는데 오히려 다른 사람을 멸시하며 예수님의 제자들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충격적인 일은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를 불러 제자를 삼으시고는 아예 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셔서 함께 음식을 잡수시며 즐거워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광경은 소위 구별되게 산다고 하는 저들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정말 충격적인 장면이요 실망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제자들이야 그렇다손치더라도 예수님 자신이 이 꼴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절대로 그럴 수는 없지 않는가? 하는 이러한 생각들 때문에 저들은 매우 충격적이요 그로 인해 지금 수군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는 저들의 그 잘못된 바를 심판하시게 됩니다. 여기에서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세리라고 하여 다 죄인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가끔 여자분들 가운데 한 번 남자한테 배신당했다고 하여 모든 남자는 다 도둑이라는 단언을 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도대체 몇 남자를 만나 보았기에 그렇게 "모든 남자"라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이는 또한 남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다가 한 여자에게 속았다고 하여 한 마디로 여자는 다 나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예요. 가령 어떤 경우에 한 외국 사람을 만나 좋지 못한 인상을 받았다고 하여 그 나라 국민은 모두가 다 나쁜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 얼마나 잘못된 편견이겠습니까?

이와 같이 저들 바리새인들은 나쁘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이제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실 때에는 이 마태는 비록 세리이긴 하였지만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세관 앞을 지나가시는 길에 한 마디로 "나를 쫓으라" 하시자 그 자리에서 일어나 좇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는 실로 보통 사람의 결단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세리장 삭개오 같은 사람은 뽕나무 위에까지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고자 했으며, 뿐만 아니라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이 정도의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과연 이 사람에게 토색한 것이 있을 것 같습니까? 없을 것 같습니까? 세밀히 조사해 보면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벌써 말하는 자세가 이만하면 그런 정도의 부정은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도 자기 딴에는 깨끗하게 살아 온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의 물건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습니다 하고 자신 있게 나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깨끗한 사람들이 세리 중에도 있더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변변치 못한 바리새인들보다는 이 세리가 더 나은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세리라면 무조건 다 죄인 취급을 하려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요, 나쁜 처사인 것입니다. 특별히 직업에 의해서 사람을 평가하는 것처럼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그 때문에 한 마디로 장사하는 사람은 어떻고, 정치인은 어떻고 하는 식의 일괄된 표현은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한번은 목사들이 모여 세미나를 하는 장소에서 어느 목사님이 이야기를 하는 중에 요즈음 "죽일 놈이 셋이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누구 누구냐 하면 부자는 죽일 놈! 그러니까 부자는 무조건 나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정권 잡은 자는 죽일 놈! 또 하나 큰 교회 목사는 죽일 놈! 이렇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즈음엔 대 교회라고 하면 이유도 없이 욕을 먹게 되는데 가만히 보면 신문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이곳 저곳에서 아차하면 무조건 때릴려고부터 하는 자세입니다. 어떻게 어처구니없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세리이면 하나 같이 다 죄인으로 취급하는 너희들의 생각이나 판단이 잘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죄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리 중에도 의인이 있고 대제사장이면서도 백번 죽어 마땅한 가야바 같은 죄인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직업이나, 신분, 지위, 혹은 소유에 의해 사람을 평가하거나 죄인시하는 판단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께서는 그 깊은 면을 보시고 이제부터 예수님을 따르며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함께 해줄 것을 생각하니 그저 대견하고 좋기만 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매사를 언제나 미래적으로 보실 뿐 과거에 매여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에 매여 거기에 연연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며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을 비롯하여 누가 복음 531절과 423절 등에서 자신을 의원, 곧 의사로 나타내 보이고 계십니다. 의사라고 하는 것은 병의 원인을 찾는 전문가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의 통찰력은 빈부귀천이나, 나이가 많고 적고의 문제와는 상관없이 병의 원인을 찾고 그 상태를 파악하여 병자를 돕고자 하는데 전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보면 경우에 따라서는 환자의 병이 자신에게 옮겨져서 어려운 위험을 당하게도 되는 것도 이 의사라는 직업입니다. 그러나 의사는 계속 환자를 도우며, 그리고 사랑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은 의사인 것이며, 단순히 세리에게 있어서 뿐만 아니라 모든 병든 심령들을 위한 의사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의사란 건강한 자에게는 쓸데가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깊은 의미가 있는 말씀입니다. 지금 이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병들었음에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저들은 의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고로 천하 제일의 명의가 있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병든 자임을 아는 그 사람, 세리에게는 예수님은 천하 제일의 명의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의사 앞에서 자기의 병적 증상을 숨김없이 다 고하므로 더욱 좋은 치료를 받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의사 앞에서까지 숨겨 두는 부분이 있다면 그 사람의 병은 결코 치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끄럽든, 어떻게 되었든 간에 자기의 과거와 병의 내력을 숨김없이 다 말할 수 있을 때에라야만 비로소 그 병은 정확한 진단과 더불어 치료가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더 중요한 것은 환자는 의사를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증상을 다 털어놓았으면 "이제는 의사 선생님만 믿습니다"하고서는 살려 달라며 "마음대로 하세요"하고 나와야 할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 환자가 의사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그 결국이 어떻게 되어지는 것이겠습니까? 이제 이 바리새인들은 자기 의에 도취가 되어 예수님 앞에 자기의 병든 바를 내어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저들에게 있어서는 예수님은 상관이 없는 의사요, 반면에 예수님 앞에 나아와 자기의 모습을 그대로 들추어 보이는 그런 사람에게 한해서는 예수님은 참된 의사로 나타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그 두번째 질문은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 하나이까?"하는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겉이나 형식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의 깊은 내면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는 중에 마태는 예수님의 마음에 들었고,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누가 뭐래도 마태를 제자로 삼으셨고, 그는 역시 좋은 제자였기에 마태복음을 기록하기까지에 이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형식과 외모를 보며 판단하고 말하는 저들의 교만이 이와 같은 또 하나의 질문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어차피 자기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긍휼과 그 은혜로 인해 얻어지는 것이 구원이라면 그 긍휼을 힘입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겸손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 때문에 마태는 예수님의 마음에 들었고 이제 그 집에서 잔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잔치는 두 가지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는 송별회의 성격으로 이는 전직 세리로서의 마태가 그 자리를 떠나서 이후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판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옛 동료 친구들이 함께 한 자리에서 "자네는 세관에 올 때부터 우리와는 달랐네. 그래, 예수님을 따르기로 한 것 참 잘했네!" 하면서 예수님을 모신 자리에서 송별 파티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의 제자들 입장에서는 환영회가 되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세리는 그만두고 이제는 전적으로 예수님만을 따르는 새로운 공동체에 들어오게 된 것을 환영하는 환영 파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과거적으로 보면 세리의 직을 떠나는 송별 파티요, 미래적으로는 환영 파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후자를 보면서 미래 지향적인 입장에서 이 잔치와 세리를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이 시간이 더욱 즐거우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시는 말씀이 "신랑"이 있는 잔칫집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 과거를 생각하면 금식하고 고행을 하여야 하겠지만 다가올 미래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영광스러운 생애뿐이란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는 것은 보통 놀라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예수님을 신랑으로, 그리고 교회를 신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3:29, 25:6, 5:25-27, 21:2 ).

그렇다면 신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신랑 없는 살림이란 아무리 많은 것이 준비되어 있어도 다 소용없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신랑이 있고야 신부가 있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예수님과 함께 있는 생활 속에서 어떻게 금식을 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너희에게 있어서 신랑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모든 의미의 중심이요, 모든 가치의 기준이며, 모든 행복의 원인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는 마치 신부가 신랑을 맞이하여 그저 즐겁기만 한 그런 잔치와 같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란 신랑을 맞이한 잔치와도 같은 것입니다. 이제는 신랑이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며 보호해 주고 사랑해 줄 것이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결혼한 사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이! 그 행복의 극치를 어떻게 달리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신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하기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냐? 혹은 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냐?고 할 때에 옛날에는 울고 불며 자학하는 식으로 하면 대단한 것으로 알았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은 행복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행복하고 그 행복은 진정 극치의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 행복에는 적어도 두 가지의 행복이 있어야 합니다. 그 하나는 예수님이 함께 계시니 그것으로 인하여 행복한 것입니다. 이 큰 행복이 있음으로 모든 고난과 역경을 다 이길 수가 있고 극복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를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보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주에도 488명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했는데 그럴 때이면 어떤 분들은 "목사님, 그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시자니 얼마나 힘이 들고 피곤하십니까?"라고 말씀들을 하시지만 그러나 저의 마음은 그렇치가 않습니다.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데 무엇이 그렇게 힘이 들겠어요. 밤새껏 세례를 베풀어도 피곤할 것이 없는 일입니다.

여러분! 한 심령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 그리하여 그와 더불어 내가 기뻐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잔칫집이 아니겠습니까? 한 심령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때이면 하늘에서 잔치가 벌어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먼저 믿은 사람들로서는 처음 믿는 사람 한 분 한 분을 맞이할 때 정말 기뻐야 하고 그를 돕는 일이 즐거워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기뻐할 줄 모른다면 그는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진정 한 심령이 회개하는 것을 그렇게도 기뻐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기쁨으로 충만한 그것이 신랑을 모신 신부가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의사이십니다. 따라서 그 앞에 있는 우리는 모든 것을 아뢰고 믿음으로 건강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신랑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에게 전적으로 위탁할 수가 있으며 무한한 행복에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의원이요, 신랑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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