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연자맷돌 비유(마태복음 18 : 1 - 14)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 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눈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나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나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오늘 본문에 나타난 비유는 언뜻 보기에는 하나같이 보입니다마는 사실은 두 비유가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하나는 어린아이와 같아야 된다고 하는 어린아이의 비유요, 두 번째는 연자맷돌에 관계한 비유입니다.
즉 연자맷돌을 목에 달리 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고 하신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하는 것인데 이 두 비유의 말씀이 하나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두 비유가 한 뜻으로 모아지고 있는 것을 볼 때에 이는 매우 귀중한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내용과 의미로 보아 매우 두려운 말씀으로 여겨집니다.
이제 주시는 말씀이 귀중한 것은 천국에 관계된 것이요, 천국에 들어가는 절대 조건이며 따라서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필요 불가결한 문제가 여기에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대로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는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이 질문에는 매우 신중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제 예수님의 제자들이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보니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의 주제가 이 땅의 것이 아닌 천국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결과 이렇게 "천국에서"라는 분명한 범위의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주제가 천국이라는 것은 충분히 파악을 하였는데 그것과 자기와의 관계를 해결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천국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문제는 내가 들어가야지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 소용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모름지기 나 자신의 문제로 돌아가서 이 제자들이 걱정을 하게 되며 그 과정에서도 아직 자기를 버리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누가 큽니까? 라며 누가 크고 누가 높은가의 문제를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하여 눌린 자의 콤플렉스(complex)입니다.
항상 정치적으로 눌려 있고 종교적으로, 경제적으로 눌려 있다보니 이 세상에서는 이렇게 짓눌려 살았으니 천국에서는 좀 높아져야겠다고 하는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이렇게 억울하게 살고 있지만 천국에서는 한번 크게 윗자리에서 행세하며 살고 싶은 그런 마음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로마의 황제도 크고, 헤롯왕도 크며, 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등이 큰 것이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도대체 누가 큽니까 라는 이야기입니다. 저들은 이렇게 크다는 문제에 대하여 아직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그 길을 가고 있음에도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나아와서는 예수님께 부탁하기를 예수님께서 왕이 되실 때에 나의 아들 하나는 주의 우편에 그리고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주세요 하는 부탁을 하게 됩니다(마 20:20-21). 그러니까 한 마디로 제일 좋은 자리에 앉게 해 달라는 것이지요. 그만큼 그들은 윗자리, 높음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을 할 때에는 무엇인가 큰 기대가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 기대가 어떤 것이냐 하면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 아마도 저들의 기대는 "이 세상에서는 제사장에 크지마는 천국에서는 열 두 제자가 크다"고 하시는 그 말씀을 간절히 바란 것이라 생각됩니다. 바로 이러한 기대감을 가지고 자기들을 크게 인정해 주시기를 바라는 그런 심정으로 예수님께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의외인 것으로 이제 예수님께서는 한 어린아이를 불러다 앞에다 세우십니다. 이것은 하나의 비유요, 상징이며, 하나의 교과서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어린아이는 베드로의 아들이었다고도 합니다만 그야 성경에 기록된 것이 아니니 누가 알겠습니까마는 아무튼 누구의 아들이었든지 간에 어린이 하나를 딱 세워 놓으시고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저들을 향하여서 "돌이켜"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돌이켜"라는 말이 매우 중요합니다. 너희들이 자꾸만 위를 보느라고 높이 높이 생각하고 있는데 돌이켜 굽히라는 말씀입니다. 위를 쳐다보았느냐? 내려다보아라! 큰 것을 생각하고 있느냐? 작은 것으로 낮추어라! 돌이켜! 즉 반대 방향으로 생각을 돌려라! 돌이켜서 이 어린아이와 같아야 한다. 만약 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이것이 참으로 큰 복음입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중생하지 아니하면, 즉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공관복음, 즉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서는 중생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 대신에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여기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신 그 말씀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절대 조건을 말합니다. 우리가 반드시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 것처럼 어린아이와 같아야 된다는 이 비유의 말씀 속에 구원의 절대 조건이 있습니다.
반드시 어린아이와 같아야 합니다. 천국에서 진정 내가 커야 하겠습니까? 이 크고자 하는 마음, 이 높고자 하는 마음 그대로는 천국을 보지도 못하고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돌이켜 낮추어서 어린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야만 천국을 볼 수 있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절대 조건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뜻이 무엇인가 할 때에 그것은 참으로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친히 해석해 주신 낮추는 마음입니다.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천국을 영접하고 싶어서 배우기도 하고 듣기도 하며 열심히 이런 저런 것을 해봅니다마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쩌면 예수를 20년, 30년을 믿으면서도 천국을 경험하지 못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 영이 천국에 들어가지를 못했어요. 아직도 천국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마음에 벅찬 감격과 천국의 그 크나큰 행복을 경험하지 못하고 사는 겁니다. 이는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어린아이가 되지 못해서 입니다.
제가 늘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예수를 몰라서 교회에 안 나오는 사람은 안 믿으니 그렇다 하더라도 교회에 나오면서도 은혜받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제 설교를 하는 사람으로서 예배를 드리고 나가는 분들의 모습을 보면 들어올 때의 모습과 나갈 때의 모습이 조금은 다른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분들은 그저 즐거워서 어쩔줄을 모르며 "목사님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하는가 하면 어떤 분은 멀리 섰다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감사합니다"하는 한 마디를 조심스레 표현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럴 때이면 오늘 예배는 이 사람만 드렸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도 됩니다. 이는 굳이 인사를 하고 가시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한 시간 예배를 드리면 말씀을 듣고 돌아갈 때에는 이러한 감격이 있어야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런 감격이 없이 예배드리고 가는 사람의 얼굴이 여전히 울상이라면 그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천국을 그리워하고 그렇게 은혜를 사모하면서도 왜 은혜 속에 들어가지 못하는가 말입니다.
그 이유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없기 때문에,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니까 말입니다. 그만큼 자기를 낮추어야 한다는 이것은 기본 자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이 어린아이라고 하신 말의 개념은 어떤 것이었느냐 하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 어린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세 가지의 특징입니다. 이는 특별히 천국적인 안목으로 본 특징으로 첫째는 자기를 낮추는, 자기를 작게 보는 겸손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자기를 크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언제든지 자기를 낮추고 작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욕심도 없어요. 조금 크면 달라집니다 마는 아주 여렸을 때에 보면 하나를 가지고 있는데 다른 하나를 주면 가지고 있던 것은 놓고 이제 주는 것을 받습니다. 내일 먹겠다고 감추는 것도 없이 그저 그때 그때에 족하며 좋아합니다. 그러다가 조금 크면 어른들에게 배워서 다 갖겠다고 나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백일 잔치에 갈 때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하는 생각을 늘 하게 됩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애에게 금반지를 끼우는가 하면 부자유한 이상한 옷을 입히고 머리에까지 무엇을 씌워 놓고는 결국은 아이를 울게 만들어요. 이 아이는 지금 싫다고 자꾸만 잡아 벗기는데 어른들은 이게 좋다며 기어이 입혀 놓겠다고 아이를 울리니 누구를 위한 백일 잔치인데 누구를 울리고 있느냔 말입니다. 이 아이에게 금반지가 무슨 소용이 있으며 다이아몬드 반지인들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어른들이 다 버리고 있는 거에요. 이 아이는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저 제발 나 좀 편안하게 해 달라는 깨끗한 마음뿐입니다. 그런데 왜 이 마음을 못 가지느냐는 말입니다. 정말 한끼 먹었으면 그만이에요. 그러고 나면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아요. 이처럼 깨끗하고 겸손한 마음, 낮은 마음, 소박한 마음이 어린아이의 마음입니다.
다음 두 번째는 이 아이들에게는 의지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자기 혼자 산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어머니가 옆에 있어야 하고 아버지가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큰일이 나는 겁니다. 그저 마음대로 노는 것 같아도 지금 내 옆에 어머니가 있고 아버지가 있다는 생각으로 안심하며 놀고 있는 것이지 만일에 여기에 어머니가 없는 것으로 생각이 되면 그 자리에서 으악 하고 울고 맙니다. 이와 같이 어린아이에게는 언제나 의지하는 그 마음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하나님의 자녀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지하는 마음이 없으면 자기 혼자서 무엇을 하겠다고 그러다가 다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교만이지요. 그러나 어린아이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어쨌든 간에 반드시 어머니가 있고 아버지가 있으며 내가 있다고 하는, 이와 같이 전적으로 의지하는 마음이 어린아이들에게는 있습니다.
그리고 세번째의 특징은 신뢰하는 마음입니다. 점차 자라가면서 이야기가 달라집니다마는 아주 어렸을 때에는 어머니의 말도, 아버지의 말도, 그 누구의 말이라도 그대로 믿습니다. 적은 의심도 할 줄 모르는 전적인 신뢰! 그것이 또한 어린아이들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마음으로라야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그 누구이든 복음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사랑에 대하여, 이웃에 대하여, 교회에 대하여 이 세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 의지하는 마음! 전적으로 믿는 마음! 이러한 마음이 있고야 천국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 문제란 어린아이는 이렇게 깨끗하고 겸손하며 누구에게 대해서나 신뢰하는 마음이 있는 반면 매우 약하다고 하는 점입니다. 또한 때로는 어리석기도 하여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은 좋으나 위험합니다. 이에 아무나 와서 잘 해주면 그에게도 따라가 버리고 마는 것이 바로 어린아이입니다. 이들은 귀한 대신에 약하고, 깨끗한 대신에 위험합니다. 이와 같이 어린아이들의 약함과 순진함! 우리는 이 점을 깊이 고려하여야 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영접하는 것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직 예수님 때문에 영접하는 것이지 그 아이가 내 자식이기 때문도 아니요, 그를 도와줌으로 앞으로 나에게 어떤 보상이 돌아오리라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저를 영접하게 되면 그것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접한다는 것은 신앙적 차원에서 영접한다는 말이며 이를 또 미래지향적 차원에서 볼 때에는 오늘을 보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자라나 크게 역사할 그 미래를 바라보면서 오늘 이 아이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는 한 마디로 말해 우리의 모든 이웃 관계가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영접하는 그런 관계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를 사랑하고, 예수 때문에 용서하며, 예수 때문에 참아요. 그리고 앞으로 하늘 나라에서 영원히 같이 지내야 할 사람이기에 내가 저를 돕습니다. 이와 같이 전부를 다 신앙적 차원에서 미래지향적인 의식을 가지고 저를 대하게 될 때 그것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닳고 닳은 심령, 굳어진 인격이 사람이라면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 사이의 책임이 반반이 됩니다. 이는 내가 아무리 잘 가르치고자 노력을 하여도 워낙 닳고 닳은 사람이라 순진하지도 않고 믿고 따르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에 수고는 수고대로 더 많이 하였지만 그 결과는 나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은 다릅니다. 이것은 깨끗하고 순진하여 잘 따릅니다. 그러니 이것은 전적으로 내 책임인 것입니다. 이제 내가 잘 가르치면 잘되고 잘못 가르치면 잘못 되는 것입니다. 검다고 말하면 검게 이해가 되고 희다고 말하면 흰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그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 것인지 모릅니다. 어른이야 잘 가르치든 잘못 가르치든 간에 그 책임이 교육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경우만은 다릅니다. 그 책임이 전적으로 어른에게 있고 교육자에게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저들에게 어떤 인상, 어떤 감화를 주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제 어떤 아버지가 하루는 자기 아들이 예쁘고 대견하기도 하여 어깨를 쓰다듬어 주려고 손을 가까이 대었더니 이 아이가 몸을 움츠려 들며 깜짝 놀라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평소에 아버지가 너무 많이 때려서 아버님의 손이 자기 가까이 오면은 이것이 때리려는 것인지 쓰다듬으려는 것인지 그것을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이 정도의 아버지가 되었다면 문제는 큰 것이 아니겠습니까? 적어도 아버지가 가까이 올 때이면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셔서 이렇게 가까이 오신다고 생각할 수가 있어야 되겠는데 이제 옆에만 오면 아이고 또 무슨 일이 생겼구나 하는 아버지의 상이 되어버렸으니 이렇게 되면 칭찬을 하여도 바로 들려지지를 않습니다. 그러기에 어렸을 때에 저들에게 보여 준 인상이 얼마나 중요한 지 모릅니다.
그 인상이 일생을 좌우하는 것이 됩니다. 그 때문에 심지어는 아버지의 인상에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신관이 좌우된다는 말까지도 신학에서는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서운 아버지를 보고 자란 사람은 하나님도 무섭게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 믿는 것도 보면은 그저 기도할 때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그저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하면서 벌벌 떨듯이 어쩔줄을 모르며 기도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게 다 왜냐 하면 아버지한테 얻어 맞던 생각이 나서 그러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저 아버지라고만 하면 그 생각이 나고 그런 처지이고 보니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여도 그 생각이 나는 겁니다. 그런 이미지(image)가 있어요.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사람은 가만히 보면 하나님 앞에서도 애교가 있어요. 그래서는 "하나님 잘못했습니다"하면 그 어떻게 하겠어요. 하나님께서도 용서하실 수밖에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이렇게 신관이 다르고 예수 믿는 방법도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처음 받은 인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이제 문제는 여기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어린 아이"라고 하는 것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 이 어린아이는 단순한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이는 처음 믿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초신자, 심령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의 사람을 의미합니다. 처음 예수 믿고, 처음 교회 나올 때의 마음은 꼭 어린아이와 같아서 겸손하지요, 순수하지요, 의지하지요, 전적으로 신뢰하지요, 어느 모로 보아도 어린아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문제는 이런 아이들을 어떻게 하여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이들을 실족케 한다면 은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 줄 모릅니다. "차라리 연자맷돌을!" 이 연자맷돌이란 잘 아시다시피 보통 앉아서 손으로 돌리는 작은 맷돌과는 달리 둥글고 큰 것으로 한 두 사람의 힘으로 움직여질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이것을 대개 당나귀가 돌렸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 나라에서는 보통 소나 말이 돌렸던 것으로 압니다만 아무튼 이 연자맷돌이란 매우 크고 무거운 것이지 않습니까? 이제 그 돌을 목에다 달고 바다에 빠뜨리우면 그 길로 영영 못 나오고 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실상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풍속에는 없었던 것 같으나 로마나 헬라 사람들의 풍속에는 실지로 있었던 것으로 아주 극악무도한 몹쓸 죄인을 형벌할 때에는 그 시체를 찾아다가 장례씩도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이 연자맷돌을 목에 달아서는 깊은 바닥 빠뜨려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주 깊이 가라앉아 물고기 밥이 되고 마는 겁니다.
여기에서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달아서는 깊은 바다에 던지우는 것과 마찬가지인 그렇게 큰 죄인을 만든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어린아이를 실망케 하고 실족케 하는 것은 마치 이 어린아이 목에다가 연자맷돌을 달아서 바다에 던지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실로 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이는 결국 그러한 무서운 큰 죄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매우 실제적인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으로 그것은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 없으나"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 하면 이 세상을 살다보면 다른 사람에게 덕을 끼치는 일만 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다 보면 본의 아니게 직접, 간접으로 다른 사람에게 부덕한 일을 하기도 하고 실망을 줄 때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정말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가 없어요. 그러나 문제는 실족케 한 죄는 참으로 크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용서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강하게 말씀하셨는지 모릅니다. 네 손이 범죄케 하느냐? 찍어 내어버리라! 네 발이 범죄케 하느냐? 찍어 내어버리라! 네 눈이 범죄에 하느냐? 빼어 내어버리라! 차라리 그렇게 불구가 되어서라도, 하늘 나라에 가는 것이 성한 몸으로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낫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버릇없는 교만한 손, 그래서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였다면 찍어버릴 것이고요, 탐심과 질투로 찬 눈, 그래서 남을 실족케 하였다면 그 눈을 빼어 버리랍니다. 거친 행동으로 말미암아 남을 실족케 하는 좋지 못한 버릇을 가진 교만한 발길이라면 발이라도 찍어 내어 버리라! 차라리 세상에서 불구인 절름발이로, 장님으로 살더라도 사람을 실족치 않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니냐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내가 어렵게 살아서 실족케 하는 경우도 있지마는 그보다는 내가 유족하게 사는 것으로 인해 실족케 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제 내가 선생이 되었기 때문에 잘못 가르쳐서 실족케 하는 것이 아닙니까? 또한 내가 돈이 있기 때문에 그 돈을 잘못 사용함으로 많은 사람을 실족케 하는 것 아닙니까? 내가 지식이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 실족케 하는 것 아닙니까? 죄송한 말씀입니다마는 아예 추녀, 추남으로 생겼더라면 더는 실족케 할 것도 없었겠습니다마는 그 제법 잘 생긴 그 얼굴 때문에 많은 사람을 실족케 합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불구자가 되고, 무식하며 가난한 몰골이 되어 남을 실족치 않게 살아가는 것이 나으며 그리하여 하늘 나라에 가는 것이 더 나은 것이 아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말씀입니까?
처음 믿는 사람을 실족케 하는 일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어느 장로님 가정에서 있었던 일인데 대학을 다니는 아들이 고등학교 다니 때부터 말썽을 부리더니 그렇게 어머니 아버지가 애원을 하다시피 하여도 교회를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러자니 너무도 답답하여 하루는 장로님 내외분이 그 아들을 데리고 저에게도 왔습니다. 그래서 몇 번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보았는데 그 아들이 맨 마지막에 하는 이야기가 "우리 어머니, 아버지 믿어라, 믿어라 해도 다 멀쩡한 허튼 소리입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기에 저가 왜 허튼 소리냐고 물어보았더니 그 장로님이 나가는 교회에 분쟁이 있어서는 다른 장로님 집사님들이 이 장로님 집으로 찾아와 나누는 이야기들이 어느 장로가 어떻고 어느 집사, 어느 교인이 어떻다며 그저 남의 흉만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어렸던 이 아들이 그런 이야기들을 다 들은 것입니다. 어른들이 예배드리고 나와서는 곧장 욕만 하고 앉았으니 예수 믿는 것이 저런 것이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괜히 사랑, 용서이지 다 허튼 소리입니다!"하면서 안 믿겠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제 이러고도 할 말이 있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예배드리고 집에 돌아갔을 때에 혹시라도 어느 순간 어린아이들 앞에서 쓸데없는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그러고 나면 이제 예수 믿으라는 이야기는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 하는 소리는 다 허튼 소리랍니다. 교회에 대한 인상을 이렇게 더럽혀 놓고는 교회에 나가라고 하니 그 아이가 교회에 나가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위대한 그리스도인을 먼저 만나고야 기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시작은 사람을 보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사람을 보고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지 하나님 먼저 만나서 예수 믿었더냔 말입니까? 누군가가 나를 인도했고 누군가가 나에게 전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만큼의 기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그 분이 한 달에 한 번 교회에 나가는 사람이면 그런 것인가 보다 할 것이고 낮 예배에만 참석하는 교인이면 예수는 낮에만 믿어도 되는가 보다 할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낮에도, 밤에도 새벽에도 나오며 열심히 봉사하는 것을 보았으면 예수 믿는 것은 저런 것인가 보다 하여 자기도 처음부터 열심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처음 만나는 사람의 이미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요즈음 말로 이 오리엔테이션(Orientation)이 바로 되어야지 이것이 처음부터 빗나가게 되면 그 신앙 생활은 일생 동안 그 모양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어린아이와 같이 처음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에게 무슨 말을 들려주며, 무슨 본을 보여 주어야 하겠습니까? 참으로 깨끗한, 그리고 아름다운 본을 보이고 들려주어야 되겠는데 그러지를 못하고 오히려 좋지 못한 인상을 줌으로 그 어린아이와 같은 심령이 잘못 방향을 잡아 일생 동안 잘못된 신앙 생활을 하게 된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이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아직 성장하지 못한 어린아이들을 위해 저희 천사가 하늘에서 지켜보며 이들의 일을 하나하나 하나님께 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읽은 양 한 마리의 비유를 말씀하시게 됩니다.
이를 여기에 연결해 보면 잃은 양 한 마리가 목자가 애써 찾아와서는 매우 기뻐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귀한 한 마리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다음 목자가 실수를 함으로 이 양을 죽여버렸다면 그 죄가 얼마나 큰 것이 되겠습니까?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우리는 사람을 실족케 한다는 것, 어린아이와 같이 깨끗한 심령 하나를 실족케 하는 일이 이토록 큰 죄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정말 깜짝 놀랄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혹시라도 나의 행동이나 언어생활이 연약한 심령들에게 잘못된 인상을 주지나 않았는지를 깊이 생각하면서 이후에는 많은 사람에게 덕을 끼치는 사람으로 약한 사람에게는 힘을 주며, 넘어진 사람은 일으켜 주어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을 잘 인도하는 그런 심령, 그러한 신앙 생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의원과 신랑(마태복음 9 : 10 - 15) (0) | 2024.03.19 |
---|---|
요나의 비유( 마태복음 12 : 38 - 42) (0) | 2024.03.19 |
여우와 새(마태복음 8 : 18 - 22) (0) | 2024.03.19 |
양과 이리(마태복음 10 : 16 - 23) (0) | 2024.03.19 |
은혜의 복음(1장 1~5절) (0) | 2024.03.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