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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허상과 실상 (고린도전서 13:1-7)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1980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인도의 테레사 수녀가 어느날 영국의 방송기자들과 만나서 기자회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기자가 테레사 수녀에게 "당신은 죽어가는 사람들 결에서 일평생을 살았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버려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하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단 몇 시간이라도 자신을 사랑하고 보살펴주는 이웃이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주는 것, 이것이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일입니다." 여러분, 테레사 수녀의 이 대답이 우리의 마음에 충격을 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버려져있지 않다는 것, 나는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살아 있는 동안에 단 몇 시간만이라도, 죽기 전에 단 몇 시간만이라도 사랑을 느끼도록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또한 테레사 수녀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위대한 일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큰 사랑으로 작은 일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름지기 사랑은 크고 위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누구를 살릴 능력도 없고 구제 할 능력도 없습니다. 사랑은 뜨겁고 크고 위대합니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은 고작 언제나 작은 일에 불과합니다. 테레사 수녀의 이 대답은 우리에게 인간의 인간됨과 사랑의 의미를 분명하게 잘 설명해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신경학자들이 분석하기를, 인간의 두뇌는 세 층의 낮은 두뇌와 한 층의 높은 두뇌, 이렇게 네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첫번째 두뇌는 Reptile Brain--'파충류적 두뇌'라고 합니다.
인간은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으려고 합니다. 생존하려는 욕구를 가지는 두뇌가 인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Mammalian Brain--'포유류적 두뇌'입니다. 인간은 젖을 먹이기도 하고 젖을 먹기도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포유류적 요소입니다. 보십시오. 갓태어난 새끼가 눈도 뜨기 전에 벌벌 기어가서 어미 젖을 물고 빨아댑니다. 대단한 본능입니다. 대단한 생명력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죽습니다. 그것이 바로 포유 동물의 Brain입니다. 포유류가 가진 본능입니다. 이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집착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젖을 빨기도 하고, 젖을 먹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본능을 가진 것이 인간입니다. 세 번째 두뇌는 Primate Brain입니다. 이것은 영장류(靈長類)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위의 두 가지 두뇌를 통합한 두뇌로 적당한 사회적 감동을 창조해가는 구실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남을 지배하려고 하고 때로는 잘났다고도 하고 남 앞에서 무엇을 자랑해보려고도 하고 성취욕을 가져보려고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두뇌 위에 가장 높은 차원의 High Brain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Love Brain입니다. '사랑의 생각'입니다. 이것은 사랑을 알기도 하고 사랑을 베풀기도 하는 두뇌입니다. 아름다움을 투사하는 두뇌입니다. 여기서부터 인간인 것입니다. 모름지기 사람은 사랑을 알고 사랑을 깨닫고 사랑을 베풀고, 그 사랑안에서 만족할 수 있도록 지어졌습니다. 물론 인간에게도 동물적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인간적 사랑이 있습니다. 그 구별은 간단합니다. 모든 동물을 자세히 관찰해 보십시오. 어떤 동물이든지 제 새끼는 극진히 사랑합니다. 아무리 사나운 맹수라 할 지라도 새끼를 낳고 보호하고 사랑합니다. 고슴도치도 사자도 어떤 거친 짐승이라도 자기 새끼를 보호하고 사랑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어느 정도 자라서 어미와 일대 일이 될만하면 새끼를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아직 '덜 된 사람'은 그렇습니다.
자기 자식이 어릴 때에는 사랑합니다. 그러나 조금 크면 원수로 여기며 삽니다. 아직도 인간됨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지극히 동물적인 사랑에 머물러 있습니다. 여기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인간적 사랑 위에 그리스도인다운 높은 사랑, 하나님의 자녀다운 높은 사랑을 우리가 터득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랑 속에 살아가야만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절대조건입니다.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절대조건인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에 있어서 절대조건인 것입니다. 나아가서 사랑은 인간 행복의 절대조건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인간일 수가 없습니다. 보십시오. 우리 삶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 건강입니다. 다른 무엇에 비교하겠습니까? 건강 잃으면 재산도 지위도 아무 소용 없습니다. 건강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러나 잊지 말 것은, 건강은 귀중하고 보배로운 것이지만 건강 없이도 행복한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평생 병들어 살아도 남보다 더 깊은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이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재능과 지식은 소중합니다. 그러나 재능이 없고 지식이 없어도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사랑 없이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땀흘려 벌어들인 물질은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 없이 가난하면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부자라도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새로이 연구되는 학문 가운데 Cultural anthropology -- '문화인류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서야 그 연구를 시작하고 있습니다만, 외국에서는 여러 해 전부터 대단히 중요한 학문으로 대두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한때 이것을 거의 전공이다 싶게 연구한 적이 있었습니다. 문화인류학을 연구할 때에는 각 민족간의 문화를 여러 모로 비교 분석하고, 이렇게 저렇게 구분하고 분류해보기도 합니다. 이렇게 문화인류학을 연구하는 학자 가운데 어떤 분은 '문화'를 증오의 문화(Hate culture)와 사랑의 문화(Love culture)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소위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 하는 공산주의는 철저하게 hate culture입니다. '부르즈와에게 착취당하는 프롤레타리아는 일어나라, 혁명을 이루자!'----이렇듯 공산주의는 자나깨나 혁명을 외칩니다. 이것은 '증오'입니다. 철저하게 증오합니다. 철학적 이야기지만 달리 쉽게 풀이하여 생각해보십시다.
우리의 문화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의 문화는 한(恨)의 문화입니다. 한이 맺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설이나 영화나 다른 어떤 것을 보아도, 억울하고 분한 일을 당한 주인공이 그것을 잊지 않고 가슴에 묻어두었다가 일생동안 원수를 갚고 복수하는 줄거리가 허다합니다. 마지막에는 자신도 죽습니다. 일생을 복수하는 것에 자신의 생을 다 바쳐버립니다. 이렇게 비참한, 증오의 문화 속에서 평생을 살고마는 불쌍한 사람의 얘기가 많습니다. 여러분도 혹시 어떤 한을 지니고 있습니까? '한'이라고 하는 것은 무서운 증오입니다. 증오의 문화에서 살아간다는 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사랑의 문화는 베푸는 문화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문화입니다. 바로 기독교적 문화를 의미합니다. 제가 북녘땅에 가보았을 때에 그곳 사람들과 얘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보니 저들은 남한이 북한에 쳐들어와서 흡수 통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디다. 그래서 벌벌 떨고만 있습니다. "아닙니다. 남한은 북한에 쳐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아무리 말을 해도 안믿습니다. 오히려 "꼭 쳐들어올 것입니다. 안쳐들어올 리가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자기네 북한이 현재 경제적으로 어렵고, 정치적으로도 소련은 이미 망했고 중국에서는 원조를 끊으려 하는 등 점차 고립되어가니까 분명히 남한에서 쳐들어올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버리십시오. 당신들은 둘 중에 하나가 죽어야 산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북한이 살아야 남한도 산다고 생각합니다. 저쪽이 살아야 내가 산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이 다릅니다." 그랬더니 "남한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라고 대답을 합니다.
여러분, 다시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삶의 동기가 어디에 있습니까? 무슨 힘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갑니까? 증오의 문화는 과거에 속하는 것입니다. 지난 날의 일들이 억울하고 분하고 원통해서 거기에 매여 있다면 결국은 현재와 미래도 전부 과거에 바쳐버리는 꼴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사랑의 문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미래만을 생각합니다. 과거는 잊은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과거는 묻지 않습니다. 오직 밝은 미래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입니다. 사랑의 문화, 그 안에서만 인간의 인간됨이 있습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읽을 때마다 우리에게 큰 충격을 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여러분,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서 많은 것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을 못가졌다면 거지 중의 거지요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가장 실패한 사람입니다. 여러분께 이야기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이름을 밝히면 실례가 되기 때문에 누구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만, 미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이름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돈을 많이 벌어서 물질적으로는 크게 성공하였지만 사랑에 실패하였습니다. 여러 여자와 결혼하고 헤어지고를 반복하다보니 당연히 실패해버릴 수밖에요. 진정으로 사랑을 느낀 적도 없고 사랑을 해본 일도 없었답니다. 결국은 병들어서 마지막 10년 동안은 홀로 은둔하며 지내다가 쓸쓸하게 죽었습니다. 완전히 실패한 사람입니다. 더없이 불쌍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우리는 얼마간의 지식이 있습니다. 일생을 통해서 계속 배웁니다. 그러나 사랑을 못배웠다면 무식한 것입니다. 온 세상이치를 다 안다 하더라도 참사랑을 배우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가장 미련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재산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 지식이 있어도 사랑을 모르면 아무것도 아니요, 인격도 사랑이 없으면 허상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피곤하십니까? 실의에 빠져 있습니까? 절망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바로 허상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고 사랑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믿음도 그렇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2절)"라고 말씀합니다. 산을 못옮겼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산은 은사로써 옮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이 있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기에 허상이 있습니다. 아무리 신비한 체험이 있고, 방언을 하고,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어떠한 신비로운 능력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 공명도 없고 아무 열매도 없습니다.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나아가서는 특별히 희생 봉사하는 것에도 그렇습니다. 저는 가끔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중년이 넘은 부인네들의 하소연입니다. 그저 좋기만한 시절에 중매로 결혼해서 처음에는 고된 시집살이 하느라 힘들었고, 다음에는 아이들 키우고 남편의 뒤치닥거리 하느라 정신없이 평생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돌이켜보니 '나는 참으로 헛된 생을 살았다. 외로운 인생을 보냈다'하는 후회만 든다고 합니다. 왜 입니까? 일평생을 다 바쳤지만 거기에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런고로 보람도 없고 아무 뜻도 없고 기쁨도 없고 성공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성경말씀은 극단적으로 표현합니다.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3절)……" 이 이상 강한 표현이 어디에 있습니까? 누구를 위하여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예물로 바쳐버릴지라도 사랑 없는 일이라면 아무것도 아니요 쓸데없는 짓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믿음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많은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장님의 눈을 뜨게 하셨고 문둥병자를 깨끗이 낫게 하셨고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셨습니다. 놀라운 능력을 많이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병고침 받았다고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장님이 눈을 떴다고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문제는 이러한 이적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야 하고 임마누엘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이 사실을 받아들이므로 이적의 내용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적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죽은 사람을 살린들 언젠가는 또 죽을 텐데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까? 이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믿게 됨으로써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십시오. 저 흉한 십자가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내 죄가 이만큼 큰 것을 말하고 또한 십자가가 아니고는 그 무엇도 나를 구속할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십자가는 내 죄에 대한 계시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계시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십자가를 쳐다볼 때마다 우리는 그 속에 계시된 엄청난 사랑--죄인을 향한, 구제불능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내용은 곧 사랑입니다.
또한 사랑은 믿음의 동기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내 소원을 이루고 내 목적이 성취될 것이라는 믿음입니까? 이것은 유치한 믿음입니다. 정말로 바른 믿음이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는 그를 사랑으로 얼싸안고 잔치를 베풀지만, 아들의 입장에서 보면 참 염치가 없는 노릇입니다. 부끄럽습니다.
그래도 아버지의 사랑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잔치에 참예합니다.
이렇듯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바른 응답--이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동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진실되이 응답해보십시오. 믿음의 용기가 생길 것입니다.
나아가 사랑은 믿음의 열매입니다. 사랑을 믿기 때문에 안심합니다. 저는 결혼을 준비하는 젊은 사람들을 볼 때마다 이런 이야기를 해줍니다. 남편이 혹 집에 늦게 들어오더라도 왜 늦었느냐 묻지 말고 '그만한 사정이 있으니까 늦었겠지'라고 생각하며 믿으라고 합니다. 무엇 때문에 늦었노라는 말이 없어도 그저 믿고 절대로 그 사랑을 의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한번 의심하기 시작하면 시험에 빠지게 되는 법이라고 일러줍니다. 여러분, 사랑을 믿습니까? 절대적으로 사랑을 믿고 있습니까? 믿는다면 그 마음은 언제나 평안합니다. 뿐만아니라 어떤 역경, 어떤 환난, 어떤 질고를 겪는다 해도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계신 것을 알고 있다면, 항상 편안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제하게 합니다. 사랑은 self control----자기 자제를 가능하게 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결혼하고 나서 처음 일 년 동안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구약성경에도 보면 일생에 있어서 그 일 년 동안이 제일 중요하니까 전쟁이 있더라도 그 기간에는 군대에 내보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일 년인데, 요새 젊은 사람들을 보거나 그들의 결혼생활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별반 그렇지를 못합니다. 그 일 년 동안이 가장 힘들었다고들 합니다. 왜 힘들었을 것 같습니까? 서로 사랑해서 화끈하게 연애하고 결혼하였는데 왜 힘들었겠습니까? 간단합니다. '주도권 쟁탈전'을 했기 때문입니다. '남편의 기를 꺾어라' '아내의 버릇을 잡아라' '이 때를 놓치면 끝난다'--이렇게 서로 신경전을 벌이는데 아주 대단합니다. 이런 사랑은 말짱 거짓말입니다. 사랑이 아닙니다. 정말로 사랑하면 자존심은 다 없어집니다. 그 앞에서는 자랑할 마음도 없어집니다. 제아무리 잘나보았댔자 그 아내요 그 남편인데 이제와서 무엇을 자랑하겠다는 것입니까? 세상에 아내 앞에서 목에 힘주는 남편처럼 바보는 없습니다. 대체 무엇이 잘났다는 것입니까? 정말 바보같은 짓입니다. 그렇게 평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다시 묻습니다. 사랑하십니까? 사랑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여러분,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그렇습니다.
사랑할 때에는 내 자존심이나 내 명예 같은 것들은 다 안개처럼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또한 사랑은 인내하게 합니다. 온유하게 합니다. 사랑은 우리로 인내와 온유를 가능케 합니다. 인내는 힘든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습니다. 몇 년이라도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저 초조하고 불안하기만 하다면, 그것은 자기 사랑이지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랑일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허상이 있습니다. 행위는 있으나 사랑이 없으면 허상입니다. 거짓입니다. 사랑이 없는 성행위를 간음이라고 합니다. 사랑 없이 살았기에 일평생을 강간당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짓입니까? 언제한번 진실로 사랑해보셨습니까? 사랑이 없는 구제는 속박이요 굴욕입니다. 사랑이 없는 진실은 교만입니다. 사랑이 없는 선물은 뇌물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주었더라도뇌물입니다. 사랑이 없이 자식을 가르치기에 자식에게 주는 것마저 빼앗기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왜 이렇게 모든 것이 피곤해졌습니까? 처음 사랑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시골 교회의 종각 아래에 허술한 집 한 채가 있었습니다. 원래 그 집에는 무척이나 단란한 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 집의 가장이 그만 폐결핵 3기라는 판명을 받았습니다. 계속해서 피를 쏟는 것에 지친 나머지, 환자는 신경질적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아내가 아무리 잘해주려고 애써도 남편은 화만 내고 신경질만 부립니다. 급기야는 이를 견디지 못해 한바탕 크게 싸우고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갔습니다. 그래서 이 환자는 아무도 없이 혼자서 고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교회의 여전도사님이 눈치챘습니다. 비록 예수믿지 않는 사람이지만 전도사님은 그 집에 매일같이 들러서 음식도 갖다주고 어지러운 방을 치워주기도 하면서 뒤치닥거리를 합니다. 그런데 이 환자를 보십시오. 전도사님께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는 못할망정 "불쌍한 사람 돕는 것이 그렇게 기분좋소? 이런 구제는 사치입니다.
당신이 예수믿는답시고 선한 일 하려는 모양인데 언제까지 갈는지 어디 한번 두고 봅시다"라고 비꼬아댑니다. 도대체 얼마나 비난을 하는지 옆에서 보는 사람조차 견딜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그만큼 신경질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전도사님은 묵묵히 이 사람을 계속 돌보아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인가 그 날도 어김없이 방문하여 방을 치우고 있는데 그 사람이 전도사님께 무언가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침을 하고 각혈을 해서 엉망이 되어버린 이부자리 밑에 감추었던 사과 한 개였습니다. "늘 저희 집에 오시지만 드릴 것이 없었는데 좀 시들시들하더라도 이것 한번 잡수어보십시오. 그나마 전도사님께서 제게 주셨던 것이지만요." 전도사님은 "고맙습니다"라고 공손히 인사를 하고는 씻지도 않은 채 앉은 자리에서 그 사과를 맛있게 다 먹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던 이 사람이 갑자기 전도사님의 손을 잡으면서 목놓아울며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나쁜 놈입니다. 이렇게 나를 사랑해주시는 분을 괴롭혔으니 나는 정말 천하에 없는 못된 놈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입니까? 그렇다면 저도 예수 믿겠습니다." 그 때에 그는 온몸이 뜨거워지면서 병균이 다 없어지고 소생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힘을 줍니다. 사랑이 생명력을 줍니다.
사랑은 창조력입니다. 여러분, 일생을 통해서 단 한 번이라도 진정으로 뜨거운 사랑을 깨닫고 죽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랑을 단 한번도 깨달아본 일 없고 느껴본 일 없고 해본 일 없이 평생을 살기에 피곤한 것입니다. 절망에 빠져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허상에 빠져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실상은 결코 교만하지 않습니다. 자기 소중한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에 대하여 기뻐합니다. 사랑은 남의 고통을 방관할 수 없습니다. 사랑으로 한 지체가 되기 때문에 남을 정죄하거나 비난하지 않습니다. 나와 저가 같음을 알기 때문에 사랑은 자기 희생속에서 자유합니다. 자기 희생의 사랑을 베풀면서 비로소 삶의 높은 가치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에 감격할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몸소 베풀 때에 내 삶의 의미를 창조해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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