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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자의 신앙고백(욥기 23:10-17)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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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자의 신앙고백(욥기 23:10-17)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내 발이 그의 걸음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그의 앞에서 떨며 이를 생각하고 그를 두려워하는구나 하나님이 나로 낙심케 하시며 전능자가 나로 두렵게 하시나니 이는 어두움으로 나를 끊지 아니하셨고 흑암으로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셨음이니라

 

이 세상에 고통을 당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고통이 고통 되고 어려운 것은 나만이 남보다 가장 어려운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점에 고통의 무게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나보다 더 어려운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많다. 이렇게만 생각할 수 있다고 해도 내 고통의 무게가 반으로 줄어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그렇게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내가 당하는 고통은 나만 당한 것이요, 그 누구는 생각지도 못하는 나만이 이 쓰린 고통을 겪고 있다고 저마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고통이 점점 더 가증해지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 그 누구를 생각해보아도 성경에 나타난 욥과 같은 고난을 당한 사람은 없다고 보여집니다. 욥처럼 억울하고, 욥처럼 무겁고, 욥처럼 괴로운 고통을 당한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을 정도의 그런 어려운 고통을 당했습니다.

욥은 모든 고난사의 대표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가 당한 고난의 특징이 몇 가지 있습니다. 일반적인 고통과 다른 성격이 있습니다. 첫째는 끝까지 의인의 고통이라는 점입니다. 이래서 성경은 죄인의 고난이 아니고 의인의 고난, 죄없는 욥이 고난을 당한다는 사실을 계속 확증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같은 죄많은 사람들이야 고난을 당해도 할 말이 없지요. 사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절반은 다 내 책임이니까요. 이보다 몇 배의 어려운 고난을 당해도 유구무언입니다. 그러나 욥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욥은 고난을 당해야 할 도덕적 이유가 없었습니다. 의인의 고난입니다. 바로 이 점에 특징이 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당한 고난입니다. 우상을 섬기고 죄 가운데 사는 그런 사람이 벌받았다는 얘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욥은 욥기 1:1에 보면 순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라고 성경은 증거해 줍니다. 그뿐 아니라 4,5절을 보면 어떤 때에 잔치를 베풀고도 혹이나 아들 딸 가운데서 죄를 범하지나 않았을까 해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그는 조심스럽게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고난을 당했습니다.

셋째는 그가 끝까지 내가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를 몰랐습니다.

바로 이것이 또한 문제입니다.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크게 다시 보상해 주시는 그 날까지 왜 이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모르고 고난을 당하면서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때는 너무너무 괴로워서 자기 생을 저주하기도 했습니다. "어머니가 왜 나를 낳았던고, 낳아서 왜 나에게 젖을 먹였던고." 이러한 슬픈 노래까지 울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욥이 당한 고난의 특징입니다.

이제 고난의 양상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어쩌면 이것은 일반적으로 우리 모두 당하는 고난과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가 재산을 잃음으로 인해서 얻어지는 고난입니다. 피땀 흘려 모은 재산, 애써서 모은 재산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마음 아픈 일입니다. 평생토록 애써서 모아 놓은 재산을 하루아침에 빼앗기고 거지가 될 때 이것은 정말로 마음 아픈 일입니다.

욥은 부자였습니다.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요, 그리고 종들도 많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동방의 제일 가는 큰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하루아침에 거지가 됩니다. 큰 잘못도 없이, 또 무슨 대책을 세워 볼 여지도 없이 스바 사람, 갈대아 사람들이 와서 무참하게 이 많은 재산을 약탈해 갔습니다. 이런 억울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무슨 죄 때문에, 누구의 죄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느냐 말입니다.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이 어려운 고난을 겪게 됩니다.

두 번째는 자식으로 인한 고통입니다. 재물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자식에 비하겠습니까? 그런데 자식이 73녀가 있었다고 합니다. 열 남매가 잘 자랐고, 또 형제간에 화친했던 것 같습니다. 맏형의 집에 모여서 늘 잔치를 했다니까요. 이렇게 화목하게 친하게 지내는 아름다운 열 남매의 자녀가 있었는데, 형님 댁에서 잔치를 하다가 집이 무너지면서 열 남매가 다 죽어 버렸습니다. 세상에 이런 고통이 어디 있습니까? 자식으로 말미암아 당하는 고통은 뼈를 깎는 것처럼 아픈 고통인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세 번째 당하는 고난은 아내를 잃었습니다. 다 잃어 버렸다 하더라도 오직 한 사람, 아내가 그래도 그 고난에 같이 동참하면서 같이 참아 보자고 서로 위로해 주었다면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내 진심과 이 고통을 알아 줄 단 한 사람만 있어도 그 고난을 우리가 참고 견딜 수가 있는 것인데 그 한 사람마저 없었습니다. 욥이 당하는 고통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에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세상에 이런 부인이 어디 있습니까? 이 어려운 때에 말입니다. 그러나 욥은 또 한번 어려운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가정을 잃어버리는 괴로움과 고독을 씹어야 했습니다.

, 여기까지 생각하고 이만하면 고통이 넉넉하다 할는지는 몰라도 아직 먹었습니다. 이보다 더 어려운 고통이 있습니다. 자기의 건강을 잃었습니다. 재산이다 자식이다 해 보아도 마지막 궁극적으로 제일 중요한 것은 내 건강의 문제입니다. 내 건강을 잃어버리고 나면 그야말로 예수님 말씀대로 천하를 잃어버리고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입니다. 그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종기가 나서 이것을 기왓장으로 긁고 잿더미에 뒹굴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는 마지막에 이렇게까지 시로 지었습니다. 19:26에 보면 "나는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이 상처가 나서 썩어 문드러지는 이 아픔을 겪으면서 그는 생의 의욕을 잃었습니다. 이제는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래도 이 몸이 다시 회복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나는 끝나는가 보다, 이 몸이 썩어진 후에 육체 밖에서, 하나님 앞에 가서 주를 뵙게 될거라고 그는 내다봅니다. 건강을 잃어버린 괴로움,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어려운 고통이 있습니다. 그는 명예를 잃어 버렸습니다. 친구를 잃어 버렸습니다. 세 친구가 욥이 어려운 일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찾아와서 위로를 하려고 했지만 너무나 기가 막혀서 아무 말도 못하고 옆에 앉아서 일주일을 같이 지냈습니다. 일주일 후에 입을 열어서 말을 시작했습니다. "잘 생각해 보아라, 죄 없이 고난을 당하는 자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데 죄 없이 너에게 왜 고통을 주겠느냐? 무슨 큰 죄를 지었나 보다. 잘 생각해보아라." 자꾸 그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이 말들이 다 괴로웠습니다.

마지막에 욥이 말합니다. "제발 입 좀 다물어라. 너희 같은 말은 나도 할 수 있다." 얼마나 기가 막히면 이렇게 말합니까? 끝에 가서, 16:20에 보면 이런 말로 결론을 맺습니다.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는구나." 내가 알기로는 친구가 그를 조롱한 것이 아닙니다. 위로하느라고 말을 했지만 그 말이 그에게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조롱으로 들려지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 당할 때 찾아와서 얼마나 괴로우냐고 하면 꼭 비웃는 것처럼 들려요. 반갑지 않습니다.

어느 때 상갓집에 조문간 사람이 들어서면서 그만 실수를 하여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했답니다. 그러니까 상주가 하는 말이 "안녕하지 못하니까 상복을 입고 있지 않소" 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런 어려운 일 당한 사람에게 가서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무엇이라고 말하면 위로가 됩니까? 좌우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흔히 들어설 때 말하기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고 합니다. 차라리 그 말이 좋을 겁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예 눈에 안 보이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릅니다. 반갑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위로한다고 찾아오는 사람의 얼굴이 반갑지 않고, 마치 비웃는 것 같고 조롱하는 것 같더란 말입니다. 이 때가 괴로운 것입니다.

친구의 위로를 조롱으로 받게 되는 바로 그런 상황인데 무슨 위로가 필요하겠습니까? 차라리 모든 척해 두세요. 차라리 방문을 그만 두세요.

위로한답시고 찾아가는 것이 오히려 그 사람에게 더 마음 아픈 일이 되고, 꼬집어 내서 뭐라고 말하는 것은 더 큰 괴로움으로 상대방에게 받아진다는 말입니다. 이 아픔, 이 정도가 되고 나면 이젠 자존심, 명예, 다 상해 버린 것입니다. 그는 아무 위로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더 큰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 괴로움이 있습니다. 13:24에 보면 "주께서 어째서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시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날리는 낙엽을 놀래시며 마른 검불을 따르시나이까?" 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볼 때 여기에 고민이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조롱해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만 밝은 얼굴로 쳐다볼 수 있고, 하나님만 나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내게 향한 사랑만 확증할 수 있다면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알 수 없는 내 죄를 향하여 화살을 쏘는 것만 같습니다. 내게 저주를 퍼붓는 것만 같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칭찬하고 일이 잘 되고 건강할 때는 하나님도 내 편인 것처럼 느꼈는데 사람에게로부터 배신당하고 멸시받는 처지가 되고 보니 하나님도 나를 버리신 것처럼만 느껴집니다. 때문에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대적으로 여기시나이까? 이렇게 몸부림칩니다. 이 종교적 고통, 이것이 고통의 극치라고 생각합니다.

욥은 이 어려운 고난 속에서 계속적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첫째는 주께서 주셨고 주께서 거두신다는 고백입니다. 1:21에 보면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셨고 하나님이 거두어 가셨습니다. 그런고로 찬송할 것입니다. 누구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스바 사람을 원망하지도 않았고, 갈대아 사람을 원망하지도 않았고, 충성되이 양을 지켜 주지 못한 종들을 원망하지 않았고, 자기를 저주하고 도망간 아내를 미워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셨고, 하나님이 도로 가져 가셨습니다. 나는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했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들었습니다. 그 누구와의 관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끝까지 하나님과 직선적 관계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철저한 신앙고백입니다.

둘째는 내세관입니다. 이 육체가 썩어져 낡은 옷을 벗어버린 다음에 육체 밖에서 내가 주를 뵈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19:27"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은 다 버렸습니다. 이 몸이 썩어지고 이 육체를 벗고 주님 앞에 가서 평생 그리던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에 외인처럼 낯설게 대하지 않을 것이라, 하나님은 영접하실 것이고 나는 반갑게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봅니다.

우리 역시 확실한 내세관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 발붙이고 이 세상에 성공 여부를 두고 여기에 목적을 두고 사는 사람은 절대로 세상 문제에 대해서 담대할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생명 문제에 대한 내세관을 분명히 가지고 있는 사람, 아무 때 어떻게 죽어도 하나님 앞에 가는 것입니다. 내세관이 분명해야 합니다. 멀어지는 세상에 대해 아쉽지 않고 병든 몸이 되어서 미련을 가지지 않습니다. 아무 때 가도 갈 것입니다. 가는 대로 주님을 반갑게 맞이할 것을 바라보며 확실한 약속을 가지고 사는 사람, 내세관이 분명한 사람이라야 오늘 이 현재의 문제에 대해서도 해결을 얻을 수가 있고 담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앞이 캄캄한 사람은 현재에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은총의 섭리를 믿었습니다. 본문 13절에 보면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나에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정한 뜻이 있다. 작정하신 것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잠시 납득이 가지를 않습니다. 왜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누구도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작정하신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게 향하신 뜻이 있다고 확실히 믿었습니다. 이것이 필요합니다.

지난날의 생을 생각해보십시오. 어디 우연한 일이 있었던가요? 하나님께서는 작정한 뜻이 계셨습니다. 오늘과 내일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잠깐 보이기는 모순처럼 보이고 부조리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이 반드시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큰 섭리 중에, 하나님의 계획 속에, 하나님의 청사진 속에 내가 오늘 들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확실한 신앙이 있고야 오늘을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었습니다. 10절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했으니 얼마나 놀라운 얘기입니까? 이 모든 것이 훈련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당장 썩어 죽어 갈 지경이 되어도 하나님은 내 믿음을 훈련시키시고 내 인격을, 내 영혼을 훈련시킨다고, 단련시킨다고 믿었습니다. 필요한 시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직 그가 아십니다. 그가 사랑으로 내게 베푸신 이 시련이라고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11,12절에 보면 최선을 다해서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오늘도 훈련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훈련 코스에 대하여 불평이 없었습니다.

마지막 신앙고백을 들어보십시다. 42:5"내가 주께 대하여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고 모든 재산을 배나 주셨습니다. 이러한 큰 축복을 받은 다음에 비로소 하는 말입니다. 전에는 듣기만 하더니 이제는 보았습니다. 그는 부자로 살 때에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역경과 환난과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여러분, 낮에도 별빛은 있습니다. 그러나 삼라만상을 다 볼 수 있을 때에는 별을 못 봅니다. 이제 이 모든 것을 볼 수 없을 때, 모든 것이 먹빛처럼 까맣게 보일 때에 가서야 영롱한 별빛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명예와 욕심과 세상에 대한 미련과 세상에 대한 아름다움에 끌리고 있는 동안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르기는 합니다만 멀리서 가물 가물 들려올 뿐입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미련을 깨끗이 끊어 버리고, 이 모든 가시를 완전히 부정해 버리는 순간 확실하게 주님의 얼굴을 뵐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42:6"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했는데, 이것은 고통 속에서 드린 회개가 아닙니다. 다시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그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회개입니다. 비로소 회개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이러한 회개인 줄 압니다. "내가 왜 하나님을 원망했던가, 내가 왜 고통 중에 생을 저주했던가, 내가 왜 하나님을 시험했던가, 내가 왜 슬픈 마음으로 눈물을 흘렸던가? 하나님께서 오늘과 같은 날을 주실 것을 내가 좀더 믿었더라면 원망하지 않을 수 있었는데"하고 하나님 앞에 지난날의 나약했던 믿음에 대해서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회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욥의 인내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에 우리의 고백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1:2"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이 시험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게 하고, 이 시험이 나로 하여금 온전케 하고, 더 큰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앞날의 미래가 약속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시험을 만날 때마다 크게 기뻐하는 이러한 신앙 고백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 : 아버지 하나님, 어리석고 미련하여 믿음을 가졌노라 하면서도 주를 원망하며, 주님 말씀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세상으로 기울어지는 저희들을 이제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환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환난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해 주시며, 환난을 통해서 우리를 당신에게로 인도해 주시는 주님께 감사하며, 아는 것은 알고 하나님께 찬양하고, 모르는 것은 믿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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