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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시기에 노예된 사람(사도행전 17:1~9)

by 【고동엽】 2022.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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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에 노예된 사람(사도행전 17:19)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및 형제를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하니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를 받고 놓으니라

 

 

오늘의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이 빌립보를 떠나 두 성을 거쳐 데살로니가에 도착했다는 이야기가 맨 처음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1)"이렇게 간단하게 한 줄로 설명을 합니다마는, 그 길은 그렇게 간단한게 아닙니다. 무려 150킬로가 넘습니다. 하루에 100리를 걸었다고 생각한다면, 낮에는 걷고 밤에는 자고, 이렇게 나흘을 가야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옛날에는 그저 걸어서 갈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먼길을 여행해서 데살로니가에 도착하게 됩니다. 데살로니가는 빌립보와 좀 다릅니다. 빌립보는 마게도냐 지경의 첫 성입니다. 여기에는 유대사람들이 별로 많이 살지 않아서 회당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강가에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고 루디아와 그 집안이 그를 계기로 해서 예수를 믿게 되고 교회가 설립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에는 회당이 있습니다. 유대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에 도착한 사도 바울은 안식일이 될 때마다 회당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이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다는 이 간단한 말씀을 사도행전의 기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2)"우리가 생각해 볼만한 말씀입니다. 자기의 규례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규례'라는 말은 헬라어로 '카타 에이오토스'라고 하는데 문자 그대로 지적하면 '습관'이라는 말입니다. '자기가 만든 자기 습관대로'입니다. 누구나 나름의 습관이 있을 것입니다. 몇 시에 일어납니까? 일어나자마자 맨 처음에 무엇을 봅니까? 신문을 봅니까, 성경을 봅니까, 아니면 찬송가를 부릅니까? 저마다 나름대로 무엇인가 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눈뜨자마자 담배부터 피우고, 어떤 사람은 신문을 보고, 또 어떤 사람은 음악을 듣고…… 여러 가지가 있지 않습니까? 또 우리네 교인들은 눈뜨자마자 찬송을 부르고, 세수를 하고, 그리고 새벽기도에 나오고, 그 다음에 집에 들어가서 뭘 하고…… 이렇게 하지 않습니까? 이게 자기습관입니다. 꼭 그러자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데도 그런 일들은 나날의 일상에서 중요한 부분이 됩니다. 늘 그렇게 살아와서 습관화한 것입니다. 일상화한 것입니다. 따로이 강한 의지가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관행이요 관례입니다. 여러분 중에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분이 있습니까? 여행을 해서 다른 지방에 가서 자도 그 시간이 땡하면 일어나게 됩니다. 자기습관인 것입니다. 이런 자기 관례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관례가 어떻게 형성되어야 하는 것인지, 그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람직한 습관이냐, 아니면 잘못된 습관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못된 그대로 나쁜 습관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일생동안 그로부터 벗어나려고 발버둥쳐도 그 습관을 못 고칩니다. 그 습관이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도 못 고치고 그것에 하릴없이 끌려가면서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울은 바울 나름대로 자기습관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관례나 습관이라고 하는 말은, 이제는 오랫동안 늘 그렇게 살아와서, 별로 어렵지 않게, 별로 생각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자기 생활 스타일이 되어버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름의 자기문화가 되어버린 그런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정말로 철저한 이방의 사도였다고 생각합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의 자기습관 네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가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되면, 만사 제쳐놓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자기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튼 유대사람은 어디 가서든지 안식일은 지킵니다. 제가 미국의 풀러 신학교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부산에서 오신 어느 목사님과 둘이서 기숙사의 한 방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토요일 저녁에 최모 장로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저는 모르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분 말씀이 "목사님, 대단히 죄송합니다마는 오늘밤은 목사님 방에서 자면 안될까요?"합니다. "침대는 둘밖에 없고 방도 깨끗하지 않은데 괜찮습니까?"하고 물었더니, 좌우간 같이 자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분이 아주 큰 사업을 하면서 왔다갔다 출장을 많이 다니는데 본 교회에서는 물론이고 어디 가나 꼭 주일은 지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날은 집에 못 가고 L. A에 머물게 되었는데 마침 다음날이 주일이었던 것입니다. "장로가 호텔에서 주일날을 지내서야 되겠습니까? 꼭 예수 믿는 가정집에서 자야겠는데 여기에는 내가 아는 집도 없고, 딱히 하룻밤을 부탁할 곳도 없습니다. 그러니 좁더라도 목사님 방에서 좀 끼여 잡시다"합니다. 그것, 말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모르는 분이지만 오시라고 했습니다. 좁지만 침대에서 자라고 해도 절대로 말 안 듣습니다. 결국 우리는 침대에서 자고 그 분은 방바닥에서 토요일 밤을 잤습니다. 그리고 주일날 아침에 교회에 나가고, 또 그렇게 주일날 밤을 보내고, 월요일 아침에 차를 타고 출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뜻이 갸륵합디다. 그게 잘하는 일인지 못하는 일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내가 여기에 와서 주일을 지내게 되었지만 호텔에서는 주일날 밤을 지내지 못하겠다. 반드시 믿는 집을 찾아가야겠다'하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 사람의 규례입니다. 자기는 주일에 절대로 호텔에서 안 잔다는 것입니다. 일리 있는 자기 규례라고 생각합니다. 나름대로 생각 있는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아무리 멀고 오랜 여행을 하고 다녀도 꼭 안식일은 지킵니다. 우리말로 말하면 주일은 꼭 지키는 것입니다. 만사 제쳐놓고 주일은 엄격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유대사람에게는 이런 말도 있습니다. "유대사람들이 안식일을 지킨 게 아니라 안식일이 유대사람을 지켰다." 주일 지키는 것, 참으로 중요합니다. 철저하게 지킬 것입니다. 그렇게 지켜 나가느라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그래서 제가 결혼 주례를 설 때마다 신랑 신부에게 꼭 부탁하는 말 한마디가 그것입니다. "둘이 아무리 사랑하려고 해도 사랑의 영을 받지 못하면 사랑하지 못합니다.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하는 마음이 안 생기면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 당신들이 행복한 가정을 이루려면 주일날은 꼭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세요." 거기에 딱 한마디 추가하고 싶지만 그 말은 혹 듣는 사람이 기분 나빠할까 봐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부부싸움을 했더라도 주일날은 꼭 같이 교회에 나오세요"입니다. 아무튼 주일날에는 꼭 같이 나와서 예배를 드리세요. 그러면 행복한 가정을 이룰 것입니다. 주일을 철저하게 지키는 습관,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또 하나, 사도 바울은 어디서나 꼭 회당을 찾았습니다. 회당에 들어갔다그러니까 교회에 나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없을 때에는 한적한 곳으로 가서, 장소를 옮겨 강가에서 안식일을 지켰다는 것을 앞에서 공부하지 않았습니까? 바울에게는 주일을 그렇듯 엄격하게 지키는 나름의 관례가 있습니다.

셋째는, 회당에 들어가면 기회를 얻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는 것입니다. 마침 회당은 열려 있거든요. 저들의 회당에서는 일단 성경을 읽은 다음에 '누군가가 이에 대하여 말할 사람 있으면 말하세요'하는 관례가 있습니다. 그런고로 사도 바울은 그 때마다 일어서서 성경을 풀어 해석하는 성경학자로서의 본분을 다하고 있습니다. 어디 가서든지 성경을 강론하는, 이것이 바울의 자기관례입니다.

넷째는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풀어서 '예수가 메시야다, 이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다'하는 것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관례입니다. 그 자신의 규례입니다. 자신의 규례가 되어서 어디 가나 이런 방법으로 살아왔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관례를 가지고 살아왔습니까? 자기습관을 어떻게 만들어서 거기에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까? 깊이 생각할 문제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니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리를 좇으나(4)"라고 말씀합니다. 헬라사람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사도 바울의 말을 따랐고, 적지 않은 귀부인들도 따랐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귀부인이라는 지칭이 있습니다. 영어성경에는 leading woman, 곧 지도급의 여성들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얘기입니다. 유대사람들은 아주 경건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방에 가서 살고 있을 때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특별히 로마의 귀족들은 유대 여성이나 후대에 와서는 기독교여성들과 결혼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방사람, 로마인 여성들의 생활이 너무도 음란 방탕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록에 보면 로마인 여성들에게는 우선 성병이 아주 많았다고 합니다. 좋은 자녀, 깨끗한 자녀를 얻으려면 아내인 여자가 깨끗해야 하므로 로마 귀족들은 깨끗한 유대 여자와 결혼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알지 않습니까? 클레오파트라니 뭐니 하는 여인들, 다 시원치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좀 생각이 있는 로마, 헬라의 지성인 가운데 돈 많은 사람들이나 귀족들은 가능한 한 유대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바로 이 부인들이 회당에 나오게 됩니다. 종교는 자기종교를 지키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귀부인'은 사회적으로 아주 높은 신분을 지닌 사람들의 부인인 것입니다. 지금은 이방사람하고 살고 있지만, 그 본색은 어디까지나 유대사람입니다. 그런고로 안식일이 되면 회당에 나옵니다. 바로 이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사도 바울을 따랐다는 얘기입니다. 또 후대에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당할 때, 많은 로마의 귀족들이 기독교 여성들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여성들이 자신의 자녀들을 기독교인으로 키웁니다. 바로 그 자녀들이 자라서 로마제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 데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 오늘의 본문에 보니 큰 무리와 적지않은 귀부인들이 사도 바울의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았다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도 바울의 데살로니가 선교 여행은 성공적이었다는 것이지요. 많은 무리가 믿고, 귀부인들이 믿고아주 시작이 잘 되었습니다. 교회가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이 잘 되니까 시련이 따라옵니다. "유대인들은 시기하여(5)"바로 유대인들이 시기했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유대인이라고 그대로 말씀합니다마는, 유대인 일반이 다 그러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이렇게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서 하나님 말씀을 전했어요. 회당에는 유대사람들, 헬라사람들도 개종을 해서 많이 들어와 있는데 이 사람들이 사도 바울의 말씀을 따라서 예수를 믿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들이 예수를 믿게 됨으로 인해서 따로이 자기의 위신과 위상이 무너진 무리가 있습니다. 바로 유대교에 속한 유대종교 지도자들입니다. 바로 이 지도자들의 소위 인기가 떨어진 것입니다. 인기도 떨어지고, 자기들의 잘못된 생활이 그만 다 노출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시기 질투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유대인이라고 간단하게 말씀합니다마는, 그실 유대 회당에서 지도자급에 있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사람들이 바울을 시기합니다.

헬라 원문에서는 '젤로산테스'라고 했는데 이 말은 영어로 jealous, 곧 시기하고 질투하게 되었다고 번역됩니다. 어쨌든 이 생명력 없는 유대주의자들, 이 율법주의자들은 그저 성경을 읽고 예배하는 형식적인 것만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 바울이 와서 생명력 있는 복음을 전하게 될 때, 모두가 바울의 말을 듣게 됩니다. , 이 사람들은 항상 메시야가 온다, 메시야를 기다린다고만 했는데 바울은 '메시야가 왔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하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의 그 강한 성경적 논증, 여기에 설득되면서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예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될 때에 유대 지도자들은 지도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 이럴 때에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바로 이 시간에 저들이 취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저들도 회개하고, 저들도 예수를 믿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고 시기 질투해서 바울과 실라를 핍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에릭슨이라고 하는 심리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시기의 근본 원인은 열등의식이다.' 일리가 있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갈등에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분리, 소외, 공포, 분노, 적의 상심, 시기, 질투, 원망, 혹은 허망된 지배욕, 자기학대, 좌절, 망상……다 좋지 않은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어디서부터 오느냐극복되지 못한 열등감에서 오는 것입니다. 열등감이 저변에 깔려 있습니다. 왜 시기하느냐자신은 그럴 수 없기 때문이지요. 자기가 더 잘 할 수 있으면 무엇 때문에 질투하겠습니까?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질투하는 것 보았습니까? 그런데 자기가 거기에 미치지 못하거든요. 결국은 이 열등의식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여러 층의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마는, 가장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 열등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참 문젯거리입니다. 이래도 걸리고 저래도 걸립니다. 그런데 가장 좋은 사람이 누구냐 하면 열등의식을 극복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나보다 잘된 사람을 위해서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박수를 칠 수 있는 사람, 다른 사람에게 기쁜 일이 있을 때에 내가 더불어 기뻐할 수 있는 사람, 우리집에는 비록 아주 복잡한 문제가 많지만 내 친구의 딸이 시집을 간다고 하면 즐거운 마음으로 가서 내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축하해줄 수 있는 사람, 내 아들은 시험에 떨어지고 형편없게 되었다 해도 내 친구의 아들이 대학을 졸업한다고 할 때에 같이 가서 축복해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모든 심리적 갈등은 극복하지 못한 열등감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부인을 못한 사람, self­denial 곧 자기 부정을 못한 사람입니다.

자기를 부정해버리고 예수를 믿어야 하겠는데, 예수 믿는다고 줄렁줄렁 따라다니지만 아직도 '자기'라고 하는 것을 십자가에 못박아버리지 못했어요. 그러면 그 신앙은 여전히 문제가 많고, 은혜가 없고, 발전이 없습니다. 자기를 완전히 부정해버려야 합니다. 자기를 부정 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좇으라 하셨는데, 자기 부인이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이럴 때에 그 마음에 평화가 없습니다.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악마가 인간을 파괴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비교의식이다.' 레비스라고 하는 사람이 한 말인데 아주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하고 자꾸 비교합니다. 비교하는 것처럼 사람을 못되게 만드는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보기만 하고 남의 깊은 속을 알 수 있습니까? 자연히 형식적으로만 보게 되지요.

결국은 비교하면서 교만해지기도 하고, 열등의식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모든 문제가 비교의식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이런 일도 있지 않습니까? 부인들이 어디 가서 좋은 옷을 사 입었어요. 그리고 신이 나서 그 옷을 입고 외출을 했는데 살펴보니 어떤 여자가 자기 옷과 똑같은 옷을 입었습니다. 그러면 다시 집에 돌아와서 그 옷을 벗어버린답니다. 이런 여자는 불행합니다. 그렇게 살자니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지워버리세요. 비교의식을 아주 쑥 빼버리세요. 그래야만 편안할 수가 있습니다.

맥스웰 말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대인은 심리적으로 적어도 95퍼센트는 열등감이라는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보세요. 시기 질투라는 것이 참 무서운 병입니다. 특별히 예수 믿는 사람이나 지성인이나 지위가 있고 명예가 있는 사람이나 신앙인이 빠지기 쉬운 참 무서운 시험입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글에 시기의 악마성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너무나 잘 아는 얘기입니다. 성자가 되기 위해서 리비아사막을 지나가는 한 수도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마귀의 졸개들이 이 사람에게 시험을 걸었습니다. 예쁜 여자로 나타나 유혹을 합니다. 그래도 수도사는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금덩이를 보여줘도 요지부동입니다. 협박을 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갖가지 방법으로 다 시험을 했는데 영통하지 않습니다. 수도사는 여전히 당당하게 갈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실패한 마귀 졸개들이 좌절하고 있을 때, 마귀 대장이 이 꼴을 보고는 "저리 비켜라, 내가 하는 것을 좀 봐라"하고 나섭니다. 그는 수도사의 귀에 딱 한마디를 속삭입니다. 그랬더니 그 수도사의 얼굴빛이 금방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악이 성공했습니다. 마귀가 시험에 성공했습니다.

궁금한 졸개들이 따라가서 묻습니다. "도대체 대장님은 무어라고 얘기했습니까?" "뭘 뭐라고 해? 간단하지. 네 동생이 알렉산드리아에서 대주교가 되었다고만 말했지 뭐." 그 한마디에 수도사의 얼굴빛이 달라진 것입니다. 동생과 형 사이에도 이렇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 열등의식, 시기, 질투…… 이것을 완전히 버려야만 신앙생활도 바로 서는 것입니다.

이 유대사람들, 이들도 별것 아닙니다. 다 그런 사람들입니다. 다 일반적인 사람들입니다. 이 열등의식이 극복되지 못하고 시기로 발전했습니다. 시기 질투가 화산같이 터져 나올 때에 막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인사불성이 됩니다. 자기도, 시기하는 그 대상도, 제 삼자도 다 망칩니다. 우선 질투하는 자기 자신, 자기 마음을 망칩니다. 또 우리가 질투하는 말을 자꾸 하니까 그 말을 듣는 사람이 망치고, 내가 질투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도 망칩니다. 돌아가면서 깡그리 망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718절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사람들이 예수를 빌라도 앞에 끌고 왔을 때, 빌라도는 그 사람들이 예수를 시기하여 그렇게 하는 줄을 알아보았습니다.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합니다. 가야바와 그 당시 지도자들이 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했느냐, 그것은 물질 때문이 아닙니다. 권력 때문도 아닙니다.

질투 때문입니다. 여러분, 시기 질투라는 것이 죄가 아닌, 그저 생각으로 지나가는 것인 줄 알고 회개도 안하고 그냥 지나가려고 하는데, 사실은 참으로 무서운 죄입니다. 이것이 악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특별히 예수 믿는 사람들이 끝끝내 죄인 줄도 모르고 덜컥덜컥 걸려 넘어가는 게 바로 이 시기 질투입니다. 아주 쉽게 넘어갑니다. 그래서 신앙이 무너지고 마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유대인들이 시기 질투로 인해서 엄청나게 큰 실수를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만 그러는 게 아닙니다. 한번 시기와 질투의 노예가 되면 누구든 다 이렇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세요.

결국은 이성도 없고, 믿음도 없고, 자기들이 소중히 여기는 율법도 없습니다. 다 팽개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시기로 인한 악만 남았어요.

소위 경건하다고 하는 종교지도자들입니다. 회당의 지도급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행티를 좀 보세요. 사도 바울들을 가리켜 첫째,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다, 하고 소란을 떱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숫제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 바울과 실라, 이 사람들을 내치고 죽이겠다는 생각뿐이지, 도대체 이 사람들의 교리가 뭔지, 어째서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지, 바울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에 맞는지 안 맞는지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습니다. 다음시간에 공부하게 됩니다마는 본문에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11)"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교인에도 신사적 교인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좀 생각을 할 줄 압니다. 바울의 말씀을 자세히 들어보고, 또 사람들이 그를 따르면 '왜 따를까'를 좀 생각할 줄 알아요. 그러나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은 그렇지 못해요. 시기 질투에 사로잡히고 말 때에 앞뒤를 분간하지 못합니다. 그리고는 사도 바울의 말씀은 한마디도 들을 생각 안 해요. 알아보려 하지도 않아요. 덮어놓고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다'하고 있습니다. 이게 마음 문을 닫아버렸다는 것입니다. 마음 문이 닫혔습니다. 시기 질투가 있으면 들리는 것도 없고 보이는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 보니 이들이 괴악한 사람들을 동원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유대사람들로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종교인들이 깡패를 동원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깡패를 동원했습니다. 소위 율법을 위한다고 하면서 애초부터 율법을 어기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불량배 동원해 가지고 소란을 떤다는 것 자체가 유대사람으로도 못할 짓이요 회당의 지도자로서는 더더욱 못할 짓입니다. 그런데 그런 짓을 하고 있습니다. 또 소동을 떱니다. 좀 고요해야 생각이 나지요. 소동을 떨어 가지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입니까?

또한 오늘의 본문에 보니, 그들은 화가 치밀어 오르니까 스스로 걷잡지를 못합니다. 사실은 사도 바울을 잡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바울을 못 잡으니까 야손을 잡아다가 치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야손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화가 치밀어 오르니까 그렇듯 걷잡지 못하고, 그래서 바울을 잡으려다가 못 잡으니까 그 집에 머물렀던 야손과 그 일행, 그 집안식구들을 끌고 와서 소란을 피웠다, 그것입니다.

또 이들이 시기 질투하면서, 목적을 당성하기 위해서 하는 말을 좀 들어보세요. 유대사람들은 로마의 속국으로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사람하고는 원수입니다. 어디까지나 원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을 보면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7)"합니다. 그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가이사에게 충성했습니까? 이중으로 죄를 짓고 있는 것이지요. 사실 예수님을 재판할 때에도 그러하지 않았습니까? 빌라도에게 '만일 당신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으면 당신은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라고 저들은 말했습니다.

아주 정치적인 문제로 돌리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도 보니 가이사를 운운합니다. 유대사람들의 본심은 로마사람 황제 가이사를 이렇게 호칭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마치 자기들이 가이사의 충신이 된 것처럼 가장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보를 받고 놓으니라(9)"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보는 요샛말로 보석금입니다. 아니 이 사건이 어떤 사건입니까? 정말 중요한 사건이라면 보석금으로 놓아줄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 또 한번 잘못하고있는 것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점으로 볼 때,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유대사람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율법을 버린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을 거역한다고 자기네들이 지금 정죄 하면서, 사실은 자기네들 스스로 철저하게 율법을 거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 보면 데살로니가교회는 이런 핍박 가운데서 세워집니다. 애당초 시작부터 그러했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의 특성이 바로 이 핍박 가운데 세워졌다는 것이므로 데살로니가교회는 훌륭한 교회요 질적으로 아주 우수한 교회라고 사도 바울은 칭찬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의 자기 규례,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생활 규례와 생활습성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느냐, 그리고 시기와 질투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가를 말입니다. 또 이것을 제어하지 못할 때, 다시 말하면, 극복하지 못한 시기와 질투가 우리마음에서 끓어오를 때에 자기도 모르게 엄청나게 무서운 죄를 짓게 되어 악의 사람이 되고, 나아가서는 사단의 도구로 쓰인다는 것을 알아야할 것입니다. 여러분, 살인하고, 도둑질하고, 간음하고, 이런 것만 죄라고 여겨서는 안됩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이 빼버리지 못한 시기, 질투, 열등의식, '자기'라고 하는 것…… 이것을 완전히 빼버리지 못하는 한 참 은혜를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허구헌날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불러도 충만한 은혜를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마음은 언제나 평안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한번 잘못 발동하게 되면 악마가 따로 없습니다. 유대사람들이 악마 노릇을 한 것처럼 어느 사이에 우리도 악마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회개하되,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시기 질투를 깨끗이 제하도록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결케 하소서'하고 기도드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시기에 노예된 사람(사도행전 17:19)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및 형제를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하니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를 받고 놓으니라

 

 

오늘의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이 빌립보를 떠나 두 성을 거쳐 데살로니가에 도착했다는 이야기가 맨 처음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1)"이렇게 간단하게 한 줄로 설명을 합니다마는, 그 길은 그렇게 간단한게 아닙니다. 무려 150킬로가 넘습니다. 하루에 100리를 걸었다고 생각한다면, 낮에는 걷고 밤에는 자고, 이렇게 나흘을 가야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옛날에는 그저 걸어서 갈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먼길을 여행해서 데살로니가에 도착하게 됩니다. 데살로니가는 빌립보와 좀 다릅니다. 빌립보는 마게도냐 지경의 첫 성입니다. 여기에는 유대사람들이 별로 많이 살지 않아서 회당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강가에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고 루디아와 그 집안이 그를 계기로 해서 예수를 믿게 되고 교회가 설립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에는 회당이 있습니다. 유대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에 도착한 사도 바울은 안식일이 될 때마다 회당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이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다는 이 간단한 말씀을 사도행전의 기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2)"우리가 생각해 볼만한 말씀입니다. 자기의 규례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규례'라는 말은 헬라어로 '카타 에이오토스'라고 하는데 문자 그대로 지적하면 '습관'이라는 말입니다. '자기가 만든 자기 습관대로'입니다. 누구나 나름의 습관이 있을 것입니다. 몇 시에 일어납니까? 일어나자마자 맨 처음에 무엇을 봅니까? 신문을 봅니까, 성경을 봅니까, 아니면 찬송가를 부릅니까? 저마다 나름대로 무엇인가 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눈뜨자마자 담배부터 피우고, 어떤 사람은 신문을 보고, 또 어떤 사람은 음악을 듣고…… 여러 가지가 있지 않습니까? 또 우리네 교인들은 눈뜨자마자 찬송을 부르고, 세수를 하고, 그리고 새벽기도에 나오고, 그 다음에 집에 들어가서 뭘 하고…… 이렇게 하지 않습니까? 이게 자기습관입니다. 꼭 그러자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데도 그런 일들은 나날의 일상에서 중요한 부분이 됩니다. 늘 그렇게 살아와서 습관화한 것입니다. 일상화한 것입니다. 따로이 강한 의지가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관행이요 관례입니다. 여러분 중에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분이 있습니까? 여행을 해서 다른 지방에 가서 자도 그 시간이 땡하면 일어나게 됩니다. 자기습관인 것입니다. 이런 자기 관례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관례가 어떻게 형성되어야 하는 것인지, 그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람직한 습관이냐, 아니면 잘못된 습관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못된 그대로 나쁜 습관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일생동안 그로부터 벗어나려고 발버둥쳐도 그 습관을 못 고칩니다. 그 습관이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도 못 고치고 그것에 하릴없이 끌려가면서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울은 바울 나름대로 자기습관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관례나 습관이라고 하는 말은, 이제는 오랫동안 늘 그렇게 살아와서, 별로 어렵지 않게, 별로 생각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자기 생활 스타일이 되어버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름의 자기문화가 되어버린 그런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정말로 철저한 이방의 사도였다고 생각합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의 자기습관 네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가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되면, 만사 제쳐놓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자기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튼 유대사람은 어디 가서든지 안식일은 지킵니다. 제가 미국의 풀러 신학교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부산에서 오신 어느 목사님과 둘이서 기숙사의 한 방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토요일 저녁에 최모 장로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저는 모르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분 말씀이 "목사님, 대단히 죄송합니다마는 오늘밤은 목사님 방에서 자면 안될까요?"합니다. "침대는 둘밖에 없고 방도 깨끗하지 않은데 괜찮습니까?"하고 물었더니, 좌우간 같이 자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분이 아주 큰 사업을 하면서 왔다갔다 출장을 많이 다니는데 본 교회에서는 물론이고 어디 가나 꼭 주일은 지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날은 집에 못 가고 L. A에 머물게 되었는데 마침 다음날이 주일이었던 것입니다. "장로가 호텔에서 주일날을 지내서야 되겠습니까? 꼭 예수 믿는 가정집에서 자야겠는데 여기에는 내가 아는 집도 없고, 딱히 하룻밤을 부탁할 곳도 없습니다. 그러니 좁더라도 목사님 방에서 좀 끼여 잡시다"합니다. 그것, 말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모르는 분이지만 오시라고 했습니다. 좁지만 침대에서 자라고 해도 절대로 말 안 듣습니다. 결국 우리는 침대에서 자고 그 분은 방바닥에서 토요일 밤을 잤습니다. 그리고 주일날 아침에 교회에 나가고, 또 그렇게 주일날 밤을 보내고, 월요일 아침에 차를 타고 출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뜻이 갸륵합디다. 그게 잘하는 일인지 못하는 일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내가 여기에 와서 주일을 지내게 되었지만 호텔에서는 주일날 밤을 지내지 못하겠다. 반드시 믿는 집을 찾아가야겠다'하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 사람의 규례입니다. 자기는 주일에 절대로 호텔에서 안 잔다는 것입니다. 일리 있는 자기 규례라고 생각합니다. 나름대로 생각 있는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아무리 멀고 오랜 여행을 하고 다녀도 꼭 안식일은 지킵니다. 우리말로 말하면 주일은 꼭 지키는 것입니다. 만사 제쳐놓고 주일은 엄격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유대사람에게는 이런 말도 있습니다. "유대사람들이 안식일을 지킨 게 아니라 안식일이 유대사람을 지켰다." 주일 지키는 것, 참으로 중요합니다. 철저하게 지킬 것입니다. 그렇게 지켜 나가느라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그래서 제가 결혼 주례를 설 때마다 신랑 신부에게 꼭 부탁하는 말 한마디가 그것입니다. "둘이 아무리 사랑하려고 해도 사랑의 영을 받지 못하면 사랑하지 못합니다.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하는 마음이 안 생기면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 당신들이 행복한 가정을 이루려면 주일날은 꼭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세요." 거기에 딱 한마디 추가하고 싶지만 그 말은 혹 듣는 사람이 기분 나빠할까 봐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부부싸움을 했더라도 주일날은 꼭 같이 교회에 나오세요"입니다. 아무튼 주일날에는 꼭 같이 나와서 예배를 드리세요. 그러면 행복한 가정을 이룰 것입니다. 주일을 철저하게 지키는 습관,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또 하나, 사도 바울은 어디서나 꼭 회당을 찾았습니다. 회당에 들어갔다그러니까 교회에 나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없을 때에는 한적한 곳으로 가서, 장소를 옮겨 강가에서 안식일을 지켰다는 것을 앞에서 공부하지 않았습니까? 바울에게는 주일을 그렇듯 엄격하게 지키는 나름의 관례가 있습니다.

셋째는, 회당에 들어가면 기회를 얻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는 것입니다. 마침 회당은 열려 있거든요. 저들의 회당에서는 일단 성경을 읽은 다음에 '누군가가 이에 대하여 말할 사람 있으면 말하세요'하는 관례가 있습니다. 그런고로 사도 바울은 그 때마다 일어서서 성경을 풀어 해석하는 성경학자로서의 본분을 다하고 있습니다. 어디 가서든지 성경을 강론하는, 이것이 바울의 자기관례입니다.

넷째는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풀어서 '예수가 메시야다, 이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다'하는 것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관례입니다. 그 자신의 규례입니다. 자신의 규례가 되어서 어디 가나 이런 방법으로 살아왔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관례를 가지고 살아왔습니까? 자기습관을 어떻게 만들어서 거기에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까? 깊이 생각할 문제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니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리를 좇으나(4)"라고 말씀합니다. 헬라사람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사도 바울의 말을 따랐고, 적지 않은 귀부인들도 따랐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귀부인이라는 지칭이 있습니다. 영어성경에는 leading woman, 곧 지도급의 여성들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얘기입니다. 유대사람들은 아주 경건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방에 가서 살고 있을 때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특별히 로마의 귀족들은 유대 여성이나 후대에 와서는 기독교여성들과 결혼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방사람, 로마인 여성들의 생활이 너무도 음란 방탕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록에 보면 로마인 여성들에게는 우선 성병이 아주 많았다고 합니다. 좋은 자녀, 깨끗한 자녀를 얻으려면 아내인 여자가 깨끗해야 하므로 로마 귀족들은 깨끗한 유대 여자와 결혼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알지 않습니까? 클레오파트라니 뭐니 하는 여인들, 다 시원치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좀 생각이 있는 로마, 헬라의 지성인 가운데 돈 많은 사람들이나 귀족들은 가능한 한 유대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바로 이 부인들이 회당에 나오게 됩니다. 종교는 자기종교를 지키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귀부인'은 사회적으로 아주 높은 신분을 지닌 사람들의 부인인 것입니다. 지금은 이방사람하고 살고 있지만, 그 본색은 어디까지나 유대사람입니다. 그런고로 안식일이 되면 회당에 나옵니다. 바로 이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사도 바울을 따랐다는 얘기입니다. 또 후대에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당할 때, 많은 로마의 귀족들이 기독교 여성들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여성들이 자신의 자녀들을 기독교인으로 키웁니다. 바로 그 자녀들이 자라서 로마제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 데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 오늘의 본문에 보니 큰 무리와 적지않은 귀부인들이 사도 바울의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았다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도 바울의 데살로니가 선교 여행은 성공적이었다는 것이지요. 많은 무리가 믿고, 귀부인들이 믿고아주 시작이 잘 되었습니다. 교회가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이 잘 되니까 시련이 따라옵니다. "유대인들은 시기하여(5)"바로 유대인들이 시기했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유대인이라고 그대로 말씀합니다마는, 유대인 일반이 다 그러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이렇게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서 하나님 말씀을 전했어요. 회당에는 유대사람들, 헬라사람들도 개종을 해서 많이 들어와 있는데 이 사람들이 사도 바울의 말씀을 따라서 예수를 믿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들이 예수를 믿게 됨으로 인해서 따로이 자기의 위신과 위상이 무너진 무리가 있습니다. 바로 유대교에 속한 유대종교 지도자들입니다. 바로 이 지도자들의 소위 인기가 떨어진 것입니다. 인기도 떨어지고, 자기들의 잘못된 생활이 그만 다 노출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시기 질투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유대인이라고 간단하게 말씀합니다마는, 그실 유대 회당에서 지도자급에 있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사람들이 바울을 시기합니다.

헬라 원문에서는 '젤로산테스'라고 했는데 이 말은 영어로 jealous, 곧 시기하고 질투하게 되었다고 번역됩니다. 어쨌든 이 생명력 없는 유대주의자들, 이 율법주의자들은 그저 성경을 읽고 예배하는 형식적인 것만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 바울이 와서 생명력 있는 복음을 전하게 될 때, 모두가 바울의 말을 듣게 됩니다. , 이 사람들은 항상 메시야가 온다, 메시야를 기다린다고만 했는데 바울은 '메시야가 왔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하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의 그 강한 성경적 논증, 여기에 설득되면서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예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될 때에 유대 지도자들은 지도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 이럴 때에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바로 이 시간에 저들이 취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저들도 회개하고, 저들도 예수를 믿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고 시기 질투해서 바울과 실라를 핍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에릭슨이라고 하는 심리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시기의 근본 원인은 열등의식이다.' 일리가 있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갈등에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분리, 소외, 공포, 분노, 적의 상심, 시기, 질투, 원망, 혹은 허망된 지배욕, 자기학대, 좌절, 망상……다 좋지 않은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어디서부터 오느냐극복되지 못한 열등감에서 오는 것입니다. 열등감이 저변에 깔려 있습니다. 왜 시기하느냐자신은 그럴 수 없기 때문이지요. 자기가 더 잘 할 수 있으면 무엇 때문에 질투하겠습니까?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질투하는 것 보았습니까? 그런데 자기가 거기에 미치지 못하거든요. 결국은 이 열등의식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여러 층의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마는, 가장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 열등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참 문젯거리입니다. 이래도 걸리고 저래도 걸립니다. 그런데 가장 좋은 사람이 누구냐 하면 열등의식을 극복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나보다 잘된 사람을 위해서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박수를 칠 수 있는 사람, 다른 사람에게 기쁜 일이 있을 때에 내가 더불어 기뻐할 수 있는 사람, 우리집에는 비록 아주 복잡한 문제가 많지만 내 친구의 딸이 시집을 간다고 하면 즐거운 마음으로 가서 내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축하해줄 수 있는 사람, 내 아들은 시험에 떨어지고 형편없게 되었다 해도 내 친구의 아들이 대학을 졸업한다고 할 때에 같이 가서 축복해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모든 심리적 갈등은 극복하지 못한 열등감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부인을 못한 사람, self­denial 곧 자기 부정을 못한 사람입니다.

자기를 부정해버리고 예수를 믿어야 하겠는데, 예수 믿는다고 줄렁줄렁 따라다니지만 아직도 '자기'라고 하는 것을 십자가에 못박아버리지 못했어요. 그러면 그 신앙은 여전히 문제가 많고, 은혜가 없고, 발전이 없습니다. 자기를 완전히 부정해버려야 합니다. 자기를 부정 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좇으라 하셨는데, 자기 부인이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이럴 때에 그 마음에 평화가 없습니다.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악마가 인간을 파괴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비교의식이다.' 레비스라고 하는 사람이 한 말인데 아주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하고 자꾸 비교합니다. 비교하는 것처럼 사람을 못되게 만드는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보기만 하고 남의 깊은 속을 알 수 있습니까? 자연히 형식적으로만 보게 되지요.

결국은 비교하면서 교만해지기도 하고, 열등의식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모든 문제가 비교의식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이런 일도 있지 않습니까? 부인들이 어디 가서 좋은 옷을 사 입었어요. 그리고 신이 나서 그 옷을 입고 외출을 했는데 살펴보니 어떤 여자가 자기 옷과 똑같은 옷을 입었습니다. 그러면 다시 집에 돌아와서 그 옷을 벗어버린답니다. 이런 여자는 불행합니다. 그렇게 살자니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지워버리세요. 비교의식을 아주 쑥 빼버리세요. 그래야만 편안할 수가 있습니다.

맥스웰 말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대인은 심리적으로 적어도 95퍼센트는 열등감이라는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보세요. 시기 질투라는 것이 참 무서운 병입니다. 특별히 예수 믿는 사람이나 지성인이나 지위가 있고 명예가 있는 사람이나 신앙인이 빠지기 쉬운 참 무서운 시험입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글에 시기의 악마성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너무나 잘 아는 얘기입니다. 성자가 되기 위해서 리비아사막을 지나가는 한 수도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마귀의 졸개들이 이 사람에게 시험을 걸었습니다. 예쁜 여자로 나타나 유혹을 합니다. 그래도 수도사는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금덩이를 보여줘도 요지부동입니다. 협박을 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갖가지 방법으로 다 시험을 했는데 영통하지 않습니다. 수도사는 여전히 당당하게 갈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실패한 마귀 졸개들이 좌절하고 있을 때, 마귀 대장이 이 꼴을 보고는 "저리 비켜라, 내가 하는 것을 좀 봐라"하고 나섭니다. 그는 수도사의 귀에 딱 한마디를 속삭입니다. 그랬더니 그 수도사의 얼굴빛이 금방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악이 성공했습니다. 마귀가 시험에 성공했습니다.

궁금한 졸개들이 따라가서 묻습니다. "도대체 대장님은 무어라고 얘기했습니까?" "뭘 뭐라고 해? 간단하지. 네 동생이 알렉산드리아에서 대주교가 되었다고만 말했지 뭐." 그 한마디에 수도사의 얼굴빛이 달라진 것입니다. 동생과 형 사이에도 이렇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 열등의식, 시기, 질투…… 이것을 완전히 버려야만 신앙생활도 바로 서는 것입니다.

이 유대사람들, 이들도 별것 아닙니다. 다 그런 사람들입니다. 다 일반적인 사람들입니다. 이 열등의식이 극복되지 못하고 시기로 발전했습니다. 시기 질투가 화산같이 터져 나올 때에 막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인사불성이 됩니다. 자기도, 시기하는 그 대상도, 제 삼자도 다 망칩니다. 우선 질투하는 자기 자신, 자기 마음을 망칩니다. 또 우리가 질투하는 말을 자꾸 하니까 그 말을 듣는 사람이 망치고, 내가 질투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도 망칩니다. 돌아가면서 깡그리 망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718절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사람들이 예수를 빌라도 앞에 끌고 왔을 때, 빌라도는 그 사람들이 예수를 시기하여 그렇게 하는 줄을 알아보았습니다.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합니다. 가야바와 그 당시 지도자들이 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했느냐, 그것은 물질 때문이 아닙니다. 권력 때문도 아닙니다.

질투 때문입니다. 여러분, 시기 질투라는 것이 죄가 아닌, 그저 생각으로 지나가는 것인 줄 알고 회개도 안하고 그냥 지나가려고 하는데, 사실은 참으로 무서운 죄입니다. 이것이 악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특별히 예수 믿는 사람들이 끝끝내 죄인 줄도 모르고 덜컥덜컥 걸려 넘어가는 게 바로 이 시기 질투입니다. 아주 쉽게 넘어갑니다. 그래서 신앙이 무너지고 마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유대인들이 시기 질투로 인해서 엄청나게 큰 실수를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만 그러는 게 아닙니다. 한번 시기와 질투의 노예가 되면 누구든 다 이렇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세요.

결국은 이성도 없고, 믿음도 없고, 자기들이 소중히 여기는 율법도 없습니다. 다 팽개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시기로 인한 악만 남았어요.

소위 경건하다고 하는 종교지도자들입니다. 회당의 지도급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행티를 좀 보세요. 사도 바울들을 가리켜 첫째,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다, 하고 소란을 떱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숫제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 바울과 실라, 이 사람들을 내치고 죽이겠다는 생각뿐이지, 도대체 이 사람들의 교리가 뭔지, 어째서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지, 바울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에 맞는지 안 맞는지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습니다. 다음시간에 공부하게 됩니다마는 본문에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11)"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교인에도 신사적 교인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좀 생각을 할 줄 압니다. 바울의 말씀을 자세히 들어보고, 또 사람들이 그를 따르면 '왜 따를까'를 좀 생각할 줄 알아요. 그러나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은 그렇지 못해요. 시기 질투에 사로잡히고 말 때에 앞뒤를 분간하지 못합니다. 그리고는 사도 바울의 말씀은 한마디도 들을 생각 안 해요. 알아보려 하지도 않아요. 덮어놓고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다'하고 있습니다. 이게 마음 문을 닫아버렸다는 것입니다. 마음 문이 닫혔습니다. 시기 질투가 있으면 들리는 것도 없고 보이는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 보니 이들이 괴악한 사람들을 동원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유대사람들로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종교인들이 깡패를 동원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깡패를 동원했습니다. 소위 율법을 위한다고 하면서 애초부터 율법을 어기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불량배 동원해 가지고 소란을 떤다는 것 자체가 유대사람으로도 못할 짓이요 회당의 지도자로서는 더더욱 못할 짓입니다. 그런데 그런 짓을 하고 있습니다. 또 소동을 떱니다. 좀 고요해야 생각이 나지요. 소동을 떨어 가지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입니까?

또한 오늘의 본문에 보니, 그들은 화가 치밀어 오르니까 스스로 걷잡지를 못합니다. 사실은 사도 바울을 잡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바울을 못 잡으니까 야손을 잡아다가 치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야손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화가 치밀어 오르니까 그렇듯 걷잡지 못하고, 그래서 바울을 잡으려다가 못 잡으니까 그 집에 머물렀던 야손과 그 일행, 그 집안식구들을 끌고 와서 소란을 피웠다, 그것입니다.

또 이들이 시기 질투하면서, 목적을 당성하기 위해서 하는 말을 좀 들어보세요. 유대사람들은 로마의 속국으로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사람하고는 원수입니다. 어디까지나 원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을 보면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7)"합니다. 그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가이사에게 충성했습니까? 이중으로 죄를 짓고 있는 것이지요. 사실 예수님을 재판할 때에도 그러하지 않았습니까? 빌라도에게 '만일 당신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으면 당신은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라고 저들은 말했습니다.

아주 정치적인 문제로 돌리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도 보니 가이사를 운운합니다. 유대사람들의 본심은 로마사람 황제 가이사를 이렇게 호칭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마치 자기들이 가이사의 충신이 된 것처럼 가장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보를 받고 놓으니라(9)"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보는 요샛말로 보석금입니다. 아니 이 사건이 어떤 사건입니까? 정말 중요한 사건이라면 보석금으로 놓아줄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 또 한번 잘못하고있는 것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점으로 볼 때,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유대사람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율법을 버린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을 거역한다고 자기네들이 지금 정죄 하면서, 사실은 자기네들 스스로 철저하게 율법을 거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 보면 데살로니가교회는 이런 핍박 가운데서 세워집니다. 애당초 시작부터 그러했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의 특성이 바로 이 핍박 가운데 세워졌다는 것이므로 데살로니가교회는 훌륭한 교회요 질적으로 아주 우수한 교회라고 사도 바울은 칭찬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의 자기 규례,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생활 규례와 생활습성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느냐, 그리고 시기와 질투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가를 말입니다. 또 이것을 제어하지 못할 때, 다시 말하면, 극복하지 못한 시기와 질투가 우리마음에서 끓어오를 때에 자기도 모르게 엄청나게 무서운 죄를 짓게 되어 악의 사람이 되고, 나아가서는 사단의 도구로 쓰인다는 것을 알아야할 것입니다. 여러분, 살인하고, 도둑질하고, 간음하고, 이런 것만 죄라고 여겨서는 안됩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이 빼버리지 못한 시기, 질투, 열등의식, '자기'라고 하는 것…… 이것을 완전히 빼버리지 못하는 한 참 은혜를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허구헌날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불러도 충만한 은혜를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마음은 언제나 평안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한번 잘못 발동하게 되면 악마가 따로 없습니다. 유대사람들이 악마 노릇을 한 것처럼 어느 사이에 우리도 악마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회개하되,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시기 질투를 깨끗이 제하도록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결케 하소서'하고 기도드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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