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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연구 총정리〓/바울 서신

바울서신 // 제 8 강

by 【고동엽】 2022. 10. 23.

바울서신 // 제 8 강

 

김세윤 교수

 

로마서 2

 

1. 로마서를 기록한 목적

지난번에 어디까지 했지요? 19페이지 중간까지. 자 그래서 바울이 로마서를 쓴 이유, 또는 로마서를 쓴 목적을 규명함에 있어서 4가지 요인들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로마 교회의 그 문제들에 있어서 바울이 이 편지를 보내가지고 로마 교회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도울려고 했느냐? 바울이 모든 편지를 그런 목적으로 쓰지요? 고린도에는 고린도 교회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便紙를 쓰고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에서 벌어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이고, 데살로니가 전후서도 마찬가지로 거기서 벌어진 問題를 해결하기 위해서 쓴거냐? 그게 하나의 토론의 요인이지. 근데 로마 교회에 대해서 우리가 별로 아는바가 없으므로, 로마서 자체내에서 로마 교회가 무슨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고, 바울이 그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는가를(돕는가를) 추측해 내거나, 아니면 로마서 밖의 자료들 --아주 어렴풋한 자료들 말이지-- 그런 자료들에서 우리가 당시 로마 교회가 아마 어떤 문제를 안고 있었을 거라고 추론해 보는 정도라 이 말이예요.

근데 그 중에 지난 시간에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아마 Claudius 皇帝의 유대인 축출이 로마 교회에 큰 변화를 일으켰을 것이고, 유대인들이 나중에 Nero의  Claudius 皇帝의 칙령 해제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이 로마에 돌아왔을 때에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 간에 관계가 어려워졌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추론해 가서 보면, 그렇다면은 로마서의 14-15장의 자료는 강한 자나 약한 자의 문제를 혹, 그 이방 그리스도인과 유대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의 문제로 해석을 해야 한다.

만약에 그렇다면 바울이 로마서를 쓴 목적중의 하나가, 이방 그리스도인들과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서로 옳은 복음에 근거해서 서로 잘 화합하도록 도울려고 이 편지를 썼다고 말할 수 있죠. 자, 그러나 그런 식으로 지금까지 추론해 갔단 말이야. 그러나 로마서 안에 로마 교회의 어떤 특정한 문제 인물이나 혹은 특별한 문제에 대항하는 어떤 특수한 논쟁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강력한 이의가 제기되어 왔었다. 1-11장에 걸쳐서 펼쳐지는 교리 부분에서 바울은 자기 복음을 설명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으로 ‘diatribe'로 알려진 수사적 방식을 채용하고 있으며, 그의 입장에 도전하는 ’적수들‘이 실재했다기 보다는 가상의 인물들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어요. 지금 거기(p19.위10째줄) 문단을 나눠서는 안되는데 괜히 자기들이 나누어 가지고, 즉 그 갈라디아, 고린도 전후서 문단이 계속 이어지는 거라구. 지금까지 19페이지 전까지는 무슨 방향으로 추론해 갔어요? 바울이 로마 교회의 유대 그리스도인과 이방 그리스도인과의 화합하도록 돕기 위해서 아마 이 편지를 썼는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추론해 갔다구.

이제, ‘그러나’로부터 거기에 대한 반론이라구. 그런데 그 중의 하나가 뭐냐면, 로마서 內에 바울이 어떤 특정한 issue나 또는 어떤 특정한 문제화를 다루는 흔적이 없다 이거야. 왜 그러느냐,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것은 로마서에서의 바울의 논쟁의 형식이 이른바 ‘diatribe’라는 수사적 방법을 쓰고 있는데 ‘diatribe’는 논객이, 논제를 전개하는 사람이 실제 자기 논지에 반대하는 적수와 맞상대로 토론을 주고 받는 것이 아니고, 자기 논지를 일방적으로 전개해 가는 하나의 수단으로 ‘가상적인 적’을 설정하여서 그 가상적인 적이 자기 논지에서 이렇게 반박을 하면 나는 이렇게 대답해 간다는 식으로 전개해 가는 수사적 방법을 말한다구. 그래서   R.Bultumann의 원래 博士學位 論文이 로마서 9-11장까지의 헬라 수사학의 한 방법인 ‘diatribe’ 형식에 대한 관찰이었다구.

그래서 그 이래로 많은 사람들은 로마서 1-11장의 바울의 “은혜로만, 믿음으로만 의인됨”이 복음이라는 설명에 간혹 반박하는 질문을 한다구. 가령 3:8, 6:1 이런 식으로 특히 9-11장에서 바울의 논지에 반박하는 문제 제기가 가끔 일어나요. 그게 실제 로마 교회에 어떤 바울의 논지에 적대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들이 바울의 복음에 반박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바울이 자기의 복음을 설명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당시 헬라세계에 유행했던 ‘diatribe’라는 수사학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고 본다구. 영어로 이걸 「 」라고 읽어요. 그런데 하여간 영어로 읽든지, 원래어로 읽든 지금 로마서에서의 바울의 논술 형식이 이런 헬라 세계에 만연되었다고 보고 diatribe라는 수사방법을 썼다고... 그러면 무슨 소리예요?

로마서는 로마 교회의 어떤 문제 인물이나 --바울을 적대하는, 바울의 복음에 반대하는 문제 인물이나-- 또는 로마 교회의 어떤 문제와는 전혀 관계 없이 순전히 바울이 자기의 복음 설명의 하나의 수사학적 방법으로 쓴 거란 말이예요. 그러면 “로마서는 로마 교회의 문제들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말이지. 왜 이렇게 생각하느냐 하면 또 갈라디아서나 고린도 전후서에 나오는 그의 적대자들이나 과오를 범하는 그의, 그가 그리스도인 만든 자들과의 논쟁과 비교해 볼 때, 바울의 로마서 논쟁은 아주 일반적인것, 일반화 된 것이며 특정한 적대자들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아요.

한번 생각해 봐요. 갈라디아서는 거기에 침투한 거짓 사도들, 거짓 선생들에게 아주 예리하게 지적하고 또 그들에 휩쓸린 갈라디아인들에게 “이 어리석은 갈라디아 인들아!” 하고 바울이 얼마나 자주 지적해서 말을 해요? 고린도 전후서도 마찬가지이지. 거기서 바울에게 대항한 녀석, 또 무슨 異邦人도 범하지 않는 음행을 범한 녀석, 또 바울의 사도직이 엉터리라고 하는 바울을 냉소적으로 말하는 초특급 사도들... 뭐 아주 생생하게 그들의 문제를 나타낸다구. 또 강한 자들, 즉 이방의 우상 숭배하는 Festival에 열심히 참여하는 그런 강한 자들, 또 뭘 먹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결혼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결혼해도 부부가 같이 생활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약한 자들, 또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서 온갖 혼란을 일으킨 자들, 성만찬 식탁에서 막 먹고 마시고 과소비하는 부자들, 먹을 것이 없고 마실 것이 없어 굶주리는 가난한 자들, 또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 바울이 다루는 어떤 특수한 issue가 나오지 않고 그 issue들이 아주 일반화 되어서 나타난다 이말이예요. 심지어 권면 부분에서 까지도, 즉 12-15장의 윤리적 권면 부분에 까지도 그의 권면은 구체적이라기 보다는 보다 일반적이라고 말해질 수 있다.

즉, 롬 12:3-13까지에서 마치 그가 고린도전서 12-14장에 다루었던 방식대로 그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제시하며 그런 맥락에서 영적인 은사들을 취급하고 있어요. 주장은 같지. 로마서 12장과 고린도전서 12-14장의 주제는 같아요. 성령의 은사 문제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몸으로 이해되는 교회의 맥락에서 다루어지는 것이 똑 같은 주제라. 그러나 로마서에서는 단지 대강적인 원리들만 취급하고 있지.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그러했던 恩師와 관련된 다양한 문제들에 관해서 특별한 교훈을 주지 않아요.

가령 방언을 하되, “집에 가서 하라. 예배때는 삼가하라.” 또는 예언을 하되 “차례, 차례로 한 사람씩 하고 다음 사람이 하려고 하면 전에 한 사람은 주저 앉고 또 필요하면 한 사람이 통역하고” 는 식으로 고린도 전후서에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을 한다구. 그러나 로마서에서는 그런게 하나도 없어요. 방언 은사도 있고 예언 은사도 있다는 이야기만 하지, 방언을 어떻게 해야 돼느냐? 바울은 뭐래. 방언은 집에 가서나 하라고 그러지. 그들은 교회에서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뭐 그게 별로 좋은게 아니라고 자꾸 그런다구. 방언은 자기만을 돕는 것이지 남 돕는게 못 되니까 은사중에서는 제일 하급 은사니까. 그거 너무 자랑하지 말라. 또 자기가 무슨 성령의 영감 받았다고 혼자 그냥 설교를 여나므시간씩 하면 안된다 이말이야. 그 다음 사람이 또 영감을 받았으면 그 사람이 하도록 먼저 사람은 앉고, 이런 식으로 하라, 차례로 하라. 이렇게 설명해 줘요.

그런데 왜 그러느냐? 고린도 교회에서는 이 은사들 때문에 예배모임 때마다 시장 바닥이 된다구. 가락시장만큼 시끄러워. 가락시장은 안가봤지만...  난장판이 되었어요. 서로 방언, 예언, 한쪽에서는 그냥 幻想을 본다고 난리를 피우고, 완전히 이건 시장이 되어 버렸다구. 그래서 바울이 질서를, 규율을 잡는 거예요. 그런데 로마서엔  그런게 하나도 없어요. 아주 은사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일반적인 원리들을 제시할 뿐이라. 이게 다 무슨 말이야? 로마서는 로마 敎會의 어떤 특별한 issue를 다룬다기 보다는 일반적인 교훈을 로마 교회의 issue와는 관계 없이 다룬거 아니냐 그 말이지.

또 로마서 14-15장과 고린도전서 8-10장의 비교는 둘 다 연약한 자, 강한 자 문제를 다루는 것은 공통점이지. 그러나 전자에서 바울이 경쟁적 관계에 있는 연약한 자와 강한 자, 두 진영들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고린도 교회에서 실제적인 갈등의 상황에서 얻은 강한 자와 약한 자들이 그리스도인의 친교 속에서 어떻게 적절하고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에 관한 일반적 원리를 제공한다는 것을 보여줘요. 아까 로마서 12장과 고린도전서 12-14장과 비교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로마서 14-15장의 연약한 자와 강한 자의 관계를 다루는 장과, 고린도전서 8-10장의 관계를 다루는 같은 관계를 다루는 고린도전서 8-10장을 비교해 보면 또 똑같은 결론에 도달한다구. 고린도 교회에서는 아주 구체적인 문제들이 생생해. 아까 이야기한대로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사다 먹어야 되느냐? 안 먹어야 되느냐? 이방인 친구 집에 초대를 받았을 때 같이 식사를 해도 되나, 안되나? 또 그 당시 市나, 직업단위로 그 市의 神殿에서 벌어지는 Festival에 참여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이런 문제들을 가지고 연약한 자와 강한 자들이 정면으로 대립하고 있은 상황이지... 거기에서 바울이 요런 문제들을 하나 하나 다루어요.

그러나 로마서 14-15장에는 구체성이 전혀 없고 일반적인 원칙만 다루는데, 로마서가 고린도 전후서 후에 쓰였으므로 곧 고린도의 복잡한 문제들이 해결된 후에 쓰였으므로 뭐라고 말하 수 있느냐? 고린도의 구체적인 강한 자와 약한 자의 관계의 갈등에서 얻은 체험에서 --그들을 지도한 상황에서-- 얻은 통찰력을 바울이 로마 교회에 일반화 해서 이런 연약한 자와 강한 자의 문제는 어느 敎會에나 있어요. 表出양식, 구체적인 표출 양식은 조금 다를지 모르나 항상 있는 거라구. 한국 교회에도 있고, 미국 교회에도 있고, 고린도 교회에도, 로마 교회에도 항상 있는 문제라구. 연약한 자와 강한 자의 문제, 이 문제를 로마 교회에 그런 문제가 異邦 그리스도인들 강한 자들과 유대 그리스도인들 약한 자들의 실재를 지금 머리 터지게 싸워서, 바울이 그들을 교정하려고 그런거 같지는 않다 이말이예요. 로마서의 이런 일반적 특성들을 강조하는 학자들은 그 편지가 로마 교회의 어떤 특수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는 견해와, 또 바울이 본 서신을 기록한 목적도 로마 교회 內의 어떤 오류들을 시정하려 하거나 혹은 분쟁을 일삼는 분파들을 하나로 연합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는 견해들을 부인한다 이말이예요.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무슨 이야기였어요? 아까는 로마, 주로 Claudius의 칙령을 배경으로 해서 많은 추론을 한거지. 처음에는 아마 유대인들이,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그 교회에 다수였을 거지. 그들이 다 쫓겨났다가 몇년후에 다시 돌아오니까 그 사이에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다수가 되었어요. 유대 그리스도인과의 그 관계에 주로 발생했을 것이다.

그런데 마침 로마서에서 다루는 중심 문제 중의 하나가 유대 그리스도인들, 유대인들 문제아니냐? 9-10까지, 더구나 로마서 14-15의 연약한 자, 강한 자 이런 문제 다루지 않느냐? 이렇게 아마 “바울이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옳바른 복음에 근거해서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나누고 살도록 하기 위해서 이 편지를 쓰지 않았나?” 이런 식으로 argument해 가는 거예요. 지금 이 19페이지 후반의 “그러나”로 부터 시작해서는 그 반대로 지금 반증, 반대로 논증하고 있는 거예요.

첫째, 로마서의 모든 토론은 구체적인 적수(적대자)를 두고 그들과 토론한다기 보다는 가상적인 ‘적대자’를 생각하고 벌이는 수사적 방법인 diatribe에 부하다.

둘째는, 로마서에서 다루는 issue들은 전부 구체성을 결여하고 일반적인 원칙적 토론이지 구체성이 없다. 성령의 은사를 다루는 문제 연약한 자와 강한 자 다루는 문제 다 일반적이고 원칙적인 것이지 구체성이 없다. 그런걸 보면은 바울이 로마서에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이 편지를 쓴 것 같지 않다는 그 말이지.

그러나 또 여기에 대한 반론, 이런 의견을 제시하는 --앞에도 내가 썼지-- R.J. Karris, G. Bornkamm, V. Furnish --Dallas에 있는 Sauthen Massachusetts University 內에 Ferkins School Theology에서 교수하는-- 이런 학자들이 그런 주장을 하는데, 거기에 반해서 K.P. Donfried는 강력한 반론을 제기하는데 그가 제기한 것 이 diatribe 라는 것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해요. 도대체 바울 당시에 문학 쟝르로서에 diatribe가 존재했었다는 것을 의심하는 몇몇 고전학자들에 호소하면서 그러니까 얼마전까지만 해도 헬라의 수사 형식하나가 “diatribe"로 특히 이 stoic, 냉소주의 철학자들에 의해서 많이 활용된 문학 쟝르라 그렇게 봤다구. stoic 주의자들이나 이 냉소주의 철학자들이 돌아다니면서 자기들의 철학을 가르칠때 관중들 모아놓고 “내가 이렇게 말하면 누가 이렇게 반박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식으로 누가 자기에게 무엇을 반박한게 아니고, 자기 혼자 가상적인 적이 자기 논지에 대해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면 그건 實際로 문제가 있다라는 것을 자기가 이렇게 보여준다는 식으로 전개해 나가는 그런 diatribe가 存在했다고 봤다구. 아주 헬라적 수사학에서 중요한 쟝르로 보았다구.

그러나 최근에 몇몇 고전 학자들이 “거 diatribe라는 쟝르가 어디가 있어? 그런건 괜히 현대학자들이 가상한거지 그게 뭐 있었나?” 라고 제기하는 학자들이 있어요. 그런 학자들에 호소하면서 Donfried는 Bultumann과 그의 영향을 받아 로마서에 있는 바울의 주장을 로마 교회의 상황과는 관계없는 ‘diatribe’라고 지적하는 자들을 공격한다. 그러니까 로마서가 로마 교회의 특정한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 이유중의 하나가 뭐라 그랬죠? ‘diatribe’ 수사학 형식을 띄는 거지. 실제로 로마 교회에 무슨 바울의 가르침에 반대하거나 또는 바울의 윤리적 가르침에 반대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는 거지.

그런데 ‘diatribe’라는게 존재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그걸 좀 봐야지. 고대 문학작품에 다양한 쟝르 속에 발견되어지는, 우리가 고작해야 ‘diatribe'와 유사한 것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문제에 관한 H. Rahn의 결론과 그와 및 다른 학자들의 서신-수필 (letter-essay)형식 쟝르에 관한 묘사로부터 유추된 통찰을 통해서, Donfried는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곳 교회의 구체적 상황을 다루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말이예요. (거기에 그 다시 번역한 친구가 어순을 잘못해 가지고) 바울은 로마서에서 교회의 구체적 상황을 갈라디아와 갈라디아인들과 그리스도인들 문제에 결부시켜 형성한 자신의 생각을 사용하여 다루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말이예요. 그러니까 Donfried가 뭐라 그러느냐면, 바울이 로마서에서 로마 교회의 구체적인 문제를 다룬다 이말이예요. 그런데 어떻게 다루느냐? 갈라디아교회와 고린도교회에서 자기가 한 체험에서 얻은 통찰력을 사용해서 로마 교회의 구체적인 문제를 다룬다 이 말이예요. 알겠어요?

그러니까 이 Donfried는 ‘diatribe’라는 문학 쟝르가 있은게 아니고 여러 쟝르에 연극, 연설, 시 여러 문학 쟝르에 이렇게 가상적인 적대자를 상정하여서 주고 받는 그런 토론 양식은 있었다. 그래서 그걸 diatribe와 같은 토론 양식이 --여러 문학 쟝르에  diatribe 쟝르가 있은게 아니고-- 여러문학 쟝르에 diatribe 같은 그런 가상적인 적수를 상정하여서 주고 받는 그런 것이 있었는데, 로마서가 바로 그런 정도의 성격을 띄고 있는거고 로마서를 구태여 문학 쟝르로 구분한다면 letter-essay라고 해야한다. 서신의 경격을 띤 ‘논문’이라고 말해야 한다. 또는 논지를 담은 ‘서신’으로 봐야 된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제 바울이 구체적인 로마 교회의 문제들을 다룬다. 그런데 얼마전에 갈라디아 교회에서 유대주의자들과 논쟁한, 그래서 얻은 통찰력, 또 고린도 교회에서 복잡한 문제들을 일으킨 자들과의 논쟁을 얻은 통찰력, 이런 것들을 사용하여 가지고 바울이 로마서를 썼다. 이렇게 주장해요. Donfried가 .

그러나 다시 이제 Donfried의 주장에 대한 또 반박 그러나, 토론이 오고 가고 하는거야. 문학쟝르로서 diatribe를 거부하고 대신에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논증에 관하여 diatribe와 유사한 문제라고 일컫는 것은 R.J. Kanis가 올바로 反駁했듯이 바울이 로마서에서 그곳 교회의 실제상황을 言及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證據가 되지 못한다는 말이예요.  diatribe라는 쟝르도 없었고 다만 여러 文學 쟝르들 속에 diatribe같은 그런 토론 形式이 있었다고 해서 그게 로마서가 그런 구체적인 證據가 되려 못되요. 아무 것도 아니라 말도 안된 소리라. 그럼 論證도 안되지. Donfried가 한 15Kg쯤 되는 프로 레슬레쯤 되는 巨人이라구. 그리고 이놈이 꼭 돼지 같이 생겼어요. 그래가지고 이 대개 신약학회 할 때마다 어디서 큰 소리가 나서 보면 거기에 K.P. Donfried가 앉아 있다구. 목소리도 얼마나 큰지 아주 그냥 모든 사람을 압도하는 목소리라고. 눈도 꼭 돼지같이 생겼고 괴물같이 생겼다구. 그런데 뭐 미국에 아주 Smith대학이라고 여자 대학인데, Ivilive중에 여자대학중에 하나로서 아주 좋은 대학이라구. 거기 교수하는 녀석인데, 뭐 꽤 많이 알아요. 이런 바보같은 소리나 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남긴다. 즉 로마서에 diatribe와 유사한 본문들 속에 보여지는 적대자들이 실존 인물인가 아니면 가증의 인물인가 하는 문제는 그러한 본문들을 상세하게 주석함으로써만 결정될 수 있는거지. 그게 “진짜 diatribe냐 아니면 diatribe와 유사란 거냐?” 그런 것으로 결정될 것이 아니라 이말이예요.

자, 로마서에 로마의 기독교 공동체 문제점들이 반영되어 있다고 보는 대다수의 학자들은, 그 문제를 유대인과 이방 그리스도인들 간에 갈등의 觀點에서 定意해요. 아, 유대인과가 아니고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간의 갈등의 관점에서 정의한다 말이야. 그러나, 그러면 구체적으로 보자 이말이지. 로마서 14-15장의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각각 연약한 자로, 강한 자로 指稱이 되어서 그들간의 갈등을 다루는 것인가, 로마서 14:1에서 15:13까지의 연약한 자를 유대파 그리스도인들과 동일시 해 버리려는 것은 얌전히 설득력 있는 主張이 못된다. 왜냐하면 그것에 나오는 연약한주의자들은 채식주의로 나타나요. 고리를 전혀 안 먹는 채식주의자들로 나타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채식주의자가 아니었어요. 그래서 이게 큰 문제라. 이게 바울이 로마서에서 구체적인 문제를 다룬다면 곧 연약한 자들과 강한 자들의 갈등을 다룬다 말이예요. 연약한 자들은 유대 그리스도인들로 생각을 해야 될텐데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채식주의로 나타난다구. 그런데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채식주의가 아니예요. 그래서 이게 문제야.

그래서 사실상 Karris는 강한 자와 연약한 자들의 정체를 밝혀 주려는 종교사학파의 모든 시도들은 완전히 실패했으며, 이 실패야 말로 바울이 로마의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실제적 상황과는 무관하게 로마서를 쓴 것으로 보는 자신의 견해의 근거들 중 하나라고 선언한다. 고린도전서 8-10장의 연약한 자, 강한 자는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로 확연히 쉽게 밝혀져요. 그러나 로마서의 14-15의 연약한 자와 강한 자들은 그들이 누구였는지 밝힐 수가 없단 말이예요. 그들이 어떤 자들인가. 어떤 과거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리고 지금 어떤 신학적 주장을 가지고 있기에 그들이 한쪽은 연약한 자, 채식주의자였는가? 그리고 해와 달, 이런 것을 존중하고 했나? 여러가지로 종교사학적으로 “이들이 유대 그리스도인이었다. 이들이 무슨 이방 금욕주의자들이었다.” 뭐 여러가지로 생각해보나 그게 다 성공하지 못했다 말이야. Karris는 이점을 들어서 바울이 로마 교회에 구체적인 狀況을 지금 다루는게 아니고 일반적으로 原則的으로 다루는데 채식주의를 하나의 illustration으로 다루고 있다고 봐야된다 그런 말이예요.

또 로마서 16장의 인사목록으로 미루어 보아서 로마의 여러개의 가정 교회들이 실재했을 것을 확인한다 해도 그것은 서로 상이한 인종적, 신학적 집단들의 정체를 밝히는데는 별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 비록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여러 집단이나 가정 교회 등지에 산재해 있었다고 하더라도 바울이 그들을 하나의 교회로 끌어 모으려고 했다는 증거를 로마서에서 찾아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Karris같은 사람들은 “로마서가 로마 교회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쓴 편지가 아니다.” 이말이죠.

다른 한편 로마서 14:1-15:13의 강한 자와 약한 자에 대한 바울의 충고를 그가 고린도교회의 分爭을 해결하였듯이 양자 사이의 올바른 관계 수립을 위한 그의 일반적인 원리의 방식으로서 단순하게 파악하려는 시도도 역시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9-10장에 나오는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의 분쟁의 근본은 곧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인 반면에 로마서 14:1-15:13에서는 문제의 일단이 약한 자들의 채식주의와 그들의 어떤 날 또는 달을 지키는 것이예요.

그러니까 Karris 같이 로마서가 일반적인 편지다. 뭐 로마 교회의 연약한 자 강한 자가 구체적으로 있어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 보다는 바울이 어느 교회나 이 강한 자와 연약한 자가 있어서 복음의 자유를 분명히 깨달아 가지고 그 자유를 행사하는 자 그런데 그 도가 좀 지나쳐서 윤리적 한계를 넘어서서 행사하는 강한 자와, 복음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깨닫지 못해가지고 율법주의로 생각하는 그 연약한 자들이 어느 교회에나 항상 있는 법이라고 바울이 생각하고, 그러므로 로마 교회에도 그런자들이 있어서 그런 문제가 있을 거다 생각해서 자기가 지금 최근에 고린도에서 실제로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의 분쟁을 해결하는데서 오는 그 체험에서 얻은 통찰력을 지금 로마 교회에 일반적으로, 원칙적으로 썼다면 그러면 무엇을 예로 들어서 강한 자와 약한 자의 문제를 바울이 썼을 거예요.??? 론 예를 들어서 썼겠지 왜? 고린도 교회에서 그래서 실제로 바울이 다룬 문제가 뭐예요?  약한 자들과 강한 자들이 첨예한 대립을 보인 문제가 뭐예요? 우상에 바쳐진 제물아니야.? ? ? 그러니까 그것을 예로 들어 가지고 로마 교회에 쓸거 아니냐 이말이지.

로마 교회와의 구체적인 관계가 없이 순전히 고린도에서 얻은 체험에 근거해서 바울이 일반적인 충고를 로마인들에게 주고자 했다면 그 예를 무엇으로 들었겠어? 이방 사회에서 항상 일어나는 가장 절실한 문제, 그리스도인들로서 이제 자기들의 community, 지역사회의 잔치에 참여할까 말까, 시장에 나와서 팔리는 모든 고기는 우상에게 한번 바쳐진 의식을 통해서 도살되었는데 그것을 먹어야 되느냐 이게 아주 첨예하게, 아주 절실한 문제지. 그걸 예로 들어서 로마인들에게 썼을것 아니야. 그런데 로마서 14:1-15:13에는 그게 안 나온다구. 도리어 뭐가 나와요? 전혀 다른 문제, 채식주의 문제, 날, 달 이런 절기 지키는 문제가 나온다구.

이것은 우리로 뭘 생각하게 하죠?  “아 로마 교회에 진짜 채식주의 문제가 있은 모양이지? 아니면 날, 달을 지키는 연약한 자들이 있은 모양이지?” 이렇게 우리를 상상하게 하죠. 그러니까 지금 이 증거가 어렵게 되어 있다구. Karris는 뭐라고 주장한다구?  이 로마 교회의 연약한 자들의 종교사적 배경이 무엇이었는지 우리가 그냥 알 수가 없어. 이들이 유대인이었다고 할 수가 없단 말이야. 왜?  유대인들은 채식주의가 보통 아니었는데, 혹 옛날 고대 문서가 갑자기 어느날 발견이 되어서 유대인들중 일부가 채식주의자였다는 것이 발견되면 몰라도 그렇지 않는 지금까지는 이들을 유대인이라 할 수 없어요. 우리가 이렇게 알려진 유대 공동체 어디도 채식주의 아닌자 없으니까. 그리고 충고의 이 일반적 성격 이런 걸 들어서 바울이 로마서에 구체적인 문제를 다루기 보다는 고린도 교회에서 다룬 체험에서 나온 통찰력을 일반적으로 로마인들에게 주었다 이렇게 생각한다 말이야.

그러나 반면에 그렇다면, 아 고린도에서 실제로 다룬 문제 --로마도 이방인 세계니까 거기서 실제로 일어날 문제--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어야 되느냐 안되느냐? 偶像 崇拜가 곁들여진 Festival에 참여해야 되느냐 안되느냐?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 친구가 식사에 초대하면 가야 되느냐 마느냐? 이런 문제를 다룰 것이지, 전혀 다른 채식주의 문제, 날, 달 문제, 이런 문제를 다루고 있어요. 이것은 “로마 교회에 그런 문제가 있었다는 거 아니냐?” 이런 식이야. 지금 증거가 어떻게 되요? 서로 이 말도 맞는 거 같고 저 말도 맞는 것 같지? 여러분들 이렇게 증거를 양쪽 논증, 어떤 주장을 할 때 그 증거를 대고 그 증거의 무게를 달아야 돼요. 어떤게 더 무거운가? 무게를 달아야 돼요. 이렇게 토론해 가는 거예요.

만일 로마서 14:1-15:13에서 바울이 로마 교회의 실제적인 상황에 관하여 언급함이 없이 단순히 보다 양심이 주저됨이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그 약한 자들이지-- 그렇지 않은 그리스도인들 --강한 자들이지-- 사이에 적절한 관계에 대한 원리만을 논하려고 했다면, 그는 고린도에서의 경험에 비추어 고린도의 두 집단 사이의 문제들을 예로 들어 그것을 논의하지 않았겠는가? 더구나 그 문제는 로마에서도 분명히 절실한 문제라. 채식주의자와 특정한 날 준수에 관한 언급은 로마서 14:1-15:13에서 바울이 로마에 있는 특수한 그리스도인 집단을 취급하고 있음을 시사하지 않는가?

자, 여러분들 지금까지 복잡하게 주장이, 서로 증거를 대면서 논쟁하는 것을 봤다구요. 지금 구분에서도 한쪽은 바울이 로마서를 뭐라고 썼다? 로마 교회의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썼다. 다른 한쪽은 “아니라. 로마서는 로마 교회와 관계없이 일반적인 바울의 충고의 전제다.” 양쪽을 정리하면, 로마 교회의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썼다는 사람들은 어떤 증거를 대는 거야? 아주 일반적인 반증으로써 로마 교회의 이방 그리스도인들과 유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Claudius 황제의 칙령 때문에 그 문제가 발생했을 것이다. 또 하나 뭐였지? 연약한 자와 강한 자의 문제, 이거 뭐 보며는 일반적인 것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왜? 고린도 교회에 얻은 통찰력을 일반적으로 일반화해서 쓴 것이면 아 ? 를 예로 들어서 할 것이지 왜 구체적으로 아주 구체적인 채식주의나 날, 달 준수하는 문제를 issue로 삼는냐 이런거지. 이런거.

반면에 로마서가 로마 교회의 문제와 관계없이 일반적인 편지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뭘 증거로 삼아요? 이 로마서의 적대자는 진짜 적대자가 아니고 가상적인 적대자를 지금 설정해서 벌리는 ‘diatribe’형식이다. 또 그 충고가 고린도서나 갈라디아서와 비교해 보면 일반적이란 말이야. 성령의 은사문제 다루는 것이라든지, 또 강한 자와 약한 자 다루는 문제도 굉장히 일반적인 거라구. 또 하나 뭐예요? 이 약한 자들이 유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 왜? 유대 그리스도인은 채식주의자가 아니니까. 지금 이런걸 왔다갔다 했단 말이야. 어느것이 더 설득력이 있은거 같애? 여러분들!  증거가 어느것이 더 무거운거 같애? 저울이 어느쪽으로 더 기우는것 같애?

자 그다음 거기에 대해서는 아직 몰라요. 우리 이런 때는 “양쪽의 증거가 아주 팽팽히 맞섰다.” 그렇게 봐야 된다구. 팽팽히 맞서 있어요. 지금. 그러니까 이제 다른 요인들도 봐야지요.

 

<세번째 요인- 로마서의 일반적, 체계적 특성> p25

여기 제기한 마지막 질문에도 불구하고 로마서가 대체로 일반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가 어렵다. 로마 교회에 대한 바울의 지식은 별로 많거나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 로마서는 수신인들의 특수한 문제들에 대한 아주 막연한 언급들과 아울러 그 일반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바울의 서신들 중에서도 매우 유별나다. 그것은 또한 바울의 복음에 대한 아주 광범위 하고 체계적인 해설을 한 서신이라는 특징이 있다. 이 특성 때문에 Melanchthon은 로마서를 ‘기독교 교리의 개요’ 라고 명명하며 다른 종교 개혁자들도 그것을 ‘그리스도인 신앙의 조직적 교리 체계’로 취급했다. 그러나 로마서에는 기독론, 종말론, 성찬, 교회정치등에 대한 포괄적인 제시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그와같은 고전적인 이해는 더 이상 지지받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일반적 권면을 동반한 구원론에 대한 충만하고도 체계적인 강해는 몇몇 현대 학자들로 하여금 바울이 그 서신을 기록한 의도 속에는 <교리 문답적 목적이 있다고 주장>하게 만들었다. 代表的으로 獨逸의 로마書의 큰 註釋을 쓴 O. Michel의 같은 교수들이어요.

로마서의 체계적이고 일반적인 특성은 여타의 바울 서신들 사이의 공통된 주체들과 비교할 때 더욱 분명하게 보여진다.

*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고 은혜에 의한 그리고 믿음을 통하여 얻는 의임됨, 칭의(롬 1-11에 체계적으로 전개, 갈 3-4, 고전 1:30, 고후 5:21, etc에 덜 체계적으로 산재해 있어요).

*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로마서 4장, 갈라디아서 3장).

* 아담과 그리스도(롬 5:12ff, 고전 15:22ff, 45ff).

* 율법, 죄, 그리고 죽음 아래 놓여 있는 육신의 속한 사람의 비참함(롬 7:7-25),고전 15:56f).

*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심, 성령의 증거와 우리의 양자됨(롬 8장, 갈 4:4-6).

*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와 그의 지체들로서의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이 은사들, ? (롬 12장, 고전 12-14장).

*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롬 14-15장, 고전 8-10장).

이런 공통된 주제들의 목록과, 신학적으로 더욱 숙고하고 정교하며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그것들을 로마서에서 취급한 방식은 그러니까 두 가지이지. 하나는 로마서에서 다루는 주제들이 다 바울이 그 이전 편지들에서 단편적으로 다룬 편지들의 집대성이란 말이야. 또 하나는 로마서에서는 훨씬 더 체계적이고 더 깊은 묵상을 거친 원만하게 전개된 거란 말이야. 다른 편지, 이전 편지들에서는 단편적이고 덜 체계적인 것인데 반해서 이 성격은 바울이 로마서를 쓴 목적이 그가 동방에서 여러해 동안 선교사업을 하면서 다듬어졌던 자신의 신학적 사상을 요약한 것으로 보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로마서를 쓴 目的이 뭐야? 로마 교회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뭐라구? 지금까지 자기가 동방 선교에서 얻은 신학적 통찰력을 잘 정리 요약한거라 말이지. 체계적으로 정리, 요약한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우리로 하여금 “바울이 왜 그것들을 요약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는가?”를 이해하게끔 도와주는 로마서 기록당시의 바울의 상황을 고려해 봄으로써 더욱 강화 된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로마서 기록 당시의 바울의 상황> p29-

이게 로마서를 쓴 目的에 다루는 결정하는 4번째 요인이지. 로마서 기록당시의 바울의 상황 한번 읽어봐요. 로마서 1:1-16를 읽어봐요.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너희도 그들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을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나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형제들아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이 로마서의 서문이 가장 길어요. 모든 편지에서 유독히 길다구. 여기서 바울이 아주 이 민감하게 편지를 쓰는데 뭐라? 그래 한마디로 자기가 로마에 가고자 하는 강력한 의사를 표시하지. 여러번 가려고 그랬는데 못갔단 말이야. 자기가 모든 이방인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할 빚을 진 자로 로마 교회의 이방 교회인 자신이 세우진 않았어도, 로마 교회도 자기 사도적 권위 아래 들어감을 은근히 바울이 지금 말하면서, 그래서 자기가 세우지 않은 교회라도 거기가서 복음 선포할 권리가 있지. 다른 이방 교회와 마찬가지로 거기서도 열매를 걷으려 하고 그들에게 은사를 나누어주어서 그들을 강화하고, 또 뭐라 그래요? 자기도 그들의 도움을 얻고자 한다. 그래서 로마에 여러번 가기를 원했는데 지금까지 길이 막혔었다. 이렇게 굉장히 긴 서문을 달아요. 모든 편지들 중에 제일 긴 서문이야.

다시 로마서 15:14-끝절까지 누가 또 한번 읽어봐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음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 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라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안ㅎ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위에 건축치 아니하려 함이니 기록된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하던 것이 여러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해전 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어 줌을 바람이라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카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증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내가 너희에게 나갈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의 사람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 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 나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여기서 --이 로마서 결론 부분에-- 다시 자기가 서론 부분에서 재기한 자기 로마 교회로의 여행 그리고 로마인들의 도움을 받아가지고 스페인으로 선교여행을 하고자 하는 의지를, 그러한 바램을 강력히 표현하지요. 이곳에서 자기 집까지에 변방에서의 선교를 한마디로 요약하면서 앞으로의 서방에서의 선교의 계획을 발표하면서 로마 교회의 지원을 지금 강력히 요청하고 있어요. 그러나 서방교회로의 선교하기 전에 동방 교회에서 얻은 예루살렘을 위한 헌금을 지금 예루살렘에 전달하러 가야되는데, 그 길이 상당히 위험 천만한 길이야. 그래서 로마인들에게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지금 하고 있어요. 자 그래서 로마서의 서론과 결론에서 바울은 로마서를 쓸 당시의 자기의 상황에 대해서 상당히 소상하게 지금 밝히고 있어요. 그걸 다음과 같은 4가지로 정리해 본다구.

1. 동방에서의 선교사역을 완수한 후 그는 이제 막 서방에서의 선교에 착수하려는 때에 당도했어요. 즉 그는 사도로서의 생애에 있어서 전환점에 서 있어요. 거기 19절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서 빙 둘러서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충분하게 선포했노라” 편만하게 전한거라 그말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가득 채우노라 그말이예요. 지금 여러분들 지도를 한번봐요. 예루살렘을 먼저 한번 찾아보고 그 다음 일루리곤을 한번 찾아 보라구. 일루리곤이 어디에 있는가? 지금 바울이 뭐라 그러느냐면, 지금 바울이 고린도에서 편지를 쓰고 있어요. 고린도에서 로마로 지금 편지를 쓰고 있는거라. 이 상황속에서 뭐라 그러느냐면 지금까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해서 두루 행하여, 두루행하여 그말이 ?이라는 전치사인데 빙 둘러서 그런 뜻이야. 빙 둘러서 예루살렘으로부터 빙둘러서 일루리곤까지 복음을 완전히 전했노라. 그래서 이 지역에서 더이상 일할 곳이 없어서 이제 로마를 거쳐서 스페인으로 가려고 그런다.

2-3년동안 에베소에 묶여 있었어요. 고린도교회 문제를 해결하느라고. 그래서 여러번 지금 로마로 일루리곤쯤 갔을 때는 길이 있어서 로마로 갈 수가 있었는데, 바울이 그렇게 하지 못하고 여러해 동안(2-3년) 에베소에 고린도 문제로 인해 묶여 있었다구. 여기서 고린도에 편지를 보내고 디모데를 보내고 디도를 보내고 세월을 많이 보냈어요. 그런데 드디어 고린도의 문제가 평정이 된 거라. 그러니까 바울이 직접 방문해서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에 이 헌금을 이제 다 거둬 가지고 예루살렘에 지금 갔다 주려고 하는거야. 그리고는 어떻게 하려고? 그리고는 이제 로마로 와서 드디어 그의 로마제국의 서반부 문제의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는 아주 중요한 시점에 서 있어요. 그래서 지금 바울은 이 로마서 15장 끝에서 지금까지의 자기의 선교를 로마제국의 동반부에서, 또는 정확히 말하면 동북부에서의 선교를 완전히 마친 것을 말해요. 예루살렘으로 부터 일루리곤까지.

지금까지의 바울의 선교를 위해서는 안디옥이 바울의 지원교회였다구(후원교회, 모교회). 그래 이제 바울이 그의 선교사업을 로마제국으로 --로마제국의 서반부로-- 옮겨 감에 있어서 안디옥은 너무 멀어. 그러니까 로마 교회가 --안디옥 교회가 했던 식으로 앞으로는 로마 교회가-- 그를 위해서 지원(후원)교회가 되어주길 바라서 이 편지를 쓰지. 지난번에 이야기 했죠. 그게 로마서를 쓴 가장 직접적인 목적중의 하나라 했지? 그건 분명하다고 했지. 그래서 지금 바울은 이 로마서를 쓰는 시점에 AD 57년쯤에, 봄쯤에 고린도에서 이 동반부의 선교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이제 여기를 완전히 떠나서 서반부로 선교의 지역을 옮기려고 하는, 아주 이 사도의 생애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에 서 있다 이 말이예요.

2. 그는 갈라디아, 고린도, 그리고 기타지역에서의 유대파 기독교인들의 훼방과 그의 회심자들, 그가 전도하여 그리스도인 되게한 자들의 오류에 직면하는 매우 어려웠던 8여년의 세월을 이제 통과하고 마쳤어요. 드디어 고린도 문제가 평정되므로 드디어 그 어려웠던 기간을 이제 지나온 셈이야.

3. 수년간에 걸쳐 커다란 어려움을 겪으면서 아시아, 마게도냐 그리고 아가야의 이방 교회들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연보모금을 방금 끝내고 나서, 고린도에서 오해가 생겨가지고 문제가 많았죠. 그런데 드디어 거기서도 이제 다, 이제 성공적으로 끝내서, 그는 이방교회의 대표단들과 함께 모금된 구제연보를 가지고 이제 막 예루살렘으로 향하려는 시점에 서 있었다(로마서 15:25이하, 행 20장).

4. 그는 유대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유대인들 박해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 의한 환영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크게 염려하고 있었다. 유대人들이 물론 자신을 박해 하겠지만, 바울이 지금 확신할 수 없는 것은 예루살렘 교회 자체가 그의 헌금을 받아 줄지 안 받아 줄지 모른다구. 그래서 이 헌금이 그들에게 받음직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지금 그러잖아요.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이 그 헌금과 자신을 받아 줄 것인가? 그리고 이방 그리스도인 대표자들을 그리스도안의 형제들로 받아 줄 것인가 아닌가가 지금 불확실하다는 말이예요. 그래 이런 상황에 바울이 처해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바울이 지금 글을 쓰고 있다.

자, 이런 상황을 감안해서 G. Bsrnkamm은 “왜 바울은 고린도로부터 로마로 곧장 직행하지 않고, 그의 개인적인 참여 없이도 아주 간단하게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시켜서 모금된 연보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보낼 수 있었을 텐데, 하필이면 자신이 직접 취합된 연보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대단히 위험스런 여행을 감행했느냐?”고 묻는다. 그렇죠? 자기는 로마로 해서 스페인으로 가기를 원했으니, 이제 하루 빨리 싸게 싸게 그리고 갈 일이지, 왜?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그래. 또 예루살렘은 아주 위험하다 말이야. 거기 각 교회 대표단을 잘 구성해서 디모데나 거기에 대표로 삼아서 보낼 일이지 왜 자신이 직접 가야돼? 위험을 무릅쓰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로마서의 목적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

참, 갈 2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편은 바울과 바나바 다른 한편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사이에 선교지를 분할했지?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들에게 가기로 하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유대인들에게 가서 선교하기로 사도적 합의를 했다 이말이야. 그 후에 이방 유대파 그리스도인 사이에의 교제의 표현으로 연보 계획을 바울이 수행했죠? 갈라디아서 2:10에 보면 이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이 바울에게 무엇을 부탁했어? 가난한 자들을 계속 생각해 달라고 부탁한 거지. 그래서 바울은 그 유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자기가 개척한 이방 교회를 위해서 헌금을 걷는데,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자들을 돕는 구제 목적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양 교회의 하나됨, 그 교제의 확인으로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교회와 유대 그리스도인 교회의 하나의 교회됨, 그리고 성도들의 교제의 sign으로 한 거예요.

그리고 또 하나의 목적이 또 있다구. 또 효과적인 목적이 있어요. 구약의 선지자들로 부터 내려오는 중요한 종말론적인 소망하나가 ‘종말에 하나님의 영광이 시온에 나타나면 뭐 그 하나님의 영광의 극치가 온 세상에 전파되어서 모든 민족들, 열방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온 세상을 덮어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래서 자기들이 지금까지 섬기던 신들이 전부 우상에 불과한 것을 알고 우상을 다 버리고 자기들의 보화들을 가지고 시온에 순례와서 진정한 神인 야웨를 예배하고 그의 구원에 동참한다는 사상’ 이것을 보통 뭐라고 부르느냐면 이방인들의 시온에 대한 종말론적 숭배사상이라 그래요. 구약의 선지자들로 부터 내려오는 아주 중요한 이방의 종말론적 소망중의 하나야.

바울은 지금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메시야의 오심으로 그리고 그를 통한 구원의 성취로 바로 이 선지자들의 이 소망이 이루어 졌다고 본다구. 시온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어요.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가 이방인들의 사도로서 이 시온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이방 민족들에게 전파하는 이방의 빛으로 지금 나서고 있는거야. 이방 모든 민족들의 자손, 시온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 그를 통해서 이루신 그의 구원을 바울이 지금 전파하는 거라. 그 시온의 영광의 빛이 온 세상에 지금 비쳐지고 있는 거예요. 누구를 통해서? 이방인 사도인 바울 자신을 통해서. 그래서 이방인들이 어떻게 되는거야? 우상을 버리고 산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있는거야. 대표적으로 데살로니가전서 1:9-10한번 읽어 봐요.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 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그래서 자기의 이방인의 데살로니가에 복음 선포한 것을 뭐라고 지금 표현하고 있는거야? 또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신앙을 뭐라고 표현하고 있는거예요? 그들이 그들의 우상을 버리고 진정한 살아계신 하나님, 우상? 그런건 목석에 불과한 것이라고 아무 생명도 없는 그런 것이라고, 그런 것을 다 버리고 이제 바울의 이 복음 선포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구. 진정한 하나님의 지식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알게 되었어요. 그들이 하나님께로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시온에의 재림을 통해서 있을 구원의 완성을 기다린 자라 이렇게 표현하죠.

지금, 자기의 이방 사도직을 통해서 이 선지자들의 비젼이 지금 성취되어 가고 있는거야. 그런데 선지자들의 비젼중에 하나가 뭐예요? 그렇게 되면 이방인들이 다 자기들의 우상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데 그들의 부활을 가지고 시온에 휩쓸려 온다 말이예요. 바울의 지금 자기가 개척한 이방교회에서 헌금 모집한게 바로 이 선지자적 비젼의 성취라. 그래서 이 구원사적 의미가 있어요. 구속사적 의미가... 그래서 바울이 헌금 걷는데 있어서 이것은 물론 구제의 목적이 있었고, 그 다음의 교회의 하나됨의 표징, Ecumeniecal 목적이 있었고, 또 유대 그리스도인이 이방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들로 인정함, 그래서 그들이 같이 사귐, 하나의 fellow ship을 나누는자 됨을, 하나의 교회됨을 인정하는 Ecumenical 목적이 있었고. 또 지금 이야기하는 구속사적 目的이 있었다구. 이에 선지자들의 Vision을 성취하는 종말론적 구속사적 목적이 있었어요.

이것은 또 하나의 目的으로 연결이 돼요.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이것은 유대인들의 구원을 신속하게 하려는 바울의 宣敎 전략과 연결이 되죠. 이렇게 바울의 獻金 모집은 삼중, 사중의 중요한 신학적 목적이 있었다구. 그래서 바울이 엄청난 어려움을 무릅쓰고 --고린도 敎會 같은 엄청난 반란을 무릅쓰고도--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 한푼도 헌금을 안 받았지만 예루살렘 敎會를 위해서는 열심히 헌금을 거둔거야.

그래서 바울의 獻金 걷는 것은 아주 중요한 신학적인 그리고 宣敎 전략적인 의미를 가진 것으로 아주 좋은 연구 대상이어요. 여러분들 생각해 보라구. 자 거기까지 하고 이 다음 시간에 계속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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