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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연구 총정리〓/바울 서신

바울서신 제 10 강

by 【고동엽】 2022. 9. 28.
바울서신 제 10 강


빌립보서 2


1. 빌립보서를 기록하게 된 정황
지난주에 빌립보 도시에 대해서 했고 바울이 빌립교회를-
자, 그러면 이 편지를 쓰게된 정황. 어떤 정황에서 이 편지를 쓰게 되었나? 이 정황을 밝히기 위해서 우리는 빌립보에서 몇가지 정보를 우선 추측해야 돼요.
첫째로, 감옥에서 지금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지. 감옥에서  편지를 쓰면서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 교회에 천거하고 있어요. 그들을 좋은 사람이라고 추천하고 그들을 잘 받아 들이도록 부탁을 했다구. 이렇게 해서 그들이 이제 빌립보에 당도할텐데 그곳에서 그들이 잘 영접받도록 준비하고 있는 것을 봐요. 혹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빌립보 교회의 오해나 비판을 미리 풀어서 해소하려고 하는 점도 있지 않나 생각해요(2:23f).
에바브로디도가, 분명히 빌립보 교회가 바울에게 보낸 에바브로 디도편에 헌금을 거두어서 바울에게 보내면서 에바브로디도로 하여금 바울을 감옥에서 좀 수발들도록 했던 것 같애. 근데 에바브로디도가 혹 그 일을 충실히 못했을까? 또는 그로부터 소식이 별로 없었다든지 이리해서 가령 에바브로디도에 대해서 오해가 좀 있던가? 혹 빌립보 교회에서 비판도 좀 있었는지 모르지. 그래서 바울이 일부러 그 부분을 상당히 장황하게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 교회의 당부를 자기에 대해서 넘치도록 잘 완수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심히 아파가지고 어려운 지경에 빠졌었노라고. 근데 그의 병환에 대해서 빌립보 교회에서 걱정할까봐 자기가 돌려 보낸다.”고 상당히 길게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그런 오해도 좀 있었는지. 그런 것을 우리가 상관케 하는데 바울이 있었다면 바울이 그런걸 해소해서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 교회에 잘 도착하고 영접받도록 준비한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지요.
둘째로,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빌립보 교회가 보낸 편지, 헌금을 감사히 잘 받았다는 영수증을 떼어 주고 있는 거지.
셋째로,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몇가지 문제들을 이 편지에서 다루고 있어요. 특히 어쩌면 에바브로디도에 의해서 바울에게 보고 된 빌립보 교회 내의 분쟁 상태를 바울이 상당히 집중해서 다루어요. 1장 후반부 부터 2장까지 또 4장에도 좀 그런게 나타나고... 그래서 “교회 전체가 하나됨이 중요하다.” 하는 것을 굉장히 강조한다구. 그 하나됨을 위해서는 서로 겸손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겸손함의 예를 들어서 겸손을 굉장히 강조하지. 그래서 누구든지 자기 주장하지 말고 서로에게 겸손하고 서로를 섬기고 서로의 남의 이익을 추구해야 된다구 하는 거예요.
네번째로, 빌립보 교회는 어쩌면 고린도후서 10-13장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유대 기독교 열광주의자들에 의해서 복음의 이해에 혼돈을 가져오고 그리스도인의 삶에 혼돈을 가져오는 문제들을 갖게 된 것 같아요. 아마 그들은 혹 외부에서 침투한 자들인 것 같은데, 그들은 바울의 복음에 반대하고 빌립보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요구하면서 자신들의 영적 체험을 지금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구원의 완성의 표징으로 자랑하면서, 현재의 고난과 그리스도의 재림때 있을 구원의 완성에 대한 미래적 소망, 이런 것을 다 무시하면서 지금 현재 완전한 구원을 누리고 승리자로 살 수 있다는 순전히 “영광의 신학”또는 “승리의 신학” “trimphalism"이라고 그러지 이런걸, trimphalism에 도취된 자들이 빌립보 교회에 와서 좀 어지럽게 하는 것 같애요.
마지막 다섯번째로, 빌립보 교회는 또 외부 세계의 계속되는 핍박 아래 놓여 있었던 것 같애. 지난번에 바울이 이 교회를 세울 때 부터 벌써 빌립보의 로마 시민 정신과 부딪혀 가지고 바울 스스로 감옥살이하고 고난 받는 것 같죠. 이 빌립보서를 계속 읽으면 그와 같은 갈등이 계속되고 외적인 핍박이 계속되었던 것 같애. 이런 그 전투를 우리가 빌립보 내에서 유추할 수 있는데, 이런 걸 볼 때에 바울이 빌립보인들에게 빌립보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의 감사함과 그들의 선물과 그들의 자신을 위해서 애써줌에 대한 감사함과 그들에 대한 자기의 넘치는 사랑과, 바울의 모든 편지중에서 이만큼 교회에 대한 사랑을 퍼 붓는 편지가 없어요. 빌립보서 같이 그에 대한 사랑과 또 핍박의 상황에서 그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또 핍박의 상황에서 그들을 위로하고 교회 자체내에서 unity 하나됨을 유지하도록 권면하고 외적인 이방인들의 핍박이나 유대 열광적 그리스도인들의 훼방에 맞서서 믿음에 굳게 서도록 이 편지를 쓰는것 같애.




2. 기록된 년대
그 다음에 이제 중요한 문제 하나가 이 편지가 그럼 언제 어디서 쓰였느냐? 상당히 중요한 문제라구. 3개의 이론이 있어요. 그런데 어느 하나도 학자들의 대다수의 지지를 받는 그런 설이 아닌 의견의 일치가 없어요. 이 문제에 있어서.
첫째는, 이게 전통적인 견해인데 로마에서 AD 61-63년 그 사이에 썼다. 그러니까 바울이 로마에 이제 감옥. 가이샤에게 상소를 해서 로마에 가지. 그 감옥에 있게 되는데 이때 썼다. 그때 당시 빌립보서가 굉장히 늦은 편지야.
둘째 이론은, 가이사랴에서 썼다. 58-60년쯤에 가이사랴에서 썼다. 바울이 로마에 끌려가기 전에 가이사랴에서 감옥살이 했지. 그때 썼다는 이론.
셋째로는 에베소에서 썼다. 54-57년 사이에 에베소에서 썼다는 이론. 에베소에서 썼다는 이론은 지리적으로 빌립보와 좀 가까워서 선물이 오고 가고 하는 것을 쉽게 설명할 수 있어요. 그러나 가이사랴나 로마는 상당히 멀다구. 빌립보에서 선물이 옥에 가는 것을 설명하기가 그만큼 어려워지지. 그러나 반면에 바울이 가이샤라와 로마에 갇혔던 해를 잘 아는데, 에베소에서도 분명히 엄청난 핍박을 받은게 사실이어요. 고린도후서 1장에 뭐라 그래. 자기가 아시아(에베소)에서 극심한 핍박때문에 자기생을 포기할 정도가 되었다고. 그래서 분명히 사도 바울이(사람들이 많이 추측하지) 혹 거기서 감옥생활하다가 경기장에서 맹수와 싸웠단 말인가? 뭐 여러가지 추측을 한다구. 근데 하여간 극심한 --거의 생을 포기할 정도의-- 핍박을 받은건 사실이라고 그래. 그래서 그렇게 보면 에베소에서 감옥살이를 했을 텐데, 이 빌립보서가 오고 가고 빌립보인들이 에바브로디도로 하여금 감옥에서 수발을 들게 할 정도로 장기간 했느냐? 그런걸 잘 모른다구.
어떤 사람들은 또 여기 이게 지금까지 말한게 주로 전통적으로 토론되어온 세가지 라이벌 이론들인데, 하나 덧 붙여서 AD 50년쯤에 고린도에서 감옥생활 --바울이 고린도에서 붙잡혀 가지고 거기 아가야 총독 Galio앞에 서게 되지. 그래서 고린도에서도 아마 감옥생활-- 을 좀 했기 때문에 거기서 쓴 거 아니냐? 그러면 고린도도 물론 빌립보와 좀 더 가까워서 선물이 오고 간 것을 좀 더 쉽게 설명할 수가 있는데 사실 고린도의 감옥생활에 대해 잘 몰라요. 이 3-4가지 설들이 어느 하나 완전한 설득력이 없이 그냥 학자들간에 추측으로 이중에는 그래도 어느 설이 제일 그럴 듯 하다고 가정하고 할 따름이지 어떤 확실한 것은 없어요.
근데 빌립보서의 연대 잡음도 좀 중요한 것은 갈라디아서와 좀 비슷하다구. 왜냐하면 빌립보서 3장에 바울의 유대 율법주의에 대항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또는 믿음으로 의인됨의 바울의 복음이 빌립보서 3장에 펼쳐져 있지. 그러기 때문에 이 편지가 굉장히 이른 편지면, 사람들이 보통 이 이론은 갈라디아서나 로마서에만 펼쳐져 있지 다른 편지들은 없다는 것에 대한 좋은 그 반박거리가 되지. 바울이 일찌감치 그의 복음을 은혜로만 믿음으로만 의인됨으로 전개하고 가르쳤다는 것을 뒷받침 한다 말야.
그러나 빌립보서의 서론적인 문제에서 특히 또 하나 중요한 문제는(빌립보서 3장이) 빌립보서가 하나의 편지로 되어 있느냐 아니면 두개 이상의 편지들이 지금 합본 되어 있느냐? 근데 이것은 무엇을 가지고 그러느냐 하면 빌립보서 3장을 가지고 그래. 빌립보서 3:2-4:3이 혹 나중에 끼어든게 아니냐. 3장 한번 펴 봐요. 2:19-3:1을 누가 한번 쭉 읽어 봐. 우리가 어떤 분위기를 갖게 되는가.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내게 없음이라.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 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내일이 어떻게 될 것을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나도 속히 가기를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자기가 지금 감옥에서 최종판결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 판결이 어떻게 나는가를 봐 가면서 디모데를 보내겠다. 그리고 자기가 만일 무죄 석방이 되면 자기도 곧 빌립보를 방문하겠다고 그래. 계속 읽어봐요.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자라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로 알고 심히 근심한 지라 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저를 긍휼하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저를 보낸 것은 너희가 저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여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 이러므로 너희가 주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리라”
여기까지 읽으면, 바울이 편지를 지금 미리 하려는 것 같지? 자기 계획을 발표하고 자기가 지금 감옥에서 잘 풀려나면 너희도 한번 방문하고 싶다고 그러구. 그 전에 이 교회의 안위를 위해서 디모데를 보내서 좀 소식을 듣고 싶고, 지금까지 2장에서 다루는 문제는 교회의 외적인 핍박과 그러나 특히 내적인 분열 이거였다구. 2장에서 주로 다룬것은 內적인 분열이 있으니까. 그래서 우선 디모데를 보내는데, 에바브로 디도도 이제 보낸다 말이야.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의 교회가 바울에게 보낸 사자니까. 에바브로디도가 다시 빌립보에 돌아오는 건 아니지. 그래서 이렇게 마무리를 지금 편지를 해 가면서 마지막으로 한번 더 3:1에 인사를 하고 있다 이말이예요. 그러다가 이제 3:2부터 읽어봐요. 와전히 분위기가 바뀌어져 버린다구.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 할례당을 삼가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 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니”
자. 여기서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지? 갑자기 바울의 어조가 격렬하게 된다구. 그래서 여기 손 할례당이라고 우리말로 번역된 말이 “κατατομη” 그게 바울이 지어낸 말이야. “περιτομη” 이게 할례라는 말이지 그것을 비꼬아서 “κατατομη”라고, 이것은 자기 몸을 짤라낸 놈들이라 그 소리야.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유대 지금 적대자들이 빌립보교회에 침투해 가지고 빌립보인들에게 “περιτομη(할례)를 받아야 된다. 그래야 구원을 받고 할례를 받으면 지금 벌써 완성된 구원을 보장받는다.” 이렇게 주장하니까, 그것을 비꼬아서 우리가(그리스도를 믿는사람) 진짜 “περιτομη”라 왜? 새 언약의 백성이니까. 할례는 뭐야? 언약의 표징이지. 우리가 진짜 할례당이고 그럼 유대인들은 뭐냐? 그들은 육신을 신뢰하는, 자기 육신 한 조각을 짤라내는 자들이다. “κατατομη”라 이렇게 욕을 한다구.
게다가 또 뭐라고 욕을 해요? 개들이라고. 개놈들이라고. 거기 “개들을 삼가하라” 개들을 주의하라는 말이야. 달려드는 개새끼들을 주의하라. 근데 이 개란 말은 원래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두고 쓰는 말이지. 불결한자, 이방인들. 그러한 말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쓸때 개라 그랬다구. 근데 그걸 바울이 누구한테 완전히 뒤집어서 --아까는 그리스도인들이 περιτομη 이고 유대인들은 뭐야? κατατομη 라고.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종말에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가 περιτομη로-- 그들을 뭐라? 개놈들이라구. 바울이 욕을 썩 잘했어요. 그래서 이 유대인들이 보통 이방인들에게 하는 욕을 뒤집어서 그들에게 돌려 하고 있어요. 그리고 거기 사람들은 자기들은 율법지켜서 늘 의롭다고 하는데 무슨 말씀(?) “행악자들이라. 악을 행하는 놈들이라.” 이렇게 그냥 욕들 퍼부어 버린다구. 지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육신을 신뢰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고, 하나님의 영으로 섬기는 우리가 진짜 할례당이라. 하나님 백성이라.” 이렇게 하면서 욕을 하고 자신의 유대인으로서의 과거와 다메섹도상에서의 변화를 이제 쭉 써요. 이게 자기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가장 personal하게 쓰는 부분이 이 부분이야. 개인적으로, 보통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사도직에로의 부름과 복음의 계시로 상당히 강조해서 자신의 직접적인 구원과도 관계해서 가장 personal하게 쓴 부분이예요. 쭉 읽어봐 4:3까지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을 내 주 그리스도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불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서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찌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날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아라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안에 서라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트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이 부분이 빌립보서에 원래 같이 쓰여진 것이 아니고, 혹 나중의 편지가 합본된 것이 아니냐? 이렇게 보는 이유가 아까 이야기한대로 4:1-아니 3:1-2로 넘어가는데 아주 부드럽지 못해. 갑자기 분위기가 바뀐단 말이야. 3:1까지는 거의 편지를 마무리 하려고 하는 그런 분위기를 느끼다가, 갑자기 바울이 격렬한 어조로 빌립보 교회내에 침투한 자들을 공격하고 그들의 가르침에 빌립보인들이 흔들리지 않도록 올바른 신앙 연습을 자기의 자서전적인 체험을 예로 들어서 설명하고 있어요.
또 하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빌립보 교회에 1-2장에 다루는 문제는 빌립보 교회 내의 겸손이 부족하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하고 자기 이익을 좇는데서 오는 이기주의에서 오는 분파문제와 또 1:27에서 보는 바와 같이 외부적인 핍박 이런 종류의 것이었는데, 3:2부터 다루는 문제는 문제의 종류가 좀 달라 이것은 외부에서 빌립보 교회내에 침투한 어쩌면 유대 광신주의자들이 조금 다른 복음을 가지고 와서 빌립보인들을 혼돈시키는 문제의 성질이 많이 다르단 말이야. 그런 이유로 요 부분이 나중에 덧 붙여지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이 돼요.
우선 여기에 문제를 일으킨 자들이 어떤 자들이었느냐? 여기서 보면 분명히 유대인들로서 할례를 구원의 표징으로 내세우면서 할례만 있으면 구원을 보장 받는다. 그러니까 이들을 바울은 뭐라 그래? 육신을 신뢰하는 자들이라. 육신에 할례 받아 놓고는, 육신의 한 조각을 짤라 내 놓고는 그것으로 구원을 확신했다고 하니 육신을 신뢰한 자라 그러지. 또 이들은 분명히 지금 벌써 구원의 완성에 도달할 수 있다고 선동한 것 같애. 그러니까 바울이 뭐라 그래? 우리가 종말에(20-21절), 그리스도의 재림때에 우리의 천한 몸이 영광스런 몸으로 변화됨으로 구원의 완성에 도달할 거고, 그때까진 우리가 구원의 첫 열매를 가진자로서, 믿음으로 의인된 자로서 어떻게 하는자여?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데 뒤의 것은 다 잊어버리고 앞을 향해서 경주하는 자로 --바울이 구원으로 달려가는 자로-- 이렇게 그리고 있어요.
그래서 이 자들은 분명히 Trimphalism, 지금 우리가 벌써 그리스도의 구원의 영광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그렇게 강조하면 자연히 뭘 비판하게 돼? 그리스도의 고난을 비판한단 말야. 그리스도인이 고난 받는 것은 “이것 뭐 믿음이 좀 부족해서다. 또는 축복을 잘 못 받아서이다. 복을 충분히 받지 못해서 이다.” 이래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부끄러워하고 또는 비판하고 또 이들은 무엇을 그러면은 자기들의 구원 받은 상태를 자랑한거 같애? 육신적인 것, 세상의 가치들 먹고 마시고 잘 입고 잘 사는 것을 고귀한 가치로 생각하면서 그걸 하나님의 축복으로 생각하고, 그래서 바울이 또 아래에서 욕을 하지? 그들은 자기 배를 신으로 섬긴다고 욕을 한거예요.
그리고 부끄러운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가치 전도... 우리 한국도 그래. 우리 한국도 그리스도인이 고난 받은 것은 뭐가 잘못되서 그런거지? 기도원에 가서 뭘좀 바쳤어야 백배, 천배로 축복 받는데 기도원에 안가서 그러지. 그래서 지금 이런자들아 그럼 이런 자들은 또 어떤 자들이었을까? 할례와 율법을 강조한 것을 보면 그리고 그들이 유대인인 것을 굉장히 내세운 것을 보면 거기에 대해서 바울이 뭐라? 그래 나도 유대인이었고 나도 팔일 만에 할례 받았고 사실은 율법에 있어서는 흠없는 자였다고 그래. 그러나 그런 것이 아무 소용없는 것이라. 그런 것을 보면 분명히 이들은 유대 주의자들이다.
반면에 이들이 지금 여기서의 구원의 완성을 부르짖고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을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도 별로 관심을 부여하지 않고 이런 것을 보면 좀 영지주의적 요소가 있지 않느냐?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바울이 여기서 지금 두 그룹을 상대하고 있다. 한편은 유대주의자들(갈라디아에 침투한 유대주의자인듯)로서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이 완성된다는 이런 유대주의 자들, 또 한편은 좀 영지주의자들, 혹 고린도에 침투한 영지주의자들 같이 이미 자기들이 지식을 가졌고 엄청난 성령체험을 하고 그래서 --그것으로 자기들의 구원이 완성이 되었다. 그래서 뭐 미래에 더 바라볼 것도 없고 도덕적으로는 육신으로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 고린도인들 그랬지.-- 우상숭배에 열심히 참여해도 되고 성문란에도 참여해도 되고 뭐 이렇게 봤다 말이야.
17절 이하에 보면 이들도 자기 배를 神으로 섬기고 부끄러운 것을 자기들의 영광으로 삼고 이방인들도 감히 저지르지 않는 형태의 음란행위에 참여하면서 도리어 그것이 자기들의 자유를 잘 나타낸다고 그것을 자랑했단 말이야. 또 이들에 대해서 뭐라고 해요? 18절에 십자가의 원수라 한다구. 이건 또 우리에게 무엇을 상기시켜, 고전1-2장에는 십자가의 도가 뭐라? 멸망하는 자들에게 뭐라? 미련한 것이요. 거침돌이 된다구. 십자가를 싫어하고 말이야. 그래서 이 뒷부분은 --3장 뒷부분은-- 또 혹 고린도에 침투한 자들같은 경향을 가진 영지주의자들 아니냐? 이렇게 그래서 바울이 3장에서 두 그룹에 적대자들을 상대하지 않느냐 이런 생각을 하는 학자들도 있어요. 그러나 고린도 교회 내에도 고후 10-13까지의 침투한 열광주의자들은 영지주의자라고 보기 보다는 원래 고린도가 헬라 도시로서 지식을 추구하고 지식을 통해서 지금 벌써 구원을 누릴 수 있다는 그 바탕이 있는데다가 거짓 사도들이 침투해서 혼란을 일으킨 것이지. 그게 나중에 발달하는 영지주의자라고는 하기가 어렵다.
마찬가지로 빌립보에도 바울이 두 그룹을 상대한게 아니고 유대주의자들과 영지주의자들 두 그룹을 상징한게 아니고 유대인들로서 유대 그리스도인들로서 자기들의 유대교적 유산, 곧 할례와 율법이 언약의 표징들로 자기들의 구원을 확실히 한다는 것을 철두철미하게 믿는 그 밑바탕 위에다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자기들의 영적체험 이런 것을 또 예로 들면서, 이 구원을 받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고난받는게 아니고 항상 승리자로 사는 것이며 이 세상에서 뭐 이런거 저런거 얽매어 사는게 아니고 자유롭게 산다고 하면서, 그러니까 율법을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도덕적으로 좀 문란한 부도덕한 생활을 하는 그들은,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유대 광신주의자적 기독교인들, 소위 ‘Jewish Xian enthusiasts' 유대 그리스도인 광란주의자들, 광신주의자들이 지금 여기 빌립보서 3장에서 일관되게 공격되고 있지 않느냐. 바로 이들이 고린도에 침투한(고후10-13)에서 바울이 격렬히 싸우는 거짓 사도들이라구. 그러니까 같은 종류의 적대자들인 것으로 우리가 보는 것이 합당하다.
그러면 이들이 어떻게 침투를 해서 바울이 어떻게 대항하게 되었느냐? 이미 빌립보서 처음 쓸 무렵에 이들의 침투를 알고 바울이 써 내려가면서 첫째로 외부적인 핍박을 극복해야 된다(1:27-28등)고 해놓고, 그 다음에 이제 빌립보 교회내의 문제 --자기들끼리의 내분의 문제-- 빌립보인들의 자기 추구하는 문제를 다루고 그 다음에 이제 외적인, 외부에서 침투한 거짓 선생들의 문제를 다루고 이렇게 바울이 체계적으로 빌립보 교인들을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다루어 가려고 처음부터 이 편지를 구상하고 썼느냐? 아니면 진짜  격렬한 언어의 변화라든지 내용의 변화에서 우리가 빌립보서가 적어도 두개의 편지로 되어 있다고 봐야 되느냐? 원래는 1-2장, 그리고 4장을 이렇게 썼단 말이야. 그러다가 나중에 또 빌립보 교회에 이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후에 편지를 썼는데 빌립보 교회에서 나중에 편지가 모아 질때 이게 합본된 거냐 이런 문제가 남는다고.
이렇게 합본된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게 뭐냐면, 4:10절 이하에 바울이 4장 10절에서 20절까지 헌금 문제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동시에 앞으로는 되도록 나에게 그런 헌금을 안 보내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을 행간에 표현을 해요. 왜? 이 빌립보인들이 바울의 원칙이 뭐야? 절대 원칙이 자비량이지. 그런데 빌립보인들이 예외적으로 빌립보인들에게서는 바울이 이것을 받았어요. 바울이 자기의 선교 원칙에 대해서 여러번 이야기 해(대표적인 예를 고전 9장에서 찾을 수 있다). 데살로니가 전서에서도 바울이 이야기하고... referrence를 좀 찾아볼까? 한번좀 찾아 봐요. 살전 2:9절 한번 읽어봐요.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거기 그래서 자기가 누구에게도 누를 끼치지 않고 자기 손으로 벌어서 먹고 살면서 복음 전했다 그러지. 살후 3:7-12도 마찬가지야. 읽진 않겠어요. 그 다음에 바울이 고전 4:8-13, 9:1-18, 고후 11:7-10에서 이 원칙을 굉장히 되풀이한다구... 근데 가장 뚜렷한 곳이 고전 9:12-15인데 한번 읽어봐요.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함이로라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여기서 분명히 말하지. 주께서 복음 선포한자들은 복음으로 부터 생계를 얻어 살도록 분명히 특권을 주었단 말이야. 그래서 다른 사도들은 다 특권을 주고 심지어 고린도에 침투한 거짓 사도들까지도 그 특권을 주장하고 있어. 고린도인들로 부터 대우를 잘 받는다구. 그런데 바울은 그 권리를 자기는 안쓰기로 포기했단 말이야. 그러니까 형식적으로는 바울이 주께 불순종한 것이지. 근데 바로 이게 고린도 교회에서는 바울의 책잡는 이유중에 하나였다구. 이 거짓 사도들이, 아 주께서 이렇게 가르쳤는데 바울이 너희들 한테 와서는 헌금해 달라고 --자기 생계를 지원해 달라고-- 못한 것은 자기 사도직에 결함이 있기 때문에 그런거다 말이야. 그래 놓고는 이제 에베소로 간 뒤에 자꾸 무슨 예루살렘을 빙자해서 헌금내라고 자꾸 그러구. 디모데 보내고, 디도 보내고 자꾸 그래서 헌금 뜯으려고 하는데 그게 바울이 사기꾼이라고 이런식으로 된거라.
그래서 바울이 여기서 자기 원칙을 분명히 밝혀요. 여기서 보면 바울이 왜 헌금받는 것을 거부했느냐면, 복음이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라 값으로 사는게 아니고 복음 자체가 값없는 은혜에요. 이 값없는 은혜를 선포할 때에 값없이 할때에 그 은혜의 성격이 더크게 나타난다구. 돈받고 선포하면 값없는 무료의 복음을 돈으로, 돈받고 주는 것같이 되잖아. 그래서 바울이 이 복음에 값없는 은혜의 성격을 강조하게 위해서. 둘째로 그의 적대자들이 바울이 자기 선교를 빙자해서 자기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한다는 것을 추구한다고 비판하지 못하도록. 셋째로 남들에게 좋은 본을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자기손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복음을 원활히 증거키 위해서 자기를 위하는 헌금은 거부하고 자기 손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예의적으로 빌립보교회에서는 받았고, 무엇을 위해서? 궁극적으로는 복음의 효과적인 선포를 위해서 복음의 효과적이고 능률적인 선포를 위해서 그렇게 했다.
반면에 예루살렘 가난한 교회를 위해서 헌금을 촉구하였다.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는 바울이 열심히 헌금을 거두었지, 자기를 위해서는 아니지만. 이거 지난번에 설명했죠. 이 헌금의 의미. 그런데 이 빌립보 교회만 아주 예외적으로 예루살렘 교회에 대해서도 아무 불평없이 --고린도 교회는 부자 교회라 한대도 그냥 그 문제만큼 몇년씩 끌면서 바울에게 온갖 욕을 다 보이면서 조금 헌금을 했는데-- 빌립보 교회는, 고후8:1- 까지 읽어봐요.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빌립보 교회가 --마게도냐 교회는 빌립보 교회를 두고 말하는 거지-- 극심한 환란 가운데 핍박가운데서도 또 극심한 자신들의 가난속에서도 기쁨으로 그리고 넘치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헌금했다는 거야. 그걸 지금까지 헌금을 오해하고 문제를 일으킨 고린도 부자 동네에, 아가야의 고린도 교회에 지금 바울이 말하고 있어요. 뿐만 아니라 자신이 또 빌립보 교회로부터 개인적인 헌금은 받았어. 바울이 예외적으로 빌 4:16한번 봐바! 한번만이 아니고 몇번 받았다고. 그것도 빌 4:16한번 읽어봐요.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번 두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자기가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도 그랬단 말이야. 한두번 근데 지금 감옥에 있는데 또 보냈지. 지금 어느 감옥에 있는지는 잘 몰라도, 그러니까 몇번 보낸거라. 그걸 바울이 또 자랑을 해요. 고후 11:8-9한번 보라구 한번 읽어봐요.
“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요를 받은 것이 탈취한거라 또 내가 너희에게 있어 용도가 부족하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함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스스로 조심하였거니와 또 조심하리라”
바울이 뭐라 그래요? 고린도인들이 부끄럽게, 이말 읽으면 고린도인들이 상당히 부끄러워 해야지, 고린도 교회는 부자교회라. 근데 거기서 바울이 이럴때 너희들에게 누를 안끼치기 위해서 자기손으로 일했지만 그도 부족했을때는 어떻게 했다구. 이 고린도 교회보다 훨씬 가난한 마게도냐 교회에서 좀 지원해 주어서 내 부족을 채워서 내가 먹고 살면서 내가 섬겼다고 그러지. 그러니까 마게도냐 빌립보 교회만 아주 예의적으로 바울이 헌금을 받은 거예요. 근데 이제 이 마지막에 감옥에 있을 때에 이것을 보냈는데 빌 4:10-19절을 자세히 안읽겠지만 여기서 문제가 이거야. 두 개예요. 왜? 바울은 벌써 1장 첫머리에서 헌금을 감사한다는 말을 했다고, 바울이. 1장 3절, 5절 한번 읽어봐요.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복음을 위해서 바울의 복음 사역에 동참함, 이것을 교제라고 표현하지. Koinonia라고. 그래서 이미 여기에서 지금 언급을 했어요. 근데 이 편지를 지금 에바브로디도에게 손에 쥐어서 보낼 때에 가장 당면한 핵심 문제가 헌금에 대해서 감사하다는 영수증을 써주는 거라. 잘 받았다고. 근데 그걸 바울이 가장 뒤에다가, 이렇게 지금 3장이 원래 빌립보서에 내용에 있었다면 너무 멀리 저기 뒤에다 둔거라. 그게 좀 이상하다 이거야. 그러니까 아마 3장은 나중에 끼어든게 아니냐. 2장 다음에 4:10부터 이렇게 헌금문제가 다루어진게 아니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그러니까 이 3장이 끼어들었다고 보는 사람들은 그런 것도 하나의 이유로 내세운다구. 그러나 3장이 끼어들지 않고 원래부터 빌립보서가 3장을 포함한 대로 한 편지로 쓰였다면, 그런면에서 우리가 설명을 해야 돼. 왜 바울이 헌금문제를 가장 뒤로 이렇게 미루느냐. 미루되 장황하게 쓴다구. 10-19절까지 자기 삶의 태도, 개성에 대한 태도를 밝히면서. 그래서 여기 10-19절까지 자세히 보면 두가지 엇갈리는 말이, 자꾸 엇갈려. 하나는 보내줘서 고맙다는 감사하다는 말과 다른 하나는 사실은 이것이 없이도 살 수 있다.
자기가 궁핍에 처할 수 있고 부요에도 처할 수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그것을 배워서 그 비밀을 배워서 사실은 다시는 헌금을 안보내주는 것이 좋을 뻔하였다. 이런 행과의 말을 해요. 바울이 그래서 빌립보 교회에서만 바울이 예외적으로 헌금을 여러번 말하는데 이것이 자기의 원칙을 위배하는 것으로써 한편은 감사하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은 상당히 껄끄러워 받지 않아야 되는데 받게 됐음을 두가지로 표현한다구.
그래서 내용적으로 빌립보서 3장이 끼어든 것이 아니고 원래 한편지로 쓰였다고 보는 사람들은 “왜 그러면 헌금 문제를 제일 뒤에 장황하게 썼느냐? 그것은 헌금 문제가 상당히 바울에게는 개인적으로 껄끄러운 것이어서 자연히 그런 것들은 자꾸 미루다가 제일 뒤에 다루게 된거라.” 그렇게 설명할 수가 있지. 그렇게 설명하는 사람들은 3장이 끼어든게 아니다. 이렇게 보는 거죠.
그래서 빌립보서의 unity 문제를 말하기 위해서는 더 자세한 논증이 필요하지만 이것도 어느 확실한 이론이 --어느 대다수의 학자들이 지지하는 이론이-- 있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크게 좀 신학적으로 자유주의적 경향을 뛰는 사람들은 “빌립보서 3장이 다른 조각으로서 여기에 끼어들었다.” 물론 바울의 편지지... 그런데 원래 빌립보서를 쓸 때에 쓰여진게 아니고 나중의 편지가 여기에 합본되었다고 보는거고. 좀 보수적인 경향을 가진 사람들은 이게 하나의 편지였다고 주장을 하는거고. 그런데 그 두주장이 어느 하나가 더 확실한 건 아니예요. 그런 경황에 우리는 대개 이게 빌립보서 전체가 하나의 편지로 지금 있는대로 쓰였다고 보는 것이 더 안전하지. 그러니까는 확실히 이게 분리된 편지였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주장하는, 가령 갑자기 tone이 변한다든가 바울의 어조가 변한다든가 주제가 좀 변한다든가 이런 것은 확신을 주는 그런 무게 있는 주장은 못돼요.
왜 그러느냐면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바울에게 보통 평안한 서재에서 편지쓰는 우리의 입장을 강요한 거라구. 우리야 편안히 방안에서 차곡차곡 편지를 쓰겠지만 바울은, 이 감옥에서, 지금 빌립보 교회에 여러날 이런 편지가 이게 지금 짧은 편지지만 여러날에 걸쳐서 쓰기도 하고 여러 주에 걸쳐 쓰기도 하는데, 그 편지 쓰면 이렇게 안쓸텐데라는 그 전제에서 시작해서 그러므로 “바울도 그렇게 안썼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두개의 편지일 것이다.” 이런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상당히 오늘날  우리의 편안한 상화속에서의 논리를 바울에게 강요하는 거라구. 그러기 때문에 지금까지 비판자들이 내놓은 이유보다더 좀더 무게 있는 이유가 나오기 전에는 이 편지가 하나의 편지로 쓰여졌다고 하는 것이 합당하다 이 말이예요.
그러나 반면에 이 편지가 원래 두 개의 편지인데 합본되었다고 봐도 아무렇지도 않아. 보수주의자들은 무조건 그러면 그냥 어디 영감들이 다 달아나고 성경이 그냥 빵구난 줄로 아는데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래도 바울에 의해 쓰여진 거라, 영감받아서. 그러니까 그렇게 무서워 해서는 안된다구. 나중에 더 좋은 이유가 발견이 되어서 이게 두 개의 편지가 합본 되었다고... 그렇다고 해서 영감이 더 떨어진거야? 고린도서에서 바울이 몇번 편지를 쓴거지. 그래서 아까, 지난번에 이야기한대로 어떤 사람들은 고린도 전후서에 전에 썼던 편지들 또는 잃어버린 편지들의 조각이 조금씩 조금씩 거기에 들어갔다고 본다 말이야.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아. 그래서 우리가 이런 것을 너무 무서워 하지 말고 살펴봐야 된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내 견해도 그래) 더 확실한 이 주장이 나오기 전까지는 빌립보서는 하나의 편지로 쓰여졌다고 보는게 나아요. 자 마지막으로 빌 1:27 한번 누가 읽어보아요.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 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 부터 난 것이니라”
거기를 좀 보라구 거기가 지난 번에 내가 빌립보란 도시가 어떤 도시? 알렉산더 大王의 아버지 Philip이 Thrace야만인으로 부터 빼앗아서 만든 도시라 그랬지. 자기 이름을 붙인 도시라 그랬지. 그때부터 군사적인 garrison town 방어도시의 성격을 띤 거라. 근데 나중에 로마 사람들이 이 도시를 재건해 가지고 거기다가 Octavianus가 누구를 정주시켰다고? 자기의 Burtus와 그의 추종자들과의 결전에서 자기 군대를 승리하게 한 군인들을 거기 정주시켰다고 그랬지. 나중에 또 Antonius와의 Actium해전에서 마지막 승리해서 Octavianus가 Augustinus로서의 로마의 유일한 통치자로 군림하게 되었을 때에 또 그때 Antonius의 군대를 쳐부순 자기의 군대들을 거기 정주시켰다구. 그래서 많은 특권을 주었다고 그랬지?
그래서 이 빌립보 도시가 상당히 군사적인 성격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고 또 이제 우리 신약시대에는 로마 시민정신, 로마의 군대들과 그들의 후손들로 시민을 이룬 로마의 시민정신이 그래서 아주 컸다. “ius ilalicum"이탈리아의 법이 빌립보에서 시행되는 이탈리아 반도내에 로마 시민의 특권을 그냥 그 자리서 누리는 특권을 가진 것이었다. 그런 군사적인 로마 시민정신을 바울이 염두에 두고 빌립보서 짧은 편지에 군사적인 또는 시민적인 Metaphor들이 많이 쓰인다 그랬지. 지난번에.... 3장 20절 거기에 우리의 시민권 이야기가 나오지. 우리 시민권은 하늘에 있단 말이야. 빌립의 시민들은 자기들의 시민권이 어디서 나와? 로마에서 나와 그걸 가지고 굉장한 긍지로 생각했다 말이야. 그래서 빌립보의 시민들은 빌립보가 야만인들의 세계로 둘러싸인 곧 바로 옆의 thrace 야만인들 세계 속에 박힌 이 세계의 지대 민족 문화 민족 로마 제국의 수도라는 것을 굉장히 긍지를 느끼고 그래서 로마에 지대민족의 높은 시민 정신 높은 문화를 이 야만인들에게 보여주는 그런 자존심을 가지고 있었어. 그런 것을 바울이 여기서 Metaphor로 이용하고 있는 거예요.
교회는 이 세상에 암흑의 세상에 박혀있는 하나님 나라의 식민지라. 빌립보가 야만의 세상에 박혀 있는 위대한 로마제국의 식민지 이듯이 그것을 바울이 그림으로 교회를 설명하는 수단, 교회는 뭐냐? 이 세상에 박혀 있는 이 암흑의 세상에 박혀있는 하나님 나라의 식민지야. 빌립보의 시민들은 로마에서 멀리 떨어져서 야만인들 세계에 있지만 뭐예요? 로마의 시민이라구. 교회 內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속에 있지만 세상의 시민들이 아니고 어디 市民이야? 하나님 나라의 시민. 바울이 여기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그래.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예요. 이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고 세상의 倫理대로 살아서는 안된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1:27-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야 된다 이 말이예요.
빌립보인들은 그 복음에 합당하게 산다는 말.  동사, 복음에 합당하게  하다. 여기서 나온 말이 정치(politics) 라는 말이예요. 헬라어의...  그래서, 정확히 말해서 “정치하라.” 그말이예요. 정치란 뭐야? 삶의 정돈, 삶을 꾸려가는 거지 복음에 합당하게 정치해가라. 교회 내에서 복음에 합당하게 정치해 가거라. 복음에 합당하게 삶을 규제하고 정돈하고 복음이 제시하는 자치대로 복음이 제시하는 윤리대로 살아가라. 개인적인 살아감 뿐만 아니고 공동체적인 삶을 꾸려가라. 공동체 삶을 꾸려 가는게 정치지, 교회내의 공동체적 삶을 복음에 합당하게 꾸려가라.
문자 그대로 하면 복음에 합당하게 정치하라. 그러니까 빌립보인들은 thrace 야만인들에 둘러싸여서 로마법에 따라 “ius italicum” 로마법에 따라 자기들의 공동체적 시민의 삶을 꾸려가지 마찬가지로 교회는 세상에 박혀 있지만 세상의 정신대로. 세상의 가치관 대로 공동체적 삶을 꾸려가서는 안되고, 어떻게? 하나님의 법대로 해야 된다 말이예요.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이니까 그게 복음이라 말이지 복음의 法대로 복음의 법은 한마디로 말하면 뭐야? 사랑이란 말이야.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그러니까 이 복음이 교회 憲法이라. 이 세상에 박혀있는 하나님 나라의 식민지인 교회 헌법, 이 복음이라구. “복음에 합당하게 공동체적 삶을 꾸려 나가라. 정치하라.” 그러면 서로 시기하고 서로 자기 이익을 추구하고 서로 자랑하고 이런거 없고 겸손하고 남의 利益을 추구하고 서로 섬기고 이렇게 되겠죠.
이게 복음에 합당한 삶이지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라? 27절 후반부 한 정신으로 한 마음으로 굳게 서서 어떻게 하라?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어떻게 하라 한 team으로 --운동선수가 한팀으로 투쟁하듯이 한 팀으로-- 투쟁하라. 거기에 그 다음에 나오는  ethletics(영어)가 거기서 나온 말이지. 운동 경기. 이거는 곧 운동경기의 Metaphor로 나온다구. 이게  앞에 붙어서 뭐라 그러느냐면, 같이 한팀으로 --축구팀이 한팀으로 싸우잖아. 한팀으로-- 그 다음에 한 정신으로 한 마음으로 굳건히 서서 한팀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해서 싸워라. 복음의 신앙으로 싸워라. 뭐 하면서? 그 다음에 28절 전반부에 아무도 두려워하지 말고 말이지. 이 말은 우리로 하여금 운동선수적인, 군사적인 장면을 연상케 해요. 운동선수가 한 팀으로 상대방 팀에게 scrum을 짜고 그 대열을 정비해서 같이 나가는 한마음, 일심동체로 나가는 그런 장면도 우리에게 연상시키고, 다른 한 장면은 여러분들이 옛날 로마 군대 전투하는 모습 영화로 본 일이 있지. 어떻게 전진해? 방패를 들고 줄을 서가지고 그냥 앞으로 나가는 거지. 이 전법이 마침 누구의 전법이냐면 마게도냐의 필립왕의 전법이야.
이 빌립보라는 도시를 세운 Alexander의 아버지 빌립의 유명한 전법이 이른바 밀집 장창 대전법이었다구. 군사를 그냥 밀집시켜 가지고 한손에 방패들고 한손에 창, 긴창들고 앞으로 막 나가는거야. 그렇게 해서 마게도냐 지역을 거의 다 통일했다구. 빌립이. 여기 빌립보도 아마 이 빌립의 필립대왕의 밀집 장창대로 아마 thrace에게서 빼앗았을 거야. 지금 이런 말들이 빌립보인들에게는 그냥 쉽게 알아듣는 거야. 자기들이 다 군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 그들도 로마시민의 정신을 이용해서 그들이 알아듣기 쉽게 교회를 하나님의 식민지로.
그러면 이 빌립보인들이 그 세계에 대한 태도와 비유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세상에 속하지 않느냐? 세상에서 자꾸 핍박이 오는데 내분이, 자꾸 자기들끼리 서롤 자기 이익을 추구하고 시기하고 뭐 이런게 있어요. 그러니까 바울이 그걸 자세히 2:1-부터 자세히 다룬다구. 그전에 우선 원칙적으로 한 마음으로, 한 정신으로 마치 운동선수가 scrum을 짜고 상대방에게 일심동체로 돌격하듯이, 마치 로마 군대가 또는 그전에 빌립보 도시 원래 세운 빌립대왕이 군대 대오를 이렇게 해서 적대자들에게... 여기서 “굳건히 서서”라고 그러지? “굳건히 서서” 아주 군사적인 언어라구. 절대 뒤로 물러나지 말고 “굳건히 서서” 앞으로 나가기만 하면 돼. 여기 첫줄 사람들이 무너지면 막 무너진다구. 그 중에(첫줄) 한 놈이 뒤로 돌아서면 안된다 말이야. 자기 자리에서 나가라. 이런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어요.
그래서 오늘 우리 교회에서도 바로 이런 정신이, 우리가 이 세상에 있지만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식민지로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시민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이 세상의 가치에 의해서 사는게 아니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야 된다. 그래서 이 세상에게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윤리를 보여주는게 교회가 존재함으로써 세상에게 하나님 나라를 증거함이지. 그런데 우리 한국에 교회가 너무 세상적으로 되어 가지고 교회법이 아니고 세상법이. 그래서 총회장 선거하는데도 꼭 세상같이 이번에 통합파 총회장 선거는 총회장 한 10억들었다 그래. 10억, 그래서 그 장로가 무슨 출판사 경영하는 장로가 총회장이 됐는데, 총회 당일날 신문에서 봤어. 진짜인지 모르겠어 신문에 났더라구. 당일날 자기 출판사 출판하는 책 가지고 갈피에다가 10만원짜리 수표하나씩 다 들어가지고 장로가 총회장이 됐어요. 그거 족히 10억을 들였어. 10억은...
이 개혁이 이번에 총회장 선거 때문에 총회 첫날 개회도 못했다고 신문에 났어. 이놈의 총회장 선거가 없어져 버려야 교회가 서지. 자 오늘 그만. 이 다음시간 골로새서 할거예요. 골로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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