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서신 제 11 강
골로새서
1. 기록 배경
오늘은 골로새서를 공부하려고 해요. 여러분들, 지도에서 골로새 한번 찾아보세요. 성경 지도에서, 우선 골로새가 어디쯤에 위치하나? 에베소에서 내륙으로 조금 들어가면 골로새가 나와요. 이곳은 Brigia 지역으로서 에베소에서 동쪽으로, 그러니까 내륙쪽으로 몇십마일 들어간 곳인데, 무역로 상에 있는 조그마한 都市로서 특히 양털과 양털식물을, 무역이 성행되었던 곳으로 고대 세력들에 나오고 Perisia의 정복전쟁때에 군대가 거쳐 갔던 곳으로서도 가끔 나왔어요.
그러나 이 도시는 별로 중요한 도시가 아니어서 이 골로새서에 대해서 중요한 주석을 쓴 J.B. Lightfood는 말하기를 아마 이 골로새가 바울의 편지 쓴 도시들 중에 제일 의미가 작은 도시였을 것이라고 그렇게 말할 정도예요. 바울이 이 편지를 썼을 당시 골로새 인구는 거기에 Brigia 원주민들과 헬라시민들, 이주민들로 대개 구성이 됐을 것이나, 상당한 수의 유대인들도 살았던 것으로 추측이 돼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Josephus가 말하기를 Antiocius 3세가 메소포타미아와 바벨론에서 2,000명의 유대인들을 골로새 지방으로 이주 시켰노라 하고, 또 62에서 61년, BC 요, 무렵에 당시 이곳의 로마총독 Flaccus가 그러니까 그곳에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의 성전세로 20pound의 금을 수송하려고 하는 것을 금했다고 하는 기록이 나오는데, 그때의 금값을 매겨 가지고 그것을 유대 성인 남자 수로 나누면 골로새를 중심으로 한 라오디게아 지역에 적어도 만천(11,000)명 정도의 유대 성인 남자가 있었던 것을 추측할 수 있어요.
근데 이곳은 Brigia의 혼합 종교의 특색을 아주 강하게 나타내었던 지역으로서, 특히 Cybele를 섬기는 Asia의 어머니가 신으로 섬김을 받았던, 이 神을 섬기는 의식이 강했고 또 이 神을 섬기는 의식(rituals)이 엑스타지와 동시에 금욕주의가 겸해지는 그런 의식, ritual이 강하게 요구되는 그런 것이었어요. 몸에 자해행위도 해가면서 하기 때문에 그래서 아마 골로새서 2:23, 2:11에 몸에 자해행위를 하는 것을 언급하지 않나 그렇게 추측이 되요. 뿐만 아니라 이곳에 특히 신비주의적 경향이 강했던 것 같고, 또 혼합주의적인 유대교의 영향도 상당히 강했던 거 같애요. 게다가 골로새서 2:8, 20에 나오는, 문자 그대로 하면 세상 요인들, 요소들 elements를 섬기는 것으로 나타내요. 골 2:8, 20, “τα στοικεια του κοσμου” 우리말로 뭐라고 번역했어? 초등학문이라고 번역했지 아마. 뭐라고 번역했어요? 왜냐하면 요 말이 갈라디아서에서도 나온다고. 그런데 요 말이 진짜 무엇을 뜻하느냐. 주석이 아주 어려워요. 그래서 영어에서는 보통 이걸 elemental spirit,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하나의 영적인 힘, 마력을 가진 힘으로 보고, 이것들을 섬기는 것이 아니냐?
가령, 고대 헬라 사상에 의하면 세상은 4가지 요소들로 구성되었다는 거지. 불과 흙과 공기, 가령 이 불, 흙, 물, 공기 이런 것은 Mithra를 섬기는 신비 종교에서는 神들로 숭상하고 그들을 기분좋게 해야 운명이, 신세가 편하다고 했는데, 그런 그 세상을 구성하는 요인들을 영적인 신적인 힘을 가진 마력을 가진 것들로 섬김을 그런 것을 섬기는게 골로새의 일반적인 종교적 경향이었지 않나. 그것에 골로새 교인들이 영향을 받기 때문에 바울이 그것을 경고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근데 이 갈라디아서에서는 이 말이 무엇까지 포함하느냐 하면, 율법이라든지 모세 율법도 이런 인간을 얽어매는 세상의 기초적인 힘으로 나타나요. 그래서 “초등학문”이라고 번역을 하는데 그게 항상 옳은 번역인지 주석가들에게 늘 토론의 대상이 돼요. 하여간 이렇게 여러가지 신비종교들 --Cybele를 섬기는 신비 종교들, Mithra를 섬기는 신비종교들, 그리고 여러가지 세상의 구성 요소들을 신을 섬기는 종교들-- 이런 것들이 있었고, 거기에 동시에 혼합종교적인 유대교도 한 몫해서 복잡한 종교적인 현상을 나타냈던 도시였다.
어쩌면 이곳에 유대교 뿐만 아니고 이방의 종교 요소들도 거기에 첨가되고 유대교의 지혜사상도 첨가되어서 상당히 혼합종교적인 복잡한 theosophy(神을 아는 지혜)를 얻고자 하는 그런 종교경향으로 나타나고, 또 神을 아는 지식을 터득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훈련(discipline), 그 여러가지 금욕주의적 형태, 그리고 여러가지 의식(ritual)들이 요구되었던 그런 그 분위기가 골로새라는 도시의 분위기였지 않는가 추측이 돼요.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그가 에베소에서 2-3년 우거할 그 무렵에 세운것 같아요. 사도행전 19:10절 누가 한번 읽어봐요.
“이같이 두해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바울이 에베소에서 2-3년동안 목회하는 동안 --어떤 학자에 의하면 바울의 전성기였다 그러는데, 그 기간동안-- 바울의 에베소에서의, 아시아 수도 에베소에서의 목회가 굉장히 성공적이어서 그 일대가 즉 아시아 일대의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들었다고 지금 사도행전 19:10에 말하고 있어요. 그런데 바울 스스로 골로새에 간 것 같지는 않고, 왜냐하면 골 1:4과 2:1에 바울이 골로새에 한번도 안 간것으로 암시돼 있어요. 아마 자기 동역자 또는 부교역자 정도를 에베소에서 인근지역 --골로새 같은 지역-- 에 파견을 해서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선포하게 하고 그 교회를 세우게 했지 않았나 그렇게 짐작이 돼요.
어쩌면 이 에바브라가 골로새의 출신인 것 같은데, 4:12을 보면은 이 사람이 어쩌면 바울을 위해서 골로새에 파견되어 가지고 복음을 선포해서 골로새에 교회가 서지 않았는가 그렇게 추측이 돼요. 그래서 골로새서엔 4:12-13등에 이 에바브라가 골로새 교인들과 특별한 관계에 서있는 것을 암시하고, 1:7에는 에바브라를 그리스도의 충실한 일꾼이라고 칭찬하는 것을 볼 때에, 아마 이 사람이 바울의 동역자로서 골로새 교회를 직접 설립한 사람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이 돼요.
골로새 교인 중에 또하나 우리에게 알려진 사람은 빌레몬과 그의 가족이지. 1:2 빌레몬과 그의 권속들, 아키포 역시 아마 빌레몬의 권속이었던거 같고, 또 바울에게 감옥에서 전도받은 옛, 빌레몬의 옛 종이었던 오네시모도 골로새 출신 빌레몬의 권속이었던 것으로 골로새서 4:9에도 나타나고 빌레몬서 11절에도 나타나요.
그래서 이 골로새서와 더불어 우리는 빌레몬서도 같이 생각을 해야 돼. 빌레몬이 골로새의 아마 가장 대표적인 그리스도인 가문이었던거 같아요. 골로새서의 서문에 있어서 중요한 두 issue는, ①골로새의 교회에 위협을 주는 이단적 가르침의 성격이 무엇이었는가? 바울이 골로새서에서 골로새 교회를 위협하는 이단적 가르침을 공격하고 사도적 선포를 변호하는데 도대체 그 이단적 성격이 무엇이며 그것을 퍼뜨린 자들이 어떤 자들인가를 규명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②이 편지가 어디에서 쓰여졌느냐? 바울이 어느 감옥에서 편지를 썼을 것이며 도대체 이 편지들을 바울이 썼느냐? 아니면 바울 이후의 편지인데 바울의 이름으로 보내진 거냐? 이런 생각, issue가 골로새서의 서문을 연구할 때 중요한 문제예요.
아주 비판적인 학자들은 바울의 이름을 건 열세편지들 중에 7개만 진짜 바울의 편지로 보지. 로마서, 제1, 2, 고린도서와 갈라디아서 등을 보면은 그 어느곳에도 이 이단 사설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하고 있지는 않으나, 바울의 언명에서 우리는 이 이단 사설이 이러 이러한 것을 주장했기 때문에 바울이 거기에 대항해서 이런 말을 하는구나 하고 이렇게 추론함으로써 이단 사설의 주장과 성격을 대강 파악할 수가 있어요. 가령 그래서 대표적인 것을 들면 1:19에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충만함이 신성의 충만함이 ? 신성의 충만함이 거한다라고 한 것, 그 다음에 2:18에 사람들이 자신들을 금욕주의적으로 자해하면서 천사들을 섬긴다고 하는 말이 나오는데 그것도 이 한 요소, 2:21에 누가 한번 읽어봐요.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여기 “붙잡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는 이것은 골로새의 이단자들의 구호를 지금 인용하는 것 같은데, 이것도 지금 한 요소고.
그 다음에 23절 한번 읽어봐요.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를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이것은 이단 사설이 요구하는 금욕주의적인 의식이요. 자해 행위인데 바울은 이런 것은 진정한 겸손의 덕을 고양시키는데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봐서, 이단 사설이 강력한 자해 행위를 동반한 금욕주의적 의식을 고취한 것을 우리가 살펴볼 수가 있어요. 거기다가 덧 붙여 아까 이야기한 2:8, 20에 세상의 원초적 힘들 τα στοικεια, 세상의 원초적 神들을 神으로 섬기고, 그 신들을 기분이 좋게 해야 운명이 편하다고 하는 그런 사상을 가진 것을 봤을 때에 이들은 아마 이런 생각을 갖지 않았나... 하나님의 神의 神性의 ? 가 하나님의 신성의 ? 충만함이 제일 높은 하늘에서 부터 이 물질의 세계인 땅에까지 점점 流出된다 말이야. 流出돼 emanation 流出돼. 그래서 이 神性의 충만함이 저 위에서 하늘의 기강 높은 神에서 부터 점점 流出된다 말이야 땅의 물질의 세계에 오면 더 이상 없다 말이야.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神性의 충만함의 流出論에 근거해서 땅에 사는 우리와 人間들과 저 하늘의 神 사이에 神性을 띠는 神의 ? 를 流出 받는 여러 이 存在들이 있다고 보았지 않나? 그래서 이 여러 存在들을 aeon이라하고 이 存在들이 神性을 조금이라도 띠는한 우리가 그들을 섬겨야 되고 그들을 기분좋게 해야 이 땅위에서 저기 하늘로 올라감. 그리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그렇게 보지 않았나. 그래서 하늘에서 보이는 별들이라 든지 이런 곳에 전부 神性을 띠는 존재들(aeon)이 있다고 보고, 그런 aeon들이 人間의 숙명과 人間의 삶을 지배한다고 보지 않았나. 그래서 그런 神들을 잘 섬겨야 하늘로 올라가서 구원을 얻는다고 보지 않았나. 이렇게 짐작이 가요. 이런 宗敎的인 전통을 가진 골로새인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았을 때에 그리스도를 그런 aeon들 중에 하나로 아마 그중에서 좀 높은 aeon 정도로 생각을 하지 않았겠나. 그래서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옛날의 종교체계 aeon들의 “하에라티”에 편입시켜 가지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섬기는 예배 --기독교 예배의식도 옛 자기들의 宗敎意識과 혼합해서 그리스도의 유일성, 하나님의 계시자로서의 유일성 구원관으로서 유일성, 그리고 세상의 통치자로서의 유일성을 위협하고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그곳에 토착적인 혼합종교들에 복잡한 한편은 광란주의적, 한편은 금욕주의적 예배의식과 섞여가지고 진정한 사도적 전통이 위협을 받지 않았나 그렇게 짐작이 가요.
이들은 금욕주의의 일환으로서 음식을 가리고 또 종교단체로에 입교의식이 복잡한 절차가 있었고 어쩌면 獨身主意를 주장하면서 男女의 성관계를 부인하고 심지어 인간의 육신을 쳐 없애야 된다는 사상에의 자해 행위도 많이 하지 않았나, 그래서 이들에게는 여러가지 Tabbu들이 많이 있지 않았겠나 이렇게 생각이 돼요. 이런걸 통해서 이들은 aeon들을 잘 섬겨가지고 영생을 얻으려고 하지 않았나. 게다가 아까 이야기한대로 유대교, 헬라 유대교의 지혜사상과 천사사상이 더 합쳐져 가지고 골로새서를 보면 바울이 그리스도를 지혜 기독론으로써 펴는데 바울이 바로 골로새의 그런 사람들 때문에 그러지 않았나 그렇게 짐작이 가요.
얼마전까지만 해도 골로새의 지금 아주 대강 설명한 골로새 교회를 위협하는 이단사상을 조금 더 정확히 영지주의 주의적 구원자 神話와 영지주의적 종교적 경향이 골로새 교인들을 위협했다고 상당히 정확하게 말하는 경향이 있었어요. 특히 Bultman학파에서. 그래서 이 골로새 교회에서는 구원자에 대한 영지주의적 神話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재 해석해서 그것이 가장 큰 위협이 되어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유일성 그리고 그리스도의 finality 그리스도의 절대성을 강조한다.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반면에 지금 Cambrige에서 가르치는 M.Hooker교수 같은 사람은 골로새의 교회에 이단 사설이 침투를 해 가지고 골로새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그리스도를 그들의 영지주의 神話의 체계에 그냥 내포시키던가 아니면 지금 설명한 이런 aeon들 중에 하나로 aeon들의 하에라티의 하나로 내포시키는 이런 일을 벌써 저질러서 바울이 그것을 이 편지를 통해서 교정하는게 아니고 그러한 골로새의 이방인들의 분위기가 골로새 교회에 언제라도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바울이 그것을 미리 예방하는 쪽으로 골로새서를 썼다.
그러니까 골로새에 진짜 이단 사설이 침투한건 아니고 침투할 가능성이 있어서 예방을 위해서 편지를 썼다. 그런식으로 설명을 하는 데에 아마 M.Hooker의 반응은 한동안 골로새 교회의 영지주의적 神과 영지주의적 종교현상이 확실히 있었다는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그렇게 말을 했겠지만, 이 골로새 교회가 신약시대 이후에 일어난다고 보통 보는 영지주의의 침투는 안 받았지만 골로새지역에 또 Brigin지역에 복잡한 혼합종교들의 영향을 받고 또 혼합종교들의 영향에 의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이 흐려지고 있는 것을 본문에서 우리가 확실히 파악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이러한 이미 침투한 이단 사설에 대항해서 바울은 첫째로 그리스도의 유일성, 그리고 그의 절대성을 아주 강조한다구. 이 강조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우주론적 역할을 굉장히 강조해요. 그래서 골로새와 에베소에 특히 골로새에 기독론, 골로새서의 기독론은 宇宙論적 그리스도론 강력하게 펼쳐지는 것이야. 근데 그게 제일 집중해서 나타나는 곳이 골로새서 1장 15-20까지의 그리스도에 대한 讚頌詩예요. 그래서 거기를 한번 자세히 읽어보겠어요. 누가 읽어봐요.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끝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여기서 두드러진 思想은 뭐야? 그리스도의 先在思想, 그리스도가 萬物보다 먼저 계심의 先在思想, 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創造의 中保者이심, 萬物들이 그를 통해서 창조되었다.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땅에 있는 것들이나 모든 것들이 보이는 것들이나 안보이는 것들이나, 우리말로 권좌들이나 뭐라고 번역되어 있어? ? 보좌들이나 왕좌란 말이지 왕좌(권좌, 보좌)들이나 ? 주권자들이나 모든 통치나 권세나 모든 것들이 그러니까 이 지금 골로새 사람들이 여러가지 神적 ?를 조금씩 流出받은 별들이라든지 하늘과 땅 사이에 存在하는 많은 세상의 요인(요소)들을 다 神的 힘을 가진 것들로 섬기는데 그들이 아마 이렇게 ? 이런 여러가지 등으로 불렀겠지. 그런 것들이 어떤 것이든 다 그리스도가 창조한 것으로 지금 여기 나타내고 있어요. 그리스도가 선재한 ? 처음 난자로서 모든 存在들 무엇까지 포함해서 골로새 사람들이 섬기는 하늘과 땅사이에 存在한다는 여러 神性을 가진 여러 統治權을 가진 그런 存在들 까지도 다 그리스도의 상징이다.
다음에 또 그리스도가 어떤 분? 再創造에 中保者 곧 구속의 종보자, 救援의 중보자이심. 그가 敎會의 머리로서 죽은자들 가운데서 첫 열매로서, 재창조 復活을 통한 終末의 재 창조의 우두머리요, 시작이요. 우두머리요 또 그것의 중보자 再創造의 中保者임을 강력히 나타내요.
그리고 또 무슨 思想? 그 다음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和解시키는자, universal Reconciter 하나님과 人間들 사이를 갈라놓는 aeon들과 혹 그 하나님께 적대하는 이 모든 사탄의 세력들까지도 전부를 하나님께 和解시키고 그의 피를 통해서 그의 십자가의 피를 통해서 平和을 입은자. 그 和解의 中保者 하나님의 피조세계 전체의 화해의 중보자 임을 거기서 나타내요. 그래서 이 십자가의 죽음을 이렇게 人間들의 罪를 속죄하고 人間들은 하나님께 和解시키는 이런 人間論的인 범위를 넘어서 世上 전체 온 우주의 和解의 의미로 확대해서 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어요. 또 하난 여기서 두드러진 생각은 처음의 1:15에 있는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 해서 그리스도의 이 하나님의 完全한 啓示者思想이 두드러지죠.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님의 啓示者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 으로서 그가 하나님을 계시할 수 있는 이유는 19절에 그 안에 하나님의 이 ? 가 神性의 충만함이 그리스도안에 거하기 때문에, 무슨 aeon들 이런 것들에 하나님의 ? 가 流出되어서 조금씩 거하는게 아니고 하나님의 ? 전체가 그리스도안에 거함. 그리스도안에만 있음.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그가 계시할 수 있고 그가 하나님의 중보자, 실행자로서 創造와 再創造의 실행자이고 그가 소외된 우주 전체를 하나님께 和解시키는 者임을 강력히 천명하고 있어요. 이 골로새서 1:15-20의 시는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cosmic role 우주론적 역활, 창조자로서 그리고 화해자로서 곧 구속자로서, 구원자로서 이 그리스도의 우주론적 역활을 아주 이 Grard, Skeley으로 그리고 있어요. 그래서 바울의 다른 편지들에서 볼 수 없는 로마서나, 고린도 전후서나 암시되어 있었지만은 가령 고전 8:6에도 하나님 그로부터 모든 것이 지음을 받았음을 나타내는 信仰고백이예요. 고전 8:6한번 읽어봐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또한 한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거기서 보면 이게 두 member로 된 신앙고백이지. 우리는 한 하나님. 고린도의 헬라 이방인들은 많은 神들을 믿고 많은 主들을 믿지만 우리는 한 神을 믿는데 唯一神 사상, 그 神은 어떤 神이냐? 創造主이시고 우리가 그로 부터 창조되었고 그래서 우리의 삶의 目的이 모든 피조물의 存在 目的이 궁극적으로 그에게 있음. 그 다음에 한 主 예수 그리스도인데 그 분은 어떤 분이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그를 통해서 창조되었어요. 그리스도가 만물에 創造의 中保者임. 이렇게 고전 8:6이라든지 이런 곳에 또는 로마 8장이라든지 여러곳에 그리스도의 우주론적 역할이 암시되어 있어요. 이미 그러나 그것이 이렇게 골로새서에 있는 1:15-20의 讚頌詩와 같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과 같이 골 1:15-20까지는 신앙고백을 찬송가로 만든 시로 보통으로 본다. 빌 2:6-11과 마찬가지로 여기서와 같이 아주 조직적으로 그리스도의 우주론적 역활을 확대 해석 한 곳은 아직 없다 이말이예요. 그래서 이 골로새서의 基督論의 독특성이예요. 그 앞에는 그리스도의 우주론적이. 그러므로 우주론적으로 해석이 돼서 하나님의 모든 하나님의 소유된 모든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다시 和解되고 統合됨을 천명하고 있어요.
바울이 이렇게 그리스도를 첫 창조의 중보자요, 재 창조의 중보자요, 그리고 만물의 화해자로 강력하게 편지 서두에 내 세우는 것은 아마 골로새 이단들의 aeon思想에 의거해서 그리스도를 많은 aeon중에 하나 정도로 볼려고 하는 것에 대처하는 行爲가 아닌가 그렇게 볼 수가 있어요. 바로 그리스도가 이런 그 골로새 사람들이 생각했던 aeon들과 그의 모든 神性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 까지도 다 그리스도에 의해서 創造되었고 그리스도에 의해서 하나님께 和解될 것임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는 그러므로, 그런 aeon들을 두려워 할 필요도 없고 그들을 뭘 섬길 필요는 더더구나 없고 그리스도안에 하나님의 神性의 충만함을 갖는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음을 천명해요. 2:9-10을(8-9)한번 읽어봐요.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그 안에서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 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그리스도가 神性의 충만함이 거하는 분이기 때문에 그를 통해서 우리도 그 안에서 神性의 충만함을 누리게 된 자들이므로 뭐 aeon이나 이런 것들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음을 말하고 있어요.
또 이단들은 그리스도를 여러 aeon들 중에 하나로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의 정통 헬라 이원론에 의거해서, 그리스도의 神性만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의 그 成育身을 부인하고 人間性을 또 부인했던 것 같애. 그래서 바울은 여기서 이 편지에서 그리스도의 人間性도 굉장히 강조를 해요. 1:22- 그리스도가 성육신함. 2:9-11. 그리스도가 그의 피를 흘림으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림으로 구원을 이루어서 만물을 和解시킴을 강조한다구. 1:27.
그 다음에 또 바울은 이 골로새인들에게 사도적 전승에 굳건히 서기를 당부해요. 아까 방금 읽은 2:28에 人間의 유전과 人間의 가르침에 반대하고 이 사도적 福音을 견지하도록 부탁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이들이 그 지역의 혼합종교들의 theosophy 체계를 받아들여 가지고 그것에 의해서 사도의 福音을 혼합시키는 그러한 일을 하지 말도록 사도적 복음과 인간의 유전을 분명히 구분해서 人間의 유전에 더 이상 휩쓸리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어요.
또 바울은 골로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확신과 그것에서 오는 자유를 강조해. 아까 이 골로새의 혼합종교에서 aeon 세상의 원초적 힘들을 섬기는 것이 여러가지 자해 행위를 동반한 금욕주의 타부, 이런 것들을 지키는 ritkuals들로 의식들로 나타났다고 그러는데 그런 것들이 전혀 필요 없음.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이 모든 하나님에 대항하는 세력들을 이기고 만유의 주로 군림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神性의 ? 가 거하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그런 세상의 원초적인 힘들의 지배를 받지 않으므로 그들을 섬기기 위해서 무슨 음식을 가리고 무슨 자해행위를 하고, 무슨 타부를 하고 그럴 필요가 없음을 강조해요. 그리스도의 자유를 강조한다구.
그래서 한마디로 골로새서는 사도적 복음이 헬라의 혼합종교와 부딪쳐서 헬라의 synchritheism 혼합종교의 체계속으로 체계속에 여러 요소들 중에 한 요소로 녹아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는 거예요. 어떻게 방지해요? 그리스도의 독특성, 절대성을 강조함으로써. 근데 이게 2세기 이후 수백년동안 그리스도의 복음이 부딪쳐야 하는 문제였지요. 헬라의 宗敎精神은 혼합종교 정신이었다구. 헬레니즘이 혼합주의죠. 그래서 어떤 것도 그 체계안에 녹여 가지고 그 혼합종교의 한 요소로 삼으려고 했는데, 바로 기독교도 그리스도의 복음도 그러한 지금 위험을 골로새에서 당하고 있는 거예요. 그럴때에 바울이 어떻게 반응을 하느냐? 그리스도의 유일성 그리스도의 finality의 절대성을 강조함으로 그리스도의 우주론적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그 혼합 종교로 기독교의 복음이 녹아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고 있어요.
오늘날 다시 소위 종교적 다원주의의 시대에 사는 오늘날, 골로새서에서 바울이 부딪치는 문제를 우리가 부딪쳐요. 특히 선교지에서 많이 부딪친다구. 특히 여러분들 인도 사람들 하고 이야기해 보면 이 문제를 금방 알 수가 있어요. 힌두교의 복잡한 혼합종교 체계 속에 그리스도를 그리스도의 복음을 녹일려고 하는 경향을 많이 볼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힌두교에, 가령 1976년에 그곳에 있는 W.C.C Ecumenical 측에서 이른바 제3세계에서 신학이란 주제로 신학대회가 열렸는데, 그때 어떻게 해서 내가 참석하게 되었는데, 인도에서 이제 제일 역사 있고 강력한 신학교가 U.T.C --United Theolgy College-- 라고 방갈로에 있는 W.C.C계통 학교인데, 거기의 교수란 친구가 인도에서의 기독론이라 해서 뭐라고 논의를 펼치느냐 하면, “인도에서는 그리스도를 브라만이라고 선포해야만 비로소 그리스도인의 인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의미가 있게 된다. 그래서 완전히 기독교의 복음을 힌두교의 체계로 조직적으로 번역을 해야 된다. 그게 이른바 토착화고 상황화라.” 이렇게 주장을 하는 거예요. 그건 골로새의 이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aeon의 체계의 하나쯤으로 ontegration하는 거와 똑 같은 현상이라구.
그런게 아주 강하게 나타나요. 근데 인도에서는 그게 노골적으로 나타나지만 사실은 어디에서나 나타나는 현상이라구. 우리 한국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나지? 종교와의 대화라든지, 무슨 토착화의 이름으로 그리스도를 전통적인 한국의 신앙체계라든지, 또는 종교 체계에 하나로 그중의 하나로 ontegration시키려고 하는 그런게 그런 경향이 항상 있는데, 이 골로새서가 바로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이른바 토착화의 한계를 금을 그어 주고 이 종교적 혼합주의의 위험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선례를 드는 의미에서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커요.
2. 기록 장소
아, 그래서 여러분들 골로새서를 연구해 보길 바라고, 이제 골로새서의 또 하나의 문제는 이 편지를 바울이 썼다면 어디에서 썼느냐? 바울의 감옥에서 쓴 편지가 4개가 있지.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이 4개가 감옥에서 쓴 편지란 말이야. 그런데 이 4개중에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와 빌레몬서는 다 내용적으로 뿐만 아니라 지역적으로 시기적으로도 다 연결되어 있어요. 가령 골로새서 4:7-8과 에베소서 6:21-22은 두기고가 이 편지를 골로새서와 에베소서를 가지고 전달하는 자로 나타나.
그 다음에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를 가지고 갔는데 바로 이 오네시모가 또 골로새서에서도 나타나고 아킵보가 골 4:17, 그리고 몬 1:2에 나타나고 이런 점으로 해서 4개의 옥중서신들 중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는 내용적으로도 아주 근접하고 골로새서, 에베소서는 내용적으로 아주 밀접하지. 밀접하고 또 지리적으로도 에베소 지역, 그 다음에 편지들에서 언급된 사람들에 의해서 우리가 이 편지들은 같은데서 썼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어요. 반면에 빌립보서와 세 편지들 간은 별 접촉점이 없어요. 그래서 빌립보서는 세 편지들과 어쩌면 다른 곳에서 썼거나 아니면 같은 곳에서 썼다면 다른 시기에 썼거나 이렇게 짐작할 수 있어요.
전통적으로 이 4개의 옥중서신들은 전부 바울이 로마에서 썼다는 것이 전통적인 설인데, 그렇다면 바울의 마지막 감옥 60년대에 이 로마에서 썼다는 것이 전통적인 견해인데, 그렇다면 이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는 그 감옥살이의 초창기에 썼고 빌립보서는 그 감옥살이의 마지막 단계에서 썼을 것이다. 그렇게 짐작이 가요. 왜? 빌립보서를 보면 1장에 곧 내려질 최후 판결을 기다리는, 그래서 그것이 혹 사형 언도가 될지 아니면 무죄 석방이 될지 바울이 상당히 내적인 불안함 속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이 영혼의 평안함을 얻는 그런 그 모습을 빌립보서에서는 확실히 우리가 느낄 수가 있다구. 그러나 에베소서와 골로새서, 빌레몬서는 그런 최후판결을 기다리는 자로서의 그 모습이 전혀 없어요.
그래서 전통적인 로마 감옥에서 이 편지들을 다 썼다면 그러면 골로새서, 에베소서, 빌레몬서는 이 감옥살이의 어쩌면 2-3년 계속 되었을 감옥살이의 초창기에 썼으리라. 그리고 빌립보서는 그 감옥살이의 마지막 단계에서 썼으리라. 아니면 아예 빌립보서는 지난번에 이야기 한 것처럼 전혀 다른 감옥에서 썼던 것 같아요. 이 세 편지와 더불어...
그래서 지난번에 이 빌립보서가 가이사랴, 로마로 이송되기전 가이사랴 감옥에서 썼나? 아니면 에베소 감옥에서 썼나? 아니면 어쩌면, 고린도 감옥에서 썼나? 여러 설들이 구구하게 있다고 그랬지? 그런데 마찬가지로 이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와 빌레몬서에서도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異見이 있어요. 로마에서 썼다는 전통적인 見解에 설득이 안되는 사람들은 로마로 이송되기 전 가이사랴에서 썼다? 우리가 여러분 저기 Guthrie책 같은 것을 읽으면 이런 것에 대한 자세한 토론이 있으니까 그런 것을 살펴봐요. 별로 중요한 토론이 아니라구.
그러나 또 하나의 유력한 說은 에베소에서 아마 잠깐 바울이 감옥살이를 했는 것 같은데, 에베소에서 이 편지를 썼지 않았을까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구. 물론 에베소에서 감옥살이 한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몰라요. 다만 고린도 후서 1장에 바울이 에베소에서 생명을 포기할 정도로 엄청난 환란을 당한 것을 언급하는데 그것이 정확히 어떠한 환란이었는지 모르나 “거의 확실히 되는 것을 포함하는 환란이었을 것이다. 아시아에서 자기가 생을 포기하고 그런 환란을 당했다고 그러는데 그 환란은 거의 확실히 몸에, 신변에 구속상태를 포함하는 환란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고 “바울이 에베소에서 감옥살이를 했을 것이다.” 보고, 그렇다면 골로새의 에베소에 갇혀 있는 동안에 골로새에 이단 사설이 침투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위협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이 편지를 썼을 가능성이 이제 많아지는 거예요.
골로새서는 그 정도로 하고, 이 다음시간에는 에베소서를 우리가 공부를 할테니까 에베소서를 또 한번 자세히 읽어봐요. 그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와의 유사점들을 눈여겨서 읽어보고 와요. 유사점들과 차이점들을 좀 눈여겨 보고 빌레몬서를 좀 더 읽어오고, 빌레몬서는 짧은 편지지만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많다구. 특히 1C의 교회가 노예문제를 어떻게 다루었나? 바울이 지금 우리의 현대 눈으로 봐서는 고대 사회의 가장 악질적인 제도였던 노예제도를 복음의 정신에서 바울이 어떻게 부딪치나? 그게 우리 오늘, 우리의 社會論理를 정립함에 있어서 시사하는 바가 상당히 크다구. 그래서 이 빌레몬서를 한번 자세히 --짧은 편지니까-- 자세히 공부하고, 특히 빌레몬서는 바울이 나중에 보겠지만, 모든 편지가 그렇지만 빌레몬서는 아주 이 Master piece라. 그 행간의 행간의 함축의미가 엄청나게 풍부한 Master piece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빌레몬의 입장에 서 봐요. 여러분들이 바울로 부터 이 편지를 받았을때 오네시모를 어떻게 했을까? 여러분들의 돈을 떼먹고 도망간 노예를 지금 돌려 보내면서 바울이 이 편지를 쥐어서 보냈다구 그랬을 때에 이 편지를 읽고 여러분들이 종 오네시모에 대해서 어떻게 대했을까? 빌레몬의 입장에서 그 편지를 한번 읽어봐. 그러면 바울이 얼마만큼 지혜있게 이 편지를 썼나. 왜 사람들이 이 편지를 Master piece라고 하나. 그 다음일이지만 오늘 우리가 기독교 사회의 뜻에 어떠한 원칙들을 깨닫게 해주는가 이 다음시간에 에베소서, 빌레몬서를 아주 면밀히 살펴 보겠어요.
[출처] [공유] 바울서신 11강 - 김세윤|작성자 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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