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고넬료 가정처럼 (행10:24-25)

by 【고동엽】 2022. 9. 27.

 고넬료 가정처럼  (행10:24-25)

성경에 보면 많은 가정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브라함, 노아, 욥, 나오미의 가정과 이삭의 신혼부부 가정이 있는가 하면 신약의 나사로, 삭개오, 고넬료의 가정 등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는 그 가운데 고넬료의 가정을 주목합니다. 우리에게 고넬료의 가정은 은혜를 받는 가정의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정이 은혜를 받으려면 고넬료의 가정을 배워야 합니다. 요즘 가정세미나가 큰 사역의 중요성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청교도 가정이 가장 복음적인 가정의 모델로 제시됩니다. 특히 청교도 가정의 3대 교육지침이 아주 본받을만 합니다.
첫째 자식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하나님의 것으로 드리는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자녀를 가르치는 선생은 부모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자녀에게 부모의 의지와 꿈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심어준다는 말입니다. 셋째는 교육은 설득이 아니라 모범이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모범을 보여주면서 훈련을 시킨다는 것입니다. 오늘 고넬료의 가정을 통해 모두가 은혜 받는 가정으로 세워 가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준비된 집회

본문에 보면 고넬료의 가정에서 베드로를 모시고 집회하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단순한 종교행사 차원으로 보기보다는 고넬료의 태도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24절에 보면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라고 했습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초청해놓고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서 베드로를 기다렸습니다. 여러분 집회할 때 나 혼자 오는 것이 더 은혜롭습니까? 내가 어떤 사람과 함께 와서 참석할 때에 더 은혜롭습니까? 물론 후자입니다. 혼자 와서 듣는 것과 함께 불러모아서 듣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달리 나타납니다. 그런 점에서 고넬료는 은혜를 안받을 수가 없습니다. 일가와 친구들까지 불러모았던 고넬료의 열정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었고 자기만 은혜받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함께 은혜받게 한 역할을 한 점에서 하나님은 고넬료에게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에 부부가 한 사람이라도 은혜받아야 그 집이 유지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은혜받는 것입니다. 일가와 친척들까지도 함께 모일 수 있는 가정이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를 받습니다.
미국의 교회와 사회가 전성기를 이루었던 시점이 1950년대입니다. 이 때가 미국이 세계 최강국으로서 확고한 자리를 잡고 세계를 주도하는 강력한 힘이 가장 폭발적으로 나타났던 때입니다. 우리 나라는 한국동란을 만나 비참한 세월을 보낸 시기였지만 미국은 세계를 호령하는 힘을 가진 나라로 평가됩니다. 1950년대의 미국가정이 가장 견고한 신앙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 이후에 핵가족 바람, 주말문화가 미국의 교회와 가정을 무너뜨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교계의 지도자 한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작년 연말에 일급호텔 모임에 초청되어 갔는데 유독 그날 저녁에는 가족단위로 식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옆 테이블에 놓인 케잌을 보니 자녀의 생일잔치를 해주는 자리였습니다. 아이의 친구들과 심지어 그의 부모들까지 청하여 생일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 분은 왜 우리가 3만8천원짜리 식사로 아이들 생일잔치를 베풀어주어야 하며, 이 식탁 앞에 아이들 생일을 자랑삼아 잔치를 벌이고 있는 한국 부모들의 모습에서 그날 밥맛을 잃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분수를 넘는 격에 맞지 않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가정이 무엇을 추구해야 될 것인가 라는 점에서 심각한 반성을 해야 합니다. 성도의 가정은 일가 친척들이나 가까운 친구들, 믿는 성도들이나 누구든지 그 집에 가기를 좋아하는 집이 되어야 합니다. 구역예배를 드리는데 누군가 일가와 친척을 불러모은 고넬료의 역할을 하는 구역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모든 사람이 오고싶어 하도록 문턱을 낮추어 함께 모이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고넬료의 가정은 고관가정입니다. 이 가정의 문을 활짝 열고 일가와 친구들을 초청하여 베드로를 기다리고 있는 고넬료의 모습에서 우리에게 또 다른 가정의 모습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기다리는 자세

둘째는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기다리는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만약에 기다리는 과정없이 바로 된다는 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기다리는 기간없이 혼사를 치른다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혼사에는 준비기간이 필요합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기도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고넬료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준비하며 베드로를 기다렸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기다림의 과정은 매우 영적인 의미를 부여합니다. 성경에 기다린다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준다는 약속을 해놓고 25년 동안 기다리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그 기다림이 아브라함에게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출생에 대한 네 가지 유형이 있는데 제일 행복한 출생은 기다리다가 태어나는 생명입니다. 할아버지나 남편, 본인이 기다리다가 태어나는 생명이 축복된 생명입니다. 두 번째는 준비되지 않은 생명입니다. 가족계획을 했는데도 예기치 못하게 태어나는 생명은 당황하게 합니다. 더 안 좋은 생명은 실수로 태어나는 생명입니다. 이것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올무가 됩니다. 요즘 후회스러운 출생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또 최악의 상황에서 강제로 태어나는 생명이 있습니다. 성폭행을 당하는 경우는 한평생 상처를 안고 삽니다. 다같이 이 땅에 태어나도 환영을 받으면서 기다리다가 축복 속에서 태어나는 생명은 오늘 성도들에게 큰 교훈으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복을 받아도 기다리다가 받으셔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을 주더라도 기다리는 과정을 두고 주시기 바랍니다. '얘야, 내가 언젠가 네게 선물을 줄텐데 하나님 앞에 한번 기도해 보렴. 하나님이 아마 좋은 선물을 안 주시겠니?'라는 간격을 두고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은혜받기 위해서는 기다리는 준비시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엎드려 절함

드디어 고넬료가 기다린 끝에 베드로가 자기 집으로 왔습니다. 이 때 고넬료의 3가지 주목할 행동이 있습니다.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기다리면서 베드로가 올 때는 엎드려 절했습니다. 고넬료가 엎드려 절했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입니다. 백부장인 고넬료는 식민지 국가의 고관으로 로마의 군인입니다. 그런데 피식민지 국민 앞에 절을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마치 일제 시대에 경찰서장이 우리 동네 사람 앞에 절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베드로는 사회적인 지위가 없는 갈릴리 어부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은 영적인 면에서이지만 이 베드로 앞에 엎드려 절하는 고넬료의 모습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로마군인은 황제 앞에서 절하고 그 황제의 신발에 입을 맛추는 것이 예라고 합니다. 황제 외에는 무릎을 꿇으면 안되는 일입니다. 이것은 무릎꿇고 엎드렸다는 동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에게 일어났던 그 일과 고넬료에게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그 의미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33절에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에서 고넬료가 베드로를 하나님이 보낸 사람으로 영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어부로 보지 않았습니다. 식민지 국가의 국민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이 보낸 사람으로 알고 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여기서 고넬료가 얼마나 영성이 충만한 사람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자 하는 마음으로 모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주께서 당신께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합니다"라는 말이 제일 핵심되는 구절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엎드리고 있습니다.
어느 가정에 아버지가 줄담배를 피우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아내와 아이들이 담배를 끊으라고 해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초등학교 다니는 딸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습니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보니 폐가 나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의사가 당부하기를 탁한 공기나 담배연기를 마시지 말라고 했습니다. 집에 돌아왔는데 영문을 모르는 아버지는 또 줄담배를 피우기 시작합니다. 그때 딸이 '아빠, 엄마랑 오늘 병원에 갔는데 폐가 나쁘데요. 의사선생님이 담배연기가 안좋데요.' 딸이 누워서 아빠를 쳐다보며 이 말을 조용히 하는데 그 말을 듣던 아버지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딸의 말에 충격을 받고는 그때부터 완전히 끊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왜 가능한 줄 아십니까? 딸이 앓고 있는 광경을 보고 내가 너를 위해서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느냐며 평소에 무엇이든 하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 한마디에 담배를 끊을 수 있었습니다.
고넬료가 베드로 앞에 엎드릴 수 있었던 것은 그 만큼 당신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은 내가 무엇이든 순종하겠다는 마음이 열려 있었기 때문에 그 행동이 가능한 일입니다. 고넬료는 오늘 우리에게 아름다운 가정의 모형이며 가정을 살릴 수 있는 신앙인의 모델로 우리 앞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우리 가정에 어느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열린 자세로 세워져 있다면 그 가정은 소망이 있을 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모이게 하는 사람, 기다릴 줄 아는 사람,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습니다.

삶의 매너를 갖추자

미 국무성에 근무하는 정운복 박사의 '미국인들은 왜 한국인을 싫어하는가'라는 글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정직한데 이상하게도 끝에 가서는 속에 부정직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두 번째 준법정신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미국인들은 매너를 중요시하는데 우리 나라 사람은 도무지 공중도덕이 지켜지지 않습니다.
세 번째 자기주장만 내세웁니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배려할 줄 모릅니다. 흑인들은 가지고 있을수록 사람들에게 베푼다고 하는데 한국 사람들은 돈을 벌수록 상대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네 번째 건방지고 덤벙댄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실속이 없다는 말입니다.
다섯 번째 너무 감정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이성적인 면이 약해서 행동하고는 후회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정에 맞으면 집도 팝니다. 그러나 감정을 내세우기 전에 기도해야 되고 생각해야 됩니다. 이성적인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여섯 번째 협동정신이 부족합니다. 이것은 이기적인 것과 같습니다.
일곱 번째 편견이 아주 심하다는 것입니다. 한쪽 말만 듣고는 그대로 단정하는 편견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무서운 것은 오해와 편견입니다. 오해하지 않도록 상대방 말을 들어야 되고 편견을 갖지 않도록 단정하는 것을 유보해야 됩니다.
여덟 번째 맹목적인 흉내를 잘 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창조성이 없는 모방의 천재들이라는 것입니다. 정운복 박사가 미국에 살면서 동족 때문에 곤혹을 치뤘던 일들이 바로 이런 일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글은 정운복 박사가 동족을 비난하려고 쓴 것이 아니라 미국 사회에서 한국인들이 실패하는 것을 안타까워해서 교훈을 주려고 정리한 것입니다.

맺는 말

하나님이 보실 때 고넬료 같은 사람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그 모습을 갖출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을 다른 것으로 장식하지 말고 고넬료가 어떤 가정으로 만들고 있는지를 영적으로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 가정에 믿는 자와 안믿는 자들이 자주 오게 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기다리는 신앙인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자는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명령 앞에 행동할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고넬료의 가정이 성도들의 가정처럼 세워져 가기를 바랍니다.

          
출처/이용호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