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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음을 품으라 (본문 빌2:5-11)

by 【고동엽】 2022. 9. 27.

이 마음을 품으라 (본문 빌2:5-11)

어느 교회 유치부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예수님께 마음을 드리자는 설교를 감동있게 했습니다. 그 설교를 집중하며 들었던 어린이가 집에 와서 저울을 꺼내고는 몸무게를 달아보더랍니다. 이상히 여긴 엄마가 아이에게 왜 몸무게를 다느냐고 물으니 아이가 '내가 예수님께 마음을 드리고 왔는데 몸무게는 줄어들지 않았어요'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엄마가 아이에게 설명을 했습니다. 그래도 이 아이는 여전히 이해를 못했습니다. 여러분 제일 곤란한 문제는 오해하는 것과 편견을 갖는 것입니다. 이 아이는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 오해가 편견으로 맘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오해는 풀어야 합니다. 오해가 오래가면 편견 덩어리가 되어서 무슨 말을 해도 바로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리가 들리지 않고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특히 진리에 대한 오해와 편견은 우리들 신앙에 아주 보편화 되어있는 현상입니다.

진리에 대한 곡해

우리가 믿고 있는 이 진리는 상식적으로나 이성적으로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믿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지혜와 이성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모순 투성이의 책입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믿지 못하고 더 큰 오해와 편견을 가지게 된 것은 19세기 신학계에 비평학이 등장하고부터 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비평학을 발전시켜서 성경을 무조건 믿는 게 아니라 이 말씀을 분석해서 따져보고 믿을 만한 것은 골라 믿고 믿지 못하는 것은 버리자는 즉 가려서 성경을 믿어야 된다는 신학운동을 전개시켰습니다. 이런 무서운 비평학이 발전해서 하나님은 죽었다는 사신신학까지 발전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비평하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믿을 수 없는 성경이야기로 설교하는 목사의 설교를 어떻게 믿을 것인가 라고 하면서 비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강단에서 선포되었던 설교가 비평을 당하자 이제는 기도가 비평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도가 비평을 당하여 거부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예배가 비평을 당하게 되었고 예배가 필요없다는 주장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진리를 대항하는 악마의 세력으로 항상 도구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성육신의 신비

오늘 성경을 보면 예수님에 대해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전제를 해놓고 예수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 말씀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두 가지 주제로 말합니다.
하나는 예수는 본래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의 권리와 영광을 포기하고 사람의 모양과 종의 형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메시야 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영적 세계의 질서가 파괴된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지각변동이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동등됨을 포기하고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메시야를 이 본문이 확실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는 살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 분이 오신 것도 죽기 위해 오셨고 산 것도 죽기 위해 산 것입니다. 인간의 상식을 가지고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씀하신 이 사실을 믿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과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역사적 사실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가장 힘이 있습니까? 가장 힘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감추어진 것이 사실로 드러나면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은 사실을 두려워합니다. 제가 한 달여 전에 종합검진을 받았는데 병원 직원들의 말을 들어보니 이 종합검진을 안받고 회피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혹시 검사를 받아서 숨은 병이 드러날까봐 차라리 묻어놓고 살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아무리 자녀들이 검사를 받으라고 권해도 그것을 거부하는 분들이 있답니다. 사실은 굉장한 힘이 있고 무섭습니다. 학력변조가 사실로 드러나면 장관도 경찰청장도 사임을 해야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에 대한 것이 사실인데도 사람들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못 배운 사람보고 무식하다고 하면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많이 배운 사람보고 무식하다고 하면 변명도 안합니다. 자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식한 사람은 자신이 배우지 못했다고 하는 그 사실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무식을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무식이라는 사실 앞에 한번은 부딪혀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진리의 사실

오늘 우리는 중요한 시간을 맞이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마저 사실을 은폐하고 감추면 소망이 없습니다. 여러분 주님 앞에서 한번 멋있게 살고 싶습니까? 여러분 자신들의 약점과 여러분 자신들의 수치스러움을 주님 앞에 적나라한 사실로 고백하십시오. '주님 저는 이렇게 몹쓸 죄인입니다. 나는 이렇게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는 자신의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깨뜨려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역사적 사실로 사람 앞에 드러났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사람 앞에 드러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수치입니다. 낮아지신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사실을 이 역사 앞에 보이셨습니다. 하늘 나라의 질서를 깨뜨리셨지만 그것은 파괴를 위한 파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또 다른 건설을 위해서 하늘나라의 질서를 파괴하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가운데에 일어나야 할 파괴는 파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시험, 창조, 생명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요즘 파괴라는 용어가 많이 사용됩니다. 가격파괴, 학력파괴, 기득권 파괴 등 이런 것들이 곳곳에 도입되고 있습니다. 파괴는 좋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오해와 편견으로 묶어져 있는 잘못된 것은 파괴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은 새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하나님의 약속과 계시와 섭리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파멸을 위한 파괴가 아닌 생명을 위한 파괴인 것입니다.
며칠 전 할렐루야 기도원을 한기총에서 이단으로 규정을 하고 SBS가 이 문제를 심각한 사회악으로 규정하고 방영했습니다. 이제는 사법기관이 다스려야 한다는 순서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그곳의 은폐되어 있던 모든 것이 전부 사실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두려워서 발악을 하는 것입니다. 과학적이고 실제적인 사실 앞에서 그들은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요즘 자살 사이트 때문에 문제가 많습니다. 이 사이트가 생기기 전에도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생긴 이후로 이제는 자살을 더 부추기게 되었고 마치 사업처럼 갑자기 주가가 올라갔습니다. 무서운 악령의 역사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교단의 바른신앙이란 잡지에 엄청나게 많은 사이버 이단의 홈페이지를 소개해 놓았습니다. 대단히 위험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한 문제는 이것들이 통하는 우리 사회입니다. 여러분 성도들은 예수를 이렇게 믿어야 합니다. 기쁜 일이 있고 형통할 때는 감정적이 되어야 하고 고난이 오고 핍박이 올 때는 이성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행동을 합니다. 어려움이 오면 우리의 판단력이 흐려져서 누가 이런 말을 하면 곧이 듣고 저런 말을 해도 곧이 듣고 맙니다. 주치의가 치료받는 일정을 정해주고 지시하지만 집에 와서 옆집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는 마음이 돌아서서 정체불명의 약을 먹고 병을 더 악화시키는 경우가 많이 있다고 의사들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냉철해 지십시오. 기쁜 일이 있습니까? 표현하고 감정으로 돌아가십시오. 이것이 바로 될 때 신앙생활에 균형과 질서가 생깁니다.

예수 마음의 실체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우리는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것이 답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마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색깔이나 모양이 있습니까? 대단히 막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예수의 마음을 품어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며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 마음의 실체를 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신 역사적인 예수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가 이 땅에 오셔서 실제로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은 예수님 마음의 한 부분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내 마음에 담을 때 예수의 마음을 내 마음에 담는 것입니다. 그 분은 자기 죄로 죽은 것이 아니라 만민들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의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신 것처럼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내 마음에 십자가를 진리로 받아들일 때 내 안에서 죽음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 옛사람, 욕심이 죽습니다. 인간의 이성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내 안에서 죽음을 일으킴으로 우리 안에 새로운 출발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의 마음은 부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 육의 사람이 죽고 온갖 더러운 것들이 죽고 나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내 안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살아 있어야만 이 땅의 유혹과 마귀의 충동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맺는 말

우리 나라 민족 지도자 중 남강 이승훈 선생의 인생을 바꾼 두 명의 인물이 있습니다. 이 두 지도자를 만남으로 이승훈 선생의 인생관이 달라졌습니다. 1907년 평양 모란봉에서 도산 안창호가 유명한 연설을 했을 때 청년 이승훈은 도산 안창호의 민족혼의 강연을 듣고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이승훈은 민족과 조국을 위해 몸을 바칠 것을 다짐했고 그의 인생관에 민족이라는 강한 개념이 생겼습니다. 그로부터 3년 후 그는 평양 어느 교회에서 한국교계의 유명한 선각자 중 한 사람이었던 한석진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이승훈 선생은 한 손에는 예수님, 한 손에는 민족을 붙잡고 이 두 가치를 위해서 몸을 불사르리라 다짐했고 오산학교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남강 이승훈이라는 이 청년 안에 예수가 들어올 때 그의 인생관이 파괴가 일어났습니다. 도산 안창호의 영향도 크지만 안창호의 사상도 다 기독교적이었습니다. 우리를 지탱하는 근본적인 힘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온갖 도전이 물밀듯 밀려오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정확한 정답은 이 땅에 메시야로 오셔서 나를 위해 속죄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가 내 마음에 만 왕의 왕으로 자리잡고있는 한 우리에게는 결코 패배와 흔들림이 없습니다.  
          
출처/이용호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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