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03월 27일] 내 믿음의 현주소(막 5:35~43) - 곽선희 목사
https://www.youtube.com/watch?v=KK7VrqcXj9M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신약성경 마가복음 5장 35절로 43절 말씀입니다. 신약성경 61면입니다. 신약성경 61면 마가복음 5장 35절부터 봉독하게 됩니다. 이 계시의 말씀을 봉독할 때에 다 함께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그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시나이까?"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의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회당장의 집과 함께 가시니, 그들이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한 제자들을 데리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그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아멘.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조지 워싱턴, 그 대통령이 어렸을 때 경험한 이야기입니다. 아침 일찍이 아버지가 읍내 마을에 가서 필요한 물건을 사 오겠다고 마차를 준비하고 마차에 올랐다고 했습니다. 아들은 달려가서 "아버지, 나도 가면 안 돼요?" 하고 아버지에게 재촉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이가 너무 에너지가 넘쳐서 불안했습니다. 조지 워싱턴은 아버지 마차 아버지 옆에 앉아서 소풍 가는 기분으로
아주 들뜬 기분으로 따랐습니다. 마을을 돌아다녔습니다. 아버지께서 이 가게 저 가게 다니면서 필요한 물건들을 사다 보니까 이 아들이 따라다니는 게 왠지 귀찮고 사랑스러웠어요. 말이 다니나요. 다 꾸물꾸물 장난하고 따라다니면서 물어보기도 하니까 그게 신경 쓰여서 아버지가 아이에게 말합니다. "너 이 골목에 여기서 서 있어라. 너희가 서 있으면 내가 물건을 다 사고 나서 너를 데리고 집으로 갈게" 하고 거기에 서라 했습니다. 조지 워싱턴은 골목길에 서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물건을 다 사가지고 마차에 싣고 아들과 함께 왔다는 걸 깜빡 잊어버리고 혼자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를 맞이하는 부인이 "여보, 조지 워싱턴은 어떡하고
왔냐?"고 아내가 꾸중을 할 때, 깜짝 놀라 아들을 놔두고 나왔다고 다시 마차를 몰고 갑니다. 아, 그런데 조지 워싱턴은 그 골목에 서 있습니다. 해가 졌습니다. 깜깜해지는데도, 동네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너 왜 여기서 있냐?" "우리 아버지가 여기서 있으라고 했어요." "야, 지금 날도 추워지고 어두워졌는데..." 해장 사람들이 인심이 좋아요. "우리 집에 들어와 밥을 먹어라." "몸을 녹여라." 뭐 여러 가지로 친절하게 "우리 집에 들어오라." "우리 집에 들어 있으라." 이 조지 워싱턴은 "아니요. 저는 이 자리를 떠나면 아버지가 나를 찾으러 와서 힘들게 될 겁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반드시 올 테니까 저는 여기서 있어야 됩니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오리라고 꼭 믿고 있습니다." 결국은
조지 워싱턴은 아버지를 만나게 됐고 함께 가까이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여러분, 믿음이 뭡니까? 어디까지 믿고 있는 겁니까? 언제까지 믿음을 지켜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 믿음을 다시 재점검 해봐야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모든 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모든 근심, 걱정, 실망, 낙담은 믿음 때문입니다. 믿음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같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갑니다.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배에 물이 들어옵니다. 배가 막 침몰할 지경까지 됩니다. 제자들이 난리가 나서 예수님을 곰 방에서 주무시고 계시던 데 막 깨우면서 "우리가 죽게 된 것을 안 돌아봅니까?"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칩니다. 난 그 말에 참 이의를 달고 싶어요. 아니, 예수님이 주무시는 물과 깨어 있는 사람하고 누가 먼저 죽겠어요? 이 일을 하는 사람들. 예수님 보고 "우리가 죽게 된 것을 안 돌아봅니까?" 아니, "예수님, 저희도 죽게 됐습니다"라고 말을 해야지. "우리가 죽게 된 것을..." 이 이 말이 만약에 맞다면 이 제자들 어쨌든 한심한 사람들이에요. 그래 예수님께서 잠에서 깨어나가지고 하신 말씀이 뭡니까? "조용하라!"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고 "고요하라" 할 때 바다는 고요해졌습니다. 제자들이 두려워서 벌벌 떨고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어찌 의심하느냐?"
적게 믿는 자여. 우리 믿음이 적은 자들아. 이건 풍랑의 문제가 아니에요. 믿음의 문제예요. 이건 세상의 문제가 아니오. 믿음의 문제요. 코로나의 문제가 아니에요. 믿음의 문제란 말입니다. 이걸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야기, 자세히 아시는 말씀입니다만 한번 음미해보면은 의미 있는 그 상황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회당장이 예수님께 나옵니다. 사실 알고 보면요, 예수님은 갈릴리 위 나사렛 청년입니다. 서른 살짜리, 지금 이제 공생애의 역사를 이루기 시작하는 때기 때문에 별로 안 알려지지 않은 사람입니다. 아주 초라한 나사렛 청년입니다. 회당장은 그 마을에서는 결코 의
영적 지도자요, 지위 높은 신분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 회당장의, 이 회당장이 예수님께 나옵니다. 와서 무릎을 꿇습니다. "내 딸이 병들었습니다. 와주세요." 여러분, 누가 회당장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습니까? 거기에 숨어 있는 아주 중요한 말씀들이 있습니다. 누가 그리스도의 길로 인도했습니까? 누가 견인했습니까? 오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 그 사나운 시련, 절박한 위기, 이것이 나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거예요. 아픈 그리스도인이라고 이것이 나를 겸손하게 만드는 거예요. 시련과 고통과 질병. 여러분, 평안할 때 기도하는 것과 병들 때 기도하는 것 같습니까?
또 고통 속에 가는 기도하는 거하고 지금 절박하게 이 목숨을 정말 앞두고 기도하는 것 같습니까? 저도 제가 그런 기도를 드려본 일이 있습니다. 의사가 말합니다. 제 아내가 병들었는데 아, 이거 뭐 수술할까 말까 합니다만 수술해도 의학적으로 40%밖에는 보장을 못 합니다. 지금 상황은 그렇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으로서는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절박한 현실, 그것이 우리를 그리스도로 인도하는 데, 주님께로 인도하는 깨끗한 심령을 만들어주는 거죠.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간단히 말합니다. 회당장의 아이도 그 딸이 병들어 죽게 되지 않았다면 예수님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나사렛 청년으로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는 이러한 도도한 당시의 종교 지도자입니다. 그러나 고난이, 고통이, 절박한 사정이 이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그리스도께 가서 무릎을 꿇게 만들었어요. 여러분 아시는 대로 예수님께서 큰 역사를 이루고 귀한 말씀을 하시지만 예수님 앞에 나온 사람들 보세요. 다 누굽니까?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 소외당한 사람, 억압받고 불행한 사람이지 당시 당당한 권세 있는 사람, 지체 높은 사람 없습니다. 너무 없어서 많은 사람들은 아, 예수님은 저 불쌍한 사람들만 상대로 해, 이런 비난이 있었다 그래요. 그래서 사도 요한은 "아니,
니고데모 같은 사람이 예수님께 나왔다." "어떤 부자도 예수님께 나와서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물었다" 이렇게 신분 높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요한복음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랬던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 앞에 나온 사람들은 전부가 불쌍한 사람이고, 낮은 사람이고, 고난당한 사람이고, 절박한 사람들이여. 한마디로 말합니다. 고난이 이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거예요. 고난이 겸손하게 만든 거예요. 고난이 요만큼이라도 믿음을 가질 수 있게 하여 주님 앞에 나오게 만든 거죠. 그가 아는 오늘 본문의 이 숨은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래, 가자" 그리고 회당장 야이로의 집을 향해 가고 있는데 아, 도중에 사건이 있었어요. 본문 조금 거슬러 올라가 보면 있습니다.
여기에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있어요. 12년 동안 활동한 혈루증으로 고생하는 아주 피폐한 여자가 하나 있어요. 이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병 고침을 받고 싶지만은 '어디가 아프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수가 없어요. 부인병이 부끄러운 병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당당하게 예수님 앞에 나와서 "내 병을 고쳐주세요" 아 문둥병자도 그렇게 말하는데도 이 사람은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는 사람. 그래서 조용히, 조용히 신께 나와서 몰래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어요. "옷자락만 만지면 능력이 나타날 거라고" 믿고 꼭 마스크 한 믿음을 가지고 경건함 가운데 두렵고 떨림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집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옷자락을 만졌느냐?" 많은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아니,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에워싸서 밀고 있는데 그 좀 부딪칠 수도 있고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는 얘기 아니에요. 그때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나의 인자가 이렇다. 가다가 오다가 오고 이진 게 아니고 의식적으로 경건한 믿음을 가지고 옷자락을 만진 자가 있다." 이 여자가 숨길 수가 없는 줄 알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예수님, 제가 옷자락을 만질 때 병이 나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라" 말씀합니다. 요런 과정이 있었어요. 요런 이 사건이 있는 동안에 회당장 야이로는 급하게 예수님을 모시고 딸에게 가고 싶, 딸에게 가고 싶은데 일이 지체됐어요. 나에게 시간적으로 얼마라고 할 수
없지만은 상당한 지체가 됐어요. 야이로의 마음은 조조합니다. 딸이 죽어가고 있는 때. "달려, 그래도 달려가야 되겠네. 빨리 모시고 가야 돼. 가는데 왜 이 쓸데없는 초라한 이 여인 때문에 이 거룩한 걸음이 지체되고 있잖아요. 쇄도되고 있잖아요." 그런데 그때 성격이 급한 사람은 따지자고 할 거예요. "저 여인 때문에 이 거룩한 발걸음을 멈춰 섰습니까?"라고 하고 싶겠지만 못했어요. 워낙 그 경건한 시간의 그 말을 할 수가 없었지요. 여기서 생각해야 됩니다. 분명히 지체되어 있어요. 이 지체되는 동안에 딸은 죽었어요. 야이로의 마음은 죽어가는 걸 해드리며 알고 있어요. 그런데 만약 이 여자는 아니었더라면 예수님은 죽어가는 여자를 고쳤지 죽은 자를 살리는 건 아니었을 거예요.
그 후 이렇게 지체가 되고 있어요. 이것을 한마디로 말합니다. 믿음의 강우를 말합니다. 이 늦장 지체된다는 것, 후행해도 같이 지체되요. 하나님의 능력이 지체될 때가 있단 말이에요. 내가 원하는 시간, 내가 원하는 방법대로 되질 않아요. 그때 우리는 초조합니다. 불안합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돼요. 지체된다고 응답 없는 게 아니에요. 나기도 하지요. 당장 이루어졌으면 좋겠는데 응답이 없어요. 여러분 기도해 보셨지요? 응답 없는 응답 없는 응답 없는 가운데 그 큰 역사가 이루어지는 거예요. 더 큰 기적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죽어가는 딸, 아직 죽기 전에 예수님을 모시고 갔다면, 병든 아이를 고쳤다. 요기까지지요. 그러나
벌써 죽어갔어요. 지체된 가운데서 아이는 죽었어요. 이 사건이 중요한 의미를 포함합니다. 이만한 큰 그 당시로 돌아가 보면 엄청난 사건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타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와서 말하기를 "예수님을 괴롭히지 마세요. 당신 딸은 이미 죽었어." 그러므로 고칠 필요도 없고 예수님을 괴롭히지 마라, 가지 마세요 라고 말합니다. 그 회당장 야이로가 지금 중요한 시간입니다. 기로에 빠졌습니다. 절박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다 예수님을 모시고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의 믿음의 한계입니다. 내 믿음이 요만큼 그 지금 우리의 고백의 한계입니다. 요기까지는 불안은 그렇습니다. 죽어가면 필요하지요. 죽음이란 그
말이야 아 그랬습니까? 마귀는 우리를 기도하지요. 마음의 문을 닫으면 끝난 거예요. 아 그랬습니까? 오늘 이 회당장 야이로가 기로에 섰어요. 자, 그 아픔에 급하게 모시고 가려고 애를 썼는데 중간에 이런 사건이 있어서 지체되는 가운데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당신의 딸은 이미 죽었어. 그러므로 예수님을 괴롭히지 마세요." 여기서 딱 섰어요.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믿음의 현 주소입니다. 이런 순간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믿기만 하라.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또 마지막 말,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이 말을 믿어야 하는 거죠. 이것이 한계를 넘어서는 거예요. 이성적 비판을 넘어서는 거예요. 인간의 지식을
넘어서는 거예요. 우리의 감정을 넘어서는 극복하는 아주 중요한 시간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이때 그동안의 인간적인 상식으로 생각하고 의원으로 알고 예수님을 하시고 기적의 사람으로 알고 예수님을 모시고 가던 길이 여기서 믿음의 중생하는 단계가 옵니다. 왜요? 병자를 고치고 죽어가는 자를 고쳤다가 죽은 자를 살리라는 예수님의 생각이 바뀌는 것이 1차원 달라지는 거죠. 믿음의 한계를 넘어서라는 거죠. "믿기만 하라" 말씀하십니다.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죽은 아이의 길로 인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딸아 일어나라" 일어날 때에 오셨더라면 죽어가는 아이를 살리는 기적을 보았겠지만, 지체되었기 때문에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믿음의 현주소를 다시 물어보세요. 기독교는 3가지가 있어요. Three Coming of Jesus Christ. 세 번의 재림을 등합니다. 예수님은 세 번 오십니다. 세 가지 형태로 오십니다. 하나는 초림으로 오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람의 몸으로 오셨어요. 믿을 때요. 둘째는 성령으로 오십니다. 부활하신 다음에 성령이라고 하는
영적인 형태로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저희는 여기에 지금 저 안 계셨어요. 성령이 오신 다음에는 어디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 나타나고 거기에 계십니다. '두 사람 이 모인 곳에 내가 거기 있다' 말씀하십니다. 세 번째는 다시 영광 중에 세상을 심판하러 오십니다. 마지막 오실 영광 중에 올 세기를 심판하실 큰 예수 그리스도로 옵니다. 이 세 가지,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 성령으로 오신 예수, 다시 오시는 예수. 여러분은 어떤 쪽을 믿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믿음의 한계가 현주소 어디입니까? 예수님 가신 역사 중에 예수님은 세 가지 중한 진리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41절에서 "딸아 일어나라", "달리다굼"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7장 14절에 보면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죽었는데 그 장례를 치르고 있습니다. "관이 나가고 있습니다." 그 관을 멈추고 관을 향해서 말씀합니다. "청년아, 일어나라" 하시되 이 청년이 일어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 되었어요. 냄새가 납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아이고, 냄새가 납니다. 무덤 열어 볼 필요 없습니다."라고 주변 사람이 말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한 다음에 "나사로야, 나오라." 죽은 나사로가 수의에 감긴 대로 그러나 온전히
사실이 수의에 감긴 대로 걸어 나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우리 믿음의 현주소가 어디 있습니까? 항상 재어 줘야 하겠습니다. 말씀의 능력을 어디까지 믿고 있습니까? 우리 인간적인 생각으로 가능하다면 가능한 것입니다. 갈 수 있는 길이라면 할 수 있다고. 그러나 인간이 불가능하다면? 여기서 떨어지는 겁니까? 믿음은 끝난 겁니까? 우리 신앙의 현주소는 거기가 아닙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바로 거기 있습니다. 이거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진리의 말씀, 그 생명력을 믿어야 어디까지? 자기 생명까지 믿어야 할 내 현주소를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 필요한 것은 아는 것이 아니오,
확신하는 것도 아닙니다.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경험과 인간적인 비판을 다 물리치고 부활 생명,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주여, 내가 믿나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야이로에게 말합니다. 벌벌 떨고 서 있는 야이로에게 얘기 말합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 말의 깊은 뜻을 야이로가 그 순간에 알아서 이를 리 없습니다. 그러나 딸이 다시 살아난 다음에 이제 비로소 알았습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이거 엄청난 의미를 깨달은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지금도 저희들이 주님의 인도를 받아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이 모든 고난과 시련 때문에 힘들리고 있고 우리의 믿음마저 근본적으로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마는 항상 새롭게 말씀하시고 새롭게 인도하시고 새롭게 믿음의 문을 열어주시고 그 지경을 넓혀주시는 것을 감사합니다. 주여, 저 야이로의 믿음이 점점 자라서 온전한 믿음에 도달한 것같이 우리의 믿음도 성장하게 하시고 시련을 극복해 가지고 온전한 믿음에 이르러 믿음으로 승리하는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말씀 본문 및 설교 내용 요약
제시된 글은 마가복음 5장 35절-43절(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기적) 성경 말씀 봉독과, 이를 바탕으로 한 '믿음'의 본질과 한계 극복에 대한 설교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마가복음 5장 35-43절 봉독 내용
| 구분 | 주요 내용 | 핵심 구절/사건 |
| 딸의 죽음 통보 | 예수님이 혈루증 여인을 고치느라 지체하는 사이,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딸이 죽었음을 알리고 예수님을 더 이상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함. |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시나이까?" (35절) |
| 예수님의 권면 | 예수님은 그 말을 들으시고 야이로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심. |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36절) |
| 현장 방문 및 선언 |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와 야이로 부부만을 데리고 집에 들어가서, 울며 떠드는 사람들에게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선언하심. 사람들이 비웃자 그들을 모두 내보내심. |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39절) |
| 기적과 경계 |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하자, 열두 살 소녀가 곧 일어나 걸음. 사람들이 크게 놀람. 예수님은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못하게 엄중히 경계하시고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심. | "달리다굼" (41절) |
2. 설교의 주요 내용 및 메시지
설교는 성경 본문의 사건과 미국의 조지 워싱턴 일화를 통해 **'믿음의 문제', '고난의 역할', '지체됨의 의미', '믿음의 한계 극복'**이라는 네 가지 핵심 주제를 다룹니다.
🌟 주제 1: 믿음의 문제와 조지 워싱턴 일화
- 조지 워싱턴 일화: 어릴 적 워싱턴이 아버지의 명령대로 혼자 시내 골목에서 밤이 되도록 굳건히 서서 아버지를 기다린 이야기. 이는 아버지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믿음'**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됨.
- 메시지: 근심, 걱정, 실망 등 모든 것은 결국 믿음의 문제이며, 우리의 믿음을 재점검해야 함.
- 갈릴리 풍랑 비유: 풍랑 속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우리가 죽게 된 것을 안 돌아봅니까?"라고 한 것은 적은 믿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며, 풍랑이나 코로나와 같은 세상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임을 역설.
🌟 주제 2: 고난의 역할 (그리스도께로의 인도)
- 회당장 야이로의 신분: 야이로는 지위 높은 종교 지도자였으나, 초라한 나사렛 청년 예수님께 무릎 꿇고 나옴.
- 고난의 기능: 야이로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것은 그의 딸의 병과 죽음이었다고 강조. 평안할 때가 아닌 시련, 고통, 질병, 절박한 위기가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함.
- 나오는 자들의 특징: 예수님께 나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 소외된 사람 등 고난당하고 절박한 사람들이었음.
🌟 주제 3: 믿음의 지체됨 (혈루증 여인 사건)
- 지체됨의 상황: 야이로가 급히 예수님을 모시고 가던 중, 혈루증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져 병 고침을 받는 사건으로 인해 시간이 지체됨. 이 지체된 동안 야이로의 딸은 결국 죽음.
- 지체됨의 의미: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시간과 방법대로 응답하지 않을 때가 있으며, 이때 초조하고 불안하지만, 지체됨은 응답 없음을 의미하지 않음. 오히려 죽은 자를 살리는 더 큰 기적을 위한 과정일 수 있음.
🌟 주제 4: 믿음의 한계 극복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 기로에 선 야이로: 딸이 죽었다는 통보를 받고 예수님을 더 모시고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믿음의 한계에 봉착함.
- 믿음의 현주소: 병들거나 죽어가는 것은 믿지만, 죽은 것은 끝났다고 생각하는 인간적 한계가 우리의 '믿음의 현주소'임.
-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시며 야이로가 이성적 비판, 인간적 지식, 감정의 한계를 넘어서도록 이끄심.
- 결과: 지체됨으로 인해 병든 자를 고치는 기적이 아닌, 죽은 자를 살리는 더 큰 능력을 체험하게 됨.
- 믿음의 목표: 죽은 나사로에게 "나사로야, 나오라"고 명령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인간의 불가능한 영역까지 믿고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현주소가 되어야 함.
💒 결론 및 기도 요지
우리의 믿음이 야이로의 믿음처럼 시련과 한계를 극복하며 성장하여, 궁극적으로 온전한 믿음에 이르러 믿음으로 승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게 해달라는 내용으로 마무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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