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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04월 03일] 예루살렘을 향한 굳은 결심(눅 9:51~56) - 곽선희 목사

by 고동엽 2022. 10. 22.

[2022년 04월 03일] 예루살렘을 향한 굳은 결심(눅 9:51~56) - 곽선희 목사
https://www.youtube.com/watch?v=_zz6WU3uMd8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신약성경 누가복음 9장 51절로 56절 말씀드리겠습니다. 아, 신약성경 100쪽입니다. 신약성경 100면 누가복음 9장 51절부터 봉독하게 됩니다. 이 귀한 말씀을 봉독할 때에 다 함께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셨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리어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마을로 가셨습니다.

아, 엠마뉴엘 라우니란 교수가 쓴 책이 있는데, "The Change is Everybody's Business"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변화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일이다, 뭐 이렇게 이 책 제목인데, 우리나라 사람이 번역하면서 번역을 아주 재미있게 번역을 했어요. 책임은 "The Change is Everybody's Business" 이건데, 번역을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한다." 하하, 이 사람은 책을 아주 통달

해 가지고 그것을 딱 추려서 한 마디로 자기 제목을 만들었어요. "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한다." 뭔지 모르고 열심히 해요. 왜 사는지 모르고 살아요. 결심만 하고 그걸 관철할 수도 없죠. 왜요? 그걸 모르니까, 최종 목적을 모르니까. 그러니 정말 한 마디로 말하면 "바보들은 결심만 한다" 그 말이 말이 돼요. 그런 것을 느낍니다.

신학자 유명한 폴 틸리히가 쓴 **'The Shaking of the Foundations'**이라고 하는 유명한 아주 명저에서 말합니다. 인생은 두 개의 질서 속에 산다. 이거 아, 신학서 공부할 때 감동을 받고, 어, 이 제목으로 많이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The Shaking of the Foundations' 아주 유명한 책입니다.

두 개의 질서 속에 산다. 꼭 기억하세요. 1. 인간적 질서 2. 하나님의 질서. 인간적 질서라고 하게 되면 경제, 정치, 문화, 역사, 이 사람들이 사는 거. 아, 무언가 거기에도 흐름이 있고 질서가 있어요. 인간적 질서.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것은 점점 거룩해지고 성화되고 아름다워지는 게 아니고, 점점 죄악으로 기울고 멸망으로 기울고, 점점 더 수렁으로 빠져들어 가는 절망적, 비관적 질서. 이렇게 말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질서. 이건 뭐냐? 역사의 흐름과 상황을 넘어서서 힘 있게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시는 질서가 있어요.

이것은 결코 요동치 않아요. 이 상황이 도를 넘어서는 거 같은데, 흥하고 다 없어지는 거 같은 상황, 이제는 끝난 거 같은데, 아니요. 하나님은 생기롭게 새로운 역사를 그 속에서 이루어 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대체로 말해서 항상 두 가지가 전쟁이요, 하나가 질병입니다. 전쟁과 질병. 전쟁과 질병. 이것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큰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지금 전쟁과 불경기에 시달리고 있습니다만은, 그러나 하나님은 이 상황에도 전쟁을 통해서 당신의 역사를 창조하십니다. 심지어는 종교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쟁을 통하지 않고 선교가 성공한 예가 없다. 감사합니다.

전쟁이라는 큰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교가 이루어지고요. 질병. 특히 우리가 지금 엄청난 일을 겪고 있습니다만은, 그 사실을 알고 보면, 역사의 흐름만 보아도끔찍한 일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많은 기록만 봤어요. 14세기 흑사병이 돌아 가지고요, 전 인구의 3분의 1이 죽었어요. 유럽 인구의 3분의 1! 굉장하죠. 가톨릭 성당이 무너진다고 한 오트 산에 있는 수도원들이 딱 거기 줬어요. 다 죽었으니까. 자, 이런 큰 사건이 종래에 일어났어요. 그러나 역사가는 말합니다. 확실하게 말합니다.흑사병 사건이 종교 개혁의 뿌리입니다.

종교 개혁을 가능케 하고, 종교 개혁을 성숙케 한 것이 그 사건이라고 이렇게 역사가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질서가 오는 것입니다. 알 수 없지만 놀랍게도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심판과 구원, 심판과 구원을 하시면서도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역사를 창조해 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자, 그래서 인간적 질서 속에 삽니다. 그러나 그 속이 우리가 알 수 없는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고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질서 속에 살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모두의 선택이 어디 있느냐는

겁니다. 우리가 어디에 속했는지, 아는,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따라가고 있는가, 그걸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의 존엄은 선택에 있습니다. 끌려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느끼고, 내가 판단하고, 스스로 뭔가 내가 결정하면서 갈 때, 그게 인간이죠. 나는 결정하지도 못하고, 생각한 것도 없고, 그냥 그냥 주어진 대로 끌려간다면 그 홍수에 끌려가는 나무토막 같은 거예요.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 인간의 세계는 선택의 기준이 나약함과 타락과 나약함 거기 결부될 때가 많아요. 마치 마약을 끊지 못하는 것, 타락. 술 많이 마시고 담배 피우는 사람이 담배를 끊어야 될 줄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것 같아요. 아, 아무 데도 안 됐어요. 요새는 여기저곳에서 담배를 못 피우게 하지 않습니까? 그러더니 보면 호텔에 들어갔는데 보면 호텔 문간 옆에 요만한 구역에 아, 거기 이렇게 모여 앉아 가지고들 담배 피우는 걸 볼 때 내가 지나가면서 생각을 해요. "이 불쌍한 족속들아. 아, 담배 하나를 끊지 못해서 이게 무슨 꼴이야? 네가 어디에 이 모양이냐?"라고 나름대로 비판하면서 미안합니다, 비웃으면서 지나갑니다. 그러나 비웃을 문제가 아닙니다. 그와 같은 일이 우리에게도 많으니까. 게으름을 이기지 못하고, 욕심을 이기지 못하고, 나약함을 이기지 못하고, 욕심을 이기지 못하고,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그것에 끌려 가지고 노예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의식마저 노예가 돼서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선택할 만한 능력도 없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까 고민과 결단도 없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불행한 현실입니까? 아,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상황을 초월해서 역사하시는 또 다른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선택이 필요합니다. 아,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의 큰 섭리를 이해하고 구속사적 사관, 하나님은 만유를 구원하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이, 구속사적 사고, 이 역사관 속에서 내가 선택하고 내 앞에 당선되게 (당면하게) 길을 간다. 이것을 위대한 선택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서 성경이 이끄는 선교관, 그리고 성경이 말해주는 맥락 (background, context) 이것을 깨달아 가면서 오늘의 역사관, 오늘의 내가 가야 할 인생관, 내 처지에 대한 조그마한 것이든 큰 일이든 하나하나 선택하고 결정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 말씀입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여러분,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 버린 밀알이 땅에 떨어져 하찮은 것으로 보이지만, 예수님은 아닙니다. 그리함으로써 싹이 나고 많은 열매가 맺느니라. 밀알이 땅에 떨어져서 썩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이야기를 하다 보면 꼭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제가 아프리카 **'포메'**에 돌아갔을 때, 어디 시간이 좀 남아서 "구경 좀 하자" 하고 택시를 타고 박물관에 갔습니다. 아, 그 일생일대에 한 번 보기 어려운 중요한 강연을 했습니다. 이집트에서, 애굽에서, 이 미라를 세 개를 갖다가 미라 많이 봤습니다. 프랑스에서도 많이 봤습니다만은, 미라를 갖다가 여기서 미라를 해부해 놓았습니다. 과학 불을 켜 가지고 딱 보여 놓았습니다. 미라의 해부한 것을 물론 언제나 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냥 한 마디로 말하면 썩을 시체를 이렇게 (선별)해 놓은 건데, 전시해 놓고 보니까 마른 명태가 또 마르냐. 그 별거

아냐, 마른 명태예요. 이 사막에서 기름 발라 가지고 바짝 말려 가지고 이걸 이렇게 싸서 미라를 만드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 해설은 그리고 이걸 보니까 큰 감동 받았어요. 해설이 뭔지 아십니까? 미라를 꺼내 놓고 보니까 3천 년 된 건데요, 손에 밀알이 들어 있답니다. 밀알이 네 개가 있었어요. 이것을 소중히 여기고 아주 소중하게 땅에 심어 보았더니 싹이 나더랍니다. 여러분, 영생관이 있습니다. 죽은 사람의 손에 있는 밀알은 그대로 있는 동안 썩지 않았는데 땅에 떨어져서 썩으니까 싹이 나는 거예요. 오, 경륜적 역사적 하나님의 섭리를 나는 선택해야 됩니다. 그 속에 내가 있으니까 말이야.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굳게 결심했다'는 말이궁금해서 많이 연구했던 때가 있습니다. '프로소폰 에스텔리센' 이렇게나 말로 되어 있는데, 프로소폰이라는 얼굴입니다. **'에스텔리센'**은 고정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얼굴을 향하게 했습니다. 예루살렘 향하여 얼굴을 고정하겠다는 의지. 의지는 변함이 없습니다. 내가 이 길을 우리말에는 **'결심하시고'**라고 번역이 됩니다. 다음 일이 우연한 사건이 아닙니다. 굉장히 중요한 얘기입니다.

예수를 믿고 성경을 연구하고 신학자가

된다 하더라도 논쟁이 끊이질 않습니다. 예, 십자가가 자발적인 것이냐? 비자발적인 것이냐? 할 수 없이 진 것이냐? 선택적이냐? 여기서 파는 어려움이 됩니다.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절대로 우연이 아닙니다. 무기력도 아니고 무능도 아닙니다. 어떤 당대 각자들이 말하듯, 예수님께서 요리저리 십자가 아니라고 피해 다니시다가 들이 닥친 환난에 걸려 가지고, 어쩔 수 없이 죽었을까요? 여러분 어떻게 됩니까? 아, 십자가에 대한 모독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합니다.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 인간들은 자기 나름대로 악으로, 계교로, 올무로, 갖은

수단을 다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만은, 거기에는 하나님의 질서가 있습니다. 사람이 일이 아니었어요. 이거 잊지 말아야 합니다. 확실한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이요,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약해서 했다가 된 거 아닙니다. 몰라서 십자가 진 거 아닙니다. 피할 수 없어서 당하지도 않았습니다. 감사히도 성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고 계십니다. 훤히 알고 계십니다. 알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확실한 선택으로 십자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귀한 진리입니다.

특별히 성경은 말합니다. '기약이 차가매',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곧 당도 (닥칠)'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이거 뭡니까? 놀라운 하나님의 경륜적 일시 사건입니다. 예수님 세상에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셨습니다.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 전도하시고 선교 사업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이것 가지고 온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게 아니에요. 최종 역사는 십자가. 십자가에서 계속적인 역사를 이루기 이전에는 구원의 역사는 성공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놀라운 경륜적 일시 사건이 본문에 기록됩니다. 아, 놀랍지 않습니까? 예루살렘을 향하여 굳게 결심하시고 얻은 게 십자가와 부활과 성천. 그것 (중에서) 성천을 먼저 말합니다.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아, 놀라운, 놀라운 말씀입니다.

십자가, 부활, 그다음에 승천인데, 오히려 성경은 말합니다. '승천을 기약이 차가매'. 이 승천을 앞에 놓고, 승천의 영광을 앞에 놓고,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장사되어, 그리고 부활한단 말이에요. 이 모든 것을 관찰하시며, 통찰하시며, 예견하시며, 확실하게 바라보면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굳게 결심합니다. 그리고 출발합니다. 여기서 생각해야 합니다. '기약이 차가매'. 이건 또 뭘 말하는 겁니까? 성경적 맥락을 말한 것. 우리가 '콘텍스트' 성경적. 성경은 언제나 예언과 성취, 예언과 성취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 예언되고, 그다음에 그것이 성취되고,

예언되고 성취되고, 예언되고 성취되고. 이것을 반복하면서 멀리 역사의 최종 심판까지, 주 재림까지 다 내다보고 있습니다. , 성경! 성경을 통해서 이 사실을 통찰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생각하고, 성경을 통해서 결정하고, 성경을 통해서 행동하세요. 이거 나오길 (나오기) 쉬운 겁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로 가노라." 가야바가 십자가를 씌웠죠. 그러나 예수님 말씀합니다. "아버지께로 가노라." 로마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죠. 예수님 말씀합니다. "아버지께로 가노라." 내가 가는 길.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놀라운

선택! 특별히 저는 신학적 차원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 바로 스데반의 설교입니다. 스데반은 집사입니다. 그는 신학자의 사람이 아닙니다만은, 아, 순교 전에 헬라파 유대인 대표자로서 그가 순교하게 될 때, 흔히 (그가) 죽기 전에 가슴에 있는(가슴에 있는 신앙적 고백) 설교를 합니다. 설교가 모든 것이 성경적 맥락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종결적으로 증거하는 겁니다. ! 예수님의 십자가를 몇 주 전에 본 사람들이요. 예수님의 부활도 맛본 사람들이요. 그러나 이것에 대한 해석학이 필요합니다. 'Interpretation', 'Reinterpretation' (재해석). 성경적 해석이 따르지 않으면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이것이 내 신앙의 간증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이 십자가까지 모든 역사를 새롭게 잘 설명합니다. 이 성경적 해석과 경륜적 맥락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사도 바울에게 이어집니다. 바울은 제가 옛날에 바울 신학을 세미나 (에서) 주었습니다만, 간단히 말합니다. 바울은 스데반 집사의 (7) 장에 설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라고. 그 내용도 그렇지만 그 방법도 그렇습니다. 성경적 맥락에서 예수의 있음을 생각합니다. 성경적 맥락에서 부활을 증거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인 확실한 신앙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스데반의 그 신학적 해석 위에 맥락을 바탕 삼아 가지고 구약 성경을 통해서 예수를 증거합니다. 구약 성경의 맥락을 통해서 십자가와 부활을 설명합니다. 이것이 바울 신학입니다.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 성경 말씀이 예수께서는 성경적 해석, 성경적 맥락, 성경적 이해. 아! 그 (의지) 이걸 확실하게 증거하고 이제 결심합니다. "아버지께로 가노라." 그거 행동하십니다. 결심만 한 게 아닙니다. 결심하고 행동합니다.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가자 가는데, 사마리아라고 하는 곳을 거쳐가면 쉽게 갈 수 있거든요. 아깝고. 사마리아를 거치지 않으면 돌아가기

때문에 좀 멀어져요. 사마리아를 통과하려고 했더니 사마리아 사람들이 못 가게 합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대로 사마리아 여인이 증거해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다 예수님 앞에 나왔다는 기록이 있거든요. 이렇게 환영을 하고 따랐던 사람들인데, 오늘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좀 통과하겠다니까 모른다고 외면합니다. 거부합니다. 왜요? 오늘 본문의 말씀이 증명합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귀한 예수님을 이 능력을 가지고 이 사마리아에서 왕 되었으면 좋겠는데, 자기들이 싫어하고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예루살렘을 가서 왕이 된다고 하니까 모른다, 사마리아 통과 못하리라. 그러는 거예요. 얼마나 화가 났으면 오늘 그 착한 야고보와 요한이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우리가 기도해서 하늘로부터 불 내려 멸망시킬까요?" 대단한, 대단한 분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 예수님이 "그만두어라. 가자." 비켜서 다른 길로 돌아 갑니다. 왜요? 주님은 가실 길, 십자가를 결심하고 가는 길에 갖가지 돌부리가 방해되겠습니까? 갖가지 작은 사건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사마리아 사람이 환영하든 말든 그것은 별개 문제가 되겠습니까? 주님의 위를 위해서 가는 길에 작은 일들 아무것도 아니다. 관용할 수 있고 다 초월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압력, 온유함은 이 같은 확실한 결심에서 오는 온유함과 여러분, 내적으로

확신함이 있고 확실한 결단이 이루어지면 작은 일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싸울 필요도 없을 것 같은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그리스도님은 이렇게 해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고 십자가 지시게 됩니다. 요한복음 10장 18절에서 말합니다. "누가 내 생명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버리노라." 깊이 좋은 말씀입니다. 십자가는 빌라도가 지었지만,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버리노라." 여기서 깨닫게 됩니다. 삶의 목적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리고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 있는 나 자신을 알아야. 그리고 성서적 맥락 속에서 내 현실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그 속에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돌아가실 줄 알았습니다. 동시에 살아야 할 이유도 알고 계십니다. 십자가, 부활과 성천, 재림 하실 것을 관철하시고, 관통하시고, 조망하시고, 그리고서 결심하세요. 한 걸음을 예루살렘을 향하여 내딛고 있습니다. 아, 생각해야 한다. 오늘 본문의 요한복음이 (아닌) 누가복음 9장 아닙니까? 누가복음은 24장까지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복음 9장에서 벌써 십자가, 부활을 내다보고 있는 거예요. 아, 알고 결심하시고 그리고 담대하게, 온유하게, 사함 십자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알고 결심이 있는 온유하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5절에서 말합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십자가를 결심한 것처럼, 바울도 말합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현실 속에 하나님이 주신 경륜이 있습니다. 그 구원의 경륜 속에서 결심하고 한 걸음 한 걸음 십자가를 향해서, 부활의 아침을 향해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침도 주님 인도함을 받아 성전에 나오게 하시고 예배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 혼란한 역사 속에도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 이루고 계신 섭리로 온 주의 품 속에 있음을 알게 하시고, 시간마다 그 섭리에 응답하며 바른 역사관, 바른 성서관, 바른 인생관을 가지고 오늘의 문제를 해석하고 담대하게, 온유하게, 이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상세 요약: 누가복음 9장 51-56절 강해 및 그리스도인의 선택

제공해주신 설교 본문(누가복음 9장 51-56절 강해 및 관련 묵상)을 아래와 같이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요약했습니다.


1. 성경 본문 요약 및 핵심 주제 (누가복음 9:51-56)

  • 예수님의 굳은 결심: 예수님은 승천하실 기약이 다가오자,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셨습니다. (원어: '프로소폰 에스텔리센' - 얼굴을 고정함, 의지를 변함없이 정함)
  • 사마리아의 거부: 예수님을 위해 준비하러 앞서 간 사자들이 사마리아 마을에 들어갔으나,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하고 계셨기 때문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 일행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 제자들의 분노와 예수님의 꾸짖음: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리어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묻자,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으시고 다른 마을로 가셨습니다.
  • 핵심 진리: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연이나 무기력이 아닌, 확실한 선택이자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승천의 영광을 내다보시고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기로 결심하셨음을 보여줍니다.

2. '두 개의 질서'와 '선택'의 중요성

A. 두 개의 질서 (폴 틸리히, 'The Shaking of the Foundations')

유명한 신학자 폴 틸리히는 인생이 다음 두 가지 질서 속에 존재한다고 설명합니다.

  1. 인간적 질서:
    • 경제, 정치, 문화, 역사 등 사람들이 사는 세상의 질서입니다.
    • 유감스럽게도 이것은 점점 죄악, 멸망, 수렁으로 빠져드는 절망적이고 비관적인 질서입니다.
  2. 하나님의 질서:
    • 역사의 흐름과 상황을 초월하여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시는, 결코 요동치 않는 질서입니다.
    • 하나님은 절망적인 상황(전쟁, 질병 등) 속에서도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 가시며 구원의 뜻을 성취하십니다 (예: 14세기 흑사병은 종교개혁의 뿌리가 됨).

B. 선택의 중요성 및 나약한 선택

  • 인간의 존엄은 선택에 있습니다: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 인간다운 모습입니다.
  • 나약함과 타락에 결부된 선택: 인간은 때때로 마약을 끊지 못하거나, 게으름, 욕심을 이기지 못하고 노예처럼 끌려다닙니다. 의식마저 노예가 되어 선택의 여지나 능력이 없는 불행한 현실에 처하기도 합니다.

C. 위대한 선택의 기준

우리는 상황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선택이 필요합니다.

  1. 하나님의 경륜 이해: 하나님의 큰 섭리, 즉 구속사적 사관 (만유를 구원하고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관) 속에서 나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2. 성경적 맥락(Context) 통찰: 성경이 이끄는 선교관, 성경이 말해주는 맥락(예언과 성취)을 깨달아 오늘의 역사관, 인생관, 모든 결정을 해나가야 합니다.

3. 예수님의 십자가 선택과 그리스도인의 자세

A. 밀알의 비유와 영생관

  •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12:24): 썩지 않은 밀알(미라 손의 밀알)은 3천 년이 지나도 그대로이지만, 땅에 떨어져 썩어야만 싹이 나는 것처럼, 멸망과 구원의 경륜적 역사적 섭리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B. 예수님의 굳은 결심과 십자가의 필연성

  •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십자가, 부활, 승천을 모두 내다보시고, 승천의 영광을 앞에 두고 십자가를 지시기로 확실하게 선택하셨습니다. 이는 우연이 아니라, 무엇이 기다리는지 훤히 알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입니다.
  • 성경적 맥락: 예수님의 결심은 구약의 예언과 성취의 맥락 속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경륜적 일시 사건입니다.
  • 사마리아 거부 사건의 초월: 제자들이 불을 내려 멸망시키려 할 만큼 분노했지만, 예수님은 그 작은 방해에 연연하지 않으시고 꾸짖으시며 다른 길로 가셨습니다. 이는 확실한 결심에서 오는 온유함과 담대함입니다.

C. 그리스도인의 최종 선택

  • 삶의 목적을 분명히 하고 선택: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 있는 나 자신을 알고, 성서적 맥락 속에서 내 현실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알고 결심한 자의 온유와 담대함: 예수님이 십자가, 부활, 승천, 재림까지 관통하시고 결심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 역시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바른 역사관, 인생관을 가지고 담대하게, 온유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본 설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향해 가신 사건(누가복음 9:51-56)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인간적 질서를 넘어 하나님의 구속사적 질서 속에서 성경적 맥락을 바탕으로 확고하고 온유한 선택결단을 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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