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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이 받은 축복은 회개! 욥42:1~6 인터넷 설교녹취
▲욥의 고난은.. 욥을 회개시키기 위한 것 이 단락 지난설교 보기 클릭
우리들은 욥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거두어 가신 슬픔 가운데
진정한 회개를 드릴 수 있었던 한 사람을 본다.
그 불행과 슬픔을 당한 사람 욥에게, 세 친구들이 ‘회개하라’고 권면했다.
그러자 욥은, ‘자기는 회개할 것이 없다’고 우겼다. 그러자 엘리후의 책망이 시작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욥에게 회개의 은총을 주셨는데,
그 회개는, 물론 친구들이 말한 범죄와, 그런 회개가 아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중에 정죄한 세 친구들을, 욥에게 용서빌게 하셨다.
욥의 회개는, 더 이상 자기를 사랑/신뢰하지 않는 회개였다.
욥은, 내가 스스로를 한(탄)하고 주 앞에 회개하나이다 라고 했다. 욥42:6
자기 스스로를 미워했다는 뜻이다.
더 이상 스스로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욥에게 있어서, 새출발이었다.
(욥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의 회개에 이른 것이다.
예레미야가 탄식한 대로,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인 것을
욥은 비로소 자기 스스로 인정하게 된 것이다.)
◑욥의 친구들보다, 욥이 먼저 회개하기 원하셨다.
▲주님이 욥의 고난을 통해, 욥에게 주신 축복은.. 사실은 <회개>였다.
‘회개’라는 주제를 간과하면, 욥기 해석이 이상한 데로 빠지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욥이 고난을 받다가 인내했더니, ‘갑절의 축복을 받았다’는 식으로 해석하는데...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눈 여겨 봐야 할 점은
<극심한 고난을 통해서 결국에 욥이 회개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욥은 10자녀를 잃었다.
자녀를 데려가시는 고난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은 욥이 철저히 <회개>하기를 원하셨다.
욥기의 마지막 장의 결론적 주제는 <회개>이지, <축복>이 아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 인생에 가장 진정한 복은 <회개>이다.
욥은 1장에서 사탄의 참소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겪는다.
여러분, 사탄의 참소는 어떤 의미에서 합법적이다.
하나님은 사탄의 참소(고소)를 거절하실 수 없었다.
오늘날에도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를 하나님께 참소(고소)한다.
그러나 그런 일을 계기로라도
우리가 참된 회개에 이를 수 있다면, 그것도 우리에게 복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참소를 받을 때, 무조건 싸우려들지 마시고
평소에 보지 못했던, 자기 죄와 허물을 깊이 바라보고 발견하며
회개하는 복된 기회로 삼으시기 바란다.
극한 고난과, 극한 실패를 주신 것은.. 그 때만 할 수 있는 회개가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한하고 회개하나이다 욥42:6
여기서 스스로를 한한다는 말은, 스스로를 미워한다 abhor/despise myself는 말이다.
abhor나 despise는 매우 싫어서 거부하거나, 경멸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욥에게 주신 축복은, 그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자기를 신뢰하지 않고, 스스로를 미워하면서, 회개에 이르는' 것이었다.
회개와 더불어, 욥은 다 회복되었던 것이다.
성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를 신뢰하는 경향이 강하다.
‘내가 이렇게 했기 때문에... 보란듯이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축복은, 베드로처럼,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많이 잡은 날,
‘주여, 저를 떠나소서,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회개하는데 있다.
여러분, 우리도 축복을 받을 수록, 더욱 회개하는 축복을 누리게 되시기 바란다.
▲이런 예가 적절할지 모르지만,
그 교회에서 제일 부부싸움을 많이 한 부부가, 바로 목사님 부부였다. 제가 잘 안다.
그런데 그런 극렬한 부부싸움의 결과, 시일이 지난 후에 그 교회에 부흥이 차츰 찾아왔다.
왜냐하면, 극심하게 부부 싸움한 결과,
부부가 철저히 하나님께 회개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때 그 부부는, 그런 놀라운 부흥을 경험한 후에
‘주님 나를 떠나소서, 나는 합당치 않은 죄인입니다’ 라는
베드로와 같은 고백을 드렸다고 한다.
(그런데 대부분은, 부부싸움을 극렬하게 하고도, 철저히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그 부부싸움은 도리어 깊은 인생의 장애와 상처로 남을 뿐이므로, 조심해야 한다.)
▲욥의 친구들보다, 욥을 먼저 회개시키셨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42:6
‘티끌’과 ‘재’는.. 욥이 고난 가운데 자기 몸을 뉘었던 곳이다.
자신이 처한 극심한 상황 가운데서,
원망보다/ 욥은 회개했다.
‘티끌과 재’는.. 원망해야 할 상황/환경이다.
그 원망해야 할 상황/환경에서.. 욥은 회개했던 것이다.
놀랍게도 주님은, 욥에게 상처를 주었던 욥의 친구들을 회개시키기 이전에,
욥을 먼저 회개시키기 원하셨다. 실제로 욥이, 세 친구들보다 먼저 회개했다.
여러분, 우리를 상처주고, 답답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내 생각에는, 그들이 먼저 회개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주님 생각에는, 내가 먼저 회개하기를 원하신다.
주님은, 그들이 돌이키기 이전에,
저와 여러분이 먼저 돌이키기 원하시는 것이다.
▲회개의 관점에서 본... 솔로몬과 베드로
솔로몬은 모든 것을 얻었다. 아버지 다윗의 명성이 그대로 이어져서
고대근동 전세계의 왕들이 솔로몬 왕에게 와서 조공을 바쳤다.
1년에 걷는 세금이 금666달란트였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 솔로몬의 영광은, 그런데 신약에서 저주로 둔갑한다.
계시록에서 적그리스도가 온 세상을 통제할 때, 666을 부여한다고 했다.
그것은 원래 솔로몬이 거둔 세금의 숫자였다.
그래서 적그리스도가 그만큼 많은 돈(세금)을,
마치 솔로몬 당시의 금666달란트만큼 많은 돈을
전 세계로부터 걷게 될 것이라는/ 세계경제를 석권하게 될 것이라는... 계시록의 예언이다.
솔로몬이 돈(세금)을 많이 걷었으나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하고, 도리어 탕진하고 방탕했을 때,
그것은 종말에 사탄이 사용하는 어떤 상징적 도구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솔로몬은, 축복을 받았지만 타락해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런데 베드로는 물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다가
하루에 고기를 엄청나게 많이 잡게 된다.
그 날 어부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저는 죄인이로소이다’하며 회개한다.
솔로몬은 엄청난 물질적 축복을 받았으나, 결과적으로 타락한 죄인이 되었으며
베드로는 약간의 물질적 축복을 받았으나, 결과적으로 회개하는 사람이 된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주님의 축복을 받을 때, 타락하는 사람이 있고(다수),
그 축복을 계기로, 더욱 회개하는 사람이 있다.(소수)
솔로몬은 평생의 축복 가운데 살면서도, 회개하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일개 소시민 어부 베드로는, 약간의 성공을 거두었을 때,
자신의 삶이 합당치 못함을 깨닫고, 즉시 회개했다. 회개가 정말 복이다.
여러분, 진정한 축복받은 사람은, 잘 될 때 회개하는 사람이다.
잘 될 때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 의/공로/자랑에 빠지게 되고, 결국 잘못된 길로 가게 된다.
잘 될 때는 회개보다는, 자랑하기 쉽기 때문이다.
▲제 개인적 경험.., 울면서도 회개 안 할 수 있다.
제가 이스라엘 선교사로 갈 때, 후원 약속을 받지 못하고 갔던 적이 있었다.
그러자 한인 선교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어떤 한 분이
저를 두고서, ‘저 목사는 회개할 것이 많아서 후원도 못 받는다’고 했다.
제가 그 말을 전해 들었을 때, 속에서 화가 무지하게 많이 났었다.
그렇지만 제가 그 일을 계기로.. 제 자신을 더 깊이 돌아보며, 회개하게 되었다.
그 때보다 더 젊었을 때, 저는 처음 예수를 믿게 되었을 때, 예배시간마다 눈물을 흘렸다.
손수건이 마른 적이 없었다. 눈물을 흘리면, 좀 스스로 위로를 받는 면이 있다.
눈물은 사람의 감정을 누그러뜨려 주며, 감정적인 평안을 주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때 주님께서 제게 주신 내적음성이
‘네가 눈물을 흘리는 것 보다, 네가 회개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었다.
눈물을 흘리고도, 회개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슬픔을 당해서 통곡하면서도, 회개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 더 읽으실 분 .....................................
◑하나님 나라의 주역과 엑스트라
▲그런데 욥의 자녀들은 얼마나 불쌍한가?
어쩌면 하나님이 그러실 수가 있으실까?
욥의 자식들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죽는 것이,
자기 아버지(욥)의 신앙을 연단하기 위한 도구로 (소모품 정도로) 사용되었다는 것인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욥의 자녀들의 죽음은... 너무 불합리하고, 너무 황당하다.
제가 전도하다가 비슷한 질문을 받았던 적이 있다.
‘출애굽 당시에, 히브리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바로 왕의 부하 군대들을 홍해에 몰살시키시는 하나님이.. 과연 옳으신가?’
그런 질문을 받고서, 순간 제가 당황했던 적이 있었다.
저는 그 질문의 답을 얻기 위해 고민하다가
비슷한 문제를, 욥기를 읽다가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욥의 자녀들 입장이.. 너무 안쓰러운 것이다. 마치 억울한? 바로의 군대 같았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데, 그렇게 허망하게 욥의 열 자녀를
그것도 하루아침에 순식간에 데려가시는 것이... 과연 사랑의 하나님이신가?’
▲가장 근접하는 대답은 이렇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진 질문들에 대해
하나님이 모든 대답을 다 가르쳐 주신 것은 아니지만,
제가 생각하는 바, 위 질문에 가장 근접하는 대답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은 헌신된 사람들을 위주로, 그들을 통해서 역사를 운행하신다는 것이다.>
출애굽 장면에 있어서, 헌신된 사람들은.. 모세와 히브리 백성들이었다.
그리고 애굽 군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역사에, 엑스트라가 된 것이다.
욥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였다. (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한다.)
욥은 하나님께 헌신되어 있어서, 자기 자녀들을 위해서 ‘날마다 제사’를 드렸었고,
그 자녀들은 헌신되지 못해서, 그냥 ‘날마다 잔치만’하면서 사는 인생들이었다.
오늘 내가 주님께 헌신되어 있지 않으면,
나는.. 주님께 헌신된 사람들 위주로 이끌어 가시는 주님의 역사에
그들의 연단과/ 그들의 훈련과/ 그들의 사역에
필수불가결한 어떤 엑스트라로 사용될 것이다. 욥의 자녀들이나, 바로의 군대처럼!
이 사실을 주의해야 하겠다.
▲하나님의 관점
여러분, 사진을 찍을 때, 포커스를 앞에 맞추면, 원거리 배경이 뿌옇게 나오고,
포커스를 원거리에 맞추면, 가까운 주변 피사체가 뿌옇게 나온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포커스를 어디에 두고 읽느냐에 따라서
성경의 해석과 관점이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여러분, 옛날에 다윗 왕이 살았던 <시온성>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아시는가?
크지 않다. 제법 큰 아파트 한 동 정도의 크기다. (900제곱미터, 약300평)
왕이 살았다고 보기에는 너무 초라하고, 작은 건물이다.
가서 보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성경의 역사책(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역대상하)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택하신 히브리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서
다윗의 삶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전쟁사를 기록하고 있다.
주님의 포커스는, 메시야를 중심으로,
그래서 메시야의 조상이 되는 다윗을 중심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계신다.
그 초라한 건물에 살았던 다윗 왕을 중심으로!
여러분, 오늘날 교회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저희 교회 안에도, 아무 직분도 맡지 못하고,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어떤 사람이
은밀한 가운데 주님께 자기를 완전히 드린다면
저희 교회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비록 그가 당회에 참석하지 않더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삶과 조화되도록 모두 진행될 것이다.
그가 다윗/욥/모세와 같은 주인공이 되고
나머지는 다 엑스트라요, 배경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오늘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은밀하게 자기 삶을 드리는 사람을 통해서,
그 사람을 중심으로 하나님은 주님의 나라를 진행해 나가실 것이다.
저와 여러분이, 그러한 반열에 들어가시기를 축원 드린다.
욥의 자녀들을 보면, 그 주님의 역사에 ‘도구’가 되는 삶을 살았고
욥을 보면, 그 주님의 역사에 ‘주인공’이 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욥의 자녀들은 헌신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아버지 욥은 헌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헌신된 자를 받으셔서, 그를 연단하셔서, 성숙시키셔서 (#7364)
하나님 나라의 도구로 사용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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