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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심 중에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신년주일)

by 【고동엽】 2022. 10. 20.

옥한흠 목사 (요14:12, 16:20-22)

희망은 생명이다.
새해 첫 주일 예배는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에게 깊은 감회를 갖게 합니다. 한해를 시작하는 예배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속해 주신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죄를 담당해 주신 예수님, 우리 안에 거하셔서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겠노라고 약속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은총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감격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 사람은 꿈도 못 꾸는 일입니다.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지요? 이런 예배를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새해가 되면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있습니다. ‘희망찬 새해’라는 말입니다. 말만 들어도 우리 가슴을 뛰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참다운 행복은 우리들이 어떻게 끝을 맺느냐 보다 어떻게 시작하느냐에 달려 있고, 무엇을 소유하느냐 보다 무엇을 바라느냐에 달려 있다.”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금 어떤 처지에 놓여 있든 간에 새해는 희망이 있습니다. 새로운 시작을 앞에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편을 탓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고 다시금 힘차게 새해를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앞날을 예측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시대를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15년 아니 10년 전만 해도 우리가 상상도 못하던 일을 지금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들이 많습니다. 지정학적인 변화를 한번 예로 들어볼까요? 15년 전에 소련이 해체되리라고 우리가 상상이나 했습니까? 그러나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었습니다. 동구의 공산권이 붕괴되리라고 그 누가 예견을 했습니까? 그러나 동구권이 완전히 몰락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 분리주의자들이 패배하고 흑인이 다스리는 정부가 들어서리라고 누가 감히 예측을 할 수 있었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흑인 대통령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중동의 평화가 이 정도로 정착되리라고 아무도 예언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중동의 평화가 어느 정도 정착되고 있습니다. 아시아가 세계 경제권에 진입을 해서 세계가 주목할 수 있는 경제 대국이 되리라고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경제 대국이 되었고, 지금은 한발 물러서 있지만 앞으로 세계 경제를 주도할 수 있는 제 3세력이라는 것을 모두들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지정학적인 변화들은 15년 전이나 10년 전에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엄연한 현실이 되어 있습니다.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10년 전만 해도 미래를 연구하는 학자나 특수한 분야의 기술자들이나 예측을 했던 일들이 지금은 상식이 되어버렸습니다. 10년 전에 우리가 휴대폰이라든지 무선통신, 노트북 컴퓨터, 시디롬(CD ROM), 지구위치 측정장치, 디지털 카메라, 멀티미디어 쌍방통신, 인터넷 같은 것을 상상이나 했습니까? 이런 것들은 그야말로 가상 세계에서나 그려보는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시골에 가도 인터넷이라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있을 만큼 삽시간에 세계를 정복하는 하나의 기술 문명이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지만 지금은 온 세계가 변하고 하늘이 무섭게 변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이와 같은 변화는 더 빠르게 지속될 것입니다. 어떻게 들으면 굉장히 황홀한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옛날 사람은 꿈도 못 꾸던 황홀한 세계가 우리 앞에 열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매우 그늘진 음지가 많이 생길 것입니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회사나 국가는 사정없이 도태되는 살벌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지난 11월 달 <뉴스위크>지에 나온 기사 중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내년 2000년에 태어나는 아이들은 100년 전에 태어난 아이들에 비해서 수명이 배로 길어진다고 그랬습니다. 사람들이 오래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좋은 현상이라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노령화 인구가 많아지게 되어 사회의 문제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앞으로 2000년대에는 빈부 격차가 어느 때보다 증가해서 소수의 승자가 모든 것을 독차지하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돈 벌 기회를 갖지 못한 다수는 사회로부터 도태되는 끔찍한 일들이 도처에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우울증이라든지 사회 공포증이라든지 불안 등의 소위 ‘하부 증후군’이라고 하는 병 증세들이 만연하게 될 것입니다. 참 어두운 이야기지만 이것이 장차 우리가 처하게 될 현실입니다.
금년에도 우리는 실직이나 부도를 만나 거리로 내 몰린 사람들이나 결식 아동들의 가슴 아픈 사연들을 귀가 아프도록 들으면서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걱정을 하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내일을 장담하지 못합니다. 누구 하나 자신 있게 어떻게 대비하면 살아 남는다고 말할 만한 자격을 가진 사람도 없습니다. 잘못하면 우리는 근심과 불안을 안고 한해를 보내버릴 위험성도 참 많습니다. 그러나 이럴수록 중요한 것은 희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곧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일을 놓고 꿈을 꾸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는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내일에 대한 꿈을 잃어버렸습니까? 숨을 쉬고 있지만 그는 죽은 사람입니다. 희망은 살고 죽는 것을 결정하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2차 대전 당시 빅토르 프랑클 이라는 유대인 정신과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다년간 고생을 하다가 전쟁이 끝나면서 다시금 자유를 얻게 되었고, 나와서는 자기가 수감되어있는 동안에 겪었던 많은 일들을 정신과 의사의 눈으로 분석해서 참 유익한 책을 많이 쓰신 분입니다.
그가 수용소에 갇혀 있을 동안 함께 수감된 사람 가운데 국제적으로 꽤 알려진 어떤 작곡가 한 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 작곡가가 그에게 다가와서 넌지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보, 의사 양반, 내가 긴히 할 말이 있어요. 얼마 전에 아주 희한한 꿈을 꿨는데, 꿈속에서 누군가 내게 다가오더니 이렇게 말했어요. ‘알고 싶은 게 있으면 무엇이든지 물어 보라. 그러면 내가 다 대답해 줄게.' 그래서 내가 이 전쟁이 언제 끝날지 가르쳐 달라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그는 1945년 3월 30일 날 끝날 거라고 대답했어요.” 이 말을 듣고 그가 되물었습니다. “언제 꾼 꿈이에요?” “한달 전쯤이요.” 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때는 1945년 3월 초였습니다. 그러니까 십여 일만 있으면 전쟁이 끝나고 수용소의 철조망 문이 열리면서 그들이 자유를 찾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하는 작곡가의 얼굴에는 희망의 빛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시간이 흐르고 흘러 3월말이 다가오는데도 수용소 문이 열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질 만큼 전세는 호전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물론 1945년에 2차 대전이 끝난 것은 사실이지만 수용소 안에서 볼 때는 도무지 변화의 징조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작곡가는 자꾸 마음이 초조해져 갔습니다. 30일을 하루 앞둔 29날 결국 사고가 나고 말았습니다. 작곡가가 고열이 나더니 쓰러져 버렸던 것입니다. 그 다음날이 되자 그는 의식을 잃고 횡설수설하더니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병원에서 검사를 해 보았더니 발진티푸스가 사인이었습니다.
빅토르 프랑클은 이 사건을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사람이 희망을 가지고 있을 때는 몸의 면역 기능이 활발하기 작동하기 때문에 발진티푸스 균이 들어와도 그 균을 충분히 억제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작곡가의 경우 30일이 다 돼 가는데도 자기가 꿈에서 들은 예언이 성취될 가망이 전혀 안 보이자 절망에 빠져버렸습니다. '이제는 도대체 무엇을 믿고 기대하며 살 것인가?'하는 생각이 들자 근심과 불안이 그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몸 속에 있는 면역체의 기능이 완전히 힘을 잃어버려 발진티푸스 균을 억제하지 못하고 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작은 예입니다만 희망을 갖고 사는 사람은 몸의 면역 기능이 활발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웬만한 일에는 꺾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은 아무리 어제 건강했다 해도 오늘은 자신할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만큼 희망을 갖는 것은 생명이요, 희망을 잃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희망을 잃을 수 없는 이유
하나님은 자기 자녀 된 우리가 희망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기 원하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가 희망을 잃지 않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오늘 읽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해서 발걸음을 옮기고 계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보는 제자들의 마음은 그야말로 근심과 공포와 낙담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할 말을 잃고 있었습니다. 한숨과 탄식소리만 간간이 들리는 무겁고 침울한 분위기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소망을 주고 위로를 주기 위해 입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긴 말씀을 하셨는데 14장부터 16장까지의 말씀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제자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서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우리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절망적인 이야기는 그 가운데 하나도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우리가 읽은 14장 12절 말씀은 희망이라는 반지에 박힌 다이아몬드와 같다고 할만큼 중요한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진실로 진실로’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멘 아멘’(amen amen)하는 말인데, 예수님이 자주 사용하시는 십 팔 번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멘 아멘’하고 말씀하실 때는 반드시 귀담아 들어야 할 매우 중요한 내용이 따라 나옵니다. 12절 말씀 역시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너희들, 내가 떠나고 나면 내가 하는 일을 너희가 하게 된단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내가 한 일 보다 더 큰 것도 너희가 하게 된단다.” 얼마나 희망에 가득 찬 말씀입니까? 얼마나 낙담하는 자에게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치료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죄와 죽음과 저주 아래 놓여 있는 인생에게 하늘의 복음을 들려주시어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새 생명을 얻고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예수 그리스도와 살 수 있는 영생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이 떠나시고 나면 이 영광스러운 일을 제자들이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르친 것처럼 너희들도 가르치고, 내가 전파하고 치료한 것처럼 너희들도 전파하고 치료하여 죽음과 죄 속에서 씨름하는 뭇 심령들을 구원해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이 영광스러운 일을 너희가 하게 될 것이다.”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이 하셨던 일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하신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의 일은 인간은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님이 하신 일이란 십자가를 지고 부활하고 승천하시는 예수님의 고유한 사역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놓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주님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하리라는 주님의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 주셔서 모든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함과 능력을 받자 얼마나 큰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전파하고 가르치고 치료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일과는 비교가 안 되는 큰 일을 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바와 같이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동안 그분의 행동반경은 매우 좁았습니다. 팔레스타인 안에서 밖으로 나가신 일이 거의 없습니다. 팔레스타인은 우리 나라로 말하면 경상도에다가 강원도 일부를 보탠 정도밖에 안 되는 좁은 땅입니다. 예수님은 평생 그 좁은 땅에서 오르내리시면서 복음을 전하시고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한참 인기 절정에 있을 때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따라 다녔지만 나중에 예수님의 신분이 위태로워지고 비판의 대상이 되자 모두들 떨어져 나갔습니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뉘게로 가리이까?”(요6:68)하고 고백하던 베드로와 같은 신앙을 가지고 마지막까지 예수님 곁에 붙어 있었던 사람은 불과 몇 백 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하신 일은 전체적으로 보면 굉장히 작아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한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마태복음 28장 18절에 보면 그들은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는 일을 했습니다. 제자들은 유대 나라에만 매이지 않았습니다. 모든 나라와 모든 족속을 사역의 대상으로 삼고 일했습니다. 또 마가복음 16장 15절에 보면 그들은 온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제자들이 하는 모든 사역은 그야말로 세계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제자들이 예수님의 일보다 더 큰 일을 했다고 말해도 잘못될 것이 없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성령 충만을 받고 복음을 전해서 3천 명을 회개하고 돌아오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그런 사건이 없었습니다. 남자만 3천명이니까 부인들이나 아이들까지 끼우면 만 오 천 명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엄청난 사람들이 한번 설교할 때 가슴을 치고 회개하고 돌아왔으니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예수님에게는 그런 사건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의 일보다 더 큰 일을 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정확하게 적중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희망을 가지라고 하시면서 근심이 기쁨이 될 것이고 통곡이 찬송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6장 20-21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서 끌려가실 때 제자들은 곡하고 애통할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세상은 오히려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기가 막힌 역전을 약속하셨습니다. 지금은 그 일이 근심이 될 지 모르지만 나중에는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근심이 해산하는 여자의 근심과 같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아기를 낳으러 병원에 들어가는 여자는 '아이고, 어떻게 그 고통을 참나? 내가 애를 잘 낳을 수 있을까?'하고 은근히 불안에 떨며 근심합니다. 그러나 어린애가 ‘앙’ 하고 우는소리만 들리면 그때부터 마음속에 있던 근심은 눈 녹듯 다 사라져 버리지 않습니까? 제자들의 근심 역시 그와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다고 해서 너희들이 지금은 근심하고 고통 하지만, 그것은 마치 해산하는 여인의 근심과 같으니라. 이제 때가 온다. 너희들이 기뻐 뛰면서 내가 하는 일을 하고 내가 한 일 보다 더 큰 일을 하는 내일이 온다.”
요한복음 16장 22절을 보십시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주님을 다시 만나게 될 텐데 무엇 때문에 근심하고 절망하느냐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
이제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하나 남아있습니다. 이 말씀이 근심에 빠진 제자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위로의 말씀이요, 소망의 말씀이라는 것을 우리는 정리를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것을 긍정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오늘 이 어려운 시대를 살면서 은근히 남 모르는 불안과 걱정을 가지고 있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자신에게도 들려주시는 말씀으로 단정해도 될까요? 제자들에게 희망을 주신 그 말씀이 나와 어떤 상관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12절에 그 대답이 나와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하는 말만 들으면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 보다 큰 일도 하리니."라는 말을 들으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현대의 권위 있는 영어 성경 번역을 보면 ‘나를 믿는 자는'이라는 말 대신 '나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에는 제자들뿐만 아니라 예수 믿는 우리 모두와 예수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나 자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을 이렇게 바꾸어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나는 주님이 하는 일을 하게 될 것이요, 또한 그보다 더 큰 것도 하게 될 것이니라.”
근심에 빠져 있는 제자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기 위해서 주신 말씀은 곧 답답한 세상을 앞에 놓고 은근히 불안해하고 걱정하는 우리를 위해 주신 말씀으로 받아도 전혀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해 꿈틀거리며 씨름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주님은 이런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 주셨습니다. “왜 너희가 염려하느냐?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이것은 다 이방 사람들, 하나님 모르는 사람이 걱정하는 것이다. 그런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더 큰 일을 바라보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구하라. 그리하면 이방 사람들이 걱정하는 먹고 마시는 것, 다 내가 알아서 해결해 준다. 그러므로 너희는 큰 꿈을 가져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하겠다는 꿈을 가져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과 예수님이 하신 것 보다 더 큰 일이 곧 그의 나라와 그의 의입니다. 우리는 그 일을 항상 제일 먼저 앞세우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예수의 제자입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것은 예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저 살아 남기 위해서 하루하루를 힘들게 보내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료하셨던 바로 그 일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로마서 14장 7-8절을 보십시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것은 바로 우리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나를 위하여'라는 명제는 이미 십자가와 함께 매장해 버린 사람들입니다. 옛날에 예수 안 믿었을 때는 만사가 '나를 위하여'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옛사람이 죽고 예수와 함께 새사람으로 태어난 다음에는 '나를 위하여'라는 명제는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예수와 함께 새로 태어난 우리에게는 '주를 위하여'라는 명제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습니다. 이 말은 오늘 본문에 비추어서 이렇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나는 살아도 주님이 하신 그 일을 하기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이 하신 그 일을 하기 위하여 죽는다. 그러므로 내가 사나 죽으나 나는 주님의 일을 위해서 살고 죽는 사람이다.“ 이것은 예수 믿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오늘 이 가운데서 아직 예수 안 믿으시는 분들이나 예수 믿는 것이 뭔지도 모르고 교회에 와서 앉아 계신 분들은 듣기가 조금 힘드실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한가지만은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순간부터 여러분은 '나를 위하여'라는 말은 완전히 잊어버려야 합니다. 오로지 '예수를 위해'라는 말만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직장 생활도 예수님의 일을 하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가정 생활도 예수님의 일을 하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렇게 명제가 뒤바뀌어야 정상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희망을 주시고자 “너희들은 조금 있으면 내가 한 일을 할 것이고 내가 한 일보다 더 큰 일을 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이요, 희망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의 일을 삶의 목표로 삼으면
희망은 아무나 갖는 것이 아닙니다. 막연히 어떤 것을 바란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인생을 사는 목적이 분명한 사람, 내가 누구를 위해 또 무엇을 위해 살기를 원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얻은 사람만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불란서에서 여론조사를 했는데 응답한 사람의 89퍼센트, 곧 열의 아홉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필요한데, 아직 그것을 못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언가 자기의 생을 불태우고 싶은데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못 찾은 것입니다. 그들 중 67퍼센트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찾기만 하면 자기 생명을 걸겠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인생이 겉으로 봐서는 모두 무언가를 위해서 뛰는 것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얼마나 공허한지 모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지도 모른 채 절망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우리는 그 무엇을 찾은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 곧 우리 생의 목표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 곧 온 세상을 구원해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바꾸는 일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일이 우리의 생명을 걸만큼 가치가 있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를 위하여'라는 명제 대신에 '예수를 위하여'라는 명제를 위해, '이 세상을 위하여' 라는 명제 대신에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라는 분명한 명제를 위해 생을 불태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철학자 니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왜 사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다.” 목숨이라도 기꺼이 걸만큼 가치 있는 목표를 찾은 사람은 웬만한 근심이나 걱정, 고난이 와도 끄떡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일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와도 근심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교회 안에 보면 자기의 신분이 너무 보잘것없어서, 또 직업이 신통치 않아서 항상 병적인 콤플렉스를 가지고 씨름하는 환자들이 많습니다. '나 같은 것이 뭐라고 주의 일을 하나? 나 같은 것이 무슨 큰 기대와 꿈을 가질 수 있나? 하루하루 먹고사는 것도 벅차니 굶어 죽지만 않으면 좋겠다. 남에게 빌어먹지만 않아도 괜찮겠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런 식으로 자기를 비하시키면서 콤플렉스를 안고 씨름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겉보기에는 믿음이 좋은 것 같지만 속은 콤플렉스로 열병을 앓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런 분이 있다면 이 시간 성령께서 치유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주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장관이 된 자라야 만이 나의 일을 할 수 있고, 적어도 아파트 60평 이상 사는 자라야 나보다 큰 일을 할 수 있느니라.”하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성경 어디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까? 조건은 단 하나 뿐입니다. “나를 믿으면 할 수 있다!” 예수를 믿습니까? 그렇다면 콤플렉스를 극복하십시오.
제가 아는 가정 중에 이런 가정이 있습니다. 남편은 남들처럼 유학을 갔다가 박사학위를 받아온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썩 좋은 직장에 다니는 것도 아닌 평범한 남자입니다. 그렇다고 돈이 많은 것도 아닙니다. 그런 남자와 결혼한 여자를 떠 올려보십시오. 아마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빠듯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부부가 예수를 참 잘 믿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면서 자녀들을 잘 키웁니다. 어쩌다 그 집 앞을 지나가다 보면 찬송 소리가 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문을 열고 나오는 남편에게 “안녕히 다녀오세요.” 하고 인사하는 부인의 평안한 얼굴이 보이기도 합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도 주변의 안 믿는 이웃들은 이러한 광경을 지켜보며 감탄을 합니다. ‘저 가정, 참 행복한 것 같다.’ 그러다가 어떤 때는 문 앞에 붙어 있는 사랑의교회 문패도 볼 것입니다. '아, 예수 믿는 집안이니까 저렇구나.' 벌써 그 삶 자체가 아무 것도 안 하는 것 같아도 주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가정을 통해 감동을 받은 사람이 언제 예수를 믿고 돌아올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는 주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때로 무릎을 꿇고 엎드려 기도하지 않습니까? 이 기도 때문에 세계 도처에서 어떤 놀라운 사건이 일어날 지 아무도 모릅니다.
저는 오늘 우리 교회 어느 집사님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그는 30년 전에 포항제철에 입사해 들어가서 그 황무지와 같은 곳에서 포항제철을 일으켜 세울 때 박태준 사장을 위시하여 포철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뜻이 있는 사람들끼리 모이면 박 사장님이 예수를 믿게 해달라고, 회사 안에 예수 믿는 많은 고급 인력들이 생기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17년만에 그 기도가 응답되었지 않습니까? 박태준씨가 지금 얼마나 믿음이 뜨거운지 모릅니다. 30년 전에 한 그 기도가 이뤄지리라고 누가 생각했습니까? 그 기도가 오늘날 이루어진 것을 보면서 저는 속으로 이렇게 감탄했습니다. ‘야, 그 친구 기도 하나 멋지게 했네.' 이게 바로 주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기도 하나를 해도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람 만들어 보겠다고 밤잠을 자지 않고 키우지 않습니까? 30년 후에 그 자녀를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큰 일을 하실 지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습니까? 자녀를 믿음으로 잘 키우는 것도 주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일해서 받는 월급 봉투는 장사하는 사람들이 하루에 몇 백만 원씩 버는 것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그 봉투를 받아오면 무엇부터 뗍니까? 십일조도 떼고, 주일 헌금도 떼고, 또 지난 한해 동안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감사헌금도 떼고, '이번 주에 비전 헌금이라지'하면서 비전헌금도 떼고, 어느 선교사님이 오셔서 간증하는데 너무 가슴이 뜨거워져서 '내가 바다 건너가서 선교하지는 못하지만 조금이라도 도와드려야지.'하는 생각에 또 얼마를 떼고, '이웃에 있는 아빠가 부도가 나 서 어렵다는데 어떻게 그냥 지나가냐?'하고 또 얼마를 뗍니다. 이러다 보면 월급의 30 퍼센트 이상이 그냥 날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분명히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상관의 눈치를 봐 가면서 아랫사람들에게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아 가면서 열심히 뛰어 번 돈 중에 얼마를 주님께 드리는 것, 이것만큼 귀한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의 직장이나 일 자체가 하나님의 일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의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콤플렉스가 있습니까? 무슨 직업이라도 괜찮습니다. 어떤 형편에 놓여 있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주의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허락하시면 주님이 한 것 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얼마나 우리 생이 희망찬 생입니까?
지난주간에 저는 대검찰청에 가서 신우회 연말 예배에 설교자로 참석한 일이 있습니다. 검찰총장을 위시해서 경인 지역에 있는 검찰청 신우회 간부들이 모여 가지고 은혜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날 저는 식사시간에 총장과 검사장들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교제를 했는데, 검찰총장이 앞에 나와서 인사하는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분이 예수 믿는 분인 줄은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런 말이 입에서 나오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매일 아침마다 검찰청에 출근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책상 위에 성경을 펴놓고 읽은 다음 기도하는 것인데, 저는 늘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의 눈에 꼭 드는 검찰청이 되게 하옵소서.' 이제 남은 임기동안 제일 우선 순위를 두고 싶은 것이 있다면 검찰 복음화입니다.” 사실 검사들이 예수 믿기가 굉장히 어렵다고들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는 검찰의 총수로서 검찰청 복음화를 위해서 남은 임기 동안 뛰고 싶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약과였습니다. 식사하는 자리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기독교 교도소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우리 나라도 미국과 같이 서구 선진국의 나라에 있는 경우와 같이 기독교가 경영하는 교도소, 즉 교회가 경영하는 교도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재 이런 운동이 계속 확산되고 있는데, 일부에서는 기독교 단체가 만드는 교도소를 운영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만일 이 기독교 교도소가 운영되기만 하면 거기에 들어오는 재소자들은 모두 복음을 듣게 될 것입니다. 미국 같은 경우 거기서 감화 받고 나간 사람들의 재범률은 4 퍼센트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기독교 교도소를 세우면 그만큼 양질의 교화를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인천 지검장으로 계시는 전용태 검사장이 대뜸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기독교 교도소가 만들어지면 내가 소장으로 갈래요. 거기 가면 얼마든지 전도할 수 있잖아요? 얼마나 좋은 황금어장이에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검장 자리가 높습니까? 교도소 소장이 높습니까?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참 대단하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직업이 검사지만 마음은 하나님 나라와 주의 일을 하는데 가 있습니다. 그러니 그 직업이 얼마나 거룩한 하나님의 소명이 되겠습니까?
크리스마스 전에 대한항공 동경지사의 부 책임자로 가 있는 우리 교회 김광석 장로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목사님, 대단한 일이 생겼어요.” 하도 흥분해서 말하기에 저는 무슨 사고라도 난 줄 알았습니다. “뭔데 그렇게 흥분합니까?” “해마다 크리스마스 이브 때면 일본의 크리스천 비즈니스맨들이 모여서 크리스마스 축하도 하고 세미나도 하는데요, 대충 백여 명 정도 모입니다. 그런데 이번 크리스마스 때는 모두들 안 믿는 친구들을 데리고 오기로 했어요. 600명을 목표로 하고 있대요. 그런데 그 모임에 강사가 세 명인데 하나는 대학 교수고, 또 하나는 연예인이고, 그 다음으로 제가 강사로 뽑혔어요. 목사님, 이건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에요. 안 믿는 사람이 한 600명이, 그것도 일본에서 내노라 하는 비즈니스맨들이 모이는데 제가 거기에 강사로 가게 되었어요. 목사님, 기도해 주세요.” “야, 정말 대단하네요. 기도해야지요.”
그가 계속 말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무슨 강의를 할까 하고 고심하며 기도하다가 제가 한 가지 결심을 했어요. 가서 전도폭발을 해야겠다고 말입니다.” 일본 문화에서는 그런 공식적인 자리에 가서 전도를 하거나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열심히 기도하고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효과적으로 제시하기 위해 슬라이드를 만들어 오버 헤드 프로젝트로 하나하나 비춰가면서 강의를 할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를 위해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 며칠 뒤에 또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할렐루야!” 뭔가 좋은 일이 있나 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됐어요?” “다들 굉장히 감동을 받았나 봐요. 어느 텔레비전 회사에 있는 분은 내 손을 잡고 자기 텔레비전에 나와서 한번 해달라고 요청하더라구요.” 신분은 대한항공 동경 지사의 두 번째 책임자이지만 마음은 주의 일에 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직업이 곧 주의 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직업이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다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이요, 앞으로 주의 일을 해야 할 사람입니다. 주님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해야 할 사람입니다. 우리는 희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세상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삶 전부를 송두리째 불태울 수 있는, 내일을 내다보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근심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주저앉을 이유가 무엇입니까?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해서 왜 낙심합니까?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낙심이나 절망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8-9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습니다. 주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밝은 내일이 기다리고 있는데 왜 거꾸러뜨림을 당합니까? 왜 낙심에 빠집니까?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새해에 여러분이 무슨 직업을 가지든, 신분이 어떠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이요, 주님이 하신 일 보다 더 큰 일을 할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와 기도하십시오. “주여, 나에게 직업을 주옵소서. 나는 주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주여, 나는 주님이 하신 그 일을 이 세상에 힘껏 펼치고 싶습니다. 주여, 나에게 직업을 주옵소서. 나에게 필요한 돈도 주십시오. 자녀를 공부시킬 수 있는 여건을 열어 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고개를 끄덕여 주십니다. 아무 말씀을 안 하셔도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내가 네 마음 다 알았다. 걱정하지 말라.’ 때가 되면 하나님이 응답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희망찬 새해를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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