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8:21-35
불란서의 소설가요, 비행가인 생테 구쥐베리(Saint Exupery, 1900-1944)는 ‘인간은 관계 속에 존재한다’고 규정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인간이란 마치 거미줄 같이 얽혀져 있으며, 그물처럼 함께 엮여져 있다. 이같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relationship)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선한 사람, 악한 사람, 배운 사람, 무식한 사람들이 구분되고 증거됩니다. 인간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해서 인간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심지어 일반 동물과의 관계에서 그 존재의 가치와 의미를 규정합니다.
인간관계의 핵심적인 단어는 용서와 사랑입니다. 용서없이는 사랑이 없고, 사랑없이 용서가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고, 사랑을 입으며, 인간을 용서하고 이웃을 사랑합니다. 이 용서의 문제를 교훈 한 것이 오늘의 본문 말씀입니다.
내용은 일만 달란트 탕감을 받은 이가 나가서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을 만나 용서하지 못하므로 일만 달란트 용서받은 것이 무의미하게 되었다는 비유의 말씀으로 용서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하기를 형제가 범죄하면 일곱 번 용서하오리까? 그러자 예수님은 일흔번씩 일곱 번 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490번의 용서가 아니라 무한정적인 용서를 의미합니다. 용서하는 그리스도인,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1. 용서는 믿음의 얼굴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두 가지 관계 속에서 성립이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만 달란트 용서받은 사람과 같습니다. 이것이 구원이요, 은혜입니다. 또 하나는 인간과의 관계입니다. 그것은 용서받은 사람이 나가서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서 용서하지 못했을 때 일만 달란트 용서받은 것이 무의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복이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그 의미를 나타내고, 그 가치와 존재가 증명되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은혜로 남아 있고, 나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이웃에게 용서하는 사랑을 실천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도 예배드리기 전에 이웃과 먼저 화해하라(마 5:23~24). 그리고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면 하나님께서 생각밖에 넘치도록 은혜와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였습니다.(눅 6:37). 또한 십자가 상에서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했고, 스데반도 순교현장에서 용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바울 사도도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심같이 이웃을 용서해야 한다(엡 4:32)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2. 용서의 근거는 은혜와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이웃을 용서하는 근거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구원에 대한 믿음이 이웃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게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같은 믿음은 곧 자기 자신이 구원 받는다는 믿음과 일치합니다. 신학자 ‘틸리히’(Paul Tillich)는 인간에게는 존재의 불안, 도덕적인 불안, 그리고 영적인 불안이 있다고 합니다. 이 인간의 근본적인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데는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 용기가 바로 존재의 용기이며, 이것은 바른 믿음에 근거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쌀독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믿는 데가 있어야 여유가 생기고 아량과 인심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용서하는 근거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시작해서 이웃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함에 그 근거가 있습니다. 옛날 요셉도 그의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근거는 하나님의 사랑과 아버지의 사랑과 형제 사랑이며, 나아가서 자기자신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것 또한 희망으로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용서의 근거는 희망입니다. 희망이 있으면 참을 수 있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하버드 대학의 사무엘 헌팅턴(Samuel Huntington)교수는 현대인의 가장 큰 병은 불신에서 오는 냉소주의(Cynicism)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부활에 대한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3. 용서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신 것은 그 자신이 책임을 자시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가능했습니다. 용서에는 어떤 조건이나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요, 용서하는 자의 책임으로 주신 은혜입니다. 왜 용서할 수 없습니까? 용서하지 못하는 자의 변명도 있습니다. 그 사람은 용서하면 전례가 되어 죄를 근절할 수 없다던지, 그것이 습관이 되어 상습범이 된다던지, 내가 예수님 같은 성자가 아니기 때문이라던지, 여러 가지 변명이 있을 수 있습니다.
유니온 신학교의 니-버 교수는 “인간의 행동원칙은 목적을 따라서 법과 원리를 따라서, 또는 책임감에 따라서”라고 규정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임금님께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기에 그 목적도, 법과 원칙도, 또는 책임상으로도 이행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무조건의 은혜로 탕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같은 동료에게 용서해야 하는 책임을 부여받은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가 그 책임을 감당하지 아니했기에 받은 바 은혜도 무의한 것입니다.
우리들도 어차피 인간 사회에서 관계를 맺으며, 엮어가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용서와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야 우리의 믿음이 의미가 있습니다.
출처/강동수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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