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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2권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의 구원> 113쪽에 있는 글입니다.
24. 성령의 사람은 성령으로 행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에게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로마서 8장 12~17절
한 가지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당신은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 되었다는 이유로 얼마만큼 기뻐해 보았습니까? 다시 말씀 드리면 내 안에 성령이 계시구나 하는 생각을 할 때마다 너무 좋아서 아무도 안 보는 데서라면 춤이라도 출 것 같은 행복감에 젖어 본 일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민수기 11장을 읽으면서 그런 비슷한 느낌을 맛보았습니다. 나에게 성령 주신 하나님이 어쩌면 그렇게 감사한지 성령이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마음이 편하고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민수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다가 해방되어 출애굽한 다음 그 삭막한 광야에서 매일 만나만 먹고 살았습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매일 먹으면 싫증이 날 수 있지 않습니까? 너무 지겹게 먹다 보니까 고기 생각이 나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백성들이 고기를 달라고 일종의 데모를 했습니다. 이것을 보고 모세가 너무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하나님께 엎드려, 왜 이렇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시느냐고 하소연을 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백성 중에서 칭찬 듣고 지혜가 있다고 판단되는 어른 70명을 뽑아 그들과 짐을 나누도록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70명의 장로들이 하나님 앞에 모이자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시던 그 날, 그들 중 두 사람이 모세의 말을 듣지 않고 집에 있었는데 그들까지 성령이 충만하여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것을 본 여호수아가 심술이 나 그들이 성령을 받지 못하게 하자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때 모세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민수기 11장 29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민 11:29).
쉽게 말하면 300만 가까이 되는 이스라엘 백성이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다 성령을 받아서 선지자가 되었으면 한이 없겠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답답하면 그런 말을 했을까요? 모든 백성이 다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모세의 꿈이요 소원이었습니다. 그렇게만 되면 고기 달라고 아우성치는 철없는 짓은 안 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는 그의 꿈을 이루어 주지 않으셨습니다.
성령을 모신 사람은 육신대로 살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모세의 꿈이 우리들에게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이 성령을 주셨습니다. 남종과 여종을 가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기만 하면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모신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세가 말한 대로 성령받은 선지자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하나 알아야 합니다. 성령의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 고기 달라며 원망하는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을 모신 사람은 육신대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12절).
앞부분에서 설명한 내용을 다시 반복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성령의 사람이 되지 않았느냐? 성령이 너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켰다. 성령이 너희 생각을 바꾸어서 영의 생각을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제는 너희가 육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육신대로 살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우리가 육신에게 빚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누구에게 빚졌습니까? 성령에게 빚졌습니다. 빚진다는 말은 책임을 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육신대로 살 때는 육신이 이끄는 대로 끌려다녀야 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령의 사람이 되었으니까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육신에게 끌려다니는 빚쟁이처럼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얼마나 단호한 말씀입니까? 변명의 여지를 조금도 남기지 않고 있습니다. 말을 해도 이제는 육신에게 빚진 사람처럼 말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흔히 입버릇처럼 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악한 사회에서 어떻게 죄를 안 짓고 사나.',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이런 말들은 전부 육신에게 빚져서 끌려다니는 사람의 말입니다.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이런 소리가 입에서 나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성령을 모시고 산다고 하면서 여전히 육신대로 살면 그 결과는 비참해집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13절).
반드시 죽는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아담을 세워 놓고 하시던 경고의 말씀입니다.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바로 그 말씀입니다. 이것인 영적인 죽음과 육신의 죽음과 지옥에서 멸망받을 영원한 죽음을 전부 다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너희'는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믿는 사람입니다. 1절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정죄함을 받을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를 말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죽을 수 없는 성도를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이 만약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십니다. 모순같이 들리지 않습니까? 분명히 앞뒤가 잘 맞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에는 엄한 경고가 담겨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자리에서 솔직히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성령을 모시고 있느냐고 물으면 '아멘, 아멘' 하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세상에 나가면 육신대로 사는 사람처럼 행세를 합니다. 만나면 돈 이야기 하는 것이 그의 낙입니다. 조금만 더 깊게 말을 나누면 자기만 알고, 자기만 위하는 사람인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니 믿음이니 하는 말을 할 때에도 그 밑바닥에는 자기 중심적인 사고가 깔려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듣기에 좀 거북하지만 이런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사실은 교회 안에 한 둘이 아닙니다. 그들이 입으로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하시네" 하고 목청 높여 찬송을 부른다고 해서 과연 성령의 사람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 '아니다' 하고 단정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사람의 믿음은 가짜일지도 모릅니다. 성령을 모시고 산다고 입으로는 말을 하지만 스스로 속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사람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죽는다는 경고를 하고 계십니다.
로마서 11장 20절에도 비슷한 경고가 나옵니다.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롬 11:20, 21).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은 원 가지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아니하고 자꾸 거역하니까 도끼로 찍어 버렸습니다.
그러면 우리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백성과 비교할 때 어떤 존재입니까? 접붙임을 받은 가지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순종하지 아니하면 원 가지도 가차없이 잘라 버리는데 가지인 너희가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성령으로 살지 아니하면 그대로 둘 것 같으냐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무서운 경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성령의 사람은 절대로 죽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진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육신대로 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이 본문에 들어있는 참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몸의 행실'
그렇다면 우리가 성령으로 사는 증거를 날마다 행동으로 입증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성령은 항상 우리를 분명한 행동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8장 14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여기에서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은 헬라어로 '아고나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강제로 끌고 간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육신으로 살던 시절에 잘 가던 곳을 가지 못하게 하고 성령의 사람으로 꼭 가야 할 곳은 가기 싫어해도 데리고 가실 만큼 강력하게 우리의 행동을 간섭하고 계십니다. 성령의 끄는 힘은 굉장히 강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버티어도 이길 수 없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육신에 대해서는 항상 '아니오' 하고 대답하게 만듭니다. 성령에 대해서는 항상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성령의 인도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사람은 우리의 삶의 핸들을 육신에게 맡기지 않습니다. 항상 성령의 손에 맡기고 삽니다. 성령이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서라 하면 서는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성령을 따르는 사람의 실제적인 생활입니다.
본문을 보면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실례가 한 가지 나옵니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3절).
성령의 사람은 성령으로 자기 몸의 행실을 죽인다고 합니다. 여기서 죽여야 된다는 말은 현재동사입니다. 한 번 죽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죽이는 반복 행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잘 알다시피 우리 몸은 아직 구원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몸에는 소위 육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죄성이 있고 나약성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충동을 받을 때마다 우리 지체 안에는 바람에 출렁이는 바닷물처럼 무서운 정욕이 발동합니다. 야고보서 1장 14절에서 말씀하신 그대로라 할 수 있습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누구나 욕심에 끌려 잘못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몸이 가지고 있는 약점입니다. 우리가 욕심대로 따르다 보면 몸의 행실이 나타납니다.
'몸의 행실'은 죄를 가리킵니다. 단순히 행동만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언행심사 전체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생각으로 죄짓는 것, 말로 죄짓는 것, 습관으로 죄짓는 것이 다 몸의 행실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말합니다.
몸의 행실을 죽이려면
이런 것들이 고개를 들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까? 죽여야 된다고 합니다. 죽인다는 말은 '꼼짝 못하게 한다' 혹은 '끊어 버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자주 일어나는 우리 몸의 행실을 끊어 버릴까요? 죽일까요? 구체적인 방법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흔히 이런 구체적인 방법이 뭐냐고 물으면 기도해야 한다고 대답합니다. 옳습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당연히 기도해야 하고, 또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자만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이 가르치는 확실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기도 안 하면 큰일납니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므로 여기서 기도하는 문제는 다루지 않고 다른 네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것들은 우리 몸의 행실을 죽이는 공식과 같은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심을 믿어야 한다
첫째는, 성령이 내 안에 계심을 꼭 믿어야 합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킨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는 것이 우리 몸의 행실을 죽이는 제 일단계 작업입니다. 성령은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는 전능한 하나님이십니다. '전능자 하나님이 내 마음 안에 계신다. 나와 함께 동행하신다' 하는 것을 한시도 잊지 않고 믿는 그 믿음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죄악에 끌려들어 가지 못하도록 막는 성령의 능력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은 그가 하실 것이라고 우리가 믿는 만큼 우리를 도우십니다.
우리가 안 믿으면 안 믿는 만큼 성령은 우리를 도우실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믿으면 믿는 만큼 성령은 우리를 도우십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시는 것을 믿지 않고 어떤 유혹 앞에서 이겨 보려고 몸부림을 치면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 아십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하고 탄식하게 됩니다.
본문에서 '너희가 몸의 행실을 죽이라'고 합니다. 몸의 행실은 성령이 죽이는 것이지 우리가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일할 수 있게 해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잊지 말아야 한다
두 번째로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을 모신 우리는 누구입니까?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은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14절).
우리는 성령을 모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성삼위 가문의 자손이 된 것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신분인지 모릅니다. 이 신분 의식을 조금이라도 등한히 하면 안 됩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하고 항상 깨우쳐 줍니다. 그래도 우리가 분명하게 행동하지 못해 갈지자 걸음을 걸으면 그 때에는 더 큰소리로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하고 말씀합니다.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은 성령을 모셨다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16절).
성령의 사람이라면 아무리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 해도 성령의 증거에 귀를 막을 수 없습니다. 만일 못 들었다고 변명하면 그는 성령의 사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좋은 집안에서는 가훈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자녀들을 교훈하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학자 한 분이 계시는데 그분의 가정에서는 이런 가훈을 만들어 놓았다고 합니다. '도박을 가까이하지 말라. 주색을 삼가라. 남에게 이기려 하지 말라.' 대단히 의미 깊은 말인 것 같습니다. 그 가문의 조상 중에서도 도박을 하다가 집안을 망친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대표적인 소설가 집안에서 태어난 자식이라면 가문의 체통을 생각해서라도 "주색에는 빠지지 말아야지. 도박은 하지 말아야지. 남에게 이기려고 아웅다웅하지 말아야지" 하고 조상의 교훈을 명심하면서 살기 마련일 것입니다. 틀림없이 그들의 행동은 다른 사람하고는 좀 다른 데가 있을 것입니다. 아마 그 자녀들이 그렇게 할 것입니다.
성령을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가훈이 뭡니까? 성삼위 하나님의 가훈 말입니다. 좀 길어 보이지만 66권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시편 저자가 뭐라고 했습니까?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어두운 세상을 걸으면서 말씀을 등불처럼 밝히고 다니라고 주셨으니 가훈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성령은 우리에게 "너는 하나님의 자녀야.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돼" 하고 항상 우리 안에서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이 정도는 살아야지" 하는 자각 의식을 시시로 일으켜 줍니다. 이 음성을 듣는 사람이 성령의 사람입니다. 요한일서 3장 2, 3절은 아주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분명한 신분 의식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처럼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주체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주체의식을 분명히 가지면 우리는 우리 몸의 행실을 죽일 수가 있습니다.
유혹 앞에서 단호한 태도를 취해야만 한다
셋째는, 유혹 앞에서 단호한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유혹이 다가올 때마다 단호한 태도를 취하도록 명령하십니다. 애매하거나 적극성이 없는 태도는 성령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안 돼!' 라고 말해야 할 때마다 반드시 '안 돼!'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래도 괜찮을까? 꼭 죄라고 할 수는 없잖아?" 하는 애매한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솔직히 말해서 누구나 스스로 약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한두 가지는 다 있지 않습니까? 이성에 약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명예에 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거짓말에 약한 사람, 노는 데 약한 사람, 체면에, 친구에 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어도 돈에는 아주 약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 한경직 목사님께서 생전에 기자들과 인터뷰하신 내용을 보니까 자신은 평생 통장을 가진 일이 없다고 하더군요. 그걸 보고 제가 아주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는 돈에 약한 것이 아닌가?" 하고 반성을 했습니다.
자신의 약점이 무엇인지 잘 알면서 그 약함을 사용하여 접근하는 유혹 앞에서 가볍게 행동하면 안 됩니다. 만약 성적 자극에 특별히 약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시면 성령께서는 그 문제에 대해서만은 항상 단호하게 말하고 행동하도록 요구하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란한 작품을 상영하는 영화관 앞에서 서성거린다든지 쓰레기 같은 잡지들을 꽂아 놓은 진열대 앞을 왔다갔다 하면서 뽑을까 말까 망설인다면 이것은 단호한 행동이라 할 수 없습니다. 미끼를 보고 그 근방을 뱅글뱅글 맴도는 물고기처럼 행동하면 안 된다고 성령은 말씀하십니다. "빨리 돌아서라. 위험한 곳에서는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라. 도망가라. '안 돼!' 하고 외치라."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은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욥은 정말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몸의 행실을 초전에 박살내기 위해서 행동의 원칙으로 정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뭔지 아십니까?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욥 31:1).
이 말은 어찌 처녀에게 추파를 던지랴 하는 뜻입니다. 아마 욥은 아름다운 여성에게 좀 약했는지 모릅니다. 돈 많은 사람들은 좀 그런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욥은 부자니까 아름다운 여성을 보면 가까이하고 싶은 욕망을 자주 느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단호한 행동을 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지침을 정해서 처녀들을 대하기로 한 것입니다. 눈짓까지도 조심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잠언 4장 25절에 있는 말씀대로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네 눈은 바로 보며 네 눈꺼풀은 네 앞을 곧게 살펴"(잠 4:25).
안목의 정욕, 이성에 대한 유혹이 가까이 올 때 눈 하나 돌리는 것까지 분명하게 하겠다는 결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성령은 이런 결단을 요구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어느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지금은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제가 가까이 모시면서 몇 년 동안 지켜 보니까 젊은 부인들, 특히 잘생긴 여성들을 만나 이야기를 하게 되면 이상하게 얼굴을 바로 보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여자고 남자고 만나면 눈과 눈을 마주하면서 이야기를 해야 뭔가 의미가 통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어른은 얼굴을 쳐다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여자의 구두 끝을 바라보았습니다.
왜 그럴까 하고 궁리해보니까 그 목사님은 뭔가 마음에 결심한 것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분이 그런 면에 약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결심한 무엇이 있었던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아름다운 여자가 앞에 있을 때는 얼굴을 보지 말자. 구두 끝을 보자.' 아주 멋있는 결단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여자의 얼굴을 유심히 볼 때는 '야, 잘 났다', '좀 못났다' 하는 생각이 자꾸 마음 속에 오고갈 수 있으니까 이것이 성령을 근심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두 끝을 보면 기껏 생각해 봐야 '비싸다', '싸다' 하는 것밖에 생각할 것이 더 있겠어요? 마음으로 죄 지을 염려가 없으니 얼마나 안전합니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령께서는 직접 우리를 대신해서 행동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보혜사입니다. 돕는 분입니다. 우리가 행동하도록 힘을 주고 격려하시는 분이지 "너는 가만히 있어. 내가 다해 줄게" 라고 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께 순종하지 아니하면 성령도 속수무책입니다. 그럴 경우에 그는 혼자 탄식하신다고 합니다. 근심하신다고 합니다. 자기가 대신 해 주실 일이면 탄식이 필요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혹이 오면 우리 스스로 단호하게 물리쳐야 합니다. 누가 대신 해주기를 기다리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의 정원을 깨끗하게 가꾸고자 하는 사람은 잡초를 자라게 해서는 안 된다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거룩한 전으로 깨끗이 가꾸기를 원하면 마음속에 잡초가 보일 때마다 쏙쏙 뽑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몸의 행실을 죽이는 일입니다. 예수 믿으면서도 아직 잘 안 되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당신을 도우시는 성령에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으로 무장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말씀을 가지고 무장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시편 119편 9, 11절 말씀이 그대로 우리의 삶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에베소서 6장 17절을 기억하십니까?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성령은 우리가 말씀을 마음에 담고 묵상할 때 그 말씀을 칼처럼 사용하십니다. 얼마나 능력 있게 사용하시는지 모릅니다.
현재 미국에서 사역하고 계시는 목사님 중에 유명한 저술가요 탁월한 설교자로 인정을 받고 있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세미나 인도차 두 주간 동안 캐나다에 혼자서 여행을 한 일이 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부부가 같이 가는 것이 상례인데 어떻게 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혼자 가게 되었습니다. 무슨 스케줄도 없고 할 일도 없고 집 생각은 자꾸 나고 하니까 고독해서 호텔을 나왔다 들어갔다 하며 여기저기를 서성거리고 다녔나 봅니다.
미국 사람들은 좀 약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가끔 있습니다. 부부가 한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못 견딥니다. 우리 한국 사람은 이런 점에서만은 얼마나 강합니까? 24시간 안 보고 밖에 있어도 아내한테 전화 한 번 안 하는 강한 기질이 있지 않습니까? 몇 년을 보지 않고 살아도 사랑이 안 변하는 순수한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아라비아도 가고 아프리카도 가서 혼자 몇 년을 있다가 오지요. 미국 사람들은 상상조차 못할 일입니다. 그랬다가는 당장 이혼을 하고 말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호텔 주변을 돌다가 다시 자기 방으로 들어가려고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 6층 단추를 눌렀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아름답게 생긴 젊은 여성 둘이 타는 것이었습니다. 몇 층을 가는지 단추를 눌러야 하는데 누르지를 않습니다. 그 대신 생글생글거리며 목사님을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6층 어때요? 오늘 오후에 특별한 계획이라도 있나요? 함께 지내면 참 즐거울 것 같은데요"
순간 그 목사님은 위기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가 그때 무슨 생각을 제일 먼저 했는지 아십니까? 이 여자들하고 한번 재미를 볼까 하는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누가 보면 어떻게 하지' 하는 우려감도 아니었습니다. 집에 있는 아내를 생각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일 먼저 마음에 떠오른 것은 자기가 평소 외워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롬 6:11, 12).
그는 평소에 말씀을 외웠기 때문에 적절하게 그 말씀을 생각하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에 사로잡힐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3층 단추를 눌렀습니다. 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나가면서 뒤를 돌아보고 "안녕히 가십시오. 나는 여러분이 던지는 그 제안에는 아무 흥미가 없습니다." 하고 냉정하게 말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유혹 앞에서 얼마나 단호한 위력을 발휘하는지 모릅니다. 중요한 성구들을 외우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다신 한 번 복습해 볼까요?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심을 믿으라.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말라. 유혹 앞에서 단호한 태도를 취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마음에 묵상하고 간직하라. 이 네 가지는 순서와 상관은 없습니다. 경우에 따라 어느 것이 먼저 나오고 뒤에 나와도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자의 행복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사람에게는 기가 막힌 행복이 따라옵니다. 그 행복이 15절에 나와 있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15절).
너무나 좋은 말씀입니다. 성령께서는 종이 주인을 무서워하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무서워하게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사랑받는 아들이 하듯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즐거워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아바 아버지' 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하시던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순진한 아기가 아버지를 향해 부르는 이름입니다. 여기에는 품위나 체면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마냥 좋아서 떨어지지 않는 어린아이한테만 통하는 말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감정이 넘치는 말입니다.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기쁨을 이기지 못해 터지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르짖는다'는 말은 뜨거운 감정을 담고 소리내어 부르는 것을 말합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끈질기게 재촉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좋아서 부르는 소리요 반가워서 터지는 소리요 급해서 찾는 소리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아바 아버지' 하고 부르짖는 것은 기도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요 행복해서 부르는 이름이요 하나님을 즐거워하면서 부르는 이름입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은 그 마음이 늘 평안하고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 찾아오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아버지를 향해 '아빠' 하고 부를 수 있는 나이의 아이를 한번 상상해 보세요. 그 아이에게는 세상에서 제일 크고 자랑스러워 보이는 분이 아버지일 것입니다. 그 아버지는 무엇이나 자기를 위해서 다 해 줄 수 있는 하나님 같은 존재로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자기만 사랑한다고 하는 사랑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색함도 없습니다. 큰형이 겁이 나서 말 못하는 것을, 사랑받고 있다고 자신하는 막내아들이 대신 말해 줍니다. '아바 아버지', 얼마나 행복한 부름인지 모릅니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이 본문을 놓고 이해를 못했다고 합니다. 아빠라고 하는 말은 요즘 사회에는 그렇게 대단한 호칭이 아닙니다. 아버지와 자녀 사이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이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가 자라나던 중세만 해도 아버지를 그렇게 부른다는 것이 대단히 어려웠나 봅니다. 대개의 아버지가 엄하고 무섭기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왜 하나님께서 자기를 엄마라고 부르도록 하지 않았을까 하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엄마'라고 해야 비로소 행복한 감정의 교류가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자라날 때 아버지에게 매를 많이 맞았습니다. 매를 많이 맞으니 자연히 아버지에 대해서 좋은 감정이 있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아빠' 하고 100번을 불러도 행복한 감정이 전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한테도 '엄마'가 '아빠'보다 훨씬 뭉클한 정감이 전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사실 아무 쓸데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빠냐 엄마냐가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과 행복을 느끼고 누리게 하신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우리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하나님을 향해서는 '아바 아버지' 하고 부르면서 즐거워하도록 만듭니다. 성령의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기에 쑥스러울 만큼 성인이 되지 않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연세가 90세가 되셨을 때에도 기도하는 모습만큼은 어린아이였습니다. 하나님의 춘추는 금년에 어떻게 되시나요? 90세가 아닙니다. 100세가 아닙니다. 영원히 사시는 분입니다. 그분 앞에 누가 어른입니까? 그런데 성령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어른인 체 합니다. 그들은 쑥스럽고 어색해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지 못합니다.
성령의 사람은 몸의 행실을 죽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갈 때 거리낌이 없습니다. 마음이 고통스러울 때도 '아바 아버지' 라고 부르는 행복이 있습니다. 고독할 때도 '아바 아버지' 하고 부를 수 있는 여유가 있습니다. 마음이 슬플 때도 '아바 아버지' 라고 부르면 그 마음에 위안이 찾아오는 것을 느낍니다. 이것이 성령의 사람입니다. 성령의 사람만큼 행복한 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령을 모시고 사는 행복을 어디에서 찾아야 합니까?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는 이 특권에서 찾아야 합니다. 사랑받는 기쁨, 자유함, 평안함. 이것이 우리에게 항상 있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 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날마다 이 사실을 확인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다시 한 번 본문을 봅시다. 우리는 성령에게 빚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해야 할 일 첫째는 12절 말씀처럼 육신대로 살면 절대 안 됩니다. 그리고 13절에 가서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14절에 가서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15절에 가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행복한 성령의 사람의 생활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와 같은 복된 은혜가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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