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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2권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의 구원> 156쪽에 있는 글입니다.
26. 성령과 우리의 연약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로마서 8장 26~27절
짧다면 짧은 생이지만 제가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크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인간은 모두 다 약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중생받은 후 지금까지 40여 년을 신앙생활 하면서 발견한 것이 하나 있는데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도 인간으로서의 연약함은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몸을 입고 땅 위에서 숨을 쉬고 사는 한, '연약'이라는 십자가는 벗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이미 경험을 통해서 공감하고 있는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신학자는 인간의 연약함을 가리켜 '인간 조건의 총체' 혹은 '피조물다움'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우리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피조물로서의 연약함을 가지고 있지 아니한 자가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이 26절에서 말씀하는 인간의 연약함은 우리에게 매우 친근한 개념으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아, 그렇구나! 하나님도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알고 계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가슴속 깊이 파고들어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몸을 질그릇에 비유하셨습니다. 질그릇은 얼마나 깨어지기 쉽습니까? 우리는 너무 지나쳐도 안 되고 너무 못 미쳐도 안 되는 약한 존재입니다. 이를테면 돈이 너무 많아도 곤란하고 돈이 너무 없어도 어려움을 당합니다. 사랑을 지나치게 많이 받아도 문제가 되고 흡족하게 받지 못해도 문제를 일으킵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도 분수에 맞게 받아야지, 너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받으면 잘못되는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약합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도 마음놓고 받을 수 없을 만큼 우리의 영육은 약합니다. 한마디로 항상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약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연약함은 아담이 범한 원죄로 말미암아 유전된 타락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중생받았다고 해서 이 연약함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연약함은 우리가 믿음이 좋다고 해서 금방 벗어던질 수 있는 겉옷이 아니요, 성령이 충만하다고 해서 슬그머니 사라지는 증세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일생 동안 연약한 존재로, 피조물다움을 벗지 못한 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
이와 같이 연약한 우리를 하나님은 어떻게 다루시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천사로 바꾸려고 하시지 않습니다. 그 대신 우리의 연약함을 돕기 원하십니다. 이 목적을 위해 돕는 자, 즉 보혜사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우리 안에 와 계시는 성령은 본래 육신의 사람이었던 우리를 영의 사람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소망이 없어 보이는 이 세상에서 장차 누릴 영광, 즉 우리 몸의 구속을 소망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의 사역입니다. 그래서 2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8장 첫절부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이르기까지 사도 바울은 성령이 우리를 어떻게 도우시는가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26절 초두에 "이와 같이"라는 접속사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한 군데 이상하게 생각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이라는 단어 뒤에 '도'라는 조사가 붙은 "성령도"입니다. 이 말을 왜 '성령은'이라고 번역하지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도'라는 조사는 '또한'이라는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성령도'는 지금까지 전혀 언급하지 않던 성령께서 갑자기 등장하는 것 같은 인상을 풍기고 있습니다.
앞뒤 문맥을 정확하게 살린다면 '이와 같이 성령은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라고 번역해야 옳을 것입니다. 성경 번역은 조사 하나 하나까지도 얼마나 예민하게 다루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성령께서 갑자기 우리를 도우려고 나타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이미 우리를 돕고 계셨고 지금도 우리를 도와 주고 계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돕기 위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다른 말로 '보혜사'라고 부릅니다. 보혜사는 도우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도우시는 분입니다. 여기에서 '돕는다'는 뜻이 무엇인지 잠깐 그 의미를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돕는다는 것은 '함께 담당한다'는 뜻입니다. 좀더 이해하기 쉬운 말로 바꾼다면 '맞잡아 준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좋습니다. 가령 무거운 통나무를 옮기려고 그것을 어깨에 짊어지고 가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가 쉽게 옮기도록 도와 주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통나무의 한쪽 끝을 맞잡아 주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가리켜 '돕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 40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데리고 마르다, 마리아 자매의 집을 방문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두 자매가 갑자기 많은 손님을 맞이하고 보니 얼마나 정신이 없었겠습니까? 마르다는 부엌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혼자서 부산하게 음식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생 마리아는 눈치도 없이 예수님 곁에 바짝 다가앉아서 그분의 말씀을 듣는 데만 온 정신을 쏟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마르다는 속이 상해서 주님께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라고 간청했습니다. 이때 사용된 '도와 준다'는 말이 바로 성령이 우리 연약함을 도우신다는 말과 똑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르다는 동생이 자기 옆에서 좀 거들어 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이 우리를 돕는다고 하는 것도 '거들어 주는 것'과 같은 성격을 띠는 것입니다.
스펄전이라는 유명한 설교자는 성령의 도우심을 놓고 재미있는 예를 하나 들었습니다. 이것은 어린 시절 바닷가에서 보냈던 제가 경험해 본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옛날에는 오늘날처럼 엔진이 달린 배가 흔하지 않았습니다. 엔진이 없는 경우에는 노를 이용해 배를 움직입니다. 그런데 노를 젓는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겉보기에는 쉬운 것 같아도 막상 해 보려면 잘 안 됩니다. 그래서 어부인 아버지는 아들에게 일찌감치 노 젓는 법을 가르칩니다. 먼저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노를 저어 보라고 시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흉내를 내가면서 저어 보지만 자기 키보다 더 큰 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쩔쩔맵니다. 노 하나만 다루는 데도 힘이 드는데 센 물살을 갈라 가면서 배를 움직여야 하니 얼마나 힘이 딸리겠습니까? 이들은 낑낑거리며 땀을 뻘뻘 흘립니다.
그때 아버지가 아들 곁에 와서 "오른발은 여기 디딤목 위에다 얹는 거야. 그리고 왼발은 바닥에다가 두고 왼손은 가볍게 노 위에 얹기만 해도 돼. 그리고 오른손으로 노를 힘있게 잡아야 돼. 자 됐니? 그러면 이렇게 젓는 거야" 하고 자세히 가르쳐 줍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명심하고 그대로 따라해 보지만 쉽게 되지를 않습니다. 얼마나 애를 먹는지 모릅니다. 보다 못한 아버지가 씩 웃으면서 일어나 아들에게로 가까이 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등 뒤에 자기 몸을 대고 두 팔을 쭉 내밀어 아들의 작은 손 위에 자기의 큰 손을 얹습니다. 그리고 노젓기를 시작합니다. 아들은 힘들이지 않고도 신나게 물살을 가릅니다. 아버지가 노를 젓는 대로 따라 움직이기만 하면 되니까요. 이렇게 해서 아들이 노 젓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노를 함께 저어 주는 아버지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너는 자기 가서 가만히 앉아 있어. 내가 다 해 주마" 라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가 노를 저을 때 도와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돕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모셨다고 해서 우리의 연약함이 금방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신다고 해서 우리가 갑자기 영적 거인이 되는 것도 아니요, 초자연적인 인물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그대로 두고 도우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의 도움을 따르려고 할 때 도우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동행해 주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약은 성령을 머물게 하는 필요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절대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연약하지 않다면 성령이 우리에게 머물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오히려 연약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엉뚱한 반응을 보일 때가 종종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연약한 것을 벗어나 보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고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가 자신의 연약함 때문이라고 탄식을 늘어놓을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을 좀더 주의 깊게 살펴보면 우리의 연약함을 탄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실패하게 하는 조건도 아니요,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 연약함이 우리로 하여금 성공하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는 비결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성령이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가 짊어지고 있는 약함을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이 성령을 머물게 하는 조건이 되기 때문에 바울처럼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고후 12:9).
이것은 자기의 연약을 꿰뚫어 보는 영의 눈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 말씀의 깊이를 아는 사람은 자기의 연약함을 결코 부정적으로 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는 성령
본문에서 바울은 특별히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는 성령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성령께서 기도를 특별히 돕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우리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연약해지면 기도하는 힘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몸에 열이 조금 나도 기도를 못하고 드러누워 버립니다. 기분이 조금 상한 일이 있어도 마음이 무거워서 기도를 제대로 못합니다. 신앙생활의 긴장이 풀려서 세상 재미에 맛이 들면 우리의 영혼은 캄캄해지고 기도가 막힙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연약함이 기도를 못하게 하는 쪽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이것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특별히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기도에 힘쓰지 못하면 우리의 연약함을 극복할 다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돕기 위해서 와 계시지만 우리가 기도할 때만 도우실 수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성령의 도움을 받기 위한 생명줄과 같은 것입니다. 기도생활에 탈이 난 사람은 성령의 도우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 그의 신앙생활은 파산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다음과 같이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온갖 질병이 감기의 문으로 들어오듯이 신앙생활의 적신호는 기도의 감기가 걸리는 것이다." 옳은 말입니다. 기도가 고장이 나면 영혼은 병들게 됩니다. 그러니까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특별히 돕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이 기도를 돕는다는 말은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탄식하심으로 우리를 도우심
어떻게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도우십니까? 성령은 두 가지 방법으로 우리의 기도를 도우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26절).
기도는 성도가 마땅히 해야 할 본분입니다. 기도를 무시하고 산다든지 기도를 가볍게 생각하고 사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마땅히 빌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마땅히 해야 할 기도인 줄 뻔히 알면서 우리가 기도를 잘 하지 않거나, 해도 바르게 간구하지 못할 때가 참 많지 않습니까? 이와 같은 우리의 연약한 모습을 보실 때마다 성령은 무표정하게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도우신다고 합니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신다는 것은 성령이 직접 탄식한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성령이 우리의 영을 움직여 탄식하게 한다는 말입니까? 우리말 번역을 보면 성령이 직접 탄식하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견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탄식한다는 말을 할 수 있느냐? 하나님은 탄식하시는 분이 아니다. 성령께서 자기가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도하는 우리를 탄식하도록 만드신다"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반면에 이 말씀을 글자 그대로 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시지만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때로는 근심하시고 때로는 시기하신다(약 4:5). 그러므로 성령이 직접 탄식하면서 간구하시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지금 어느 쪽의 해석이 옳으냐를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도우시는 것은 그 자체가 너무나 신비스러운 영역입니다. 우리가 그 신비의 베일을 벗기려고 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무모한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적인 한계선이 있습니다. 성령이 어떤 형식으로 탄식을 하시는지 우리가 꼭 집어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 견해를 다 수긍하는 편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성령께서 친히 탄식하실 때가 있는가 하면 그와 함께 우리의 영이 탄식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친히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십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이 무슨 뜻입니까? 말로서 표현할 수 없는, 아주 농도 짙은 탄식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또 여기에는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한 탄식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2절을 보면 모든 피조물이 함께 고통하며 탄식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탄식의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탄식하는 소리도 우리가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귀에는 안 들리지만 분명히 성령은 탄식하고 계십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성령이 우리 마음에 정말 들어와 계신다면 우리 마음을 들여다보실 때마다 그가 기뻐하실까요, 아니면 탄식하실까요? 저는 탄식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이 우리의 기도하는 꼴을 보고 가슴을 안 치시겠어요? 마음에도 없는 기도, 형식적으로 겨우 입술을 놀리는 꼴을 볼 때마다 어찌 탄식이 나오지 않겠어요? 이런저런 사소한 일을 핑계삼아 가장 중요한 기도를 희생시켜버리고 하루 해를 넘기는 우리 꼴을 보고 어찌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한 가지 알아 두십시오. 그분은 이러한 우리의 연약함을 스스로 짊어지고 탄식하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분의 탄식이 없다면 우리는 더없이 비참해지고 말 것입니다. 이분의 탄식이 없다면 우리의 기도는 공중을 날다가 힘없이 떨어지는 화살처럼 하나님의 존전까지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성령의 탄식이 있기 때문에 비록 형편없는 기도지만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올라가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다음으로 성령이 우리를 탄식하게 해서 나오는 탄식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성령은 자신이 탄식하면서 기도하는 우리를 탄식하게 도우십니다. 우리는 탄식하지 않으면 안 될 많은 연약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탄식으로 부르짖지 아니하면 진정한 기도를 할 수 없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우리를 탄식하게 하는 것입니다.
저의 경험으로 보아도 제 기도의 약 80%는 탄식의 기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가끔은 찬송하며 기도를 드릴 때도 있고, 가끔은 너무 좋아서 막 웃으면서 기도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춤을 추면서 기도할 때도 있지만 그런 예는 극소수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연약함을 쏟아 놓을 때는 탄식하는 기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본능적인 탄식이 아닙니다. 자연인의 탄식도 아닙니다. 성령이 탄식하는 영을 주실 때만 할 수 있는 탄식입니다. 탄식은 위선과 거리가 멉니다. 탄식은 입술에서 나오는 무엇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성령만이 진지한 탄식을 할 수 있게 만듭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해 보십시오. 잔뜩 찡그린 표정이 대부분입니다. 저의 서재에는 우리 교회 유치부의 '예꼬들'이 찍힌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예꼬라는 말은 '예수님의 꼬마'라는 뜻입니다. 그 아이들의 기도하는 귀여운 모습을 카메라에 담은 것인데 너무 마음에 들어 확대를 하여 걸어 놓았습니다. 대여섯 명의 꼬마가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는데 한두 놈만 빼고는 전부 오만상을 찡그려서 기도합니다.
이것이 기도하는 사람의 기본 표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일학교 선생님이 그 아이들에게 그런 표정으로 기도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얼굴이 찌푸려지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입니다. 사람이 웃을 때는 17개의 안면 근육이 움직이고 찡그릴 때는 43개의 근육이 움직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나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주름살이 좀 많고 약간 울상인 표정을 짓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우리의 기도은 탄식이 빠지면 하나님이 들으실 만한 기도가 안 될 때가 참 많습니다. 탄식하며 부르짖는 기도를 많이 하다 보니 자연히 얼굴에 주름살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기도를 진실되게 하시는 성령의 탄식을 들으면서 함께 탄식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유창하게 말을 늘어놓으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탄식에다 마음의 진실을 담아 드리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탄식할 수 없는 우리를 탄식하게 하시는 성령이 계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도록 도우심
둘째, 성령은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 간구함으로 도우시는 분입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27절).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고 마음을 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기도를 곧잘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지 못할 때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몰라 우왕좌왕하는 우리를 돕기 위해서 성령이 우리 대신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해 주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27절 말씀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고 봅니다. 성령이 직접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한다고 할 수도 있고 성령이 우리의 마음을 열어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하시고 그 뜻에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도우신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보든지 다 좋습니다. 성령께서 경우에 따라 필요한 대로 우리를 도와 주시기 때문입니다.
가끔 우리는 세베대의 두 아들처럼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마태복음 20장을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하실 때에 요한과 야고보 형제, 또 그들의 어머니인 살로메가 예수님을 찾아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시면 분명히 높은 왕좌에 오르실 텐데 그때 두 아들이 좋은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살로메는 엉뚱한 욕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와서 절하며 다음과 같이 요청했습니다.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마 20:21).
이때 주님이 참 의미있는 대답을 하셨습니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마 20:22).
주님의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기 욕심대로 구한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주님이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마 20:23).
하나님의 뜻은 따로 있는데 이 모자는 자기들의 뜻대로 무조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우리가 가끔 이런 기도를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했던 기도, 소위 손해 보는 기도를 자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다. 처음에 만나를 먹을 때는 좋아했지만 세월이 흘러 그것이 싫증나고부터는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고기가 먹고 싶어 안달이 났습니다. 얼마나 고기가 먹고 싶었던지 어른들마저 고기를 달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하나님이 거절을 못하시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시편 106편 15절을 보면 참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지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시 106:15).
그들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그 결과가 좋지 못했습니다. 고기를 실컷 먹은 육신은 피둥피둥 살이 쪘는지 모르지만 그 대신 영혼은 형편없이 야위어 갔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영양실조에 걸려 나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았고 또 순종할 기력마저 잃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 구한 결과로 고기는 먹을 수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형편없이 손해를 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잘 몰라서 내 뜻대로 기도하기 쉬운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특히 아주 어려운 재난을 만난다든지, 어떤 숨가쁜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에 봉착하면 하나님의 뜻을 몰라 당황할 때가 많습니다.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무엇을 달라고 해야 할지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내다볼 수 있는 영적 지평선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위급한 때일수록 하나님의 뜻을 찾기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대의 철학자 중에는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는 극단적인 말을 한 사람마저 있습니다.
저의 이야기를 잠깐 하겠습니다. 제가 지난 몇 년 동안 병으로 고생할 때 가끔은 난감할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병든 사람의 기도는 뻔하지 않습니까? "주여, 꼭 고쳐 주옵소서. 고쳐 주시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나이다. 고쳐 주시면 내 몸을 더 아름답게 헌신하겠나이다." 이렇게 똑같은 기도를 하다 보면 종종 이런 생각이 듭니다. '너무 내 뜻대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뜻은 내 기도와 다를지도 모르는데...' 이런 불안한 마음이 생기면 기도가 잘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모르니까 마음만 답답해집니다. 그러다가 결국 이런 기도를 합니다. "주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제가 병을 가지고 기도하는 중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뜻이란 찾을 때마다 손바닥 보듯이 금방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 뜻을 잘 모를 때가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나의 연약함으로 인해 성령은 나를 위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더 적극적으로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리무중을 헤매는 소년처럼 기도하면서 힘들어하는 나의 입에서 나도 모르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는 은혜스러운 간구가 나오게 하시는 것을 얼마나 많이 체험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고마우신 성령이신지요.
다시 한 번 정리를 해봅시다. 성령은 친히 우리를 위해 탄식하는 기도를 하여 우리를 도우십니다. 성령은 친히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심으로 우리를 도우십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는 우리의 불완전한 기도를 온전케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이 어떻게 우리의 약함을 도우시는가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붙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멀리하고 제멋대로 기도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자주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십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여, 우리 자신의 기도는 항상 약합니다. 우리는 평생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한시도 떠나지 않고 우리의 연약함을 짊어지시는 성령 하나님이 계심을 찬양합시다.
특별히 우리가 골방으로 들어가면 함께 들어오시고, 우리가 무릎 꿇으면 함께 무릎을 꿇으시고, 우리가 입을 열면 함께 입을 여시고, 우리가 탄식하면 함께 탄식하시고, 우리가 기도를 마치고 일어서면 함께 일어서시는 성령이 우리 곁에 계심을 감사합시다. 그분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연약하여도 낙망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도우시는 한, 우리는 기도에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위로요, 은혜입니까? 여러분의 기도가 항상 성령의 도우심으로 활화산처럼 타올라서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 힘차게 올라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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