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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3권 <구원받은 자는 이렇게 산다> 213쪽에 있는 글입니다.
46.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또 가로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또 이사야가 가로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로마서 15장 1-13절
교회 안에는 믿음이 강한 자와 믿음이 약한 자가 있게 마련입니다. 믿음이 강한 자들만 모인 교회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보고 믿음의 강약을 평가할 수 있습니까? 교회를 얼마나 열심히 다니느냐, 기도생활에 얼마나 힘을 쏟느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얼마만큼 시간과 재물을 바쳐 헌신하느냐 하는 등등으로 믿음의 정도를 측량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와 같은 것들이 신앙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전혀 엉뚱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인간관계를 얼마나 성숙하게 잘하고 있는가를 가지고 믿음의 정도를 판단해야 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교회 안에서 약한 형제를 얼마나 잘 돌보며 감싸 주는가?" 하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의 믿음이 강한지 약한지를 판단할 수 있다고 합니다. 특히 흠이 많고 실수를 잘하는 형제를 어떤 태도로 대하느냐에 따라 그의 믿음의 강약을 진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약한 형제를 판단하지 않고 그의 주장이나 생각을 바다와 같이 넓은 마음으로 포용해 주는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그는 믿음이 매우 강한 사람입니다. 약한 형제가 걸려 넘어질까 염려되어서 마시고 싶은 것도 안 마시고 하고 싶은 일도 안 하며 그 형제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으려고 애씁니까? 그렇다면 그는 매우 강한 믿음을 가진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점에 대해 우리는 자기 성찰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교회 안에서 자신의 현주소를 점검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나의 인간관계가 내 믿음을 증명해 보일 만큼 성숙했다고 할 수 있는가?" 이 문제를 놓고 성령께서 우리 각자 자신을 돌아볼 수 있도록 마음의 눈을 열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자기를 어떻게 보았는지 압니까? '믿음이 강한 자'로 보았습니다. 15장 1절을 보면 "우리 강한 자" 하고 나옵니다. 여기의 '우리' 속에는 바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믿음이 약한 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연약한 형제를 위해서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하고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바로 서도록 하기 위해서 필요한 사역을 하는 데 부끄러움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를 강한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믿음이 강한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위해서 할 일이 매우 많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약한 자는 강한 자를 위해서 할 일이 별로 없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가 많은 교회일수록 그 교회는 살아 있는 교회요, 능력을 가진 교회요, 사랑이 넘치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교회를 가리켜 "이 세상에서 교회만큼 이질적인 집단은 없다"고 했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이는 대부분의 단체는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동창이다', '종씨다', '동향이다', '같은 취미를 가졌다'는 등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끼리끼리 모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공통된 특성이 구성원들을 쉽게 어울리게 만듭니다.
그러나 교회는 어떻습니까? 자연적인 성향으로 볼 때 잘 어울릴 수 없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 통할 수 없는 점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서로 취미가 다릅니다. 빈부귀천이 확연히 나타납니다. 식자, 무식자가 한데 모여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서로 밀어내기 쉬운 성질을 가진 일단의 사람들이 믿음이라는 띠에 묶여서 모였기 때문에 가끔은 교회 안에서 참으로 다루기 어려운 문제들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사랑의교회 우물가선교회에서 <십자가에 달린 창녀>라는 제목의 성극 공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흘 동안 연속 공연된 성극을 보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어떤 때는 앞자리에 앉아 자꾸 우는 관객들 때문에 역을 맡은 형제 자매들이 지장을 받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공연 매회 만장을 이루었는데 어떤 때는 3, 4백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좌석이 없어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번 성극을 통해서 우리의 현주소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창녀를 불쌍히 여기고 찾아가셨지만 우리는 창녀라는 과거를 가진 사람이 예수를 믿고 새사람이 되어도 색안경을 쓰고 보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공연 기간에 우물가선교회 멤버들과 잠깐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어느 자매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목사님, 우리 선교회에 소속된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 사람들은 서러움을 느끼고 있답니다. 예배에 참석해도 그 분위기에 휩싸이지 못하고 다락방 모임에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어요. 어느 분이 제자훈련을 신청했더니 교회에서 거절했다고 해요. 그 이유가 뭘까요? 과거가 좀 복잡하다는 이유 때문에 교회 안에서 보통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목사님, 교회의 이런 풍토를 좀 고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자매의 말을 듣고 저는 무척 가슴이 아팠습니다. 교우들이 다 믿음이 강한 자라면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과거의 경력이 어떠했든, 무슨 죄를 범했든, 허물과 약점을 수두룩하게 가지고 있는 약한 형제라도 넓은 품으로 안아 줄 수 있는 강한 믿음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믿음이 약한 자는 쉽게 상처를 받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행할 수 있는 힘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앞세우고 확신이 없으면서 남이 하는 것을 잘 따라 합니다. 이해를 잘 해주어도 쉽게 상처를 받고, 아무리 거치는 것을 놓지 않으려고 조심해도 잘 걸려 넘어집니다. 이것이 믿음이 약한 자가 가지고 있는 약점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약함은 하루 아침에 고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상당 기간 동안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약한 부분을 끌어안고 허우적거려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형제는 사랑의교회에 처음 와서 강단 뒤에 십자가가 붙어 있지 않은 것을 보고 한참 동안이나 마음에 시험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형제는 틀림없이 '믿음이 약한 자'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형제를 향해 누군가가 "당신, 왜 그런 것을 가지고 교회를 비판합니까? 그러면 다른 교회로 가시오. 십자가 붙어 있는 교회로 가면 되지 않습니까?" 하고 그 형제를 비난했다면 그 역시 믿음이 약한 사람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
믿음이 강한 자는 어느 정도로 약한 자를 위해 주어야 할까요? 앞장에서 우리는 두 가지 원칙을 배웠습니다. 첫 번째 원칙은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입니다. 각자 소신대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 약한 자를 받아 주는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원칙은 약한 형제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형제를 실족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 원칙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약한 형제를 비판하는 일을 삼갈 수 있고, 다른 형제가 실족하지 않게 나 자신이 거치는 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저나 여러분이나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정도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오늘 말씀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이것이 세 번째 원칙입니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1절).
믿음이 약한 자에게는 약점이 있다고 했습니다. 상처 잘 받고, 비판 잘 하고, 하고 싶어도 실천하지 못하는 여러 가지 약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이러한 약한 자의 약점을 자기 약점처럼 짊어질 수 있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합니다. '담당한다'는 말은 '짊어진다' '내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4절을 보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또 이사야 53장 6절을 보면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허물을 대신 덮어쓰시고 그 모든 허물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받으셨다는 것을 일컬어서 '담당한다', '짊어진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우리도 교회 안에서 약한 형제들의 약점을 비판하지 말고 그의 약점을 바로 나의 약점으로 알고 그것을 함께 짊어지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여기서 '마땅히'라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모릅니다.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말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수준이 이만큼 높은 것입니다.
이웃의 약점을 나의 약점으로 알고 짊어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희생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희생의 대가가 1절 끝에 나옵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웃을 기쁘게 하고, 자기를 기쁘게 할 생각은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래야만 약한 형제의 약점을 짊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희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산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형제의 약함을 대신 짊어지기 위해서는 목적 의식이 뚜렷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목적을 가지고 그렇게 해야 합니까? 2절을 보기 바랍니다.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2절).
형제에게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하겠다는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선을 이룬다는 말은 유익이 되게 한다는 말입니다. 즉 약한 형제에게 도움을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덕을 세운다는 것은 건물을 세우듯 서로 붙들어 세워 주는 것을 말합니다. 즉 형제의 믿음을 키워 주고 형제의 약한 점을 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운다는 것을 하나로 묶으면 형제의 신앙과 인격을 키우기 위해서 나 자신이 희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2, 33절에서는 이 내용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 10:32, 33).
여기서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한다"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앞에 놓고 묵상하면 예수 믿는 생활이 재미가 없는 것처럼 생각되기 쉽습니다. 다른 형제를 기쁘게 하려고 나의 기쁨을 희생해야 한다는 말이 반가울 리가 없습니다. "다른 형제에게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기 위해서 나의 기쁨을 포기해야 한다면 신앙생활에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 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과 정반대입니다. 이웃을 위하는 것이 바로 나를 위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웃을 기쁘게 하는 것이 곧 나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요즈음 세상에는 예수 믿어도 개인주의가 팽배한 까닭인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마치 뜬 구름 잡는 소리처럼 듣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죄를 많이 범하는지 모릅니다. 꼭 눈에 보이는 잘못만이 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이 가르치는 수준만큼 살지 못하는데도 아무 가책을 받지 않고 있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무서운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한번 다시 봅시다. 약한 형제를 위해 줄 때 그것이 나를 위하는 것이고 약한 형제를 기쁘게 할 때 그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적 생활의 대원리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우리는 그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앉은 자리가 따뜻하면 온 몸이 노곤하게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가 약한 형제를 기쁘게 해 주면 그 기쁨이 놀랍도록 나에게 전달되어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반면에 자기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교회생활 하는 사람은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빨리 믿음이 강한 자가 되어서 약한 형제를 위해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임하면 작은 예수가 될 수 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남의 짐을 대신 짊어지라, 남을 기쁘게 하라, 남에게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라 하는 교훈은 분명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매우 어색한 이야기로 들리기 쉽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장 하기 어려운 일임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 잊을 수 없는 한 가지 추억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부끄러워서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낍니다.
예전에 제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어느 교회의 부교역자로 부임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저에게 중요한 일을 맡기셨습니다. 신학교를 갓 졸업한 저에게 600~700명 되는 교회의 부목사 일을 맡긴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교회에는 저보다 먼저 들어온 부목사님 한 분 있었습니다. 그분은 무슨 부족함이 있었는지 몰라도 담임목사님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담임목사님은 제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면서 저에게 중책을 맡겼습니다. 위계질서가 바뀐 셈이지요. 저는 담임목사님이 시키는 대로 일을 했습니다만 이것으로 말미암아 전임자가 크게 상처를 받았습니다. 여러 명의 부교역자를 두고 능력 위주의 인사 처리를 하는 것은 큰 시험거리가 될 소지가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그때 제가 용기를 내어 담임목사님에게 "저는 이 일을 못합니다. 전임자에게 맡겨 주십시오. 저는 그분보다 더 잘할 자신이 없습니다." 하고 간곡히 사양을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불행히도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연유로 해서 3년 동안이나 두 사람 다 힘든 세월을 살았습니다. 그분이 자꾸 저를 비판하고 다녀서 저도 속으로 몹시 갈등했습니다. 서로가 가까운 이웃에 살면서도 만나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슬슬 피해 다닐 정도였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결국 그분은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볼 때 제가 로마서 15장 1, 2절 말씀을 실천했더라면 결코 그런 부끄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학교 나와도 별수가 없더군요. 목사 안수를 받고 교회에서 설교를 몇 년 해도 잘 안 되더라구요. 지금도 잘 안 되기는 마찬가지만 저는 중요한 사실 하나만은 분명히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은혜만이 나를 움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순종할 수 없다고 움츠러들 때마다 은혜가 임하면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은혜는 우리의 마음 밑바닥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강한 동기가 됩니다. 이 초자연적인 감동이 마음을 움직이면 우리는 할 수 있게 됩니다. 그 동기와 감동에 붙들리기만 하면 우리는 믿음이 강한 자가 되어서 형제의 약함을 짊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감동시킬 수 있는 강한 동기는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3절).
예수님은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어떻게 하셨는가를 아는 데서 우리를 움직이는 은혜가 임합니다. 그 은혜가 우리를 예수님처럼 살 수 있도록 만듭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활동하실 때에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하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를 기쁘게 하시기 위해서 그분은 희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바로 알고 그 놀라운 은혜에 감동을 받으면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할 수 있습니다. 약한 형제들을 기쁘게 해 주려는 일이 잘 안 된다면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알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멀리서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을 비방하는 세상 사람들의 저주를 홀로 받으셨습니다. 죄인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욕하고 거역하고 배역했지만 그 모든 죄악의 값을 예수님이 혼자 다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이것은 빌립보서 2장 6~8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왜 예수님께서 하나님 자리에 계시기를 거절하시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자기를 기쁘게 하시지 아니하고 우리를 기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왜 예수님이 종의 모습으로 말구유에서 탄생하셨습니까? 자기의 기쁨을 포기하시고 우리의 기쁨을 위해서입니다. 왜 주님께서 자기를 낮추어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까? 우리에게 선을 이루고 덕을 이루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로 우리는 질고에서 해방되었고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만나는 사람은 초자연적인 진한 감동을 받게 됩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만나는 자는 자기만을 기쁘게 하려는 삶 자체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도 예수님처럼 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처럼 살기를 원하는 마음을 일컬어서 예수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우리 안에는 성령이 임하여 계십니다. 성령이 임하시는 순간에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소유합니다. 성령이 임하여 계신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살아 계신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가 내 마음에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은 내 마음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마음을 가지면 자연히 예수님의 성품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일컬어서 성령의 열매라고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성령의 열매가 나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 아홉 가지입니다. 이 성령의 열매는 한마디로 요약해서 자기를 위하는 삶이 아니라 다른 형제를 위해 희생하는 삶을 말합니다. 다른 형제의 짐을 지고 그것을 기쁘게 감내하면서 사는 삶을 일컬어서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사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육체의 일은 이와 뚜렷이 대조가 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9절 이하를 보십시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이것들은 철저히 자기 중심의 삶을 사는 자가 가지고 있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닮아가는 인격을 가졌다는 것을 무엇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까? 다른 형제와의 인간관계가 어느 정도인가를 보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형제의 짐을 지고 함께 기뻐하면서 나갈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가진 사람이요,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말씀대로 약한 형제를 적극적으로 받아 주려면 한마디로 작은 예수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처럼 되지 아니하면 불가능합니다. 내가 예수님처럼 되어야 비로소 약한 형제를 받을 수 있고 형제의 약함을 기뻐할 수 있고 그 형제와 함께 동고동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와 같은 수준까지 가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미국이 낳은 저명한 신학자요, 설교자요, 목사였습니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에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가 프린스턴 신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의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그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딸은 적령기에 있었는데 그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늘상 무겁기만 했습니다. 그 이유는 딸의 성격이 몹시 날카롭고 괴벽스러워서 결혼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어떤 멋있는 청년이 그의 집을 찾아왔습니다. 그 청년은 목사님의 딸에게 청혼을 했습니다. 목사님의 마음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곧 냉정을 되찾고 청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아비로서 자네의 청혼을 받아들일 수 없네. 결혼할 생각을 하지 말게나. 자네가 내 딸을 잘 몰라서 그러는 것일세." 그랬더니 그 청년은 "제가 따님을 사랑하는데 왜 그러십니까?" 하며 물러날 기색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글쎄, 내 딸을 사랑하지 않는 게 좋을 걸세" 하고 목사님은 잘라 말했습니다. "따님도 저를 사랑하는데 왜 그러세요?" 하고 청년은 조금도 굽히지 않았습니다. "내 딸과 자네는 자격이 잘 맞지 않는 것 같구려" 하고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청년이 말을 받아서 "무슨 자격 말입니까? 저도 예수 믿습니다. 그 이상의 자격이 또 필요합니까?" 하고 대들 듯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봐, 젊은이, 고집 부리지 말게나. 내 딸 같은 사람과 평생 동거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는 하나님이라야 할 걸세. 자네가 하나님이라도 된단 말인가?" 이 에피소드가 우리에게 중요한 진리 하나를 가르쳐 줍니다. 약한 형제를 받아 주려면 나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약하고 허물을 가진 사람을 포근히 감싸 주려면 작은 예수가 되어야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네가 어떻게 약한 형제를 감싸 줄 수 있겠니? 그것은 너에게 가당찮은 일이야. 차라리 포기해버려" 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네가 힘들더라도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교회 안에 있는 약한 형제들을 감싸 주고 위해 주어야 한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려면 우리가 작은 예수가 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몸부림치고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을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로 읽지 못하는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훗날 주님 앞에 섰을 때 얼굴을 바로 들지 못할 것입니다.
나의 인격이 예수로 흘러 넘치려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닮는 수준에 이르기까지 자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성령의 열매, 예수님의 성품이 나의 인격을 통해 흘러 넘치도록 할 수 있을까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오늘 본문 말씀이 중요한 것 하나를 가르쳐 줍니다.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4절).
성경 말씀이 우리를 교훈하기 위해서 기록되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4절 말씀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형제의 약점을 담당할 수 있는 수준까지 자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 말씀을 부지런히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었으니 가만히 있어도 내가 예수님처럼 자라게 될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먹어야 자란다고 합니다.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될 때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자랍니다. 자꾸 자라서 나중에는 예수님처럼 나도 모르게 변해가는 것입니다.
성경을 열심히 배우는 사람은 그 말씀 앞에서 자기의 이기적인 마음이 녹아지는 것을 체험합니다. 지금까지 그런 체험이 없이 성경 공부하셨나요? 만약 그렇다면 다시 검토하시기 바랍니다. 계속 말씀을 먹는 영혼은 자기만을 내세우는 악한 성품이 깨어지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심령으로 바뀌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는 것을 매일매일 새롭게 느낍니다. 예수님처럼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고 약한 자의 약점을 짊어지고 이웃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을 발견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바뀝니다.
좋은 음식을 먹는데 안 자라는 아이가 있습니까? 특별히 병든 아이를 빼고는 모두 자랍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말씀을 계속 먹으면 나도 모르게 자랍니다. 나도 모르게 예수가 되어 갑니다. 나도 모르게 예수처럼 행동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성경 말씀을 잘못 배운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통해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을 받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나의 인격이 온전하게 되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7).
교회 안에는 집안이 부유해서 값비싼 옷을 입고 다니는 자매들이 있습니다. 특히 주일에 교회에 올 때는 유난히 눈길이 가는 비싼 옷을 걸치고 옵니다. 부인들이 새 옷을 입어도 어디 가서 자랑할 데가 별로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교회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니까 자랑스럽게 입고 오는 것입니다. 자기 돈으로 사 입고 다니는데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많은 자매들이 성경 말씀을 배워 어떻게 사는 것이 형제에게 덕이 되는 삶인지를 깨닫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행동이 달라지는 것을 봅니다. 어떻게 달라지는지 아세요? 가난한 형제를 생각해서 가급적 비싼 옷을 안 사고, 또 비싼 옷이 있다 해도 일부러 안 입으려고 합니다. 이제는 누가 보아도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아니할 만한 그저 평범한 옷을 입고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그의 성품이 주님을 닮아 가는 증거입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이상하게도 부인들은 옷에 민감하더군요. 돈이 없어서 입고 싶어도 못 입는 사람들은 잘 입는 사람을 보고 상처를 받게 되고, 못 가진 사람은 가진 사람에 대해 은근히 반발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믿음이 약하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약한 형제를 생각하여 돈이 있으면서도 검소하게 차리고 나와서 예배를 드리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말씀을 통해서 사람이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처럼 주님을 닮아 가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게 되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꿈을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의 꿈이 무엇입니까?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5~7절).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배울 뿐 아니라 예수님의 소망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꿈을 배우게 됩니다. 5절부터 7절까지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예수님은 교회가 하나 되기를 소망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한마음 한 뜻을 가지고 한 몸을 이루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면서도 교회 안에서 서로 갈등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교회가 하나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 배운 사람이 약한 형제와 등을 지고 살 수 있겠습니까?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지고 계시는 또 다른 꿈은 세계가 하나 되는 것입니다. 7절부터 12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세계 열방 앞에 복음의 증거자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복음의 사역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8절).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할례받은 사람은 유대인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을 섬기는 복음 증거자가 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유대인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유대인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유대인을 세계 앞에 복음 전하는 자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9절에는 구약의 시편 18장 49절에 있는 내용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9절).
여기서 '나'는 누구입니까? 유대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으로 하여금 열방 앞에서 주님을 찬양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 다음에 더 나아가서 이 유대인이 이방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하게 만든다고 말씀합니다.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10절).
유대인들과 함께 온 세계 민족이 하나님을 찬송하게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꿈이요 예수님의 꿈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11절을 보기 바랍니다.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11절).
유대인도 하나님을 찬송하고 이방인도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면 모든 열방이 하나 되는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꿈입니다. 이제 12절을 봅시다.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12절).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셔서 열방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 위에 건설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꿈입니다. 예수님의 꿈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소망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영원히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꿈인 것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은 교회가 하나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 어떻게 교회 안에서 다른 형제에게 상처를 주면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주님이 교회가 하나 되기 원하신다면 나도 하나 되기 위해서 형제의 약점을 짊어지고 그들을 기쁘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계가 하나 되는 것을 주님이 소망하고 계십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동양인과 서양인, 백인과 흑인, 식자와 무식자,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모두를 하나로 묶으셔서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영광스러운 나라를 만드는 것이 그의 꿈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잘 알면서 어떻게 형제와 더불어 하나 되는 것을 거부하며 살겠습니까? 어떻게 자기만 생각하고 자신의 사욕만 채우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 드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이 꿈을 풍성하게 채워 주신 것을 감사드려야 합니다. 끝으로 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3절).
이 소망은 교회가 하나 되며 더 나아가서 세계가 주 안에서 하나 되는 소망입니다. 주님은 이 소망을 우리에게 넘치도록 부어 주기를 원하십니다. 자기의 꿈을 우리와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말씀을 통해 이 소망을 나누는 사람이 어떻게 약한 형제를 참사랑으로 받아 주지 않겠습니까?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교회 안에서 하나 됨을 방해하거나 깨뜨리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을 대적하는 사람입니다. 교회 안에서 형제와의 화목을 깨뜨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 목적을 방해하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나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고 형제를 기쁘게 하는 작은 예수가 되기를 원합니까? 믿음이 강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약한 자라도 받을 수 있는 강한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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