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두 번째 기회를 선용하라 (요나 3:1-10)

by 【고동엽】 2022. 9. 1.

두 번째 기회를 선용하라   (요나 3:1-10)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에서 깨닫는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은혜입니다. 깨달음이 없다는 것보다 더 불행한 것은 없습니다. 깨달음이 없다는 것은 축복이 없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모든 인간 생활의 은혜요 형통은 깨닫는데서 출발합니다.
시편 49:20 말씀입니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이 말씀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비참한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더 이상의 저주일 수 없는 말입니다. 멸망하는 짐승 같다는 존재, 그것은 이미 인간이 아님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존귀에 처하나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있어도 돈의 소유와 가치를 바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짐승 같은 사람이며, 그러할 때 그 돈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높은 지위를 가지고, 권력을 가지고, 명예를 가지고 있어도 그 모든 것들의 소유와 가치에 대한 바른 깨달음이 없을 때 그는 멸망하는 짐승 같다는 말입니다. 성경에도 그렇고 우리의 역사에도 그렇고 오늘을 현존하는 우리들의 삶에도 그곳은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히 죽을 죄에서 구원받은 우리들이 그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짐승보다 더 나을 것이 없습니다. 가난에서 부요함으로 복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그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짐승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질병의 고통에서 치료해 주신 주님의 그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함부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짐승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저주 가운데 축복된 삶을 살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고(自高)하는 사람을 살아가는 것은 짐승보다 나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출생해서 죽는 날까지 그렇게 아름다운 무지개 빛 같은 삶을 사는 이가 없습니다. 죄인된 인간은 실패하고 좌절하고 죄를 짓고 넘어지면서 살아갑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축복 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삶입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에서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회를 선용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문제에 대하여 놀라운 교훈적인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세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고, 우리에게는 두 번째 기회까지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한번은 주어진 기회를 놓치기 마련입니다. 물론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악한 의미의 기회가 아닌 선한 의미의 기회를 말합니다. 나쁜 짓을 하는 것을 기회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순간을 기회라고 정의할 때 사람은 바로 그 좋은 일을  할 수 있고, 자기에게나 이웃에게나 하나님에게나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잃어버리는 경우들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한번의 기회를 놓쳤다고 해서 다시 기회를 주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다시 한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리고 모든 이들을 위한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는 것을 오늘 본문의 요나를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1. 하나님은 거룩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 모두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요나서 1:1에서 하나님은 요나에게 하나님의 거룩하신 일을 위하여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니느웨의 악함을 보신 하나님이 그대로 니느웨 백성을 멸망하실 수는 없기에 요나를 보내어 회개를 촉구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일지라도 자신의 생각에 하기 싫은 일이어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의 기회를 포기해버리고 맙니다. 그것이 바로 니느웨 정반대의 방향을 향하여 자기 길을 걷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오늘 우리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지만 내 마음에 싫으면 하나님의 말씀과는 반대의 길을 걷는다는 놀라운 사실이 요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취소하거나 없던 것으로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심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결국 하나님은 대풍을 준비하여 요나의 길을 막고, 큰 물고기를 준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고, 물고기 뱃속에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치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순종하는 것이 최고의 축복이며 그것을 거절하면 그만큼 시간만 늦어질 뿐 반드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기회는 어떤 일이나 행동을 하기에 가장 좋거나 알맞은 시기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동안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를 결코 흘러 보내어서는 안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요한복음 9;4 말씀입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그런데 이 좋은 기회를 부정적인 측면으로 의미를 부여할 때 기회주의, 기회주의자가 됩니다.
기회주의는 어떤 일에 있어서 종국의 목표를 위하여 철저하지 못하고 정세에 따라서 기회를 관망하고 지조 없이 편의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이론의 결핍, 행동의 돌변이 그 특징이 됩니다. 기회주의자는 일정한 신념이나 주관이 없이 그때 그때의 형편에 따라 서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허무한 일의 기회는 기회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사로잡아 절망에 빠뜨리고자 하는 올무일 뿐입니다.
성도의 사용할 기회는 분명합니다. “아버지의 일을 하여야 하리니”입니다.
즉,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진정한 기회를 선용하는 것임을 주님이 가르치신 것입니다.

홀트 아동복지회가 있습니다. 초기에는 ‘홀트 양자회’였습니다. ‘홀트 양자회’를 설립한 헤리 홀트 씨는 미국 오래곤 주의 한 평범한 농부였으며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1954년 가을 어느 날 그곳에서 열렸던 선명회 총재인 피얼스 박사의 강연회를 통하여 한국 전쟁의 참상과 버려진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홀트 씨는 마음에 강한 충격을 박았고 즉시 온 가족이 합의하여 8명의 아기를 입양하여 함께 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입양법에는 2명 이상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가족들은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기도는 미국의 상원과 하원을 움직여 합법적으로 한국에 가서 8명의아이들을 데리고 올 수 있었습니다. 그 후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이에 협력하여 홀트 양자회가 설립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고 이것이 진정한 기회입니다.
구약에서 기회라는 용어는 ‘에트’(תע)인데 이 말은 본래 “시기, 때”라는 의미에서 학개서 1:2과 에스더 4:14에서 기회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악한 의미로 기회를 악용하는 경우들이 있었습니다.
마음에 미움을 가득 담고 상대방을 죽일 기회를 찾는 경우가 있습니다(민 35:20)
악인이 의인을 엿보아 살해할 기회를 찾는 경우도 있습니다.(시 32:6)
죄악의 기회만을 기다리는 자가 있습니다.(시29:20)

그러나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시는 성공을 위한 좋은 기회가 있는데 이 경우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그 믿음을 행하기만 하면 축복의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축복의 기회를 잃고 좌절하고 절망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내 것 잃고 슬퍼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잃고 난 뒤에 유익되는 일 없습니다. 성공의 기회를 잃었거나 사랑의 시절을 놓치고 결혼의 기회를 잃었거나, 사업의 성공과 직장에서 승진할 기회를 잃었을 때 좌절하고 절망하는 것이 사람의 일입니다.
귀한 것을 귀하게 간직할 줄 알고, 참된 것을 참되게 모색할 줄 알고, 옳은 것을 옳다고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 사람이 기회를 선용하는 사람입니다.

요나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축복의 기회인데 요나는 이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니느웨로 가라는데 다시스로 갔습니다. 니느웨 성읍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을 선포하라 했는데 요나는 그들이 회개하는 것이 싫었습니다. 결과는 물고기 뱃속에 갇히는 어둠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이제 한 번 잃은 기회를 슬퍼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니은 놀라운 은총을 베푸시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2. 하나님은 기회를 선용치 못한 자에게 다시 한번 두 번째 기회를 주십니다.

본문 3:1의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여기의 “두 번째”는 ‘쉬니트’(תינשׁ)인데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주어진 기회는 다른 것이 아니라 첫 번째 주어진 말씀처럼 “큰 성웁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입니다.
이 말씀에 따라 요나는 두 번째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래서 니느웨 성읍 백성들이 회개하게 되어 구원을 얻게되었습니다. 즉, 두 번째 기회를 선용한 요나의 모습에서 우리의 삶을 조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번 실수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듯 인간이 실수를 할 수 있음을 너그러이 헤아려 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요나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태도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요나는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수행하는데 실패했지만 하나님은 요나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두 번째 찾아와서 첫 번째 하신 말씀을 다시 주셨습니다.

요나가 두 번째 말씀을 순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이미 하나님의 능력을 깊이 체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풍랑과,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을 크게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연을 통한 재앙은 요나로 하여금 자신이 절대로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도우시는 능력이 아니고는 결코 살 수 없는 무력한 존재임을 철저하게 인정케 했습니다. 이와 같은 체험 후에 내려진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더 이상 거역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이같은 일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3. 우리는 두 번째 기회를 놓친 실패자가 아닌 선용하여 성공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두 번째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멸망한 사람들과 두 번째 기회를 선용하여 축복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창세기 4장의 가인은 동생 아벨과 우애 있는 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잃고 동생을 돌로 때려 죽였습니다. 이 엄청난 실수를 깨우치려고 하나님은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셨을 때 회개할 기회를 잃고 오히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소리쳤습니다. 두 번째 기회를 잃은 가인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민수기 22장의 발람은 선지자의 사명을 수행할 기회를 잃고 물질에 눈이 어두워 모압왕 발락에게로 가는 중 하나님의 사자가 그의 길을 막고 선 것을 나귀가 보았는데 눈이 어두운 발람은 보지 못하여 나귀를 때릴 때 나귀가 입을 열어 말을 하게 되고 하나님의 사자가 발람의 눈을 열어 보게 했을 때 다시 선지자의 사명을 수행할 두 번째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물질에 눈이 어두워 그 기회를 잃어버리고 유다서에 기록된 저주받은 세 사람 중의 하나가 되고 말았습니다.

열왕기상 18장의 갈멜산 꼭대기의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의 기도 대결 장면은 아합 왕이 지난날의 허물과 죄악을 회개하고 하나님 신앙을 회복할 두 번째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아합은 이세벨의 간언에 넘어가 하나님의 저주받고 악한 왕으로 일생을 마칠 때 그의 시체를 개들이 핥아 버리는 저주받은 일생을 마무리했습니다.

역대하 26장을 보면 웃시야 왕은 십육세에 왕이 되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선정을 베풀었으나 강성하여지매 마음이 교만하여 제사장만이 분향하는 것을 시행하여 할 때, 아사랴 제사장을 중심으로 80명의 제사장이 그의 행위를 막을 때가 두 번째 선정을 위한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교만이 극에 달하여 제사장을 향하여 노를 발하는 순간 문둥병이 발하여 죽는 날까지 문둥이가 되어 별궁에 거하는 저주받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범죄한 후 회개하여 두 번째 기회를 놓치지 않아 축복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열왕기하 12장에는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하고 죄를 범하였을 때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그 죄를 추궁하고 책망하였을 때는 다윗에게 있어서 두 번째 기회였습니다. 다윗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용서함을 받고 선왕으로 일생을 마쳤습니다.

마태복음 26:75에는 베드로가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였지만 닭 울 때에 자신의 허물과 잘못을 뉘우치고 눈물로 회개하는 것이 두 번째 기회가 되어 이를 놓치지 않고 오직 주님으로 충만하여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이었지만 기독요인을 잡아죽이는 데 앞장 서 진정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두 번째 기회를 통하여 회개하고 위대한 사도가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죄가 기회를 타서 내 안에 탐심을 이루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가룟 유다처럼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는 것처럼 하나님 교회에서 신앙 생활하면서 다른 사람의 허물을 잡아 고통하게 하는 기회는 찾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악인은 의인을 엿보아 살해할 기회를 찾는다 했는데(시37:32) 이와 같은 죄악에 물들지 않는 심령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은 그리스도인인 된 우리들이 그 자유로 방종과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신앙생활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기회를 잃으면 안됩니다.
봉사할 기회, 헌금할 기회, 선행을 할 수 있는 기회, 구제할 수 있는 기회, 선교할 수 있는 기회, 용서할 수 있는 기회, 회개할 기회를 잃지 않고 선용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 축복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어야 합니다.
기회는 흐르는 강입니다.
현명한 자는 기회를 찾기보다는 기회를 창조합니다.
비관론자는 기회를 문제로 만드는 사람이고 낙관론자는 그 문제를 기회(機會)로 삼는 자입니다.
위기(危機)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즉, 위험(危險)과 기회(機會)입니다.
기회주의자는 선한 사람을 악하게도 만들지만 기회를 선용하는 사람은 실수를 위대한 인간으로 만듭니다.

하나니은 오늘도 우리들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십니다.
누구나 한번은 실수를 하고 죄를 범하고 잘못을 저지르지만 하나님은 그것 때문에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번 지난 날의 허물과 잘못을 돌이켜 더 좋은 삶을 위하여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두 번째 주시는 기회입니다.
두 번째 기회를 선용하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축복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하나님은 지금도 원하십니다.

출처/박청호진목사 설교 중에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