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보좌 (히 4:14-16)
인간은 관계적 존재입니다. 즉, 만남에 의하여 모든 것이 결정되고 형성되는 것입니다. 만남의 중요성을 일깨운 학자는 마틴 부버입니다. 그가 1923년에 쓴 “나와 너”에서 부버는 인격적 만남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깨어진 세계에서 찢기고 또 자기도 찢으면서, 해체되고 또 자기도 해체 작업에 한 몫 거들면서, 분열되고 또 자기도 분열을 추진하면서 살아갑니다.
경이적인 과학의 힘에 의하여 기술 문명의 진전과 그에 따르는 대중 사회적 상황의 진행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의 가치와 존엄성을 잃어 가면서 인간 소외 현상의 심각한 위기에 신음하고 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부버에 의하면 그것은 인간의 근원어 “나-그것”의 지배 아래 신음하면서 “나-너”를 말할 수 있는 기쁨을 잃어버린 데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너”의 경우에 있어서 “영원한 너”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역설하면서 인간의 인간다운 삶의 회복은 “나와 너”의 만남에서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인간 생활의 만남은 더없이 중요한 것이지만 근원적인 만남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궁극적인 만남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만남의 공동체입니다. 거기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같은 뜻과 목적을 가진 성도들이 만납니다.
교회를 통하여 이같은 만남이 이루어질 때 성도들은 세상의 죄악과 싸워 이길 수 있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생활을 통해서 인간 생활의 진정한 안식과 평안을 발견하고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스위스 퀴리히 태생의 조직 신학자 에밀 부루너의 저서 중에 “만남의 진리”라는 책이 있습니다. 부루너는 이 책에서 만남으로서의 진리의 개념에는 인간을 책임적인 존재로 일깨우고 만드시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전제된다고 언급을 하였습니다. 부루너가 이 글에서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난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열어 보여 주심으로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지는 사람은 그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하나님께 맡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비로소 인간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이것을 신앙의 사건이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만남에 대하여 갈증을 느끼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치하고 싶은 만남의 대상을 만나기 어렵고, 정신적인 합일 대상을 만나기는 더욱 어려우며, 자기에게 잇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고 싶은 대상을 만나기란 더욱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과 마주하면 알 수 없는 안도감이 일어나고, 어떤 사람을 만나면 따뜻한 감정이 일어나며, 어떤 사람을 만나면 평안과 행복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래서 만나고 나면 그 사람이 더욱 보고 싶어지고 다시 만나면 말할 수 없는 평안함을 느끼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자리입니다.
길지 않는 인생 길에서 동일시할 수 있는, 편히 기댈 수 있는 이웃을 만나는 것보다 더 행복하고 아름다운 것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때문에 인생에 있어서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이 만남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이 무엇입니까? 만남입니다. 너와 나의 만남에서 아름다움과 감격과 기쁨과 그것을 나누는 것이 교제입니다. 거기서 두터운 우정과 뜨거운 사랑을 나눕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이별 없이 인생이 없고 헤어짐 없는 만남이 없습니다.
그래서 콜리지는 “만나서 알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것이 많은 사람의 슬픈 이야기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슬픈 이야기가 아닌 아름다운 만남, 행복한 만남, 소망 있고 생명 있는 만남이 있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수가성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 여인은 유대인이 상종해 주지 않는 사마리아 여인이었으며 남편 다섯을 둔 과거 때문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생활하는 가련한 여인이었으며, 삶과 인간관계에서 시만 갈등과 아픔을 느끼고 있었던 소망 없는 여인, 기쁨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 여인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얻게 되었고 삶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되었고 자신의 존재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의 강도 만나 죽게 된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과 만난 것은 생명의 만남이며 아름다움의 만남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의 바울과 루디아의 만남은 마게도니아 지역에 선교의 장을 열 수 잇는 선교 사역의 아름다운 만남이 되었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만남은 아름다운 우정과 사랑의 만남으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일생을 살아가면서 아름답지 못한 만남을 통한 어둠의 삶을 살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에덴에서의 하와와 뱀의 만남은 인류 역사를 어둠과 불행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가룟 유다와 대제사장들과의 만남은 예수를 은 30에 팔고 역사의 죄를 짓는 불행의 만남이었습니다.
빌라도와 유대 백성들과의 만남은 악한 죄인 바라바를 놓아주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의 만남은 멸망의 만남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만남의 기쁨과 감격을 경험하지는 못하고 어둠의 상황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같은 정치, 경제, 사회 상황이 어느 한 분야도 밝고 아름다움이 없는 절박한 현실 가운데서 인간은 만남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살아가게 됨으로 더욱 어둡고 불행한 삶을 수놓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합니까?
16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1. 은혜의 보좌는 어디입니까?
은혜란 구약에서는 ‘헤세드’(רꘑꕛ), 또는 ‘헨’(וꕚ)으로 표현하는데 이 두 단어는 70인역에서는 모두 ‘카리스’(χαρις)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이 단어가 갖고 있는 기본 어근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 둘째는 하나님의 축복과 은사들, 셋째는 하나님의 용서하심, 넷째는 보호와 안위 등의 뜻이 있습니다.
헬라어 ‘카리스’(χαρις)는 하나님의 은혜, 기쁨, 호의, 선물, 감사 등으로 번역되고 있는 데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카리스’(χαρις)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임하신 구속의 은총을 가리키며 이와 비슷한 뉘앙스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면 ‘카리스’(χαρις)는 예수님의 성육신과 죽음, 그리고 부활 생명을 통하여 인간을 향해 베풀어진 하나님의 자비에 적용되는 것입니다.
아무 자격도 없는 우리들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이 은혜로부터 용서의 축복, 하나님과의 화평, 구원, 그리고 하나님께 복종할 수 있는 힘, 교회에서의 섬김을 위한 은사가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보좌란 말은 ‘드로노’(θρονω)인데 이것은 왕의 보좌란 뜻으로서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보좌” 혹은 “그리스도의 보좌”로 사용되었습니다.
은혜의 보좌라는 말은 하나님이 현존해 계시는 장소로서 구약 시대의 하나님이 거하시는 상징적 장소인 성막 안의 속죄소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이 속죄소에 일년에 한번 나아갈 수 있었으며 속죄의 행위가 받아들여졌을 때 그 곳은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시은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타난 “은혜의 보좌”는 구약 시대의 시은소 개념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모세가 전해 준 율법적인 속죄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왕같은 제사장이 된 성도들이 언제라도 나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보좌로서 여기에 나아가는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신 다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은혜의 보좌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믿고 나아 오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생명 있는 축복의 자리입니다.
. 왜 우리가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야 합니까?
16절 말씀에서 그 답을 들을 수 있습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불확실하고 여러 가지 형편과 처지가 항상 희비로 경험됩니다. 이와 같은 삶의 자리에서 우리는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기쁠 때면 기쁜 대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들의 삶의 내용은 다양하게 경험되어집니다.
성공하고 싶지만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기쁨으로 살고 싶지만 슬픔으로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희망으로 살고 싶지만 절망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살고 싶지만 불평하며 살 때가 있습니다.
건강하게 살고 싶지만 병약할 때가 있습니다.
믿음 안에 살고 싶지만 세속적으로 살 때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아름답고 복된 삶을 살 수 있나요?
이럴 때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셔야만 우리들의 모든 삶이 평안하고 복되고 아름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들의 모든 삶의 필요한 것을 하나님이 도우시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아니하고 살아갈 수 잇다는 마음이 벌써 저주받은 마음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치 않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앉고 서는 것을 아십니다. 마음의 생각도 아십니다. 눕고 앉는 것도 아십니다. 어려운 문제도 아시고 괴로운 사정도 아시고 억울한 일도 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아시고 필요에 따라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은혜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3. 어떻게 나아가야 합니까?
16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입니다.
여기의 “담대히”라는 말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씻으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구속의 은총을 이루셨으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두려운 마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과 감사한 마음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구약 시대의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들만 들어갔습니다. 일반 백성들이 지성소에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고 어린 양이 되셔서 속죄의 제물이 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누구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심판의 보좌 앞에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보좌 앞에는 은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도들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슬픈 얼굴로 나아 왔으면 기쁜 얼굴의 은혜를 주십니다. 두려움으로 나아 왔으면 평안의 마음을 주십니다. 죄를 가지고 나아 왔으면 사죄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소원을 갖고 나아 왔으면 소원 성취의 은혜를 주십니다.
요한복음 6:37의 말씀입니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쫓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55:1의 말씀입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막달라 마리아 같은 과거가 어둡고 더러운 여자도 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옴으로 축복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삭개오 같은 죄인도 담대히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옴으로 구원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일평생 강도짓 하다가 십자가에서 주님과 같이 못 박힌 강도 같은 사람도 담대히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옴으로 낙원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 앞에 나아오신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왔으니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
사람은 일평생 동안 네 번의 만남을 갖는다고 합니다.
첫 번째 만남은 부모와의 만남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의 부모와 어떤 만남이 되고 있습니까?
두 번째 만남은 스승과의 만남입니다. 일생동안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을 가르치고 여러분 자신이 진심으로 따를 수 있는 스승이 계십니까?
세 번째 만남은 친구, 혹은 동반자와의 만남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한 대로 “인생에서 단 한 사람의 진실한 친구를 갖지 못한 삶은 죽은 삶과 같다”고 했는데 여러분은 그런 친구와의 만남이 있습니까?
네 번째 만남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과 어떤 만남입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기뻐하시는 만남이 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하나님을 만나기 두려운 삶을 살고 계십니까?
어떤 경우이든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이 용납하시고 넘치는 은혜도 넉넉하게 하십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중풍병자는 예수님을 만나 자리를 들고 걷고 뛰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귀먹고 어눌한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 듣게 되고 온전하게 말을 할 수 있는 복을 받았습니다.
12년 혈루증세로 공생하던 가련한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 건강을 얻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소경 거지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만나 보게 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 담대함으로 나아왔던 여러분, 앞으로도 담대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와 날마다 감사함을 노래하는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이 곳으로 나아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처소가 되도록 성결하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출처/박광현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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