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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 - 사랑 (레 19:17-18,요일 3:13-20)

by 【고동엽】 2022.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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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 - 사랑   (레 19:17-18,요일 3:13-20)

지난 주일에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죄악과 욕망을 털어 버리고 성령을 좇아 행하여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부터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차례대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 첫 열매인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주제는 우리가 자주 들은 것이요, 또 성경 전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만큼 이 주제는 무궁 무진한 깊이를 가진 것이요, 우리가 끝없이 배우고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세상에서 듣고 보는 사랑이라는 말은 낭만적이고 달콤한 감정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사랑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로서의 사랑은 우리의 감정에 자리 잡기 보다는 거듭난 의지에 자리 잡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하여 배우는 것이며, 이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의지의 작용이요 의무이다


먼저 우리가 생각할 것은, 사랑은 우리의 감정에서 저절로 우러나와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지의 결단을 필요로 하며,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레위기에 주어진 명령인데 예수님은 두 번째로 큰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저절로 생겨나서 하는 것이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어떤 사람을 억지로 사랑해야 된다고 명령을 받을 때 오히려 그 사람을 싫어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또 우리는 사랑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첫 눈에 반하여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랑이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랑하고 싶은 감정이 일어나지 않을 때에도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명령을 주셨고, 따라서 우리는 사랑해야 할 의무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의무란 내가 싫든 좋든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엘케고르가 쓴 책으로 "사랑의 역사"가 있습니다. 이 책의 첫 석장의 제목이, '너는 사랑하라', '너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 '너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입니다.


첫 제목인 '너는 사랑하라'에서 사랑에는 의무가 수반됨을 강조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하나의 의무일 때에만,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게 되며, 축복된 독립 속에서 영원히 자유로울 수 있으며, 영원히 행복할 수 있으며, 결코 절망치 않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 제목인 '네 이웃을 사랑하라'에서는 '네 이웃에' 강조점을 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구란 우리가 선택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웃은 내가 선택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입니다. 이웃이란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내 곁에 와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될 사람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인 것입니다. 그 이웃을 사랑해야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셋째 제목인 '너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에서는 '너는'에 강조점을 둔 것입니다. 이것은 온 인류에게 주어진 일반적 명령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는 그대로의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입니다. 이 명령은 내가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거나 간에 나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떠넘길 수 있는 명령이 아닙니다. 바로 나에게 떨어진 명령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사랑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의무적으로 복종해야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우리의 감정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의 작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전혀 감정이 없는 사랑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감정이 먼저 우러나서 사랑하게 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사랑해야겠다는 결심에 따른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 대한 애정의 감정은 그를 봉사하겠다는 결심을 하기 '전에' 오는 것이 아니라 그를 봉사하겠다는 결심을 한 '후에' 오는 것입니다. 감정은 멋대로 왔다가 멋대로 가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지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굳건하게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은 바로 성령께서 우리의 의지를 굳건하게 해 주실 때 수행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항상 이 명령이 바로 우리의 의무요 의지로 수행해야 할 것임을 늘 명심하면서 사랑하기를 힘써 나가야 하겠습니다.

사랑은 지속적인 의무이다


이렇게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명령이기 때문에 우리가 항상 복종해야 할 의무를 갖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어떤 일정 기간에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항상 주어진 명령입니다. 오늘만 사랑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사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웃을 하루만 사랑한다든지 일년만 사랑해야 한다면 대체로 누구나 억지로 참고 해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은 그런 조건부 명령이 아니라 이웃이 네 옆에 있는 한 언제까지나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면 모두가 사랑스러운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내가 지독히도 싫어하는 성격을 가진 사람, 달라는 것이 없이 미운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것이 교회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또 내가 한번 다니기로 결정한 교회라면 대개 평생을 다니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을 평생 사랑해야 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이것처럼 감당하기 어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그 모든 고통을 참아내면서 서로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받은 사랑의 명령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쉽게 교회를 떠나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다른 교회로 간다한들 거기 오래 머물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만 모인 교회가 되기를 바랄 수 있습니까? 설혹 그런 교회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진정한 교회라고 할 수가 없고 다만 인간적인 집단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떤 때는 불편한 인간관계로 해서 교회에 나오는 것이 고통스러울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때에도 참고 사랑하기를 힘쓰면 마침내 그 어려움은 극복되고 새로운 사랑의 관계가 형성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 사랑을 배우기 위해서는 마음에 별로 드는 사람이 없더라도 한 교회에 오래 꾸준히 다닐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은 이웃의 삶과 필요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뜻합니다. 지나가는 길에 만난 거지에게 동냥하듯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같이 사는 부부가 서로 사랑하듯 하는 지속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강도 만난 사람을 사마리아인은 그를 돌아보고 치료하고 나귀에 싣고 주막에 머물러 치료받게 하였고 그 치료비를 자기가 감당할 뿐 아니라 모자라는 부분은 돌아오면서 지불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강도 당한 사람이 완전히 치료될 때까지 지속적인 관심을 가질 때 이것이 내 이웃에 대한 진정한 사랑임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심은, 하나님 자신이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죄인들인 우리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인간들을 끝까지 사랑하셔서 마침내 그의 자녀로 기업을 상속받게까지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명령은 하나님 자신이 먼저 시행하여 보이시므로 우리에게 그 사랑이 어떠하며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를 알게 하신 후에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올바로 그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사랑하고 계심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우리 이웃을 사랑하되 지속적으로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구약성경 호세아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예언자에게 명령하시기를 "너는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고 하시자 그는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그 여자를 사서 데려다 아내로 사랑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의 아내 고멜은 처음부터 음란한 여자였는데 그를 데려다 아내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 여자가 아이를 낳은 후에 다시 다른 남자에게로 갔던 것을 데려온 것 같습니다. 호세아는 이런 과정에 사랑이 얼마나 큰 고통인가를 배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언자의 이런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자손들을 다시 사랑하며 그들을 그의 백성으로 받아드리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가를 알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때 진정한 사랑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의 명령은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그 명령은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희생을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바로 이 사랑은 성령의 열매라는 사실입니다. 성령의 열매로서의 사랑은 우리 자신의 노력에 의하여 완성될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므로 우리로 그 사랑을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어린아이가 어떻게 사랑이 무엇인가를 배웁니까? 어린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통해서 사랑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됩니다. 어린아이는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경험함으로써 사랑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만일 여러분이 마땅히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껴지면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는 죄악에 빠진 모든 인간과 세계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큰 사랑을 우리가 깨달아 알게 될 때 우리가 거기에서 사랑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 주님을 우리가 사랑하게 되면 우리는 바로 이웃을 보게 되며 그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우는 사랑입니다. 그를 떠나서 우리는 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바라보게 하실 때 우리는 뜨거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사랑을 깨닫게 되고 마침내 이웃을 향하여 마음을 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직도 나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된 이들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면, 성령의 도우심을 요청하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을 도와 사랑할 수 없는 죄인들을 위해 자신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하실 것입니다. 이제 이렇게 배운 사랑으로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 이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가 되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또 한가지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싫으나 좋으나 이 교회 안에 있으므로 해서 사랑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흑과 백"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흑인과 백인이 한 수갑에 채인 채 이송되는 중에 탈출하게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같이 걷고 같이 뛰고 같이 잘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로가 죽이고 싶도록 싫지만 자기가 살기 위해서는 상대방도 함께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갈등과 어려움을 겪으면서 도망을 갑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수갑을 끊어버릴 수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각각 자유롭게 도망갈 수가 있었습니다. 마침 지나가는 기차가 있어 흑인이 먼저 집어탔습니다. 그러나 백인은 좇아가다가 미쳐 타지를 못하자 먼저 탔던 흑인이 뛰어 내립니다. 둘은 함께 부둥켜안고 노래를 부르다가 추격해 온 경찰에 잡힌다는 이야기입니다. 서로 미워하던 두 사람이 함께 수갑에 채워져 도망가는 동안에 정이 들게 된 것입니다. 흑백을 초월한 인간애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교회 공동체도 바로 서로 맞지 않는 다양한 사람들이 그리스도라는 수갑에 채워져서 함께 모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줄에 매여 우리는 함께 모인 것입니다. 싫든 좋든 함께 모일 수밖에 없고 함께 예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함께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마침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 이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그리스도 몸인 교회 안에 묶어 놓으시고 사랑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미워하고 싸우기도 하고 등을 돌리기도 하지만 교회를 떠나지 않는 한 그는 마침내 미워하던 자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함께 서로 노력해야합니다. 서로 사랑하기를 힘쓸 때 사랑의 감정이 우리 속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사랑은 말과 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마침내 이 교회를 사랑의 공동체로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의무입니다. 억지가 필요합니다. 노력하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싫은 감정을 억제하고 참는 인내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을 따르는 일은 나의 감정이나 의지를 넘어서는 일입니다. 사랑하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성령을 따라야겠다는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참고 노력하노라면 하나님께서 사랑을 우리 속에서 솟아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자라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랑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내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는데 어떻게 사랑하느냐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 속에서 우러나는 사랑은 결국은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자기에게 유익하고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 때 사랑할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인간의 사랑이란 자기 중심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날 때 바로 자기 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게 되고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이웃을 향하여 우리의 마음을 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성령의 열매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제 말씀 따라 이루는 첫 번째 삶의 열매는 바로 사랑입니다. 새 천년에는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기도하고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사랑을 배워 서로 사랑함으로 100주년을 향한 안동교회를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로 만들며, 그 사랑을 가지고 이웃들에게 찾아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 충만함을 통하여 사랑의 열매를 맺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유경재목사님 설교자료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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