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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② (에베소서 6;18-20)

by 【고동엽】 2022.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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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②    (에베소서 6;18-20)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두 가지 기능을 위해서 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지키려면 기도를 해야 됩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은 자꾸 침공을 당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자꾸 손상을 입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기도가 항상 필요한 것입니다.
   두번째는 사단을 공격하기 위해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단을 공격할 때 기도의 화살을 가지고 공격을 해야 됩니다. 사단은 영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습니다. 안보이는 영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영으로 공격을 해야 됩니다. 영으로 공격하는 무기가 바로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내가 가진 믿음을 지키는 파수적인 기능과 사단의 힘을 못쓰게 하는 공격으로써의 이 두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기도를 진지하게 할 때 기도하는 사람의 믿음이 자라갑니다. 그리고 우리를 해치려는 사단의 모든 공격들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환경에서 물러가는 것입니다.

   효율적인 기도방식

   본문에 보면 "모든 기도와 간구로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고 여러 성도를 위해서 구하고"(엡 6:18)라고 했습니다.
   기도의 방식이 모든 기도입니다. 기도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시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때가 없습니다. 언제든지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기도를 힘쓴다는 말은 기도가 성숙하고 발전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힘쓰는 일은 발전합니다. 모든 성도를 위해서 구하는 것은 기도의 대상입니다. 18절에서 가르치는 기도의 교훈은 기도의 모든 방식을 모두 다 동원하고 무시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상에 제한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기도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모든 일은 다 기도의 대상이 됩니다. 심지어 원수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복을 빌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기도, 모든 방법, 모든 대상, 모든 일이 전부 기도 안에 허용된 범위입니다.
   바울이 가르치는 기도에는 신비로운 뜻이 많습니다. 루마니아의 산 순교자 리차드 범브런트 목사님이 18년 동안 공산당의 치하에서 옥고를 치르면서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고문이 너무 혹독해서 몇 번이나 사경을 넘은 목사님입니다. 그런데 범브런트 목사님이 그런 죽음의 수용소에서 18년을 견디면서 이겨냈던 유일한 무기가 기도였는데 그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감옥에서 창틀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창틀 너머에 있는 아름다운 별들을 보았다." 그 별을 보게 하는 통로가 바로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믿음을 지켜주는 역할 뿐 아니라 마귀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공격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실제적으로 적용하면 기도가 부족하면 우리 믿음이 허약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내 주변에 마귀의 손길이 강하게 다가온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거꾸로 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강해져야 하고 마귀는 약해져야 하는데 내 기도가 약해지면 믿음은 약해지고 마귀는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허약해지는 여기에 온갖 시험이 틈을 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기도는 '삶의 양념'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기도는 우리가 당한 문제를 확산시키는 것을 막아줍니다. 종기는 덧나지 않도록 치료를 해야 됩니다. 우리의 삶에는 상처가 납니다. 그 상처가 아물어야 되지 확산이 되면 안됩니다. 그 문제를 확산시키지 않고 아물게 하는 약의 역할을 기도가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흐트러진 우리 삶의 질서가 회복이 되고 안정이 오고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나아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신앙생활의 양념의 역할을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기도

   우리가 기도에 대한 메시지를 듣는 것은 기도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하나의 길잡이입니다. 이 설교를 들었다고 해서 기도가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는 사도 바울이 가르친 것처럼 기도에 항상 힘써야 합니다. 기도하는 은사는 없습니다. 힘쓰는 자에게 기도의 은사를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작정하고 힘쓸 때에 기도의 은사를 누립니다. 내가 기도하는 은사를 받고 기도하자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기도를 힘쓰라는 말이 수없이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는 힘써야 된다는 전제를 가지고 기도에 관한 말씀을 들어야 됩니다.
   8차선 고속도로와 비포장 외길 중 어느 길이 좋습니까? 그것은 답으로 예, 아니오를 할 수가 없습니다. 8차선 고속도로와 비포장 외길은 누가 보아도 8차선 고속도로가 좋은 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길을 가는 사람은 가고자 하는 목적지와 그 길이 연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 길을 가고 있을 때 내가 가는 목적지가 어디냐에 따라서 그 길은 좋은 길도 되고 나쁜 길도 됩니다. 만약 8차선 고속도로를 가고 있지만 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와 다르다면 그 길은 나쁜 길이 됩니다. 그 길은 빨리 돌이켜야 됩니다. 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와 부합하는 길이라면 비포장 외길이라도 좋은 길입니다. 가야 되는 길입니다. 목적지에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이렇게 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와 가고 있는 길이 서로 부합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역할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 바울이 선교하는 과정을 볼 때 어디로 가야될 지 모를 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심지어 죽음의 경지에서 사람들이 그를 밧줄로 광주리에 담아 성에 달아 내렸던 위급한 상황에서 건져주셨던 때도 있었고 어디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모를 때에도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그 길을 제시해 주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이와는 상대적으로 사도 바울과 함께 동역하는 사람들과 사도 바울이 만나서 일을 하는 상대 교회가 기도하는 것과 맞아가는 것은 참 신비로운 것입니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과 목적이 맞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도에 맞고 그것을 부지런히 인도받는 역할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무작정 8차선 고속도로를 간다해서 모든 사람이 좋은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목적지가 설정된 다음에 길을 분석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라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막연한 일입니다. 보이지 않는 일입니다. 기도가 어떤 조건이 될 수도 없고 기도가 어떤 답으로 형성될 수 없습니다.

   금식은 조건이 아니라 은혜이다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내려오시니까 제자들이 나아와서 아주 고민스럽게 말을 합니다. "우리가 귀신들린 자를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왜 안됩니까?" 그 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기도 외에는'이란 말씀은 어떤 원문에 보면 '기도와 금식 외에는'이란 금식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금식이라는 말을 넣었느냐? 금식이라는 것은 내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간증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음식을 먹고 싶어하는 욕구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기도했다는 것인데 '내가 금식하더니 되더라'고 하는 개념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제가 몇 번 기도원의 집회에 가보았는데 강사가 금식을 강요하는 메시지 전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강사가 금식기도를 강조하면서 '어느 교회 어느 성도는 이런 문제를 두고 금식기도를 해서 해결을 받았다' 등등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그 고통은 금식으로 해결될 수 있으니까 이번 기회에 금식을 하라' 이렇게 금식권유를 많이 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비성경적이라고 볼 필요는 없지만 솔직하게 따져 봐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기도를 한 후에 금식기도를 했든, 안수기도를 받았든, 작정기도를 하셨든, 무슨 기도를 했든지 '기도하니까 이렇게 됐다'는 것을 결과론적으로 공식화하면 기도에 대해서 오해를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금식기도를 하면 된다는 어떤 약처럼 처방을 가르치는 게 아닙니다. 기도는 내게 이루어진 일은 모두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지 '금식하니까 되더라'는 방식은 금식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아 버리는 것입니다. 이 금식은 인간의 행위이고 인간의 조건입니다. 그래서 금식을 자꾸 조건으로 강조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그 문제도 금식을 하면 해결된다' 이건 약방의 처방과 똑같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금식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나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드러내는 수단으로써 금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할 때 하나님 앞에 한다는 의식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누구 들으라고 하는 기도가 아니고 누구 보라고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어떤 기도의 경력을 쌓기 위해서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기도할 때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내가 지금 이 기도를 드린다' 라는 신전의식을 가지고 기도를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기도를 하면서 탈선을 합니다.

   기도가 일을 한다

   또한 예수님이 가르치시기를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인격적인 기도를 하라는 말입니다. 주문은 비 인격에게 하는 것입니다. 주문 외우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그것은 말이 안 되어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인격 앞에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문은 어떤 망령 앞에 하는 것입니다. 주술신앙이라는 것은 인격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주문이 아닙니다. 기도는 중언부언하면 안됩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기도하는 의식을 가지고 말이 되도록 기도해야 됩니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자기 노력으로 발전하는 단계가 있고, 자기 노력이 아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를 끌어주는 단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다가 보면 그 두 가지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끌어 올려 주신다는 측면은 하나님 편에서는 섭리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만난다, 결혼을 한다, 상관을 만난다, 교수를 만난다, 지도자를 만난다 하는 이 모든 인간의 만남은 눈에 보이는 만남이지만 배후에 하나님의 섭리가 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기도할 이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관계가 없으면 기도 밖의 일입니다. 그러나 그 섭리가 내게 복이 되기 위해서는 기도가 플러스되어야 합니다. 모든 만남이 행복하고 모든 만남이 다 나를 성공으로 보장해 주는 섭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사람에게, 모든 사건에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나는 일은 이 세상에 한 가지도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섭리를 드러나게 하고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 안에 선으로 역사하게 하는 역할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혹 일을 해 보면 이유도 없이 나를 미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마음에 안 드는 정도인데 상대방은 내게 대해서 자꾸 강하게 공격을 해 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살아갈 때 그런 경우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모르는 사람이 나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나하고 무슨 일을 같이 하다가 미워하는 것인데 그런 경우에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 내가 저 사람과 이런 일을 하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일이라면 하나님께서 간섭하셔서 복된 만남이 되고 선을 이루는 일이 되도록 역사해 주옵소서"라고 기도를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 나를 지독하게 공격하는 사람이 내 기도 안에서 축복의 사람으로 다가오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경우에 그 기도를 안 함으로써 비극으로 끝나는 인간관계가 많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음으로써 주안에서 선을 이룰 수 있는 일도 못 이루는 책임이 우리 안에 많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제 경험에도 많이 일어납니다. 밖에 나가 교단 일을 하다보면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일들이 이 세상에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 앞에 기도 제목을 하나 더 주신다 생각하고 기도를 해 보면 5개월이 지나고 1년이 지나다 보면 다 풀려지는 일들이 더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만큼 기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손길을 움직이게 하는 능력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알면서도 늘 부족함을 느끼는 것이 기도의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공중기도의 요령

   우리가 공중기도를 합니다. 주일예배, 구역예배, 각종 모임에서 하는 기도, 나 혼자서 하는 기도가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기도하는 공중기도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 기도를 할 때는 몇 가지 참고사항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개인 회개기도

   우선 공 기도를 하면서 개인 회개를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주여, 기도할 자격도 없는 이 죄인이 오늘 기도를 합니다.' 그렇게 따지면 누가 기도를 하겠습니까? 개인 회개기도는 공중기도를 할 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과거형 표현

   그리고 기도는 과거형으로 마치면 맞지 않습니다. '기도하였사옵나이다'라고 하는데 맞지 않습니다. 영어에 'thank(감사하다)'라는 말은 언제나 현재형으로 씁니다. '기도하였사옵나이다' 하면 기도가 과거형이 되어 버립니다. 지금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서 '고맙습니다'라고 해야 되지 '고마웠습니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그 때는 고마웠는데 지금은 아니요'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과거형으로 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현재형으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라고 하는 것이 어울립니다.

   모임성격 파악

   기도는 그 모임의 성격을 잘 파악하고 기도를 해야 됩니다. 친목회 라면 친목회라는 성격, 식사기도면 식사기도의 성격, 예배기도면 예배기도의 성격에 맞게 기도해야 하는데 예배기도에도 교사헌신예배 등 예배의 성격을 염두해 두고 기도를 해야 하기 때문에 사전에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항목을 적어서 하는 것이 좋습니다. 저도 비중 있는 기도를 몇 번 해보았는데 반드시 항목을 적어 갑니다. 3분 안에 그 항목을 가지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항목을 안 적어 가면 다른 항목이 나와서 기도의 조절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배기도는 항목을 적어서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리고 그 항목 외의 것은 기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항목 안에서 3분내로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기도의 길이

   제가 신학생들에게 기도시간에 대한 과제를 해 보았습니다. 시무하는 교회의 주일 낮 기도를 녹음해서 시간이 얼마나 걸리고 내용이 무엇인지 조사해 오라고 과제로 내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8분 이상 기도하는 교회가 약 40%, 조사해온 것 중에 제일 길게 기도한 기도가 12분, 그리고 2분 짜리 기도도 있었습니다. 저는 짧게 했다는 것을 잘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래도 예배 기도를 제대로 하려면 3분은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번은 선교사 위로 만찬회가 있었는데 거기서 어떤 원로 목사님이 식사 감사기도를 15분 했습니다. 제가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난 후 모든 분들의 안색을 보니 식사할 입맛을 다 잃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필라델피아의 어느 교회에 갔었는데 봉헌기도가 18분 이상 걸렸습니다. 우리 교단 총회장 어른 가운데 한 분이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축도를 맡았는데 5분이나 걸렸습니다. 여러분, 축도 5분이라는 시간은 엄청나게 긴 기도입니다. 아무리 좋은 기도라도 시간조정에 실패할 때 그 기도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책임있는 기도는 항목을 적어서 하셔야 합니다.

   설교자 호칭

   그 다음에 설교자에 대한 호칭이 통일되는 것이 좋습니다. 기도하실 때 어느 모임에 가든지 그 예배에 설교하는 분을 위해 기도를 하는데 너무 무질서합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오늘 말씀을 증거하는 '주의 종에게' 그렇게 호칭을 하든지 우리 교회 같은 경우에는 오늘 말씀 전하는 '목사님에게', '오늘의 설교자에게' 그렇게 호칭을 하면 무난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가끔 '당회장에게' '당회장 ···목사님에게' 라고 합니다. 당회장은 행정적 직명입니다. 무슨 증명서를 발급할 때 '당회장 ···'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목회적 명칭은 담임목사입니다. 담임목사는 대학부를 담당하는 목사님도 담임목사입니다. 전도담당 목사님도 담임목사입니다. 담임목사이면서도 당회장 아닌 목사는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교회 전체를 목회하는 측면에서 목사이고 행정적으로 당회장입니다. 당회를 인도하는 자리에서는 '당회장님에게 지혜를 주셔서 이 회의를 잘 인도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를 하면 회의하는 기도이니까 맞습니다. 그러나 예배는 회의가 아닙니다. 그래서 당회장이라는 호칭보다는 설교자에게, 설교하시는 목사님께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부를 수는 있지만 본 교회 목사님이나 장로님들이 기도순서를 맡았을 때 꼭 이름을 부를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가정예배를 드릴 때마다 아들이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설교하시는 이용호 목사님께' 이렇게 꼭 이름은 부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교회를 방문한 타교회의 목사님이라면 이름을 불러 드리는 것이 오히려 좋을 것입니다. 이름을 부르는 것이 잘못됐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안 불러도 무방하다는 것입니다.

   정확한 내용

   문제는 기도내용입니다. 지금 설교할 목사를 위해서 기도할 때는 설교사역에 대한 기도를 해야 됩니다. 설교를 전하는 일을 위해 기도를 해야 되는데 가정기도, 목사의 건강기도, 목사에게 관계된 여러 기도를 전부 곁들여서 하는 기도는 맞지 않습니다. 설교하는 이 시간에는 목사님이 가정 생각하고 설교하면 안되는 것처럼 설교하는 그 일에 해당되는 기도만 집중적으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목사님의 신상을 다 거론하면 맞지 않습니다. 우리가 금요기도회나 자유기도를 할 때는 전반적으로 다 기도할 수 있지만 예배의 공중기도는 설교자나 어떤 순서를 맡은 분을 위해서 기도할 때는 그 순서에 해당되는 기도를 하시는 것이 더 은혜롭다는 것입니다.
   가끔 예배인도를 하는 분이 개회기도를 하면서 대표기도를 하듯이 다 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심지어 회개기도까지 곁들여서 합니다. 그것은 예배인도를 할 때, 또는 회의를 할 때 개회기도를 하는 기도는 간단하게 해야 합니다. 대표기도를 하듯이 하면 어울리지 않습니다.

   장례식 기도

   뿐만 아니라 문상이나 장례식 때도 죽은 자를 위한 기도는 일체 표현하면 안됩니다. 문상이나 문병을 가서는 소망과 위로가 담긴 기도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인간을 생사화복으로 주장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이런 시작은 좋은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하나님에 대한 송영입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그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신 그 하나님의 영광과 송영을 합친 내용입니다. 이런 것은 장례식이나 문상을 가서 사용하시면 좋습니다.
   그러나 이 좋은 송영도 지금 긴급하게 사고를 당해서 정신이 없는데 가서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라는 죽고 사는 이야기가 곁들여지면 다급한 상황에서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교사들이 어린이 앞에 기도를 할 때 연구를 많이 해야 되는데 어린이들이 알아듣는 용어로 해야 됩니다.

   피해자의식 기도

   뿐만 아니라 이것은 기도론의 기도교육에 늘 나오는 것인데 기도를 할 때는 피해자 의식으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피해자 의식으로 기도를 하면 감정이 배어 나옵니다. '나는 피해자이고 너는 가해자다' 이것을 염두해 두고 기도를 하게 되면 그 기도에 감정이 묻어 나옵니다. 듣는 청중이 더 잘 압니다. 기도할 때는 피해자 의식으로 기도를 하면 안됩니다. 죄인의식으로 기도를 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예수의 이름을 빌려서 하는 의인의 기도입니다. 내가 피해자이지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소망의 사람으로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수 있는 그 기회를 얻은 것이 소망입니다. 그래서 피해자 의식을 가지고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설명식 기도

   그 다음은 설명식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주여, 이 세상은 앞뒤좌우를 보아도 다 썩었습니다. 이런 세상에 어떻게 믿음을 지키겠습니까?' 이런 유의 설명조 기도는 기도로써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웅변식 기도를 하지 말고 대화식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이가 아버지 앞에 용돈을 얻으러 와서 웅변식으로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평소에 자비로운 아버지여, 이 아들에게 용돈 주시기를 모든 친구들의 이름으로 요구합니다!" 그런 아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기도는 대화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식하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간구

   중보기도를 할 때 남을 위해서 축복해 주고 간구하는 것을 많이 하는데 간구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간구는 주로 회개기도를 한 후에 합니다.

   항목을 정하라

   그리고 항목을 정해야 합니다. 예배의 기도에 해당되는 항목을 정해서 기도를 하셔야 합니다. 국가를 위한 기도라든지 어떤 특정 개인을 위한 기도는 예배기도 때 할 시간이 없습니다. 간구는 무슨 경품 타 가듯이 하나님 앞에 와서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주님 앞에 충성 되이 살기 위해서 이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주십시오'라는 서원적 간구를 하라는 것입니다. 서원하고 연관이 있고 회개하고 연관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제가 이렇게 이렇게 해서 부족합니다. 이것을 만회가기 위해서 이런 축복이 필요합니다. 이런 은혜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해 주십시오' 라는 주님 앞에 이제 일어나 보겠다는 것을 담아서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기도학자들이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뜻이 있습니다.

   맺는 말

   산 순교자 안이숙 여사가 서대문교도소에서 고문을 당했습니다. 남이 고문을 당하는 그 비명소리를 들으면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밀려오는데 하도 고문소리가 비참하니까 안이숙 여사가 귀를 막다가 결국은 전력을 당하여 하나님 앞에 부르짖은 기도가 '하나님, 저 장면을 사진 좀 찍어놓으세요' 라고 기도했답니다. 하나님이 저 고통을 기억해 주시고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내용일 것입니다.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고 그 기도가 생각나더랍니다. 그렇게 몇 번이고 울부짖었답니다. 그 대목을 읽어보면 어떤 장문의 기도보다 더 감동적입니다.
   기도의 생명은 간절성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이 대목을 놓치면 안됩니다. 우리 기도가 10분을 했느냐, 20분을 했느냐, 밤을 새워 했느냐, 한 주간 금식이냐, 40일 작정기도냐 하는 기도의 분량도 중요하지만 기도의 생명은 간절함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는 마음을 모아서 해야 됩니다. 기도는 간절성이 얼마나 포함되어 있느냐에 따라 기도의 평가가 하나님 편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기도는 신앙생활의 양념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맛있게 합시다. 날마다 맛나는 별미를 잡숫는 신앙생활이 되기 바랍니다. 곧 기도가 살아있는 신앙생활입니다.

출처/이용호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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