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과축복 (창22:9-13)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창세기 22 : 9-13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습니다. 변하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히브리서 6 : 17,18에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칠십 오세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축복을 약속으로 받습니다. 창세기 12 : 1 이하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했는데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신복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다시 약속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창세기 15 : 1이하에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백 세가 되어도 아이가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자식이 있으리라고 더 이상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계속해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확인하시고 그 약속한 바를 이루셨습니다. 창세기 17 : 15 이하를 보면,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로 그 이름을 사라라 하게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는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식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데 사라는 웃었습니다. 왜 웃은 것입니까? 약속을 믿지 못한 것입니까? 자신을 통해서 자식을 주시리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자기가 말씀하시고 약속한 것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결국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삭을 백 세에 얻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제물로 다시 잡아 드리라는 것입니다. 본문 2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게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다시 번제로 드려야 할 자식이었다면 차라리 주시지 말 것이지 왜 주시고 다시 바치라는 것입니까? 어떻게 보면 하나님은 잔인하신 분 같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처사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아들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제물은 희생을 말합니다. 정부는 내년에 적어도 세 번의 선거를 치루어야 한다고 합니다. 국민들은 정치에 별 관심이 없으나 선거에는 관심이 많습니다. 일꾼을 뽑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일꾼을 많이 뽑는 데도 제물 되는 일꾼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에는 제물 될 자가 필요합니다. 자기 스스로 제물 될 자가 한 사람만 있어도 이 사회는 새롭게 변화될 것입니다. 과거에는 나라를 위하여 제물 된 자들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을 열거할 수 있지만 대표적인 인물로 어린 소녀 유관순을 들 수 있습니다. 그 한사람의 희생에 의해서 독립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식을 위해서 제물 되는 부모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희생의 제물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제물 되는 성도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제물되면 반드시 축복을 받습니다. 자신이 복을 받고, 가정이 복을 받으며, 이 사회, 이 민족이 복을 받습니다.오늘은 세 가지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짐승과 제물
사람은 갈등이 많습니다.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적게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할 것 없이 갈등은 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공부를 많이 한 대로, 공부를 적게 한 사람은 적게 한 대로 갈등을 합니다. 특별히 연말을 앞두고 정치, 경제, 사회, 가정 등 모든 분야에 갈등이 많습니다.
이런 인간의 갈등은 두가지 입니다. 먼저 살기 위한 갈등이 있습니다. 소련과 북한 그리고 공산권의 갈등이 바로 살기 위한 갈등입니다. 또한 잘살기 위한 갈등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갈등이 곧 이 갈등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잘살기 위한 갈등이 꺾어지면 살기 위한 갈등으로 바뀌어 집니다. 누구에게나 이런 갈등은 다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 믿는 사람들은 갈등이 더 많습니다. 예수 믿으면 모든 것이 잘되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 갈등을 합니다. '기도를 그만 할까?''교회를 그만 다닐까?''다른 교회에 가볼까?' 믿으면서도 계속 갈등을 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늘 갈등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 뿐 아닙니다. 하나님에게도 갈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갈등은 인간을 살리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축복을 받고 더 잘살며 더 행복하기를 원하는 갈등이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를 드릴 때 짐승을 잡아 드리도록 했는데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갈등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살리시고자 하는 갈등이 있었기 때문에 인간 대신에 짐승을 잡아 제물로 드리도록 한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로마서 6 : 23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아담이 범죄함으로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죽음은 곧 죄의 결과입니다. 죄에 대해서 말할 것 같으면 인간은 백 번 죽어 마땅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행위대로 책망하시지 않고 짐승을 대신 희생시킴으로 인간의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대신 짐승이 제물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갈등이라는 것과 그것은 곧 우리에게 큰 축복임을 알 수 있습니다. 레위기 1 : 2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고 했소, 드리되 "흠 없는"것으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여호와께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고 4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도 은혜 받기 전에는 하나님에 대한 갈등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은혜 받고 난 후에는 갈등이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의 갈등을 먼저 해결해 드리고 나니까 저의 갈등이 해결되었던 것입니다. 내가 살고자 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살리시고자 하는 것이 더 강합니다. 내가 잘살고 축복을 많이 받고 싶어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은 나를 축복하시기를 더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갈등을 먼저 해결시켜 드리면 우리의 갈등도 해결되는 것입니다.
2. 헌물과 제물
헌물은 짐승이 아닙니다. 이것은 곡식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곡식은 생명입니다. 이 곡식을 하나님께 소제로 드렸는데 이것은 헌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소제로 드려진 헌물이 있는가 하면 그냥 드려진 헌물이 있습니다. 레위기 2 : 1,2에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로 가져 올 것이요 제사장들은 그 고운 기름 가루 한 줌과 그 모든 유향을 취하여 기념물로 단 위에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보면 소제의 제물로 화덕에 구운 것, 번철에 부친 것, 솥에 삶은 것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번제는 속죄의 제사로 짐승을 속죄의 제물로 드리도록 했고, 소제는 화목제로 곡식을 화목 제물로 드리도록 한 것입니다. 우리가 맥추절기와 추수절기를 지킬 때 드리는 제물은 번제의 제물이 아니라 헌물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화목 제물인 것입니다. 우리가 번제의 제사를 통해서 속죄를 받았으면 이제는 화목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요엘 선지자는 "소제와 전제가 여호와의 전에 끊어졌고 여호와께 수종드는 제사장은 슬퍼하도다 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처량하니 곡식이 진하여 새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도다"고 요엘서 1 : 9,10 말씀에서 탄식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가 잘살기를 원하시고 축복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열왕기상 17장을 보면 이스라엘 땅에 삼년 육 개월 동안이나 비가 내리기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자 백성들은 극한 가난 속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말할 수 없이 갈등했을 것입니다. 잘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렇게 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릴 십일조와 헌물을 도적질했기 때문입니다. 말라기 3 : 8,9에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땅히 드려야 할 헌물을 드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무리 주어도 하나님께 드릴 줄 모르니까 가물게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할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면 축복받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 기록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린 처음 사람입니다. 창세기 14 : 20에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라함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은 야곱입니다. 창세기 28 : 20 이하에 보면, 야곱이 벧엘에 이르러 하나님을 만나고 서원할 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고 했습니다. 곧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약속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창세기 31 : 1에 의하면 야곱은 거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헌물을 드리면 축복을 받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모든 소출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여 헌물을 드림으로 축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3. 자신과 제물
우리는 어떤 경우에 하나님은 무자비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백 세에 난 아들을 잡아서 제물로 바치라고 하는데 그런 하나님께서 어찌 자비로우신 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사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잡아 바치라고 한 것은 이삭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마음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묵묵히 순종하여 모리아 산에 가서 제물로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식을 바친 것은 곧 자신을 바친 것입니다. 하나 밖에 없는 귀한 아들을 바친다고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식을 잡아 바치는 일이 쉬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자식 보다도 오히려 자신을 바치는 것이 더 쉬울 것입니다. 이삭을 바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드렸습니다. 곧 자신을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물을 요구하시나 제물 이전에 그 마음을 요구하십니다. 이사야 1 : 11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어떤 것입니까? 상한 심령입니다. 곧 마음입니다. 시편 51 : 16,17에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나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 보다도 자신의 마음을 드리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을 받으신 하나님은 이삭에게 손대지 못하게 하시고 이미 준비해 놓으신 수양을 잡아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줄 아셨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헌금을 바쳐라''제물을 드려라''십일조를 바쳐라'고 하니까 성도들의 것을 모두 빼앗아 가는 줄로 압니다. 다시 달라고 할 것 같으면 차라리 주시지나 말것이지 줘 놓고는 달라고 하는 것은 뭐냐고 합니다. 그렇게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으로 더 큰 것을 주시기 위해 준비해 놓고 기다리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제물을 드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수양을 가지고 멋진 예배를 드린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과 우리에게 있는 것을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우리에게 다시 돌려주시고 미리 준비하신 축복까지 쏟아 부어 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고집했다면 아들을 잃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기의 마음을 쏟아 부었을때 자식은 자식대로 얻게 되었고, 제물은 제물대로 준비해 주신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제사와 제물을 원치 않으시고 영원한 제물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히브리서 10 : 5에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고 했고, 12절에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고 했으며, 14절에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18절에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번제도 소제도 원치 않으십니다. 오직 산 제사를 원하십니다. 로마서 12 : 1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산 제사는 마음과 몸이 함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마음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몸도 움직여야 합니다. 성경 가운데 몸을 드려 예배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창세기 4 : 8 이하에 나오는 아벨이요, 사도행전 7 : 54에 나오는 스데반입니다. 우리 나라가 오늘 이렇게 놀라운 축복을 받은 것은 몸으로 예배드린 믿음의 조상들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형식적으로 번제나 소제의 제물만 드려 냄새 피우는 성도가 아니라 진정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통회하는 심령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매일매일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순종함으로 산 제사를 드리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처해 있는 곳에서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성도를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출처/김충기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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