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히 여기는 자 마5:7
◑긍휼과 동정은 하나님의 속성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누가 말할 수 있습니까?
빌 게이츠입니까? 하버드대학의 총장입니까?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과 예수님만이,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둘째 애통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셋째 온유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넷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주리고 목마른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다섯 번째로 "복 있는 사람"은 긍휼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긍휼히 여긴다는 말의 뜻은 ‘불쌍히 여긴다/ 측은히 여긴다/ 동정한다/
자비를 베푼다/ 은혜를 베푼다/ 사랑을 베푼다..는 뜻입니다.
▲이 다섯 번째 복의 특성은 ‘이웃에 대해서 가지는 마음과 삶의 자세’입니다.
불행한 형편과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는 사람을 보고 조소하고 비웃는 대신
불쌍히 여기고 가까이 가서 그를 어루만지며,
사랑을 베풀고 도와주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에게 해를 끼친 사람까지도 원망하고 미워하는 대신
불쌍히 여기고 용서를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예수님의 마음을 가장 정확하게 묘사하는 말이 있다면
그 말은 바로 긍휼이란 말일 것입니다.
히브리어로는 ‘헤세드’이고 헬라어로는 ‘엘레오스’입니다.
이 말의 뜻은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고 인자하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자주 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표현은 ‘긍휼과 자비’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시103:8
한 마디로 하나님은 헤세드가 많으신 즉 긍휼이 많으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시편에 이 말씀은 반복해서 나옵니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시145:8
하나님께서 죄악이 가득한 니느웨성를 구원하신 다음
그것을 불평하는 요나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12만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욘4:11
이것이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탕자의 이야기를 하신 다음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눅15:22-24
이것이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맏아들은 돌아온 탕자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불평했지만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돌아온 탕자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이번에 쌍뜨뻬쩨르부르그 에르미따지 박물관에서 "돌아온 탕자"의 그림을 보았는데
그 그림에 아버지의 눈물방울 네 개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눈물이 많고 긍휼이 많으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간음현장에서 붙잡힌 한 여인에게 긍휼을 베푸시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요8:11
이것이 긍휼이 많으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누가 복이 있는 사람입니까?
선과 악을 분명하게 판단할 줄 아는 분석력과
비판의식이 강한 선지자적인 사람입니까?
선과 악을 판단할 줄 알면서도 죄악의 길로 가다가
불행하게 된 사람들을 바라보며
동정의 마음을 품고 눈물을 흘리는 제사장적인 사람입니까?
요나가 복이 있는 사람입니까?
맏아들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까?
범죄한 여인에게 정의의 돌을 던지려드는 사람들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선과 악을 분별하고 판단하고 비판하는
선지자적인 의인들로 가득합니다.
▲동정하는 사람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아침 주님은 불행과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바라보며
동정의 마음을 품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테레사 수녀와 같은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런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하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와 중세교회의 수많은 성가의 가사 중에는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끼리에 엘레이손’
이란 가사가 거듭해서 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기도는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입니다.
아마 제가 한 평생 가장 많이 한 기도의 말은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길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신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이웃을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까?
▲1.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체험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다.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사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긍휼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긍휼을 베풀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체험한, 남편 다섯을 두었던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은
아마 한 평생 자기처럼 불행한 형편에 처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며 살았을 것입니다.
간음현장에서 붙잡힌 그 불행한 여인도
아마 한 평생 자기처럼 불행한 형편에 처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며 살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주님의 긍휼하심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죄인인 한 여자도
주님으로부터 용서와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에
아마 한 평생 자기처럼 불행한 형편에 처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용서와 사랑을 베풀며 살았을 것입니다.
저는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도
자기가 이전에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자비를 받았기 때문에
강도 만난 사람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긍휼을 체험한 사람이 긍휼을 베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되려면
먼저 주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기심을 받아야 하고 체험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랑을 받고 긍휼하심을 받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인은 아닙니다.
눅7장에 나오는 죄인인 한 여자는 사랑을 받을 줄 알았는데
종교인 시몬은 사랑을 받을 줄을 몰랐습니다.
죄인인 그 여자는 긍휼하심을 받을 줄 알았는데
시몬은 긍휼하심을 받을 줄 몰았습니다.
스펀지와 같은 부드러운 심성은 사랑의 물을 흡수할 수 있지만
차돌과 같은 딱딱한 심성은 사랑의 물을 흡수할 수가 없습니다.
스펀지와 같은 부드러운 마음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단순한 윤리의 종교가 압니다.
기독교는 사죄의 종교요 은총의 종교요 사랑의 종교요 긍휼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 아래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고 체험하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은 사람,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은 사람만이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2. 불행한 형편에 처해 있는 사람을 바라볼 때, 감정이입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감정이입)이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다.
불행한 형편에 처해 있는 사람을 바라볼 때
금방 눈물을 흘리고 동정하고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런 사람을 바라보아도 나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아무런 느낌을 가지지 못하는 냉정하고 무관심한 사람도 있습니다.
불행한 사람들과 자기 자신을 연계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불행한 사람들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불행한 형편에 처해 있는 사람을
자기 자신과 연계 시키고 동일시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불행한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참으로 긍휼을 베풀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기적인 사람은 긍휼을 베풀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쉽게 연계 시킬 수 있는 이타적인 사람,
개방적인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다른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 수가 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의 곁으로 제사장도 지나가고 레위인도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강도 만난 사람과 자신을 연계 시키거나 동일시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들을 그 강도 만난 사람과 구별시켰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그 당시 개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옷차림으로도 구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지금 강도를 만나서 쓰러져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 당시 존경을 받던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강도 만나서 죽어가는 사마리아인과 동일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긍휼히 여길 마음도 없었습니다.
피하여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을 어떤 사마리아인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사마리아 사람은 길가에 어떤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나 쓰러져
죽어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그 사마리아인을 목격했을 때 자기 자신을
그 사마리아 사람과 연계 시켰을 것입니다.
강도 만나 쓸어져 있는 사람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했을 것입니다.
개 같은 취급을 받으며 살아가다가 강도 만나 쓸어져 죽어가는 사람을 바라볼 때
바로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로 가까이 갔습니다.
자기 자신을 그와 연계 시키며 동정과 사랑과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그는 쓰러져 있는 사마리아 사람에게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발라 상처를 싸매고 치료해 주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의롭고 경건한 사람으로 간주하는 사람은
비참한 형편에 처해 있는 불행한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 수가 없습니다.
때때로 위선적인 구제와 자선의 행위를 할 수는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부터 울어 나오는 진정한 동정과 사랑과 긍휼을
베풀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불행한 사람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는 사람만이 긍휼을 베풀 수 있습니다.
▲3. 긍휼을 베푸는 일을 실행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다.
사랑은 말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긍휼과 자비도 말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과 긍휼은 실천하고 실행함으로 이루어지고 베풀어집니다.
사랑과 긍휼은 훈련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사랑의 사도 요한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일3:18
사랑은 실행하면 할수록 더욱 커지고 깊어집니다.
긍휼도 실행하면 할수록 더욱 진해지고 넓어지고 깊어집니다.
긍휼을 베풀면 베풀수록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그리스 손영삼 선교사는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집시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며 살고 있고
이선희 전도사는 불행과 고통 중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며 살고 있습니다.
사랑은 훈련이고 긍휼도 훈련입니다.
사랑의 훈련과 긍휼의 훈련을 많이 받으면 사랑의 사람이 되고 긍휼의 사람이 됩니다.
사랑의 가지치기(증식)를 많이 하고, 긍휼의 가지치기를 많이 하게 됩니다.
긍휼을 베푸는 일을 실행하는 사람이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친절을 베푼 오네시보로를 위한 기도를 이렇게 드렸습니다.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원컨대 주께서 저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딤후1:16,18
어떻게 오네시보로가 이런 귀한 기도를 받을 수 있었습니까?
그가 평소에 긍휼을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도 바울에게 긍휼을 베풀었고 다른 나그네들에게도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 나의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 딤후1:16
그러나 평소에 긍휼을 베풀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을 받는 대신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약2:13
마치는 말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을 받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날마다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옵소서 시51:1
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불행과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에 그들을 향한 측은한 마음과 동정하는 마음과
찾아가서 돕고 싶은 마음이 일어납니까?
저는 어제 이 설교를 준비하다가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는 한 사람이 생각났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한 사람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움의 손길을 폈습니다.
우리들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죄 때문에 불행을 당하는 사람도 있고
바울처럼 주님의 일을 하다가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우리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가까이 찾아가서 그들을 어루만지며 눈물과 사랑을 베풀고
도와주어야 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긍휼을 베푸는 복 있는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네시보로 같은 사람,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긍휼히 여기는 복 있는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에 주님의 긍휼하심을 다 받으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추천인 명설교편◑ > 김명혁목사 명설교(55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회는 - "보석으로 만들어진 집” 출25:8~22 (0) | 2022.04.21 |
---|---|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길 마6:14~15 (0) | 2022.04.21 |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마5:12 (0) | 2022.03.27 |
나 기쁨 되기 원하네 고후5:9 (0) | 2022.03.20 |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하나님이시라 창45:1~15 (0) | 2022.03.2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