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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익 목사 준비중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

by 【고동엽】 2022. 6. 11.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 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양주동 박사라는 분이 일본에서 유학시절 서울의 어느 여학생을 짝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이 워낙 문학솜씨가 있어 문학적으로 연애편지를 여러 통 써 보냈는데 답장이 없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그 여학생 기숙사 사감이 편지를 검열하고 연애편지니까 전해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하다가 편지에 “요한 일서 47절” 만 간단하게 써서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그 편지가 통과되어 본인에 전달되었다고 합니다. 그 성경구절 내용이 “우리 서로 사랑하자”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편지에는 “마가복음 10 7-8절” 을 써 보냈습니다. 그 내용은 “이러므로 둘이 한 몸을 이룰지니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둘이 결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북한에서는 남한의 젊은이들이 사용하는 사랑의 언어사용하는 것이 유행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만났다 헤어질 때 “안녕, 잘자, 내 꿈꿔, 사랑해”라는 언어들입니다. 지금 북한에서도 한창 사랑의 물결이 흐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북한에서는 이 물결을 막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평양의 김책 공과대학의 어느 여교수가 이런 한국에서 유행하는 언어를 사용했다가 당적과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5년 교화형에 처해졌다고 합니다. 북한은 참 살벌한 동네임에 틀림없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언어는 사랑의 언어입니다. “난 너를 좋아해, 우리 사랑하자, 사랑해” 얼마나 따뜻한 대화입니까. 동물들도 “사랑해”라는 말을 알아듣고 좋아하고 식물들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면 잎이 윤기가 난다고 합니다. 닭장에 있는 닭들에게 조용한 음악을 들려주면 알을 더 잘 낳고 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들려주면 더 알을 잘 낳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사람은 오죽하겠습니까. 사람은 듣는 대로, 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 만들어지고 조성되는 존재입니다.      

 

 오늘 설교제목을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라고 정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연애편지”라는 말입니다. 본문 요한복음 316절은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해 놓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의 농도는 헤아릴 길이 없을 만큼 깊고 넓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성경에 나오는 말씀들 중의 핵심이 되는 말씀입니다. 오늘 성경을 영원한 베스트셀러라고 말하는데 이의가 없습니다. 오늘 성경은 약 2천여 개의 언어로 번역되어서 연간 수백만부가 보급되고 있습니다. 2006년도 월 스트리트 저널이 소개한 자료에 의하면 2003년도에서 2005년도까지 3년간 보급된 성경은 25%가 증가되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낮추어도 미국서만 성경책이 2 500만부가 보급되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가장 많이 팔린 책이 해리포터 시리즈인데 그럼에도 성경은 그 책보다 두 배나 더 많게 배부되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인류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연애편지”이기 때문입니다. 그 연애편지의 내용 중에서도 핵심 내용은 오늘 읽은 요한복음 316절입니다.    

 

 

 이 땅에서는 부모의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에 비견하기도 합니다. 부모의 자식 사랑은 과히 맹목적입니다. 무조건의 사랑입니다. 죽도록 벌어서 자식들의 과외비로 다 지출합니다. 엊그제 사고로 죽은 어느 기러기 아빠의 죽음은 처절하기까지 합니다. 그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지상에서 최대의 사랑은 부모의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죽이심으로 제물 삼아 인간을 구원하시기까지 사랑하였습니다. 그 사랑이야기가 성경에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성경을 읽을 때에는 몇 가지 읽는 법이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우선 성경을 읽을 때는 성경의 문자를 그대로 읽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을 읽는 첫 번째 원칙입니다. 연애편지를 읽을 때는 글자와 문자 그대로를 읽어야 합니다. 속독이 아니고 정독으로 한자 한자 읽어야 합니다. 아니면 그 글 속에 들어있는 의미를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특히 연애 초기 같으면 속마음을 가능하면 감추기 때문에 읽고 또 읽어야 감추어진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대충 읽는 연애편지라면 그것은 별 볼일 없는 상대의 편지일 것입니다. 엊그제 어느 미국인과 만날 기회가 있어 물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알기에는 미국 대통령은 케네디 대통령만 빼고 오늘 오바마를 비롯해서 모두가 크리스천이 아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이 대답하기를 “아니라고, 겉모습은 그럴지 몰라도 속은 크리스천이 아닌 대통령도 있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예를 들면 제퍼슨 같은 대통령은 겉으로는 크리스천으로 비추어졌지만 성경에서 기적내용은 모두 가위로 도려내고 만든 성경책을 3천권이나 만들었던 사람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성경책이 지금도 보관중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게 무슨 크리스천이냐고 말했습니다. 성경에서 기적을 빼면 그것은 성경이 아닙니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 부활, 승천, 재림 모두가 기적인데 그것을 빼내면 무슨 성경이겠습니까.  

 

 성경은 있는 그대로를 정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성경을 읽는 자세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말씀을 통해서 깊은 뜻을 발견하게 되고 말씀이 주는 감화를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은 성경을 너무 속독 시킵니다. 어떤 단체에서는 성경을 1주일에 한번 읽게 하는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연애편지를 그렇게 읽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성경은 신비의 책이다. 속에 비밀이 가득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실 때는 돈으로, 금덩이로, 달러로, 보석으로 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성경을 통해서 은혜를 주시고 진로를 안내하시고 운명을 개척하게 하는 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 그 속에서 아이디어를 발견하고, 길을 찾고, 천국을 보고, 미래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구약성경을 읽다가 모세가 갈대상자에 버려졌는데 그 갈대상자에 물이 새지 않도록 역청을 발랐다는 구절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때 “역청”이라는 단어를 읽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고 합니다. “역청”(bitumen)은 우리말로 “원유”라는 뜻입니다. 이 분이 역청을 읽는 순간 “그럼 그 지역에 원유가 있다는 말 아니냐”라는 생각이 번뜩 들어 달려가 지질을 탐사한 결과 그곳에서 유전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음미하고 연애편지 읽듯이 정독한 사람에게 이런 눈이 뜨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연애편지를 읽듯이 정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속에 숨겨있는 보고를 발견하게 되고 지혜를 얻게 되고 길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리켜서 “무한한 보고”라고 부릅니다.    

 

 

 

 

영적으로

 

 

 

 

성경은 영적 감화로 쓰인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영적 양식의 보고라고도 부릅니다. 육신은 육신의 음식을 필요로 하고 영은 영의 양식을 필요로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쓴 책이기 때문에 누구나 이 성경을 읽을 때 영적인 양식을 공급받게 됩니다. 성경을 영적으로 읽는다는 말은 “겸손하게 읽으라”는 말입니다. 그 말은 그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쓰여졌다고 전제하고 읽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때 이 말씀을 통해서 나를 향하신 영적인 뜻과 의미와 교훈을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21절 이하를 보면 왕에게 1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1만 달란트면 오늘 날 돈으로 환산하면 약 6조원의 돈입니다.  6조원의 빚을 진 사람이 왕으로부터 그 엄청난 빚을 탕감 받고 나옵니다. 나오다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났습니다. 100데나리온이면 오늘 돈으로 천만 원 정도입니다. 그때 6조원의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자기에게 천만 원 빚진 자에게 빚을 빨리 갚으라고 윽박지릅니다. 며칠만 연기해 달라는 빚쟁이에게 당장 갚으라고 처자를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임금이 다시 불러 “나는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 주었거늘 너는 백 데나리온을 갚으라고 하느냐, 너도 다시 갚으라”하고 감옥에 가두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채는 죄를 말합니다. 우리들이 죄를 지었습니다. 그 죄 값이 얼마냐 하면 자그마치 일만 달란트나 됩니다. 우리들이 그 빚을 갚기는 불가능 합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셔서 제물 삼으심으로 우리의 엄청난 죄를 탕감해 주신 것입니다. 이 비유가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죽이신 이유가 6조원이나 되는 우리 죄를 대신 갚으시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예수의 대속의 죽음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성경을 읽음으로 알게 됩니다. 그것이 성경을 영적으로 읽는 방법입니다.  

 

 

 

 

 

생활로 읽음

 

 

 

 

성경은 한번 읽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성경을 읽을 때 이 말씀이 내 생활에 적용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성경말씀이 내 생활에 적용되지 않으면 이 성경책은 소설책이나 역사책에 불과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소설책만도 못합니다. 소설책은 재미라도 있는데 성경책은 재미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손에 들자마자 잠이 오지 않습니까. 이 성경은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말씀의 책입니다. 동시에 이 성경은 나 한사람에게 주어진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성경책은 시대를 불문하고 그 시대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이고 동시에 이 성경은 모든 개개의 사람들에게 다 적용되고 변화시키고 소명을 알려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육자는 이 성경을 읽고 교육에 적용하고 법조인은 법에 적용하고 사업가는 사업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성경은 읽고 삶에 적용해야 하는 책입니다. 그 적용이 없으면 이 책은 무의미한 책이고 윤리나 도덕책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값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경우입니다.

 

 성경을 보면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주인이 세 명의 종에게 재산을 맡기고 집을 떠났습니다. 한 사람에게는 5달란트를, 또 한사람에게는 2달란트, 한사람에게는 1달란트를 맡겼습니다. 그랬더니 5달란트 2달란트 받은 종은 열심히 일해서 또 5달란트, 2달란트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 돈을 땅에 묻어 두었다가 주인이 왔을 때 그대로 내놓았다가 큰 책망을 받고 쫓겨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여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왜 그렇게 혼이 났습니까. 여기 이 한 달란트가 얼마인지를 잘 모르면 이 종의 무책임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모를 수 있습니다. 조금 전에 일만 달란트는 약 6조원의 돈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1 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오늘 날로 말하면 약 10만 원쯤 됩니다. 그러면 한 달란트면 6천 데나리온입니다. 그러니까 한 달란트는 한 데나리온의 6천배이고 당시 6천일 분의 품삯이니까 오늘 돈으로 환산하면 6억 원이 된다는 말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 종이 6억 원이나 되는 돈을 땅에 그냥 묻어두었습니다. 그러면 이 종이 무사하겠습니까. 그런 정신, 자세, 생각가지고 남의 집에서 월급 받으며 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종은 직무를 철저하게 유기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생활로 읽어야 합니다. 여기 달란트는 우리에게 주어진 재능을 말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재능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재능을 활용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이런 죄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생각하면 당장 내게 주어진 재능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지 안하고 회피하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됩니다. 그것이 성경을 생활로 읽는 방법입니다.

 

 

 

 

본체를 발견하는 일

 

 

 

 

성경을 보면 많은 이야기와 비유와 역사와 사례들과 죄와 심판과 족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두께가 큽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이 모든 것들은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그 그림자 속에 들어 있는 본체를 발견하고 알아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들이 성경을 공부하는 이유이고 설교를 듣는 이유입니다. 그 본체가 바로 예수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글들은 다 예수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각종 비유나 역사나 족보나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이 모두 예수의 그림자들입니다. 그 그림자들 즉 비유, 역사, 족보, 이야기들은 모두 예수를 말하기 위해서 써진 그림자들이고 나뭇가지들 입니다. 그래서 그 그림자들과 나뭇가지들을 헤치고 연구해 들어가면 마지막에는 본체인 예수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신구약의 모든 말씀을 압축하면 한마디로 요약이 나오게 되는데 그 말씀이 본문 요한복음 3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셨다,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이것이 성경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의 핵심은 예수입니다. 그것을 찾아내는 작업이 성경공부이고  그것을 발견한 것을 알리는 작업이 설교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본체가 자꾸만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꾸만 성경에 나오는 그림자들이 주인공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성경공부를 가르칠 때 교사들이 자꾸만 가지를 가르치고 그림자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의 어머니 이름이 뭐냐, 아버지 이름은 무엇이고 고향이 어디냐, 제자가 몇 명이고 아버지 직업은 뭐냐, 예수님이 옆구리에 창에 찔렸는데 그것이 죽은 후인가 죽기 전인가를 묻습니다. 모두 숲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그림자이고 나뭇가지들입니다. 그것들은 몰라도 구원받는데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정작 알아야 할 것은 “예수는 누구인가?, 왜 세상에 오셨는가?, 왜 죽으셨는가?, 그의 죽음과 오늘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것이 핵심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많은 숲과 가지와 나무들과 그림자들을 헤치고 나가서 본체 되시는 예수를 발견하고 만나야 합니다. 그렇게 성경에서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한결같이 변화하였고 사역자들이 되었고 예수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발견한 마리아는 “나는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소서”하고 순종하였습니다. 요셉은 “네 정혼자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모든 오해를 풀고 순종하였습니다. 목자들은 예수의 탄생 소식을 듣자마자 예수께 달려가 경배하였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예수의 탄생 소식을 듣자마자 오늘 이라크 땅에서 예루살렘까지 수개월을 걸어서 찾아와 경배하였습니다. 백부장은 죽어가는 예수의 모습에서 진정 예수를 발견하고는 그는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그 예수를 발견하고 나서 “나는 예수를 위하여 다 버리노라, 나는 이제부터 예수만 알기로 작정하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을 때 그림자만 보고, 이상한 기적 내용만 읽어 보고 무슨 성경이 이러냐고 하지 말고 성경을 읽을 때 그 속에서 진정 예수를 발견하고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말씀의 초점을 알고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그 예수를 만나서 고백한 사도바울처럼 “나도 이제부터 예수만 알기로 작정한다”는 고백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많은 위인들은 그렇게 성경을 읽다가 예수를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이고 이유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그런 축복이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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