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이란 무엇인가
한국 기독교 실패 원인은 설교입니다. 설교가 성서 해설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입니다. 설교에서 성서가 해설되지 못하는 이유는 성서가 우리 삶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영적인 말씀이라는 인식 때문입니다. 그리고 설교자가 삶의 변화를 요청하는 메시지를 성서보다 인문학이나 도덕에서 찾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인문학과 경쟁하면 백전백패합니다. 교회는 성서를 통해서 삶의 변화를 요청해야 합니다.
설교자가 인문학을 몰라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설교자가 인문학과 철학 과학 지식을 갖추어야 성서 메시지를 찾을 수 있습니다. 신학자보다 성서를 더 깊게 성찰하는 지라르 아감벤 등 인문학자가 많습니다.
모든 글은 해석되어서 나에게 옵니다. 성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성서 해석은 과학 역사의식 문학양식 즉 이성에 거슬리지 않는 해석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예수평화를 만납니다.(빌4:7)
예수 메시지를 따르지 않는 설교는 예수께서 바라는 새로운 세상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바라는 세상을 위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평신도는 교양 감동 유익 재미있는 설교에 호응하면 안됩니다. 삶의 변화를 이루어 구원받으려면 성서 해설 설교에 호응해야 합니다.
우리가 몰라서 삶의 변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말씀이 내 몸에 체화되도록 하나님 말씀을 반복해서 듣는 게 좋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길을 신학에서 찾지 않고 성서에서 찾습니다.
유럽 인구 35 퍼센트가 죽은 종교 개혁 전쟁과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정교분리가 이루어졌습니다. 사회에서 종교는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는 인식이 생겼습니다. 18 세기 까지는 정치와 종교가 일치해서 프랑스 등 유럽에서 국가 관리가 되려면 제후나 귀족의 문하생이 되거나 신학교에 입학해야 했습니다. 근대가 되면서 종교에서 정치가 분리되어 종교가 실제 삶에 대한 영향력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신학자와 성직자들은 성서를 영적 혹은 심리 의미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종교는 보다 더 중요한 부분을 담당한다는 인식을 대중에게 심어주려는 의도입니다. 신학이라는 용어 자체가 이스라엘이나 성서 시대엔 없었습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것인가를 말하는 글 입니다.
우리 번역자들이 성서 언어 에이레네(샬롬)를 삶의 관계에서 이루는 평화라고 번역하지 않고 평안 평강 화평 안심 등으로 번역하여 실제 현실 삶이 아닌 개인 영혼과 심리에 관계된 의미가 나타나도록 번역한 것이 그 예가 됩니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1 세기 성서 시대를 마감하고 2 세기 신학이 출발하면서 예수 사역과 가르침이 실종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현재 삶에서 이루어가는 하나님 나라 신학이 실종되었숩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바라는 세상이 아니라 엉뚱한 세상이 되는 신학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실종은 기독교 신학에 치명상을 입혔는데,
1. 구원의 확신입니다.
구원이 삶의 구원이 아니라 영혼구원이라는 인식으로 구원 확신 교리가 발생했습니다.
예수 설교 중심인 하나님께서 여시는 평화의 하나님나라는 실종되고 2 세기 신학자들이 예수를 해석한, 예수께서 우리 죄를 사하기 위하여 대신 죽으셨다는 대속 교리가 기독교 중심이 되었습니다.
기독교 발생지인 이스라엘 사유에는 몸과 영혼이 분리되었다는 사유는 없습니다.
유대 사유에서는 인간이 영혼과 육체의 합의 결과로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 둘 사이에 어떤 위계질서도 세워질 수 없습니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다는 사유는 그리스 사유입니다. 영혼과 육체는 통합된 실재입니다.(1)
2. 하나님나라 확장한다는 믿음입니다.
성서에서 하나님나라가 연구되지 않아서 하나님나라 확장한다면서 교회와 기독교 현실에서 하나님 의가 아니라 자기 의가 발현됩니다.
구원은 영혼 구원이고 하나님 나라는 자기가 확장한다는 인지부조화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선 별도로 서술합니다.
구원 확신과 하나님나라 확장은 성서 가르침이 아니고 순전히 교인 결속과 교회 번영을 위한 의도로 성립한 신학입니다.
여러분이 신학자들과 성직자들에게 속았습니다. 거짓은 반드시 망합니다.
평신도가 깨어나야 합니다.
그리스 사상이 기독교로 유입되어 신학이 오염되었는데 그리스 사상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교회가 확장을 위해서 교묘하게 유리한 것만 취합해서 입니다.
신플라톤주의는 당시 금욕주의 세계에서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서 구원에 이르는가를 가르친 종교성 짙은 사상입니다.
에피쿠르소는 금욕주의 세계에서 땅에서의 행복한 삶을 강조합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에피쿠로스를 구원자(소테르)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철학은 오늘날처럼 학문이 아니라 삶을 인도하는 길이었습니다.
기독교가 땅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가 아니라 필요해 의해 영혼 구원을 창안해 냈습니다.(2)
구원확신은 성서 가르침이 아닙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마지막 날 자기 행위로 심판받고(로마2:6) 우리가 구원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빌3:12-14)
구원확신 교리는 예정 교리에서 나왔습니다.
예정교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정립하고 칼뱅이 확대 발전시켰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께서 멸망받을 무리 가운데서 일정한 수의 사람을 선택하셨다. 이 수는 불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또한 선택된 사람들은 영원히 신에게 속하고 그밖의 사람들은 형벌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아우구스티누스 타락과 은총에 관하여 13 권 39 장)(3)
이러한 구원확신 교리는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자를 별도로 남겨 두신다는 남은 자 사상과 함께 유사 기독교가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칼뱅주의인 구원받을 자와 심판받을 자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예정과 버림(유기)이라는 예정론이 구원확신이 되었습니다. 이 교리는 기독교에서는 힌두교처럼 숙명론으로 발전하지는 않았습니다.
힌두교인 인도는 숙명론으로 계급사회가 심화되었습니다. 지금도 불가촉 천민은 자신들의 허드렛 일을 당연시하고 40 세가 넘으면 다음생의 등급을 위해 산속에서 수련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기독교는 예정교리가 놀라우리만치 삶에 긍정성을 부여했습니다. 믿음이나 신념이 부족하면 무기력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원으로 선택받았다는 믿음은 성공적이고 효율적인 전문활동 직업 노동 사업에 활력을 일으켰습니다.(4)
50 - 60 년대 한국 교회는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명령받았으니 일하러 가 찬송을 많이 불렀습니다.
세계에서 개신교 국가들은 부유하고 가톨릭 국가들은 가난합니다.
문제는 부유한 삶이 구원인가 라는데 있습니다.
예정교리는 자본주의 사상과 결합하여 부강한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막스베버는 자본주의가 기독교에서 발생했다고 합니다.
물질이 구원을 준다는 공산주의 유물론보다 자본주의 유물론이 사실상 더 심각합니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물질이 구원입니다.
유물론 사유는 한시적입니다. 자신의 이념이 적용되어 어느정도 이루어진 사회는 그 이념이 폐기되고 또 다른 이념을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5)
다시 말하자면 물질이 갖추어진 사람은 더 이상 물질이 구원이 되지 못합니다.
재물 권력 명예는 한 번 달성되면 그것이 구원을 유지해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재물 권력 명예로 인해 망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유한 사람에게 우울증이 많은 게 이러한 사례입니다.
자본주의는 신학도 없고 교리도 없지만 종교가 되었습니다. 생산과 구매 그리고 소비라는 제의 종교입니다.
생산자는 구매자가 없으면 망합니다. 우리나라 삼성 현대 엘지 에스케이가 망한다면 국가가 망합니다. 망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생산을 증대하고 소비를 촉진합니다. 지구는 과소비로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지구 생태 학자들은 앞으로 30 년이 지구 존폐를 결정할 중요한 시기라고 합니다.
토마스 베리 신부는 현대가 신생대를 마감하고 생태대로 넘어가는 시기라고 합니다. 우리가 저출산과 저소비를 이루지 못하면 우리 후손들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조악한 지구 환경에서 살게 될 것 입니다.
과소비는 지구를 병들게 하고 끝 없는 경쟁으로 빈부격차를 일으켜서 사회에 부모 도움 없이 나오는 젊은이들을 절망케 합니다.
중산층도 자기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쉼 없는 생활로 결국에는 망합니다. 사회가 이미 피로사회가 되었습니다.(한병철)
미국 사회는 직업이 3 개인 사람이 많은데 우리나라도 직업이 2 개인 사람이 많은 현실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의 예정교리는 운명의 불안에 의해 발생했습니다.
중세 말기의 하늘천국과 지옥 신학은 사회 불안을 부추겼습니다. 사회가 불안해서 하늘천국과 지옥 신학이 발생했는데 이 하늘 천국 지옥 신학이 불안을 조장하는 악순환입니다.
불안은 금욕행위 성지순례 성유물에 대한 집착 면죄부에 대한 열망 미사와 고해성사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났습니다. 개신교에서는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 예정교리가 구원확신을 위해 태동했습니다.(6)
오늘날은 두려움과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구매와 소비에 집착합니다. 모두가 물질이 구원인 것처럼 매달리지만 물질이 구원이 아님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물질 풍요 사회에서 가족이 해체되고 청년과 노인이 절망으로 자살하는 사람이 셰계에서 우리가 1 위 입니다.
두려움은 대상이 있지만 불안은 대상이 없습니다. 고대는 자기 존재에 대한 불안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현자들이 철학을 통해 그 불안을 잠재우려 했습니다. 중세는 성직자와 지배층의 타락과 부패로 사회가 불안했습니다.그래서 도덕이 불안을 잠재우는 도구였습니다. 그때 형성된 도덕 신학이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개인주의는 불안을 가속화 합니다.
예수께서 우리 죄를 사하시기 위해 죽으셨다는 대속교리로 인해 개인 죄가 강조되고 도덕 신학의 강화는 개인주의를 심화시켰습니다.
대속교리로 인해 죄를 강조한 것이 유대교의 공동체 중심 신앙이 기독교에 와서 개인 중심 신앙이 된 원인입니다.
불안은 존재에 대한 위협입니다. 불안은 인간 한계를 인식하는 가운데 자기 긍정을 위협합니다.
결국에 불안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데서 옵니다.
믿음은 이러한 불안을 인식하고 불안으로부터 자유의 가능성을 찾습니다.(로마7:14-25)(7)
기독교 핵심은 영과 자유입니다.
그동안 교회는 오순절 계통 교회처럼 영을 육의 반대 즉 기이한 현상 정도나 특별한 재능을 받았다는 은사로 가르쳤습니다. 고대인들이 지녔던 영의 인격성이 퇴각했습니다.
히브리 개념에서 영(루아흐)은 생명의 숨쉼과 힘이고 서양 철학사에서는 정신과 지성입니다. 폴 틸리히는 이것을 결합합니다.
즉 그에게서 영은 힘과 의미의 연합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은 삶의 활력입니다.
필자가 하려는 말은 구원이란 믿음을 통해 삶에서 영과 자유를 찾는데 있습니다.
다시말하자면 구원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생명과 자유 그리고 평화를 얻음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는 구원자 즉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원은 미래에 얻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오늘 지금 나에게 오는 새로운 삶 입니다.
발터 벤야민에 의하면 계급 없는 사회는 마르크스 주장대로 계급 간의 투쟁에 의한 진보로 이루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계급 없는 사회는 프롤레타리아(가난한 사람들) 자신의 혁명적 정치 관심에 메시아 얼굴이 부여 되어 있어야 합니다.(9)
벤야민의 주장은 가난한 사람들이 지금 신의 은혜를 받을 때만이 그가 투쟁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뜻 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이란 가난한 사람들에게 오늘 부여되는 신의 은혜라는 뜻 입니다.
나는 죽은 다음생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습니다. 다만 지금 삶에서 구원받고 있다면 죽은 다음에도 구원이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철학자들은 의미 있는 삶을 실존이라고 합니다.
철학자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관계 자유 역사참여를 실존이라고 합니다.
관계란 물질 명예 권력 따위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말고 하나님과 관계 자연과 관계 다른 생명체와 관계 사물과 관계 다른 사람과 관계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행위를 말합니다. 개인 죄에 대한 강조와 도덕신학 강화는 개인주의를 심화시키어 불안이 증가합니다. 그러므로 불안은 관계에서 해소됩니다.
자유란 물질 권력 명예 집착 의존 등 무엇에도 지배 당하지 않고 사회에 책임있는 인간으로서 자유하게 사는 삶을 말합니다.
역사참여란 나의 안락과 평안에 머물지 말고 역사 발전에 참여하여 세계를 위하여 사는 삶이 의미 있는 삶이라는 뜻 입니다. 우리는 홍익인간弘益人間입니다.
굼벵이는 자기 침으로 흙을 뭉쳐서 벽에 바르는 반복 작용을 통해 구멍을 만들어 지상으로 올라옵니다. 그렇게 그는 구멍을 만들어서 토양에 산소를 공급하게 합니다. 굼벵이 삶은 농작물이 자라게 하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 일생을 바칩니다.
미물도 이러한데 인간으로 태어나 남에게 알량한 권력으로 상처주어 세상을 불화하게 하고 과소비하여 후손에게 파멸 직전의 지구를 물려주어서야 되겠습니까(설교해서 미안합니다)
성서는 의미 없는 삶을 죽음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성서를 통해 구원 즉 삶의 의미를 찾아갑니다.
(마태복음 11장)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사람들은 누구를 도우러 자기가 그 사람에게 갑니다. 그가 오면 같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라고 하십니다. 그분은 기꺼이 같은 처지가 될 의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회개할 가능성이 있거나 은혜받을 자격을 갖춘 사람만 오라고 하시지 않고 모두 오라 하십니다.
그분은 죽음 이후에나 올 쉼을 지금 여기에서 주신다고 합니다.(10)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 앞에 엎드리어 자신의 딸이 구원받아 살게 하소서 간청합니다.
우리는 구원받고 그리고 살게 하소서에 주목합니다.
신분 높은 사제가 딸을 살리기 위해 많은 사람이 보는 데서 평신도 앞에 엎드립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께서 주이시고 주께서 생명 주심을 알았습니다.
딸을 살리신 예수께서 그 딸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딸의 구원은 새로운 삶 즉 생명 얻음입니다.
무리 가운데서 예수의 옷자락을 만지고 혈루병(하혈)이 치유된 여인에게 예수께서 평화하라(에이레네)고 하십니다.(마가5:21-43) 가톨릭 200 주년 기념 성서와 개역개정은 평안 공동번역과 새번역은 안심으로 번역하여 개인 심리로 이해하도록 유도했습니다.(11)
1 세기 삶에 대한 기록이 현재 우리에게는 개인 심리 문제가 됐습니다.
혈루병 앓는 여인은 성전 출입과 축제 참여가 금지되고 동네에서 쫓겨난 여인입니다.(12)
그녀의 구원은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새로운 삶의 회복입니다. 여인은 이렇게 구원받아 평화를 얻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지나가지 않는데 예수께서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버림받은 땅 사마리아를 일부러 찾아가십니다.
우물가에서 여인을 만나 영생을 약속하시어 여인을 구원하십니다. 이 여인은 3 번만 이혼이 허용되는 이스라엘 법에서 5 번 이혼한 여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녀 삶의 현실을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서늘한 새벽이나 밤에 물 길러 오는데 이 여인은 사람들 만나지 않으려고 뜨거운 낯 정오에 물 길으러 우물에 왔다가 예수를 만났습니다.
사람들을 피하던 여인은 이제 스스로 사람들 앞에 나가서 예수를 전합니다. 여인의 구원은 버림받은 삶에서 인간 존엄을 회복하고 사회에 책임있는 인간으로 서있는 자유한 삶 입니다.(요한4:4-42)
구원이란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생명 자유 정의 평화를 얻음입니다.
구원받음이란,
1. 악한 영의 지배로부터 해방입니다.
스스로 희생양이 되시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어둠의 세력을 이기셨습니다. 예수의 영이신 성령이 우리를 살리는 생명으로 인도합니다.(요한6:63 로마8:6 고후3:6)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악령의 지배를 받지 않고 성령의 이끄심을 받습니다.
2. 의미있는 평화 삶으로 인도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을 통해서 하나님 의를 이루시려고(고후5:21) 그리스도인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습니다.(고후5:18) 성서에서 의미있는 삶은 평화의 삶 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현실에 참여해 있는 현실이 그리스도인의 구원입니다.
예수평화(pax christus)는 약자를 힘으로 지배하는 로마평화(pax romana)와도 다르고 모두가 참자는 천진한 평화도 아닙니다. 약자가 강자와 동등하게 존엄이 존중되는 평화입니다. 즉 정의로운 평화입니다. 예수평화는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예수평화는 악한 지배 세력에게 저항함으로서만 얻을 수 있는 평화입니다.
예수께서 평화를 이루기 위해 기득 세력에 죽음으로 저항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방해하는 정치세력 탐욕 불의에 저항하는 사람입니다.
19 개월 간의 모든 글쓰기를 마칩니다. 그동안 함께 하신 모든 분들께 머리 숙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당분간 페북 활동을 중단합니다. 며칠후에 그동안 감사와 소회 그리고 앞으로 계획에 대해 글 올립니다.
1. 미셀 앙리 육화 살의 철학 박영옥 자음과 모음 2013, 19p
2. 필자 책 「기독교 본류를 찾아서」에 구원이란 무엇인가를 상세히 논구한 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글은 그글의 요약이 아니고 새롭게 구상한 글 입니다.
3. 폴 틸리히 그리스도교 사상사 잉게 베르그 C 헤넬 엮음 송기득 대한기독교서회 2020, 218p
4. 알젠카 주판치치 정의의 그림자 조창호 도서출판 b 2005, 67p
5. 테리 이글턴 유물론 전대호 갈마바람 2018, 112-113p
6. 폴 틸리히 존재의 용기 차성구 예영 2012, 93p
7. 쇠얀 키르케고어 불안의 개념 임춘갑 치우 2011, 245p
8. A J 맥컬웨이 폴 틸리히 조직신학 요약과 분석 황재범 김재현 한들출판사 2020, 272p
9.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최성만 길 2008, 356p
10. 쇠얀 키르케고어 그리스도교의 훈련 임춘갑 다선글방 2005, 15-34p
11. 첫 영어 성서 KJV은 go in peace 입니다
12. 김근수 슬픈예수 21세기북스 2017, 98p
회원님, Seungchul Paik, 외 122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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