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친구의 신앙의 깊이는? (단 3:13-18)
물의 깊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시내물의 깊이, 강의 깊이, 그리고 바다의 깊이는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깊이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를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⑴‘그리하시면’의 신앙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만일 이렇게 해 주시면...’ 하고 조건을 붙이는 신앙 태도를 말합니다.
창28을 보면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꿈에 사닥다리로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내리는 것을 보았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어 복을 내려주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야곱이 잠에서 깨어 베개 하던 돌을 세워 기둥을 삼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서원하여 기도하기를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동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창28:20-22)
그렇습니다. 오늘도 이렇게 조건을 내세우면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조건에 맞으면 감사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원망하고 불평하고, 심할 경우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신앙의 깊이가 시냇물처럼 얕은 사람들입니다. /할/
⑵‘그리하실 줄로’ 믿는 신앙입니다. 주 앞에서 ‘마치 꼭 그렇게 될 것처럼’ 추호도 의심치 않는 순종하는 신앙의 태도를 말합니다.
수3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을 앞 세워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요단강 물로 들어가라고 명하셨습니다.
놀랍게도 저들은 아무런 인간적인 대책도 없이 강물로 뛰어들었습니다. 다리를 마련한 것도 아닙니다. 배를 준비한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구명조끼를 입은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줄로 믿고 뛰어든 것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오늘도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역사 해 주실 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선한 길로 인도하실 줄로 믿고 추호의 의심도 없이 나아갑니다. 그 신앙의 깊이가 강물처럼 깊은 사람들입니다. /아멘!/
⑶‘그리 아니하실찌라도’의 신앙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비록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끝까지 하나님을 믿겠다는 그런 신앙의 태도입니다. /할/
합3:17-18절에 하박국의 고백을 보세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비록 내 바람대로 내 믿음대로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찬양하며 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신앙의 깊이가 바다처럼 깊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여기까지 가야 합니다. /믿/아멘!/
오늘 본문은 바다처럼 깊은 신앙의 인물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찌라도’의 신앙의 깊이를 가진 이 세 친구의 믿음에 우리가 도전을 받고 배워야 합니다. /할/
①본문의 배경은 무엇인가?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은 당시 세계 최강대국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자기가 섬기는 벨 신을 기념하고 자신의 업적을 나타내기 위해 거대한 금 신상을 만들어 놓고, 모든 지도자들에게 이 금 신상 앞에 나와 ‘절하라’고 명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금 신상 앞에 나와 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들을 시기하던 바벨론 사람들이 왕에게 이 사실을 고했습니다. 왕이 화를 내며 저들을 잡아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한 번 더 기회를 주면서 이번마저 절하지 않으면 풀무 불에 던져 넣을 것이라고 위협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끝내 거절했습니다. 그 때 저들이 저 유명한 말을 왕에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능히 풀무 불에서 우리를 건져내실 것이지만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왕의 신을 섬기지 않을 것이라’ /할/
화가 난 왕이 평소보다 7배나 강한 불에 던지라 해서 그 명을 받들던 자들이 불에 타 죽을 정도의 뜨거운 불에 저들이 던져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극렬히 타는 풀무 불 속에서 저들을 그야말로 털끝 하나 타지 않게 구원해 내셨습니다. 왕이 이 사실을 목도하고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이들을 구원할 다른 신이 하나님 외에 없다고 전국에 조서를 내려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 사람을 더욱 높은 자리에 앉게 했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할/
②그런데 본문의 핵심은 느브갓네살 왕의 질문과 다니엘의 세 친구의 대답에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느브갓네살 왕이 이렇게 묻습니다.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즉 ‘누가 감히 내가 하는 일을 가로막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어떤 신이 있어 내 권위를 부정하며 내 하는 일을 막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무시하는 교만의 극치를 보인 것입니다.
이 때 다니엘의 세 친구가 놀라운 대답을 합니다. 16절을 보세요! ‘느브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한 마디로 대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단호하게 말합니다. 17절에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왕이 자기들을 풀무 불에 던져 넣어도 하나님께서 넉넉히 건져내실 수 있고, 왕이 또 다른 방법으로 자기들을 해 하려해도 하나님께서 능히 건져내실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다시 말하면 왕의 질문에 한 마디로 하나님만이 자기들의 구원이 되신다는 답을 하고 있습니다. /할/
그러면서 18절에서는 놀라운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우리를 풀무 불에 던져 넣는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구하실 것이지만 만의 하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불에 타 죽게 하신다고 해도 우리는 결코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을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하지 않으신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무능해서가 아니고 금 신상보다 못해서가 아니고 여전히 능력의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다른 뜻이 계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으실 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끝까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아멘!/
③본문 상황으로 더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제 왕의 명령이 떨어져서 풀무 불 속에 던져집니다. 여기서 풀무 불이란 풀무로 바람을 일으켜 불을 피우는, 요즘 말로 용광로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면 더 쉽습니다. 평소 보다 7배나 더 뜨겁게 해서 이 세 사람을 끌고 가던 사람이 풀무 불 밖에서 불에 타 죽을 정도로 뜨거운 용광로입니다.
이곳으로 끌려가면서 이 세 사람은 어떤 기도를 드렸을까요? 먼저 자기들을 이 풀무 불에서 건져 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가 깊어지면서 저들의 기도는 ‘하나님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구하는 그런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할/
그런데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분명히 풀무 불안에 던져진 사람은 이 세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풀무 불안에 보이는 사람은 네 사람이었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이 자세히 들여다보니 한 사람은 사람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극렬히 타는 풀무 불 속에 하나님께서 저들 세 사람과 함께 계셨습니다. 저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 응답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 세 친구의 신앙은 ‘하나님을 구하는 그런 신앙’이었습니다. /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결과를 구합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기도했던 것처럼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풀무 불에서 제발 건져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을 위해 죽도록 충성하겠습니다.’ 이것이 ‘그리하시면’의 신앙입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널 때처럼 기도합니다. ‘하나님 능력을 나타내 보이실 줄을 믿습니다. 우리가 풀무 불에 던져질 때 풀무 불이 꺼지든지 아니면 우리에게 특수 보호막을 치시든지 해서 우리를 털끝 하나 상하지 않게 해 주실 줄을 믿습니다.’ 이것이 곧 ‘그리하실 줄로’의 신앙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이 세 사람은 하나님께 하나님을 구했습니다. 풀무 불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이 털 끝 하나 상하지 않게 되기를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저들이 구한 것은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풀무 불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자기들의 죽고 사는 일 까지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즉 결과에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저들이 구한 것은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할/
결과는 놀랍습니다. 하나님께서 풀무 불에 함께 하시니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저들을 지켜주셔서 죽지 않게 하시고 상하지 않게 하신 것은 물론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이 변합니다. 전국에 조서를 보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참 좋은 환경이 마련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세 사람의 지위가 높아집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시는지 모든 사람들이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도무지 바라고 구할 수 없었던 엄청난 결과가 임한 것입니다. /아멘!/
사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자기 생각 속에 가둬 놓습니다. 하나님을 자기 수준으로 격하 시켜버립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해 드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어떤 결과를 상정해 놓고 그 결과가 이루어지기 위해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결과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 아니하실찌라도’의 기도를 할 수가 있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이 여기까지 가야 합니다.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할 수 있는 성숙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④그들의 신앙은 두려움을 이겼습니다.
두라 평지라는 넓은 광장에 거대한 금으로 만든 신상이 세워졌습니다. 높이가 60규빗 약 30미터 아파트 10층 높이입니다. 그리고 넓이가 6규빗 약 3미터입니다. 이 거대한 신상을 금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역사가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의하면 금 22톤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보기만 해도 탄성이 절로 나고 그 앞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위용입니다.
전국에서 각계 각층의 지도자들이 그 광장에 다 모였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신호에 맞추어 다 함께 그 신상에 절을 하고 있습니다. 일사불란하게 그 금 신상에 절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넓은 광장에 모두가 절을 하려고 엎드린 그 순간 우뚝 서서 고개를 당당히 들고 그 금 신상을 비웃듯이 쏘아보고 있는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우상 앞에 절할 때 우상에 대항하여 맞서는 담대한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무도 우상 앞에 맞설 수 없던 상황 속에서 저들은 단호하게 맞설 수 있었습니다.
그 위대함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믿는 그런 믿음의 발로에서 온 것입니다. /믿/
오래 전에 어떤 증권회사의 광고로 기억이 됩니다. ‘모두가 예 라고 말할 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모두가 아니오 라고 말할 때 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자’는 광고였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큰 사람이고, 큰 능력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모두가 예라고 하는데 아니오 라고 하려면 왕 따가 되든지 아니면 큰 불이익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니오 라고 해야 되는지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 사람은 그 뒷감당은 하나님께서 해 주실 줄로 믿고 나아갔습니다. 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하거나 자기들이 큰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그 뒷일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인도하실 줄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맞습니다. 오늘도 이렇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두가 예 할 때 아니오 해야 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멘입니까?/
더 놀라운 것은 이 세 사람이 죽음의 두려움마저도 이겨냈다는 것입니다. 풀무 불에 던져지면 죽을 뿐 아니라 아무 것도 남지 않고 다 연기로 사라져갈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자기들을 끌고 가던 사람이 그 불길에 이미 타 죽는 장면을 바로 옆에서 보았습니다. 이제 죽음이 자기들 의 코앞으로, 다가 와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저들이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 세 사람은 아직 청년들입니다. 한참 인생의 꽃을 피우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때입니다. 아직 죽음을 생각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죽는다면 여한도 많고 너무 억울하고 그래서 선뜻 죽음과 맞서서 싸울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죽음 앞에 담대하게 맞섰습니다. 그야말로 ‘죽으면 죽으리라’입니다. 얼마나 멋있는 신앙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두려움을 물리쳐야 합니다. 당장 내게 닥칠 고난에 대한 두려움을 물리쳐야 합니다. 심지어 그것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도 물리쳐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이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게 해 줍니다.
잠3:25절에 ‘너는 창졸간의 두려움이나 악인의 멸망이 임할 때나 두려워하지 말라’
시118:6-7절에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내게 어찌할꼬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요일4:18절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믿는다고 다 같은 믿음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하시면’의 신앙으로, 또 어떤 사람들은 ‘그리하실 줄로’의 신앙으로 주를 믿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세 친구들은 ‘그리 아니하실찌라도’의 신앙으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이 신앙이 우리들의 신앙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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