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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증거 하는 베드로! (행 2:22-28)

by 【고동엽】 2022. 3. 20.

예수를 증거 하는 베드로! (행 2:22-28)

 

  한마디로 베드로의 설교의 주제는 한 마디로 '예수'입니다. 그의 설교의 본문은 구약 시편의 말씀을 본문으로 삼고 예수님의 생애와 그 구약의 예언의 말씀을 비교함으로써, 이 예수님이야말로 '주와 그리스도'되신 분이라고 증거한 것이 바로 신약교회의 최초의 공식 전도설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단순한 설교가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심령을 감동시킴으로써, 예루살렘 교회는 그 날 하루에 삼천 명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할/


  ▶초대교회에서는 4가지 유형의 설교가 있습니다.
  ⑴케리그마: 실제로 본 것을 선포하는 설교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3년 동안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행하신 기사와 표적들이 많았습니다. 이 사실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⑵디다케: 가르침입니다. 선포된 사실의 뜻과 의미와 내용을 설명하고 질문을 하고 답변을 하는 문답식 설교를 말합니다. 부흥회 때나 세미나 때 이런 설교를 많이 사용합니다.
  ⑶파라 클레시스: 권고, 근면입니다. 성도의 의무와 책임과 사명을 다하도록 권고, 권면하는 설교입니다.
  ⑷호밀리야: 인생의 모든 분야를 성경 본문을 통해서, 기독교 입장에서 다루는 설교입니다. /할/

 

  ①복음의 핵심을 전하고 있습니다(22).
  완전한 설교는 위의 4가지가 다 내포된 설교라야 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이 4가지가 잘 배열된 설교입니다.
  베드로는 누구에게 설교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사람에게'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그 당시 유월절 행사에 15개국으로부터 찾아온 동족들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릅니다.
  이 존칭은 무엇입니까? '너희 모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들으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를 통하여 큰 권능과 이사와 표적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베드로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증거한 것입니다. 즉 '나사렛 예수'라는 명칭 자체가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예수님의 생애는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으로 가득 채워진 생애입니다. 그것을 두고 베드로는 '너희도 아는 바'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행하신 기적들은 '너희 가운데서 베푸신'것, 즉 그들  자신이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 것들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기사와 표적을 부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사와 표적은 인정을 하면서도 다만 '바알세불'에 힘입어 행하였다고 비난했습니다(마9:34).
  베드로는 예수님의 기사와 표적을 근거하여 설교한 것은 예수님의 메시아 성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그분은 메시야이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는 바'라고 한 것은 그들이 알기는 알면서도 믿지는 않는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으로 끝나야 합니다. /할/
  22절은 '공동 성경 번역'에서는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내 말을 들으시오. 나사렛 예수께서는'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의 설교 서두의 말은 한마디로 예수님이십니다. 기독교의 복음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예수님이십니다. '복음, 복된 소식, 기쁜 소식, 예수 소식' /할/
  행8:26절 이하에 보면 에디오피아 국고 장관인 내시가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리고 돌아가는 길에 병거에서 이사야 53장을 읽으면서 갑니다. 그때 빌립집사가 그 병거로 가까이 가서 물었습니다.
  '당신이 읽고 있는 말씀 중 주인공이 누군지 아시오?'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어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이때 빌립은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빌립은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예수님의 좋은 소식을 전해준 것입니다.
  바울은 롬1:1-4절에서 '이 기쁜 소식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본 절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는 '이는 내가 보낸 그리스도니라!' 그 증거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행하심으로 증거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덩이로 5천명을 먹이시고 열 두 광주리를 남기는 큰 권능을 행하셨습니다.
  또 기사를 행하셨는데, '기사'란 주로 자연계에 일어나는 이적을 말하는 것으로 '바람아! 잠잠 하라! 풍랑아 멈춰라!'고 명하실 때 다 그분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 다음 '표적'은 주로 사람에게 일어난 사건으로 문둥병이 낫고 앉은뱅이가 일어서고, 소경이 눈을 뜨고, 죽었던 사람을 살리는 표적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 나사렛 예수를 통하여 행하셨던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은 예수님의 사역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메시아이심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아멘!/

 

  ②십자가를 전하고 있습니다(23).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정하신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피하고 싶어했습니다. '아버지여, 이 십자가를 피할 길은 없습니까?'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마26:39)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십자가를 지려고 오신 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요 구원의 계획입니다. 그래서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된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법 없는 사람은 율법을 모르는 로마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 법은 세상의 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놓고도 말씀을 모르는 저들 로마인들에게 예수님을 넘겨주어 죽였습니다. /할/

 

  ③부활을 전하고 있습니다(24).
  베드로의 설교의 초점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에 있습니다.' 베드로는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음이니라!'고 밝혔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롬1:4절에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할/
  그렇습니다. 마귀는 예수를 사망의 공통 속에 집어 놓고 빗장을 걸었습니다. 죽음이라는 빗장을 예수께 걸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를 죽음의 무덤에서 계속 머물러 있게 하신 것이 아니라 삼일만에 '사망의 고통의 빗장을 열어 주셨기 때문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주께서 부활하신 사건은 그분이 '죄가 없으시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의 설교의 핵심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신' 역사이었고, 부활의 당위성에 대하여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이, 인간을 죽음에서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 되신 그 예수님 본인이 죽음에게 매여 있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활 사건이야말로 예수님이 그 약속하신 메시아였다는 사실을 가장 확실하게 증거 해 주는 '증거 제1호'가 되는 것을 설교하고 있습니다.  /아멘!/

 

  ④하나님 우편에 계심을 전하고 있습니다(25-28).
  사도 베드로는 여기서 놀랍고도 절묘하게 구약성경에서 다윗의 부활신앙을 안용하고 있습니다. 시16:8-11절을 인용한 것인데 다윗이 쓴 이 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시편을 인용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구약의 예언의 성취임을 증명하는 게 그 목적이 있으나 유대인들이 베드로에 대한 편견을 그들이 가장 존경하는 다윗 왕의 말을 인용함으로 없애 주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16편에서 다윗 자신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혈통에서 오는 메시아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시16편은 메시아의 대표적인 시입니다.
  25절에서 다윗은 벌써 영적으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본 사람입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날마다 영적으로 '내 앞에 계신 주'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자에게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시고 주님과 가까이 하는 성도와 함께 하십니다. /믿/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얼마나 멋있는 신앙의 고백입니까? 다윗은 예수가 십자가에 죽었다가 3일 만에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지금은 우리 주님은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믿/ 우리가 그분의 보호 속에 있기 때문에 요동치 않습니다.
  26절의 '이러므로'는 주께서 항상 내 우편에 계셔서 요동치 않게 하시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항상 주 앞에 있을 때에 주님은 나로 요동치 않게 하여주시고 또 우편에서 나를 붙들어 주시므로 마음이 기쁘고 입술도 즐거워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육체도 희망에 거하게 됩니다. 잠4:22절에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얻은 자에게는 그것이 자신에게 생명이 되고 육체의 건강이 된다는 것입니다. '육체가 희망에 거한다.'는 말씀의 더 큰 의미는 '육체는 썩을 수밖에 없지만 부활이라는 소망이 있기에 기쁨과 희망이 넘친다'는 의미입니다. /아멘!/
  어찌 세상에 기쁜 일만 있겠습니까? 눈물날 일도 있고 고통스러운 일도 있고 여러 가지 실수도 있고 수치스러운 날도 있고 병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을 가진 성도는 '그 마음이 기쁘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부활 신앙 때문에 감옥 안에서도 우리를 향하여 권면하기를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4:4-5)고 했습니다. 
  27절에서는 성도의 영혼은 절대로 음부에 버려지지 않습니다. /믿/ 그 이유는 예수 부활은 내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한 것입니다.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을 천 년 전에 예언했습니다. 그 예언이 성취되어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고 베드로는 설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다윗이라면 꾸뻑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장 존경하는 다윗의 시편을 들어 그들은 이해시키고 있습니다. 
  28절에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다윗은 그 당시도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주께서 부활을 주셔서 영생의 길을 주셨기 때문에 기쁨이 충만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생명의 길을 발견한 사람은 기쁨이 충만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기쁨의 비결을 압니다. 아무리 오래 산 사람이라도 내일 죽는다면 절망입니다. 그러나 요11:25-26절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어도 살겠고' 예수님께서 영원한 세계를 약속해 주셨기 때문에 충만한 기쁨에 거할 수가 있습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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