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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의 성취로 오신 예수! (마 2:13-23)

by 【고동엽】 2022. 3. 20.

예언의 성취로 오신 예수! (마 2:13-23)

 

  구약은 수없이 예수님의 '탄생, 죽음, 부활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약을 보면서 이것을 빨리 깨닫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에 나타난 예수님의 관한 예언과 기록은 실체에 대한 하나의 그림자로 모형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고전13:12절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구약은 어떻게 봐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봐야 합니다. 구약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신약을 통해서 구약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구약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한 역사가 아니고 구약의 역사는 나와 상관이 있고, 나의 구원의 가장 기초가 되는 말씀임을 새삼스럽게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 가지 예언의 성취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①13-15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애굽으로 피신하는 사건입니다.
  마태는 이 사건을 호11:1절의 응답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님이 피난을 가셔야만 할 이유는 '하나님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애굽으로 피난을 가도록 지시하였기 때문이며, 또 이 일이 있을 것에 대하여 구약성경 호11:1절에서 예언하셨기 때문'입니다. 호11:1에서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렀다'고 하셨습니다.
  호세아는 주전 570년경의 선지자였으므로 그는 약 750년 이후에 하나님의 아들이 '애굽으로 가시게 될 것'을 예언하였고, 그 예언은 예수님이 피난하시는 형편으로 성취된 것입니다. 호11:1절의 뜻은 '하나님이 430년 간 애굽에서 고난과 고통 속에 살던 이스라엘을 광야 40년 세월을 거처 가나안 땅으로 불러낸 사실을 잊고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소흘이 하고 있다'고 경고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 중에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불러내신 것'처럼 하나님이 '예수님을 애굽에서 불러내셨다'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마태는 그 '불러내셨다'는 말씀을 '예수님이 애굽에서 나오실 것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베들레헴에서 애굽까지는 약 1500마일이나 됩니다. 갓난아이와 산모를 데리고 수천 마일을 피난 가는 것은 참으로 무리한 일입니다. 첩첩산중, 험악한 광야 길을 걸어서 애굽으로 피난하는 일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주의 사자의 지시를 따라 곧 순종합니다.
  여기서 동방박사의 순종보다 요셉의 순종이 더욱 빛이 납니다. 동방박사의 경우는 단순하게 다른 길을 돌아가 버리면 되는 것이지만 요셉의 경우는 이제 출생한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와 산모들 데리고 고국 이스라엘을 떠나 외국으로 피난 가는 것입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폭적으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때나 무슨 일이나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의무인 동시에 특권입니다. /믿/
  주의 사자의 지시는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는 내용입니다. 헤롯이 주후 2년에 죽기까지(19절) 약 6년 간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특별섭리를 베푸셔서 예수님을 보호하셨으며 이와 같은 보호와 인도는 모든 성도에게도 동일하게 베푸십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는 완벽합니다(시121:1-8).

  ▶요셉의 순종의 모습을 보자(14)!
  ⑴애굽으로: 순종하기 위해서는 정든 고향, 정든 친구들을 떠나는 결단이 요구됩니다.
  ⑵피하여: 순종에는 즉각적인 행동이 요구되고 순발력이 요구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즉시 순종했습니다. 오늘 해야 할 것은 내일로 미루는 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믿/
  ⑶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순종하는 자의 자세는 항상 다음 지시를 기다려야 합니다. /할/
  ⑷거기 있으라: 명령을 기다리는 자세입니다. 참으로 요셉은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순종의 사람을 들어서 쓰시며, 축복하시며 일하십니다. /믿/
  전설에 의하면 예수님이 애굽으로 피난 가실 때 두 번의 위험한 고비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데리고 피난 가던 도중 강도를 만난 것입니다. 강도가 그들을 죽이고 보따리를 빼앗으려고 하는데 그때 강도의 우두머리 격인 '다스마스'에게 어떤 힘이 나타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님과 그의 양친에게 조금도 해를 가하지 못하게 되었고, 아기 예수께 말하기를 '최고의 축복은 받은 자여! 나에게 자비를 베풀 때가 이르면 나를 기억하여 주소서! 그리고 이 시간을 잊지 마옵소서' 간구 했답니다.
  그런데 그 강도두목이 후에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으며 결국 십자가상에서 예수로부터 용서를 구원받은 우편 강도라는 것입니다. 이 우편 강도가 바로 아기 예수를 구원해준 강도 두목 '다스마스'라고 합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학설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전설은 예수께서 애굽으로 피난 가던 도중 저녁이 되어 몹시 피곤한지라 어디에서 쉬고자 할 때 마침 동굴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들어가 쉬었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유난히 바람이 세차게 불어 동굴 안이 너무 추웠습니다. 이때 동굴 속의 거미 한 마리가 이 모습을 보고 '내가 이 추운 날 아기 예수를 위해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급히 동굴 입구로 나가 거미줄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한참 후에 아기 예수님이 잡아죽이라고 명령을 받은 헤롯 군대가 이 동굴 앞에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조장 격인 한 군인이 '혹시 여기 숨었는지 모르니 수색하라!'고 하자, 한 병사가 뛰어가 동굴 입구를 보더니 '여기 거미줄 좀 보십시오, 사람이 들어갔다면 이 거미줄은 걷고 들어갔을 텐데 거미줄이 삼 겹이나 쳐 잇는 것을 보니 이 속에는 사람이 없는 게 분명해요!' 그럽니다. 그리하여 위기를 모면했다는 전설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성탄절 트리에 금실 은실을 치는 것이 이러한 전설에 기인한 것이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⑴하나님이 아기 예수를 보호하고 계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위기와 절망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우리를 지키십니다. /할/
  우리에게 작은 위기가 있는 것은 큰 위기를 막기 위해서요, 작은 고통이 있는 것은 큰 고통을 예방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섭리입니다.
  ⑵애굽으로 피난 가는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교훈은 하나님은 필요하실 때는 꿈으로 역사하시고, 천사를 사용하셔서 급한 위기를 극복하게 하십니다. 여기서 천사는 돕는 이웃을 표현한 말입니다. /할/

 

  ②16-18절까지는 렘31:15절의 성취로 베들레헴의 통곡소립니다.
  헤롯이 하룻밤을 지나도록 기다려 봤으나 동방박사들이 오지 않자 속은 줄을 알고 심히 화가 났습니다. 헤롯이 무엇을 부탁했는가? 7-8절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예수님을 찾는데 있어서 박사들이 제일 열심이고 그 다음에 헤롯왕이었습니다. 헤롯은 예수님을 잡아죽이려고 하기 때문에 관심이 큰 것입니다. 헤롯이 박사들에게 아기 예수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자기에게도 알려주면 헤롯 자신도 가서 예수님께 경배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죽이려고 마음먹었으면서도 겉으로는 경배하겠다고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항상 거짓되고 악랄한 수법으로 우리를 공격합니다.
  우리가 먼저도 말씀드렸지만 헤롯은 성품이 잔악하여 죽이는 일에는 노련한 사람입니다. 그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유대인의 최고기관인 산헤드린을 없애기 위해 300만의 위원들을 살해했고, 첫째 부인에게서 낳은 후계자로 주목받던 아들을 살해하였고, 둘째 부인에게서 두 아들이 태어났는데 부인과 두 아들을 살해하였습니다.
  헤롯은 아내와 자식마저도 자신의 왕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되면 가차없이 살해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기 위하여 유대 나라에 2살 이하의 사내아이는 모두 살해하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충분히 그렇게 할 잔인한 임금입니다.
  그 당시에 '헤롯의 아들이 되느니 차리리 돼지가 낫다' 하는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헤롯은 예수님이 태어나시고 얼마 있지 않아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에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마을의 유지들을 다 잡아다 감옥에 넣어라! 그리고 내가 죽거든 그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온 나라에 곡하는 소리가 들리게 하여 온 국민의 '나의 죽음을 이렇게 애도하는구나'하는 소리를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헤롯이 죽은 뒤에 이 명령은 실행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잔악 무도한 헤롯이기에 어린이들을 학살하는 일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는 한 살 아래 아이로서는 만족하지 못하여 두 살까지의 아이에게까지 학살 영을 내렸습니다. 베들레헴만으로도 불안하여 그 근방까지 확대했습니다.
   18절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이 사실은 주전 550년경의 선지자인 예레미야가 미리 예언한 것이 응한 것입니다. 렘31:15에서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레헬이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 하였도다'라고 한 말씀을 응용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은 그때로부터 약1,000년 전에 야곱의 아내 라헬이 베냐민을 낳으면서 난산할 때 신고(아픔으로 인한 슬픔)한 사실을 말씀하시면서 예레미야 당시에 국운의 쇠약으로 말미암아 온 민족이 라헬 같은 슬픔을 당할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바로 서면 머지않아 하나님이 다시 위로해 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창35:16-20, 렘31:15-17).
  이때에 예레미야 선지자는 약1,000년 전의 라헬의 슬픔이 그 민족에게 온 것을 말하면서 위로하였는데, 본문을 기록한 마태 역시 예레미야서에 나타난 말씀 중 라헬의 슬픔이 약800년 만에 어린이를 학살당한 부모들에게 또 임하였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서 라헬은 야곱의 아내이자 요셉과 베냐민의 어머니로써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어머니로 묘사되어 왔습니다. 라마는 베냐민지파의 성읍이며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에서 가까우며 벧엘로 가는 도중에 위치한 곳입니다. 바로 이 부근에 라헬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라헬이 그 무덤 속에서 죄로 인해 포로로 끌려가는 그 자손들을 바라보면서 통곡하는 것으로 묘사된 것입니다. 옛날에 조상들이 겪은 슬픈 사건은 미래에 있을 슬픈 사건을 예언한 것이며 또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을 교훈한 것입니다.
  여기에 초점은 이스라엘의 어미들(라헬)이 흘리는 눈물에 맞춰져 있습니다. 생떼 같은 자식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모습을 보면서 울부짖는 이스라엘의 어머니들을 묘사한 것이며, 또 다른 이방인 헤롯(에돔)의 학정으로 살해된 다윗성의 베들레헴의 아이들의 어머니가 흘리는 눈물로 그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성장하신 후에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23:37) 하고 우시던 그 통곡과도 이것은 연결시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할/

 

  ③19-23절까지는 사11:1절의 성취로 예수님을 나사렛 사람이라고 부르게 한 것입니다.
  앞 부분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 만은 사11:1절은 굉장히 난해한 구절입니다. 다시 한번 알아보면 '나사렛'은 '싹, 어린 순'이라는 뜻입니다. 나사렛은 구약에는 나오지 않는 지명이지만 사11:1절에 '싹'이란 말이 바로 나사렛과 같은 뜻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나사렛은 갈릴리 남쪽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언덕에 올라가면 세상의 반이 보인다고 합니다. 서쪽에 눈을 돌리면 지중해가 보이고, 동쪽을 바라보면 평원과 요단강이 보이고, 서산으로서는 다메섹과 아프리카와 다리를 놓은 애굽까지 이르는 넓은 길이 보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사렛은 멸시받던 곳입니다. 빈민굴, 술주정뱅이, 노름꾼 등 요사이말로 표현하면 달동네요 쪽방 촌입니다. 요1:46절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빌립이 나다나엘을 전도할 때 나다나엘이 한 말입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이 말은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가 어찌 그리 쪽방 촌에서 나올 수 있겠느냐는 그 땅을 무시하는 말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출신지역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절대 잘못된 편견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고향이 어디인가로 그 사람을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어디서 사느냐? 고향이 어디인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또한 '권력이나 지위나 명예나 부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신분을 묻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베드로를 부르신 주님은 그때 그 모습을 보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훗날 십자가를 거꾸러지고 죽도록 충성하는 그 모습을 보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수없이 많은 예수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우리 메시아 예수는 꼭 '나사렛 예수'라고 합니다. 오직 나사렛 예수님만이 십자가의 능력과 부활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아멘!/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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