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배를 담은 질그릇 렘18:1~6
사람은 누구인가(15)
"사람은 누구인가?" 오늘 15번째 설교를 합니다.
사람이 누구인 것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누구인가?" 오늘 아침 세 가지로 나누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첫째 사람은 진흙이요 질그릇입니다.
성경은 사람을 가리켜 진흙이라고 묘사하고 진흙으로 만들어지는 질그릇이라고 묘사합니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사64:8).
"We are the clay, you are the potter."
"사람과 짐승이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 가니라"(전3:20).
"All come from dust, and to dust all return."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이 그릇은 우리니"(롬9:21, 24).
"We are the pottery." "이 그릇은 우리니."
사람은 진흙이요 질그릇입니다. 사람은 흙으로 지음을 받았고 흙을 밟으며
흙과 더불어 살다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도록 지음을 받은 존재입니다.
오늘 렘18장 본문도 사람은 진흙이요 질그릇이라고 묘사합니다.
그런데 길가에 내버려진 진흙이 아니고,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진흙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렘18:6).
"Like clay in the hand of potter, so are you in my hand."
사람은 진흙이요 질그릇인데,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진흙이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질그릇입니다.
하나님은 진흙인 우리들을 손 안에 담으시고, 우리들을 아름답고 쓸모 있는 그릇들로 만드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시는 질그릇들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질그릇을 만드는 장면을 머리게 그려 보시기 바랍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을 손으로 담아서 뱅뱅 돌아가는 물레바퀴(녹로)에 올려놓고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이면서 그릇의 모양을 만듭니다.
물레바퀴가 돌아가면서 토기장이의 손이 움직이면서 그릇의 모양이 점점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토기장이는 자기 생각에 따라서 접시 모양의 그릇도 만들고
사발 모양의 그릇도 만들고, 찻잔 모양의 그릇도 만들고, 꽃병 모양의 그릇도 만듭니다.
토기장이가 무슨 모양의 그릇을 만들던지 아름답고 쓸모 있는 그릇을 만들려고 할 것입니다.
보기에는 아름답고 쓰기에는 필요한 쓸모 있는 그릇들을 만들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릇을 만드시는 토기장이십니다.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 같이 내가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렘18:6).
하나님은 우리 사람 하나 하나가 잉태되는 순간부터
아름답고 쓸모 있는 그릇으로 만들어 가시는 토기장이이십니다.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시139:13).
우리는 잉태되는 순간부터 또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특히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아름답고 쓸모 있는 그릇들로 지어져 가는 진흙 덩이들입니다.
모세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아름답고 쓸모 있는 그릇으로 지어져 갔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나 사울은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부터
아름답고 쓸모 있는 그릇들로 지어져 갔습니다.
사람은 진흙이요 질그릇입니다. 하나님의 손 안에서 아름답고 쓸모 있는 그릇들로
지어져 가는 질그릇들입니다.
◑2. 둘째, 사람은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이요 다시 만들어지는 질그릇입니다.
오늘 본분의 강조점은 질그릇이 아름답고 쓸모 있는 그릇으로 만들어져 가다가
그만 깨어지고 마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녹로로(물레바퀴로) 일을 하는데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파상하매"(렘18:4).
토기장이가 그릇을 아름답고 쓸모 있는 그릇으로 만들려고 하지만
그릇을 만드는 과정에서 깨어지는 그릇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그릇은 인생의 초기에 깨어지고, 어떤 그릇은 인생의 중반기에 깨어지고,
어떤 그릇은 인생의 말기에 깨어집니다.
오늘 본문은 그릇이 깨어지는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릇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깨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진흙 자체의 잘못 때문이든지, 질그릇을 굽는 가마의 잘못 때문이든지,
또는 어떤 알지 못하는 이유 때문이든지
그릇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깨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자라는 과정에서 깨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인격이 깨어집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는 인격의 진실성과 투명성이 깨어졌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신앙이 깨어집니다.
베드로의 경우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신앙이 깨어졌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도덕성이 깨어집니다.
다윗의 경우는 성적 순결이 깨어졌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건강이 깨어집니다.
에바브로디도의 경우는 불치의 병으로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사람은 깨어질 수 밖에 없는 지극히 연약한 질그릇들입니다.
인격도 신앙도 도덕성도 건강도 쉽게 깨어지는 질그릇과 같은 존재가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 중도에 부서지고 깨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일성수도 포기하고 예배생활도 포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깨어지고 마는 존재는 아닙니다.
한번 실수했다고 해서 아주 넘어지는 존재도 아니고
한번 불치의 병에 걸렸다고 해서 아주 쓰러지고 마는 존재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질그릇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비록 깨어지고 부서질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그것이 끝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소년 시절에 인격과 신앙과 건강이 파손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청년 시절에 어떤 사람은 장년 시절에 인격과 신앙과 건강이 파손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인생의 끝장은 아닙니다.
우리가 토기장이가 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토기장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버리시지 않고 붙잡으시고
우리들의 부서지고 깨어진 인격과 신앙과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고
다시 아름답고 쓸모 있는 그릇으로 만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1985년 2월 4일 죠지 던칸 목사님이 전해준 이야기 하나를 소개합니다.
어느 여선교사 한 사람이 아프리카에서 선교를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완전한 절망 가운데 빠져서 돌아왔습니다.
선교지에서 외로움에 빠져 다른 남자 선교사와 잘못을 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죄를 범했기 때문에 이제는 다시 선교사가 될 수 없다는 절망 가운데 빠져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여자의 마음 속을 어두움이 가득하게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질그릇이 그만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여자 선교사가 던칸 목사님을 찾아와서 상담을 했습니다.
던칸 목사님은 예레미아 18장 말씀을 읽어 주며
하나님께서 깨어진 그릇을 다시 만들어 주시기를 바란다고 말씀했습니다.
그 후에도 목사님과 여선교사 두 사람은 서로 편지로 왕래했다고 합니다.
20년이 지난 어느 해 여름 케직 사경회에서 던칸 목사님은 한 여성을 만났습니다.
그 여성은 환한 얼굴로 던칸 목사님에게 반가운 인사를 했습니다.
"목사님, 저를 기억하십니까?" "예 기억합니다."
"하나님께서 깨어진 저를 다시 빚어 주셨습니다.
저는 다시 주님의 쓰임 받는 질그릇이 되었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큽니다. 저는 몸이 부서질 때까지
토기장이 되시는 주님을 섬길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입니까? 사람은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이요 다시 만들어지는 질그릇입니다.
단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을 때 그것이 가능합니다.
깨어진 질그릇이 회개하는 마음을 가지고
다윗처럼 또는 베드로처럼 "나를 새롭게 빚어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할 때 가능합니다.
바로 이 시간 여러분들도 회개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여 깨어진 나를 새로 빚어 주시옵소서. 나를 새로 창조하시고 나를 새롭게 하소서!"
◑3. 셋째, 사람은 보배를 담은 질그릇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을 가리켜 질그릇이라고 불렀습니다.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쉽게 깨어지고 쉽게 부서질 수 밖에 없는 질그릇이라고 표현했습니다.
"We are the pottery."
"이 그릇은 우리니" 이것이 사도 바울의 인간관입니다.
깨어지기 쉽고 부서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은 존재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의 무익함과 연약함을 누구보다도 강조한 사람입니다.
자만, 위선, 정욕, 명예 등의 약함이 바울을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의 약한 것들을 들어 내놓고 자랑을 했습니다.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고후12:5).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고후12:9).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전2:3).
그러나 사도 바울의 인간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의 인간관을 능가하는 적극적은 인간관을 가졌습니다.
사람은 보기 좋고 쓸모 있는 질그릇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고귀한 보배를 지닌 특별한 질그릇이라고 했습니다.
질그릇은 질그릇이지만 고귀한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 보배는 이 세상의 어떤 보배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생명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0).
"예수의 생명이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1).
사람은 지극히 연약한 질그릇이지만, 가장 귀한 보배인 예수님의 생명을 담은 질그릇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의 생명이 자기 안에서 움직이는 것을 체험할 때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넘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놀라운 사실을 체험했을 때 세상에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능력의 심히 큰 것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어떠한 세력도 바울을 넘어뜨릴 수가 없었습니다.
환난과 핍박과 죽음의 세력도 바울을 넘어뜨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고후4:8-12).
사도 바울 앞에서 마귀도 놀라서 도망쳤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은 누구입니까? 진흙이요 질그릇입니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질그릇입니다.
하나님의 손 안에서 아름답고 쓸모 있는 그릇들로 만들어져 가는 질그릇들입니다.
깨어지는 때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빚어주십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 보배 되시는 예수님의 생명을 부어 주십니다.
주님의 손 안에서 아름다운 그릇들로 만들어져 가시기 바랍니다.
보배를 담은 질그릇으로 멋지게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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