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 하나님의 선물 P1 ~ P3 출3:5, 29:43~46 출처
이지웅 목사
오늘 살펴보고자 하는 성경은 <레위기>입니다
<레위기>는 성경 66권 안에서
굉장히 독보적 위치를 차지합니다
좀 과장해서 말씀드리면, 66권 가운데
레위기를 이해하지 못하면
전체 성경의 거의 절반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면 레위기는 뒤에 나오는
구약의 역사서나 선지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근거와 기초를 제공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이전 성경인 출애굽기가
레위기에서 완성됩니다
여러분 레위기의 첫 번째 단어가 ‘그리고’입니다
‘그리고’로 시작된다는 말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 앞에 있는 책과 연결된다는 말입니다
레위기가 중요한 이유는
구약의 역사서와 선지서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근거와 기초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그 이전 성경인 출애굽기가 완성이 레위기에서 됩니다
뿐만 아니라 사복음서에 언급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설교와 비유와 그 모든 것들을 해석하는
아주 중요한 열쇠가 레위기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레위기를 이해하지 못하면 사실은..
과장해서 말씀드린다면, 성경의 절반 가량을 우리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위험에 빠지게 되죠
레위기를 몰라도 역사서, 선지서, 출애굽기와
사복음서를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러나 핵심이 빠져버리는 겁니다
'왜 예수님께서 그때 이런 말씀하셨을까?'
'왜 이럴 때 이런 비유로 말씀하셨지?'
‘예수님은 왜 이렇게 행동하셨지?’
'여기서 말씀으로 죽은 사람을 살리셨고,
왜 여기서는 사람을 만짐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을 살리셨을까?'
라는 이해는 레위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레위기를 놓치면
사실 우리는 굉장히 중요한 것들을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레위기 1~27장 전반에 언급되어있는
중요한 한 가지 개념이 있습니다
그 개념을 제가 먼저 설명드린 다음에
그 이해를 기반으로 깊이 나가겠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오해하게 하는 것은,
성경을 읽고 공부해도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하고
성경을 오해하게 하는 한 가지 중요한 요인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이분법적 사고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갑니다’ 라고 말하는데 이렇게
교회와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분법적 사고로 성경을 보면,
이분법적 사고로 우리가 세상을 접근한다면
많은 것들을 놓치게 되고, 율법주의적이고
굉장히 위험한 사고방식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나요?
성경은 이 세상을 어떻게 구분할까요?
이분법으로 구분할까요? 아닙니다
레위기는 사실 자세히 공부하지 않아도
그냥 읽기만 하셔도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레위기는 이 세상을 이분법이 아닌, 삼분법으로 나눕니다
<거룩-정결-부정>입니다
레위기에 근거해서 이 세상의 것을 구분하자면
삼분법으로 구분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거룩
두 번째는 정결
세 번째는 부정不淨입니다 *정결치 못함
먼저 <정결>부터 살펴봅니다
정결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원래 상태>죠
그렇기 때문에 여기는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불완전한 요소가 있어요 연약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세요 이건 죄가 아니에요
연약함이 있어요 불완전한 요소가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정결>은 그런 불완전한 요소,
연약함 때문에 쉽게 그 균형이 깨어집니다
(부정不淨 unclean 으로 전락)
예를 들면 ‘욕심’은 죄일까요, 아닐까요?
‘욕심’이란 단어자체가 부정不淨적입니다
(여기서 욕심 : 우리가 뭔가를 원하는 마음상태, desire)
‘욕심’이란 단어자체가 부정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꾸
욕심을 멀리하는 경향이 있고 죄악시 하지만
아무튼 욕심을 ‘뭔가를 원하는 마음 상태’로 정의한다면
그건 갈망 desire 이 되죠
뭔가를 원하는 상태입니다 (이게 사람은 필요하죠)
여러분, 욕심이라는 단어에 구약에 사용된 단어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그 단어입니다
이게 죄는 아닙니다 *‘정결’의 상태
성경에 ‘욕심이 잉태하면 죄가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삼분법이 아니라 *거룩-정결-부정
이분법적 개념을 가집니다 *거룩-부정
거룩하지 않으면 모두 죄로 봅니다
이런 사고를 가지게 되면 늘 불안하고 만족이 없습니다
늘 멍에가운데 머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경험했다 할지라도 자유함이 없습니다
그 이유중 하나는 이분법적 사고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레위기에 근거하면 이 세상을 이분법으로 나누지 않고
삼분법으로 나누는데
정결은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신 그 본래의 모습입니다
거기에는 연약함이, 불완전한 요소가 있습니다
(쉽게 부정으로 떨어짐)
그 불완전한 요소, 연약함 때문에
그 정결의 균형은 쉽게 깨집니다
그래서 그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굉장히 능동적인 노력과 수고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계는, 그 적극적인 노력과
그 수많은 능동적인 노력과 의지를 동원해서
모든 노력을 쏟아 붓지만
그 결과는, 더 나은 상태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결’을 <유지>시키는 겁니다
아무리 내가 노력을 쏟아부어도
아무리 내가 애써도
내가 아무리 결단해도
할 수 있는 것은 ‘정결’을 <유지>할 뿐입니다
절대로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한다 할지라도
정결에서 (위로, 거룩으로) 내가 더 나아지지 않습니다
절대로 거룩 상태로 변화되지 않아요
그 노력의 결과로 단지 정결을 유지할 수 있을 뿐이에요
문제는 뭐냐면, 누구도, 어떤 사람도
정결의 균형이 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갈수록
내가 노력을 쏟아부으면 부을수록
내가 허망함, 절망함에 빠집니다
‘내가 뭐지? 내가 이렇게 애쓰고 수고하는데’
나아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다가 살다보면 죄를 지어요
우리 중에 누가 죄짓지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또 정결의 균형이 깨어져요
그러면 또 좌절하게 됩니다
또 회개합니다 다시 정결로 돌아와요
시간이 지납니다
내 모든 노력을 쏟아 붓습니다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균형이 또 깨져요
그럼 또 부정不淨하게 돼요
그럼 또 절망해요
이것이 계속 반복되어요 (*율법 아래서 삶)
그러면서도 신앙이 나아지지 않아요
절망가운데, 허무함가운데 빠집니다
‘이건 (거룩은)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어!’
거기까지 가게 되요
여러분, 정결은 정상적인 사람이에요
누구도 그 정결의 균형이 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율법적으로) 노력하고 수고하는 그 모든 것의 결과는
단지 그 정결을 유지하는 것밖에는 없어요
그런데 그 정결의 균형이 깨지면 어떻게 됩니까?
레위기에 의하면 부정不淨하게 돼요
여기에서부터 문제가 생깁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거룩-정결-부정不淨
하나님만이 거룩하세요
...........................P2 시작 ........................
◑'거룩'하신 하나님이 '부정'한 인간에게 임재하시면.. 그들이 죽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거룩 - 정결 – 부정이에요.
하나님만이 거룩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수많은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이 나옵니다.
그것을 두 가지로 나누면 ‘공유적 속성’과 ‘비공유적 속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도 가지고 계시고, 우리와 공유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랑, 오래참음, 온유.. 그런 것들이 있겠죠.
또 비공유적 속성 또는 성품이 있어요.
하나님만 가지고 계신 것들입니다.
우리가 비록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 할지라도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 것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인간이 흉내낼 수가 없어요.
뭘까요? 전능, 전지, 무소부재
이것은 하나님의 고유한 속성이요, 하나님만 갖고 계십니다.
비공유 되는 것입니다.
▲그럼 <거룩>은 뭘까요? 거룩은 공유일까요, 비공유일까요?
하나님도 가지고 계시고, 나도 가지고 가지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하나님만 가지고 계신 걸까요?
여러분, 거룩은 비공유입니다.
그건 완벽한 하나님의 것이에요.
완벽한 의, 완변한 빛, 완벽한 생명이에요.
어둠은 조금도 없는 완벽한 빛일 뿐만 아니라
죽음은 조금도 없는 완전한 생명이고
죄는 조금도 없는 완벽한 의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중에 선한 사람이 있더라도
더 착하게 사는 사람이 있지만
그 정도로는 ‘거룩’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거룩’은 인간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이 세상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하나님만 고유로 가지고 계시는 고유한 속성, 성품입니다.
그 고유한 ‘거룩’이란 하나님의 성품!
▲‘정결’의 상태가 깨어져서
‘부정unclean’하게 되면서부터 문제가 생긴다고 앞서 말씀드렸어요.
왜냐면 그 ‘거룩’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신 목적 때문에 그렇습니다.
출29:46에는 하나님이 출애굽시키신 목적과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출29:46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신 목적은 뭘까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거하고 싶으셔서’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세요.
하나님은 이 세상을 ‘정결’하게 창조했습니다.
‘정결’한 상태에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어요.
‘거룩’하신 하나님서는 ‘정결’한 상태가운데 임하실 수 있습니다.
그들가운데 거dwell 하실 수 있어요.
문제는, ‘정결’의 균형이 깨어져 ‘부정’이 되었을 경우에는
‘부정’한 상태에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오면 즉시 죽습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부정’한 상태에 임하시는 즉시
그 ‘부정’은 깨어지게(변화되게) 되어 있습니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 ‘정결’의 균형이 깨어져
‘부정’하게 되면서부터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과 함께 거하시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 내셨어요.
왜요? 같이 있고 싶으셨어요. 같이 (동)거하고 싶으셨어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정결’의 균형을 잃어버리고
‘부정’하게 되었어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임하시는 즉시, 그들은 죽어버립니다.
그리고 부정한 상태에서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올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함께 거하고 싶으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셨음에도 불구하고
거하실 수 없는 상태가 되었어요.
▲여러분은 오늘 정결하세요, 부정하세요?
만약 여기가 구약교회라고 한다면,
여러분이 예배당안에서 ‘하나님, 여기 임재해 주십시오’ 기도한다면
그래서 하나님이 임재하셨을 때,
살아남는 사람은 정결한 사람이고,
부정한 사람은 다 죽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에서는 ‘하나님 오시옵소서’
이런 기도를 함부로 못 합니다.
오늘 우리는 정말 은혜의 시대에 살아요.
죄송하지만 우리는 건방지게 하나님 앞에 마음대로 나가서 구해요.
그러나 보세요, 구약에서 이것은 살 떨리는 일이에요.
내가 ‘정결’하게 되었다면 거침이 없어요.
자꾸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임재라는 것은
사실은 축복인 동시에 양면성을 가졌어요.
하나님의 임재 자체가 심판이 되는 거죠.
사실 사도바울이 이 개념을 신약에 가지고 왔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다 축복인가요? 아닙니다.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그 자체가 심판입니다.
구원 얻을 자들에게는 축복이겠지만요
예수그리스도의 나타나심과 십자가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 모든 개념은 여기 레위기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임재는, 여러분, 항상 축복으로 오지 않습니다.
부정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임재는
그 자체가 심판이고 멸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정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원래 상태인 정결로 회복되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정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원래 상태인 정결로 회복되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질문입니다.
내가 노력했지만 부지중의 실수로, 연약함으로
아니면 어떤 죄로 말미암아 정결의 균형이 깨어졌어요.
그래서 부정unclean하게 되었어요.
그러면 다시 정결clean의 상태로
회복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습니다. 방법이 뭘까요?
그게 바로 제사 sacrifice입니다.
레위기에서, 죄로 인해서 부정하게 된 경우에는
반드시 제사로 회복되어 집니다.
그러나 어떤 연약함, 어떤 실수,
죄가 아니에요.
여러분 제가 지나가다가 어떤 사체를 밟았어요,
죽은 동물요, 그게 죄인가요?
그건 죄가 아니죠. 그건 연약함이요, 실수이죠.
그런 연약함과 실수, 즉 죄가 아닌 경우에는
레위기에 의하면 제사에 의해서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 ritual’ 즉
옷을 빨고, 저녁까지 기다리는
어떤 의식을 통해서 회복되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레위기에 보시면 이런 것들이 잘 구분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런 것들을 우리가 잘 모르면
무조건 회개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무조건 제사드려야 된다고 생각한다든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부정에서 정결로 회복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제사, 하나는 의식입니다.
아무튼 정결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래 상태이고
그 균형이 깨지면 부정하게 되고
그 부정한 상태에서는,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를 받는 경우
그 부정은 깨지게 되고
부정한 상태에서는 거룩한 하나님께 나아올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세 가지 상태입니다.
-거룩 holy
-정결 clean
-부정 unclean
▲이것 한 가지 기억하시겠습니까?
정결은, 모든 노력을 쏟아부어도
아무리 의지를 일으켜도
할 수 있는 최선은 그냥 ‘정결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결의 아주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정결은 절대 다른 상태에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언제나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정결이 부정과 맞딱뜨리면
반드시 정결은, 그 균형을 잃어버리고 부정하게 됩니다.
기억하세요. 정결은 절대로 다른 상태에 영향을 주지 못해요.
그래서 정결이 부정을 이기는 유일한 길은
피하는 것밖에 없어요.
반드시 정결이 부정과 부딪히면
정결은 정결을 잃어버리고 부정하게 됩니다
정결은 항상 영향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이 세가지 상태 가운데 영향을 주는 것은 2가지입니다.
‘거룩’과 ‘부정’
▲‘부정’은 영향을 줍니다. 미칩니다.
부정이 정결을 만나면 100% 이깁니다.
정결과 부정이 싸우면, 맞딱뜨리면 100% 부정이 이깁니다.
그러나 부정이 거룩을 만나면
부정은 깨집니다.
절대로 부정은 거룩을 이길 수 없습니다.
‘거룩’은 정결을 만나면,
정결을 거룩하게 합니다.
거룩이 부정을 만나면 깨어지죠.
그러니까 거룩은 항상 영향을 주게 되어있어요.
정결은 항상 영향을 받게 되어 있어요.
부정은 (정결에) 영향을 주기도하고 (거룩에)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질문입니다. 그러면 지금 한국교회는
이 세가지 상태 중에서 어디에 처해 있을까요?
여러분 기억하세요!
거룩은 그 자체로 영향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정결은 절대 영향을 미칠 수가 없어요.
부정도 영향을 줍니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교회는
이 세가지 상태 중에서 어디에 처해 있을까요?
왜 한국교회가 영향을 잃어버렸을까요?
성도가 줄어들어서요? No
목사가 설교를 못해서요? No
교회숫자가 줄어들어서요? No
돈이 없어서요? No
선교갈 사람이 없어서요? No
한국교회가 힘을 잃어버린 유일한 이유는
거룩함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정결’은 그 자체로는
절대 영향력을 못 미칩니다.
항상 (부정이나 거룩으로부터)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모든 노력을 다 쏟아부어도
그냥 정결을 유지하는 것 뿐입니다.
정결이 부정을 이기는 유일한 길은
그냥 부정을 피하는 것밖에 없어요.
한국교회가 어디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는 사회에, 또 다른 교회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unclean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거룩이나 부정은 항상 영향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성도 수가 많다고
힘이 생기지 않습니다.
초대교회의 모든 기독교인 숫자를 다 합친 것이
지금 서울의 기독교인 숫자보다 적습니다.
그러나 그 초대교회 성도들은
온 나라에 영향을 미치고도 남았습니다.
뭐가 있었겠습니까?
돈이 있었습니까, 교회가 컸겠습니까?
직업이겠습니까, 학벌이겠습니까? 아니에요.
그들이 영향을 미쳤던 유일한 이유는 뭐냐면
그들 가운데 거룩함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죄를 미워함이 있었어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저는 이 교회를 사랑합니다.
제가 스위스에 있을 때부터 많이 지켜봐 왔습니다.
여러분의 교회는 무엇을 가지시겠습니까?
1907년 평양에 대부흥이 일어났을 때
그 모든 부흥의 시작은 회개부터 시작했습니다.
죄를 두려워하는 마음,
그 작은 죄도 아파했습니다.
그리고 ‘부정’이 자기에게 올까봐 두려워했던 마음이었어요.
그 ‘부정’을 깨버리는 거룩함!
하나님 앞에서 그 신실함,
거기서부터 평양대부흥이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그 거룩을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과거에) 거룩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도 잊어버렸습니다.
‘거룩, 그거 옛날에 있었던 것 같아’
그러면서 그게 무엇인지 잘 몰라 합니다.
이제 거룩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거룩을 맛을 봤어요.
그걸 본 사람들은 비록 잃어버렸다 할지라도
‘아하 그거’ 하면서 알게 되는데
이제는 시대가 지나서
거룩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시대가 되었어요.
여러분, 교회의 희망은
성수의 숫자에 없습니다.
그 거룩함의 힘은
성도의 수에 있지 않습니다.
성도 숫자에 목맬 필요가 없습니다.
재정에 있지 않습니다.
말 잘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교회의 교회다움은 거룩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룩은 빛과 같습니다.
여러분, 어두운 상태로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누가 한국교회에 어둠을 가져왔습니까?
누가 가져온게 아니라
빛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어둠이 온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해야 빛이 어둠을 이길 수 있습니까?
빛이 오면, 어둠은
빛이 오는 속도보다 같거나 더 빠른 속도로 도망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를 비난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어둠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빛(거룩)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어둠을 다시 정복할 수 있겠습니까?
어둠과 싸우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에요.
빛을 가져와야 해요.
빛을 가져오면, 그 빛이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빛나기 시작합니다. 어둠이 물러갑니다.
여러분, 거룩은 생명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어둠’을 ‘빛의 부재’라고 정의한다면
빛이 없는 상태를 어둠이라고 정의한다면
여러분은 죽음을 뭐라고 정의하시겠습니까?
뻔하죠, 생명이 없는 상태가 죽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착각하는 것은
‘사망이 생명을 삼킨다’는 착각입니다.
사망이, 죽음이, 생명을 이긴다는 것이에요.
아니에요.
고후5:4절에 ‘죽음이 생명에 삼키운다 되었다’고 했어요.
반대입니다.
죽음이 생명을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생명이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지금 우리가 살아있습니다.
우리가 죽음에 머무는 시간은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우리가 이땅에서의 모든 삶을 다 마치고
우리가 이땅에서 육신으로 사는 삶을 다 마치고 죽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두려워하는 그 죽음
그 생명이 없는 상태, 즉 죽음에 머무는 시간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아마 잠깐 사이 밖에 안 될걸요?
이 땅에서의 마지막 호흡을 하고
내 눈이 감겨 곧바로 뜨는 순간
우리는 예수님 품안에 있는 것이잖아요. 잠깐입니다.
여러분, 죽음은 절대 생명을 이길 수 없습니다.
죽음이 가득한 이유는,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오기 시작한다면, 빛이 오기 시작한다면
어둠은 그 설 자리가 없기 시작합니다.
죽음은 절대 생명을 이길 수가 없어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우리가 그 두려운 죽음가운데 머무는 시간은
정말 순간도 안 되는 것입니다.
왜 그것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며 매여서 사십니까?
아니요 그것은 소망인 것입니다.
내가 이 땅에서 모든 육체의 호흡을 다 마치고
주께서 내게 주신 부르심과 사명을 다 마치고
눈을 감았다 뜨면
여러분, 죽음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절대로 죽음이 생명을 삼키지 못한다는 것이
고후5:4절입니다.
그것이 곧 거룩(빛. 생명)입니다.
여러분의 교회가 무엇을 가장 가지기 원하십니까?
그 거룩이 있나요?
그 생명되신, 빛되신 거룩이 있다면
여러분의 교회는, 인원과 상관없이, 영향을 미치게 되어있습니다.
그 거룩, 그 거룩함이 다시 회복되면 좋겠어요.
그럼 또 질문해볼까요?
...........................P3 시작 ........................
그런 균형이 깨지면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정결 clean’이 깨어지면 ‘부정 unclean’하게 되죠.
그래서 ‘부정’은 거룩함으로 나올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해야 될, 요구되는 조건은
원래 상태인 ‘정결’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제사 sacrifice 로 회복될 수 있어요.
(정결)의식 ritual 으로 회복될 수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거룩하게 될 수 있을까요?
답은, 정결이 거룩에 접촉되면 됩니다. 임재를 통해
어렵지 않습니다.
구약성경, 모세오경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받아
드디어 장막을 완성하죠.
‘모세의 장막’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시면 모세의 장막은 크게
3가지로 별명이 불리어집니다.
1) 증거막 tabernacle of the testimony
아마 증거궤가 그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 같아요
구약성경에 4번 나옵니다
2) 성막 tabernacle – 82번, 꽤 많이 이 이름으로 부릅니다.
한글로 성막은 ‘거룩한 텐트’라는 뜻입니다. *dwelling place라는 뜻
3) 회막 tent of meeting – 구약에 146번이나 나옵니다.
성막, 증거막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이 언급된 명칭이 ‘회막’입니다.
‘모세의 장막’의 첫 번째 정체성은 ‘거룩한 곳’이 아니라 ‘만남의 장소’입니다.
그게 장막 성막의 첫 번째 정체성인데
만남의 장소, 모임의 장소이라는 뜻입니다.
이 회막이란 이름이 굉장히 의의가 있어요.
한글로 ‘성막’이라면 ‘거룩한 장막’이란 의미로 이해되기에
좀 가까이 가기 두렵죠.
그렇지만 회막이란 히브리어는 그 단어 자체로 일반적인 언어입니다.
우리가 그냥 야유회 가서, 해변가에 가서 치는
텐트에 해당되는 바로 그 단어입니다. 그냥 텐트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든 텐트입니다
그게 회막입니다.
그런데 그 회막이 순식간에 거룩한 성막이 됩니다
어떻게요?
그냥 이렇게 벽돌로 만들어진 어떤 공간이
순식간에 거룩한 곳이 되어버립니다.
그냥 우리가 밟고 서 있는 이 땅이
잡초가 있고, 자갈이 있고, 잘 정돈되지 않은 어지러운 땅인데
그 땅이 순식간에 거룩한 땅이 됩니다. 어떻게요?
우리가 입고 다니는 이 옷이
그냥 아무데나 길거리나 시장에서 산 옷인데
이 옷이 순식간에 거룩한 옷이 됩니다. 어떻게요?
출29:43 ‘내가 거기(회막, 성막, 증거막)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을 인하여 회막이 거룩하게 될찌라’
하나님이 거기 임하시면, 하나님 자신으로 인해서
그 일상적인, 시장에서 구할 수 있는 천으로 만든 텐트가
순식간에 거룩한 곳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임재로 말미암아!
여러분, 출3장 기억하시나요?
하나님께서 미디안 광야에서 모세를 만나셨어요
출3:5 ‘네 신을 벗어라’
왜요?
‘네가 선 땅은 거룩한 땅이다’
말이 안 됩니다
왜냐면 그 당시 미디안 땅, 지금 모세가 서 있는 미디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이 단 한 번도 그 전까지 밟지 않았던 땅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거기선 한 번도 예배가 드려지지 않았던 땅이에요.
우상숭배 하던 땅, 더러운 땅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세요.
‘아니야, 네가 선 그 곳은 거룩한 땅이야!’
여러분, 잡초가 있는 땅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 바깥에 있는 땅과 똑같은 땅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세요.
‘아니야, 너는 지금 거룩한 땅에 서 있어!’
순식간에 그 일반적인 땅이 거룩한 땅으로 바뀐 겁니다.
어떻게요? 우리가 다 알아요.
답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로 말미암아 그 곳이 거룩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룩의 속성은
인간이 자기 노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성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구별 apartness)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수여되는 것입니다.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거룩입니다.
거룩은 절대로 내가 (애써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 노력과 모든 수고로
내 의지를 일으켜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서요!
그 하나님의 임재로 말미암아
(접촉된) 땅이 변화되고
옷이 변화되고
공간이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거룩의 힘은 뭔가요?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이 그곳에 계시면
그 곳은 거룩한 땅이 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한 번 적용해 볼까요?
그러니까 거룩의 핵심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여러분, 이 교회는 지금 건물 6층에 위치해 있어요.
그래서 초행길인 제가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곳은 거룩한 곳일까요, 아닐까요?
거룩하다고요? 왜요?
하나님이 임재하시니까!
그럼 여기가 교회라는 타이틀이 있기 때문에 거룩한 건가요?
아닙니다. 타이틀이 거룩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앞으로 30~40분 있으면 우리가 다 예배를 마칩니다.
그럼 다들 집으로 돌아가십니다.
그러면 여기 빈 교회당은 거룩한 곳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집은 거룩한 곳인가요, 아닌가요?
여러분의 집이 거룩한 곳이라면 왜요?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면 그렇습니다.
직장은요? 학교는요?
계속 질문 드립니다.
그러면 교회와, 가정과, 직장과, 일반 길거리
그 중에서 가장 거룩한 땅은 어디일까요?
하나님이 계신 곳이겠지요.
하나님이 계시니까 그곳이 거룩한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라는 타이틀이 거룩을 보장해 주지 않아요.
아무리 ‘교회’라는 타이틀이 있다 해도
거기에 하나님의 임재가 빠져버리면 정결, 부정으로 전락합니다.
절대로 거룩은 타이틀이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거룩을 보장해 주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중요합니다.
그러면 그곳이 거룩한 곳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거룩한 곳으로 만들고 싶은 곳이 있으신가요?
내 가정, 내 직장, 내 학교, 내 강의실이
언제까지 빼앗기고 살겠습니까
첫 번째 기억하세요.
정결 clean은 절대 힘이 없습니다.
정결은 항상 영향을 받게 끔 되어있어요.
거룩이든, 부정이든,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게 되어 있어요.
질문드립니다. 그 하나님의 임재를 원하시는 분이 계세요?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그걸 원치 않는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제 질문의 뜻은
‘여러분, 거룩을 얼마나 원하세요?’
우리 중에 하나님의 임재를 원치 않는 분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을 원치 않는 분이 어디 있습니까?
이 소중한 금요일, 토요일에 집회에 나왔는데
그걸 원치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질문의 핵심은
‘여러분, 얼마나 원하세요?’
‘여러분, 어느 정도의 거룩함으로 만족하시겠습니까?’
‘성이 안 차야 돼요’
여러분 죄와 싸우는 일에 성이 안 차야 돼요.
여러분 어느 정도의 거룩을 경험하시렵니까?
어느 정도의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시면 만족하시겠어요?
여러분 하나님의 임재가 신내림 입니까? 그렇지 않잖아요.
골2:3 ‘그(그리스도)안에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숨겨져 있느니라’
시16:11 ‘주께서 내게 생명의 길을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여러분, 나의 모든 지혜와, 지식과, 기쁨과, 보화가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습니다.
다른데 기웃거리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다른데를 찾아 헤매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은 그 하나님의 임재안에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성경이 명확히 설명합니다.
여러분 아무리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열심히 사역한다 할지라도
순간적으로 외로움이 있어요.
저도 열심히 사역해요.
목사는 외로움이 없을줄 아세요?
공허함이 없는 줄 아세요? 있어요.
순간적으로 오는 공허함이 있습니다.
아무리 기도하며 살아도
순간적으로(짧게) 찾아오는 공허함과 외로움이 있습니다.
절대 다른 데서 찾으면 안 되는 것이에요.
내게 필요한 모든 보화는 모든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 있어요.
▲이것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예가 요15장 포도나무 비유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비유로서 가장 탁월한 비유 중 하나입니다.
아버지는 농부, 예수님은 포도나무, 우리는 가지입니다.
세상에 이런 단순함의 이런 기쁨을 가질 수 있어요?
없어요.
여러분 포도나무의 농부이신 하나님 아버지가
포도나무 가지에 대해 가지시는 기대는 무엇이겠습니까?
오직 하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가지고 계신 계획이 뭔지 모르겠어’
뭘 모르십니까? 그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열매를 맺길 원하세요.
재미있는 것은 열매는 가지 끝에 맺힙니다.
그런데 열매를 맺기 위해 애쓰고 수고하고 집중해야 되는 것은
가지 끝이 아니라,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는 반대편입니다.
그래서 아이러니 하게 열매를 더 많이 맺기 위해
가지 끝에 집중하면 할수록 탈진합니다. 실망해요.
열매가 맺혀지지 않아요.
열매가 맺혀도 마른 열매가 맺혀져요.
너무 아이러니해요.
열매는 분명 가지 끝에 맺혀지지만
그 열매가 더 많이 맺히기 위해, 더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해
애써야 할 부분은 가지 끝이 아니라
반대로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바로 그 부분입니다.
저는 지난 월요일에도 목사님 두 분을 만났습니다.
저는 사역특성상 수많은 선교사님들을 만납니다.
여러분 목사님들이 얼마나 수고하는지 아세요?
월요일에 만난 분은 지난 13~14년 동안
자기 삶을 내팽개치고 교회를 돌보신 분이에요.
여러분 선교사들이 얼마나 애쓰고 수고하는지 아세요?
그런데 열매가 없습니다.
그럼 놀았겠습니까? 밤 잠 못자고 애썼습니다.
어떤 사역자가 열매를 원하지 않겠어요? 다 원합니다.
참 아니러니 한 것은, 열매를 맺기 위해
아니 열매를 더 빨리 맺기 위해
사역자가 가지에 집중합니다. 가지에 집중해요.
수많은 프로그램에 집중합니다.
'이 사람만 교회를 도와주면.. 이 프로그램만 하면 잘 될 거야...'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럴수록 교회는 말라가게 되어있어요.
열매는 먹지 못할 열매를 맺습니다.
물론 열매는 가지 끝에 맺힌다 할지라도
그 열매가 온전하고 풍성히 맺히기 위해
애쓰고 수고하고 집중해야 될 곳은
저 반대쪽인 가지가 나무와 연결되어 있는 바로 그 부분입니다.
가지가 나무에 잘 붙어있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잘 거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임재하심 가운게 거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풍성한 은혜들은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 안에 없어요. 선교사 안에 없어요.
어떤 유명한 사람, 능력 많은 사람 안에 있지 않습니다.
내게 필요한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 예수 그 안에 있습니다.
그 안에 거하면, 잘 붙어있기만 하면
여러분, 너무나 아름다운 열매를 우리가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느 정도까지 원하세요?
어느 정도까지 거룩을 원하세요?
어느 정도까지 하나님의 임재를 원하세요?
우리가 예배드릴 때
정말 살아있는 임재를 경험하고 싶지 않으세요?
여러분, 하나님의 임재는 말로 형언할 수 없어요.
왜냐면 그 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세요.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의 임재가 있으면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도 깨달아집니다.
내가 지은 죄가 너무 한심해집니다.
예배가 시작되지 않았어요.
아직 찬양이 시작되지 않았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로
내 안에 있는 죄가 뼈에 사무치게 싫어져요.
그래서 스스로 회개합니다.
스스로 자기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위로 받기 시작해요. 소망을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빛 가운데 나아가기로 결심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살아계신 하나님이 임재입니다.
우리가 그 안에 붙어있기만 하면, 우리가 그 안에 거하기만 한다면
여러분 너무 자연스럽게 붙어있어요. 너무너무 잘 붙어있어요.
▲많은 분들이, 저희가 사역지를 방문할 때마다, 제게 이런 기도를 해 주십니다.
‘불의 종 되게 해 주소서’
‘능력의 종 되게 해 주소서’
불의 종이 무엇인지 제가 잘 모르겠어요.
불의 종도 계시겠지만, 그게 핵심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우리교회 담임목사님은 늘 주님 안에 거하게 해 주십시오.
늘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게 해 주십시오.
그의 생각이, 그의 하는 모든 말들이, 그가 품은 모든 마음들이
주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시편의 말씀처럼 그의 마음에 품은 묵상들과
입술의 모든 말들이 주의 앞에 열납되게 해 주시옵소서
주님 안에 거하게 하시고, 주님을 두려워하게 하시고, 따라가게 하시고
늘 주님 앞에 머물게 하소서.’
그게 불의 종보다 백 번 낫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혹시 힘든 일이 있으세요?
지금 긴급하게 결정해야 되는 일이 있으세요?
힘을 빼세요. 차라리 그 문제를 옆에 갖다 내려놓으세요.
그게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그럴수록 우리가 이렇게 결단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는 가지입니다.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는 가지입니다. 나는 주를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나는 주를 떠나서 열매를 맺지 못할 정도가 아니라
주를 떠나서는 살 수조차 없습니다.
나는 가지입니다!’ 라고 선포하셔야 됩니다.
아니면 지금 성공가운데 계세요?
하는 일이 너무너무 잘 되세요?
그래도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하나님, 제가 지금 하는 일이 너무너무 잘 됩니다.
내가 하는 모든 사업이 너무너무 잘 됩니다.
그러나 나는 가지입니다. 나는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걸 인정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붙어있을 때
그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 거하기 시작할 때
그 그리스도안에서 풍성한 지혜와 그 은혜와 그 놀라운 기쁨!
여러분 쾌락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불이 번쩍번쩍 거리는 곳에서도 기쁨이 있을 수 있겠죠
그건 더러움 기쁨입니다.
그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깨끗한 기쁨
그 순전한 기쁨, 우리가 그런 게 필요합니다.
여러분 다른 데 기웃거리지 마세요.
너무 외로우세요? 너무 힘드세요?
네 지금이 하나님앞에 달려나갈 때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사모하며 도우심을 받을 때입니다.
구약성경의 하나님의 임재는
신약성경의 성령충만과 같이 갈 수 있습니다. *동등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임재를 간구하십시오.
다른 말로 성령의 충만을 간구하십시오.
여러분, 성령은 파워이기 이전에
초자연적인 현상이기 이전에
성령은 살아계신, 인격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은 아세요.
내 기도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아세요.
입에서 나오는지, 아니면 정말 갈급함에서 나오는지..
우리가 하나님의 충만함 가운데 거할 때
그 거룩으로
온 성도의 삶과 온 교회안에 가득할 때
하나님은 새 일을 하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힘은, 돈에 있지도 않고
유명한 사람에 있지도 않고, 말 잘하는 설교자에 있지도 않고
건물에 있지도 않고, 성도 숫자에 있지도 않고
거룩함에 있습니다.
그 거룩함을 하나님은
이 교회에 주기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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