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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하는 자를 복되다 하리라(약 5:7-11) / 이수영 목사

by 【고동엽】 2021. 12. 27.

인내하는 자를 복되다 하리라


약5:7-11


새문안교회 주일예배


설교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여러 차례 반복되어 나오는 단어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참는다"는 단어입니다. 이 "참는다"는 말이 먼저 7-8절에서 세 번 나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10절에서도 이 단어를 볼 수 있습니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11절에서는 "참는다"는 말 대신 "인내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이렇게 볼 때 오늘 본문은 전체적으로 "참고 인내하라"는 권면의 말씀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왜, 어떻게 참고 인내하라는 말씀인지를 차례로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먼저 "무엇을" 참고 인내하라는 말씀이겠습니까? 본문 첫 절인 7절이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했듯이 "그러므로"라는 말로 이끌리는 것으로 보아 오늘 본문을 바로 앞서는 구절들 속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6절 말씀에서 "너희는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한 것으로 보아, "악한 자들로부터 부당하게 정죄를 받거나 죽임을 당하는 것과 같은 일"을 참고 인내하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왜" 참고 인내하라는 것입니까? 이에 대한 답은 8절과 9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즉 만유의 유일하신 심판주이시고 공의로 심판하실 주님의 강림이 가까웠으므로 참고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 강림이 가깝다는 것은 꼭 실제로 아주 가까운 장래에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뜻으로만 이해할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 때는 언제가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주의 강림이 가깝다는 것은 주님의 강림이 어느 때에 이루어질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마치 주님께서 바로 문 밖에 서 계신 것처럼, 언제든지 이루어질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지금 악한 자들로부터 부당하게 정죄를 받거나 죽임을 당하는 처지에 있으나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고 정의로 심판하실 수 있으니 참고 인내하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9절에서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한 것은 얼핏보면 전후문장과 상관없이 불쑥 튀어나온 말씀으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악한 자들로부터 부당하게 정죄를 받거나 죽임을 당하는 것과 같은 일"을 참고 인내하라는 본문전체의 말씀과 동떨어져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다 깊이 생각해보면 부당하게 정죄를 받거나 죽임을 당하는 것과 같은 힘든 상황에 처하다 보면 같은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도 서로 짜증내고 상처주는 말을 하게 되며 불평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서로 원망하지 말라"는 권면과 "참고 인내하라"는 권면은 잘 어울리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또 "서로 원망하지 말라"는 말씀은 야고보서 전체 속에서 반복되어 등장하는 주제, 즉 "자기 혀를 재갈 물리고 서로 비방하지 말라"는 말씀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어떻게" 참고 인내하라고 합니까? 첫째는 "농부"처럼 참고 인내하라고 합니다. 7절을 다시 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했습니다. 농부의 예를 들며 참고 인내하라고 말하는 야고보의 생각은 아마도 신11:13- 17의 말씀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거기 보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내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 가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두렵건대 마음에 미혹하여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것에게 절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이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께서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적당한 때에 필요한 대로 비를 내려주실 것인데, 그것을 믿지 못하고 미혹을 받아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참고 견디며 때를 기다리지 않고 하나님 외의 다른 것들이나 우상을 의지하려고 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비록 지금 악한 자들로부터 부당하게 정죄를 받거나 죽임을 당하는 처지에 있으나 끝까지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다른 어떤 사람이나 방법을 의지하여 어려운 처지를 면하려 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선지자들"처럼 참고 인내하라고 합니다. 10절을 봅니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저자는 여기서 어떤 선지자들을 가리키는지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지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선포하라고 주신 말씀을 전하는 일은 항상 고통과 자신의 신변에 대한 위험이 동반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특히 예레미야나 이사야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메시지를 성실하게 전함으로써 이방의 왕들로부터 뿐 아니라 특히 자국민들로부터 엄청난 고난을 당해야 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을 따라 행하고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온갖 고생과 죽음까지 감수한 믿음의 선진들의 사례를 길게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11:37에 보면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그냥 "어떤 이들은"이라고 했으나,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중간시기의 전통에 의하면 그 어떤 이란 바로 이사야 선지자라고 합니다.






셋째는 "욥"처럼 참고 인내하라고 합니다. 11절을 봅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욥은 그가 당하는 고난의 이유가 이해되지 않는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매어달렸고 하나님 안에 소망을 두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욥1:20-22을 보면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했습니다.






2:7-10에 보면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했습니다.






16:19에서는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고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니/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중재하시기를 원하노니" 했습니다.






19:25-26에서는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했습니다.






본문 마지막 절은 이렇게 부당하게 정죄와 고난과 죽임 당함을 인내하는 이들을 가리켜 "복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인내하는 이들을 가리켜 "복되다"고 말합니다. 선지자들이나 욥처럼 참고 인내하는 이들을 가리켜 "복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1절을 봅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우리가 참고 인내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또 우리가 참고 인내할 때, 하나님께서는 결코 무정하거나 무관심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그의 무한한 자비와 긍휼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고 인내하는 이들은 복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서 욥의 경우를 보라는 것입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사람이 당할 수 있는 고난의 한계를 경험한 욥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결말이 무엇이었습니까? 욥기 마지막 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그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셨다고 했습니다(42:10). 욥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이전에 알던 이들이 다 와서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으며 그를 위로하였다고 했습니다(42:11). 하나님께서 욥의 말년에 그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셔서,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게 되었다고 했습니다(42:12). 새로 아들 일곱과 딸 셋을 얻었다고 했습니다(42:13). 그리고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름다운 여자가 없었다고 했습니다(42: 15). 그 후에 욥은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다고 했습니다(42:16).






이 세상은 참으로 험하고 악합니다. 믿음 따라 행하며 바르게 살려고 하는데 너무나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이유 없이 정죄 당하고, 때려잡겠다고 달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고초를 겪을 때도 있습니다. 악랄하고 집요한 중상모략과 음해공작에 시달리면서도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있어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같은 방식으로 악인들에게 대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참고 인내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 상황을 바꾸어주시기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참되고 유일하신 심판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는 바로 문밖에 가까이 계시며 언제라도 우리에게 임하셔서 바르게 심판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한없는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참고 인내하는 이가 복되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마5:10-12에서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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