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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인 명설교편◑/추천(가) 명설교 300편

그리스도인의 관용 / 빌 4:4~7

by 【고동엽】 2021. 12. 23.

그리스도인의 관용 / 빌립보서 4:4~7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향해 여러 가지 소원을 갖고 계시지만, 특별히 이 험한 세상을 사는 우리가 밝고 건강하게 그리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살길 원하십니다. 세상이 얼마나 악합니까? 세상이 얼마나 더럽습니까? 세상이 얼마나 모순이 많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는 밝고 건강해야 합니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문제가 생겨도 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십니다. 이 3가지 말씀을 가만히 묵상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떤 삶을 살길 원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대로만 순종한다면 정말 세상 사람과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실천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제 이 말씀을 통해 특별히 관용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연말이 되면 우리는 지난 한 해를 돌이켜보는 버릇이 있습니다. '어떻게 잘 살았나? 특별히 대인관계에 있어서 내가 덕을 세우면서 제대로 사람들을 품고 이해하고 살았나?' 하고 반성하는 시간을 갖기도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사람들과 어우러져 그 틈바구니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향해서 내가 얼마만큼 관용했는지 생각해 보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해를 돌이켜보면 고통 하는 날도 있었습니다. 굉장히 우울하고 어두운 날도 있었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겠지만 그 중 하나가 사람들을 품지 못해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너무 까다로워서 우리 스스로 고통하며 어두운 나날들을 보낸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책합니다. '왜 그렇게 옹졸한 마음을 가지고 그 사람을 대했을까?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왜 쉽게 용서하지 못하는 것일까? 용서한다고 해서 내가 손해 보는 것도 아닌데.' '왜 그토록 그의 처지를 이해하기가 어려웠을까? 조금만 이해하고 받아주었더라면 우리 가정의 분위기가 달라지고, 우정 또한 돈독해졌을 텐데. 왜 나는 그러지 못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어떤 때는 부끄러움 마저 느끼곤 합니다.

 

한국인은 좁은 땅에 살고 있어서 그런지 참 조급합니다. 마음도 좁아서 어떤 면에서는 용서를 잘 못합니다. 유머감각도 너무 빈약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반세기 전만 해도 살기가 너무 힘드니까 여유가 없어서 그렇겠지 하고 이해했지만, 지금은 그런대로 살만한데도 점점 더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로 변해가고 다른 사람들을 품지 못하는 좁은 가슴을 안고 사는 모습을 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한국인만이 갖고 있는 고질병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얼마 전 전문적인 여론 조사기관에서 한국을 위시하여 동남아 지역에 있는 여러 나라 젊은이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배우자의 조건이 무엇인가를 묻는 설문조사였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젊은이들의 경우 71%에 해당하는 수가 제 1순위로 '성격'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성격을 가장 원하는지 다시 질문하자 '너그러운 성격'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오늘 우리의 모습을 반영하는 단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평소 가정에서든, 사회에서든 사람들이 너그럽지 못해서 답답하다는 감정의 표현임과 동시에 좀더 너그러웠으면 좋겠다는 마음의 소원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는 관용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당시 초대교회 사람들은 핍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당할 수 있는 모든 손해는 다 당하고 살았습니다. 법적으로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했습니다. 재산을 몰수 당하기도 하고, 자녀들이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기도 하고, 때로는 살고 있던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정처 없이 유랑생활을 해야 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심지어 끌려가서 남모르게 죽임을 당하는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당할 때 자기를 핍박하고 괴롭히는 사람을 향해 적의를 품거나 분노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용서하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태도를 관용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 나와 마음이 잘 안 맞는 사람을 품는 그런 사치스러운 관용이 아니라, 나를 정말 괴롭히고 나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힌 사람을 품는 넓은 마음을 일컬어 관용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이와 같은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 보이라고 명령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말씀 앞에서 얼마나 주눅이 드는지 모릅니다. 조금만 마음이 틀어져도 품지 못하는 형편에 나를 핍박하는 원수를 품어주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나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을 위해 축복을 해줄 만큼 넓은 가슴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 앞에서 부담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관용의 본질은 긍휼, 곧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다른 사람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려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밑바닥에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처지로 내려가서 그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마음가짐이 있을 때 관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예수님을 한번 보십시오. 예수님의 관용의 극치는 십자가를 지실 때,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나타났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너무나 끔찍한 고통과 씨름할 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죽여라', '십자가에 못 박아라' 하고 고함을 지르던 폭도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줄을 모르기 때문에 저런 짓을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에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처럼 용서하고 품는 것이 관용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밑바닥에 있을 때, 우리는 사람들을 향해 마음을 넓게 열 수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긍휼은 함께 살아가는 생활방식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혼자 살려면 긍휼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함께 어우러져 살려면, 서로에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한마디 더 덧붙였습니다. '온 세계를 품을 수 있는 치유의 공간으로 우리의 마음을 넓게 확장하는 것이 긍휼이다.' 모든 사람을 품고 그들의 심신을 고쳐주는 공간, 이것이 바로 긍휼로 넓어진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을 때 누구든지 관용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우리의 마음은 굉장히 이해타산에 예민합니다. 우리에게 좌절을 안겨주고 고통을 안겨주는 사람을 쉽게 품지 못합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했어도, 아무리 목사가 되어 수십 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어도 나를 욕하고, 나에게 고통을 주고, 나를 좌절 시키는 사람을 가슴에 품을 수 있는 여유는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형제를 불쌍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이 내 속에서 일어난다면 그 때는 관용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은 긍휼이 여기는 것은 큰 복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 임이요."(마5:7) 남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진짜 복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2장 1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내가 남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면 하나님도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고 법대로 심판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이 여길 수 있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누군가 긍휼을 통해서 남을 품는 관용에 대해 재미있는 예를 한 가지 들었습니다. 우리 몸 안에 있는 대표적인 소화기관으로 위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유 1리터를 마시게 되면 소에게 있던 알부민이 꽤 짙은 농도로 사람의 혈액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위를 통해 흡수된 알부민이 혈관 속으로 흘러 들어가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유를 주사기에 넣어 사람의 혈관에 바로 투입하면 쇼크사를 당하고 맙니다. 그런데 소의 알부민이 위 안에만 들어가면 우리 몸과 조화를 이루어 몸 속에 자연스럽게 흡수가 됩니다. 우유뿐만 아니라 온갖 음식물이 위 속으로만 들어가면 우리 몸과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어 영양분을 공급하게 됩니다. 이물질이 들어와도 함께 공존할 수 있게 하는 생물학적 장치가 위 안에 있습니다. 이 생물학적 장치를 일컬어 관용이란 뜻의 '탈러런스'(tolerance)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위는 이런 관용의 장치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수필가도 이 관용을 일컬어 재미있는 표현을 했습니다. "자기 안에 자기와 다른 사람을 품는 것이다." 마치 위가 이물질을 다 소화하듯이 관용이란 자기와 다른 사람을 품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기와 다른 것, 자기에게 없는 것에 대한 애정이 바로 관용이다."라고 했습니다. 다르지만 받아주는 것, 틀리지만 품어주는 것, 잘 맞지 않지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끌어안아 주는 것, 이것이 관용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용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어울릴 수 있는 조건이라곤 없습니다. 오죽하면 우리를 하나님의 원수라고 했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맞아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편안하게 품어줄 만한 어떤 근거도 우리에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워주셨습니다. 머리에 하나님의 긍휼로 관을 만들어서 씌워주시고, 우리의 허물을 허물대로 갚지 않으시고, 법대로 우리를 다루지 않으시고,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관용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형제에게 관용하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모든 사람에게 너희 관용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숨은 자리에서 남을 포용하지 말고, 가정에서만 포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정말 마음이 넓다. 정말 대단하다. 하나님의 마음이구나!" 하고 감탄할 정도로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하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얼마나 사람들에게 관용하고 있습니까? 뜻이 잘 맞지 않는 자들을 얼마나 품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을 힘들게 하는 자들에게 얼마나 마음을 넓히고 있습니까? 심지어 해를 끼치는 자들을 얼마나 불쌍히 여기면서 품어줍니까? 그렇게만 했더라면 지난 한 해의 삶이 훨씬 밝고 건강하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문제에도 품어주지 못하고 서로가 갈등하면서 어두운 고통의 시간을 보내진 않았는지 한번 돌이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쉬운 것부터 그리스도의 관용을 실천하도록 합시다. 먼저 교회 안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우리는 관용을 보이도록 합시다. 2절을 보면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이 두개의 이름은 보통 여자 이름으로 보고 있는데 이들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합니다. 빌립보 교회의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많아야 몇 백 명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작은 공동체에서 주님을 섬기며, 당시의 여러 핍박과 고통 속에서 한 형제가 되어 뜨거운 가슴으로 서로를 품어주면서 신앙생활을 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은 빌립보 교회는 지상의 천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러운 마귀가 인간의 약한 것을 이용해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 들어가 이간질할 때가 있습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개는 상당히 헌신적이고 믿음 좋은 부인들인데, 아마도 서로 일을 하다가 그 교회의 지도자들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리더십을 형성하는 핵심 인물이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만 두 사람 사이에 가끔 의견 충돌이 생기고, 서로 맞지 않아 같은 교회에서 상처를 주고 받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서로 관계가 소원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 교회 안에 편이 갈리는 불상사까지 생겨났습니다.

 

교회란 자칫 잘못하면 이렇게 되기 쉽습니다. 교회 환경은 잘못하면 서로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을 수 있는 여지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상처를 입고도 오랜 시간 동안 서로 풀지 못한 채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이런 현상이 크게 눈에 띄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작은 교회에 가 보면 가슴 아픈 사례들이 많습니다. 서로 반목하고 용납하지 못하고 헐뜯는 일들이 교회 안에 비일비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는 "아버지여,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나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날마다 불쌍히 여겨달라고, 나를 품어달라고 기도하면서 실제로 교회 안에서는 형제들을 품고 용서하며 불쌍히 여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큰 모순입니다. 날마다 성경을 통해 사랑하라는 말을 듣고, 설교를 통해 서로 용서하고 품어주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실제는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위선자를 가장 많이 양산하는 곳이 있다면 바로 교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안고 있는 약점인 것입니다.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인간입니다. 우리가 중생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그리스도의 제자된 삶을 살려고 노력하지만 여전히 우리에게는 인간적인 약함이 있고, 부패한 인간의 악한 본성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 서로 상처를 주고 받고 갈등하면서 잘못하면 등을 돌릴 수 있는 여지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이런 약점이 있음을 알고 서로 불쌍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형제에게 완전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옥 목사에게 완전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예수 믿고 중생 받아 하나님을 찬양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긴 했지만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약점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언제 그것이 노출될 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완전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또한 어떤 실수나 잘못을 범했다 할지라도 거기에 얽매여 형제를 보지 마십시오. 잠깐 그 잘못으로 인해 상처를 입을 수는 있지만, 거기에 매여 있어서는 안됩니다. 빨리 우리는 그 잘못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형제의 여러 가지 좋지 못한 것을 잊어버릴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돌려야 됩니다. 사랑과 용서의 능력을 가지고 위험한 감정, 해로운 감정에서 우리는 벗어나야 합니다. 거기에 얽매여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은혜를 구하면서 노력만 하면 하나님께서 긍휼이 여기는 축복, 긍휼이 여길 수 있는 능력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증오를 극복하는 은혜를 우리가 함께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그런 곳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서로의 의심을 극복할 수 있는 곳이 교회이어야 합니다. 소망을 가지고 절망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교회가 체험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교회는 교회다워야 합니다. 한국 교회는 교회답지 못한 면을 너무 많이 보여주어 사회로부터 관심 밖의 대상이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한번 틀어지면 절대 용서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한번 상처 주고 나면 두고두고 그것을 기억합니다.

 

어떤 교회에 가서 사적으로 만나 이야기를 듣다 보면 10년 전의 이야기를 합니다. 교회는 교회다워야 합니다. 교회가 어떤 곳입니까? 형제의 약함을 끌어안는 곳이 교회가 아닙니까? 서로의 실수까지도 함께 짊어지는 것이 교회가 아닙니까? 교회 안에서부터 우리가 불쌍히 여기고 관용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밖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쉽게 말해 그 사람은 아직도 주님의 마음을 닮지 못한 사람인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담을 쌓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오늘 예배 마치고 나가서 금년이 가기 전에 자신을 드러내고 약함을 고백하면서 서로를 품는 아름다운 관계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저도 미워하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계속 생각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제가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찾아 갈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아직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두 번째로는 가족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살과 피를 나눈 혈육의 관계가 가족입니다. 따라서 가족만큼 중요한 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끝까지 같이 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가족 밖에 없습니다. 가족이야 말로 우리가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동안 좌절하지 않도록 항상 새 힘과 위로를 공급 받으며, 마음에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유일한 선물입니다.

 

그러나 한편 가족만큼 가까우면서 서로 상처를 주고 받고, 잘못하면 미워하고 원수 되기 쉬운 관계도 없을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 부모와 자녀 사이, 형제 자매들 사이에서 서로가 용서하고 받아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를 하루도 겪지 않고 넘어가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하루에 12번도 더 용서하고 불쌍히 여기고 받아 주어야 하는 상황들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한 지붕 밑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체면 없이 위세 부리고 큰 소리만 치는 시어머니를 어떻게 받아 주어야 합니까?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을 어떻게 품어주어야 합니까? 바가지를 긁는 아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기적인 딸, 거짓말 잘하는 아들, 공부에 관심이 없이 바깥으로 도는 자녀들, 우리가 어떤 식으로 그들에게 관용할 수 있습니까? 참 어려운 일입니다.

 

조금 지나친 예이지만, 한번은 청주시에 사는 김남희 자매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쓴 글이기 때문에 공개해도 지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남편은 신혼 때부터 바깥으로 돌기 시작하고, 툭하면 온 몸에 멍이 들도록 아내를 구타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버릇이 아이를 둘이나 낳았는데도 고쳐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 부부 사이는 지옥이나 다름없습니다. 부부가 되면 행복한 사람도 있지만 그야말로 지옥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결혼이 지옥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남편이 식사를 하다가 숟가락을 몇 번 툭 떨어뜨리더니 옆으로 쓰러지는 것입니다. 병원에 가서 진찰해보니 '소뇌 위축증' 이라는 희귀 병에 걸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남편은 점점 운동신경이 죽어가고, 나중에는 시력까지 잃어갔습니다. 그래서 점점 쇠약해지다가 나중에 죽어버리는 불치병이었습니다.

 

그는 작은 방이 딸린 가게 하나를 장만하여 장사를 하면서 병든 남편을 간호하고 어렵게 하루하루를 살아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날마다 아내에게 좋은 약을 사오라고, 자기를 고쳐달라고 야단법석을 쳤습니다. 이렇게 8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다가 남편이 고생하는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죽었습니다. 남은 것은 빚과 가난 밖에 없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가게를 팔고, 자녀의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청주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삿짐을 다 꾸린 후 행여나 빠진 것이 없나 하고 내버리기로 작정한 책들을 다시 한번 뒤져보는데, 거기에 눈물 비슷한 걸로 얼룩진 누런 종이가 보였습니다. 무심코 들어보았더니 세상을 떠난 자기 남편이 써 놓은 글이었습니다. "애들 엄마에게"라는 말을 시작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당신이 원망하고 미워하는 남편이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나를 보살펴 주어 고맙소.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날마다 하고 싶지만 당신이 나를 용서할까 싶어서 하지 못했소. 난 당신에게 미움 받아야 마땅하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말 같구려. 여보 사랑하오. 그러나 나를 끝까지 용서하지 마시오." 가족이라는 게 무엇인지, 부부라는 게 무엇인지 세상에서 제일 포용하고 관용하기 힘든 상대가 바로 가족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미 자주 들어서 아시겠지만 지난번 임직식 때 강사 목사님이 와서도 같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TV 프로 중에 노인 부부를 앞에 앉혀 놓고 진행하는 프로가 있습니다. 거기에 참석한 할아버지에게 단어 하나를 주면 아내 된 할머니가 그 말을 알아 맞히도록 갖은 힌트를 주면서 제스처를 하는 프로그램입니다. 마침 이 할아버지에게 '천생연분' 이라는 단어가 주어졌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나와 자네 사이"라고 힌트를 던졌습니다. 그런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할머니 입에서 "웬수"라는 대답이 튀어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할아버지가 "아니, 한 마디가 아니고 두 마디야."라고 말하자, 이번에는 할머니 입에서 "평생 웬수"라고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부부라는 사이가 얼마나 묘한 관계인가를 느끼게 됩니다. 애와 증의 감정이 녹아서 촛대를 이루고, 그 애증의 촛대에서 하나의 행복이라는 불꽃을 피워가면서 그것이 꺼지지 않도록 조바심하며 한 평생을 살아가는 것이 부부 관계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므로 부부 사이, 부모 자식 사이에서는 잘못하면 평생 마음의 분노와 적의를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음의 분노와 미움을 갖고 살면 손해는 내가 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기 시작하면 그 미움이라는 감옥 속에 누군가를 가두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사람을 감옥에 가두면 밖에서 누가 지켜야 됩니까? 다름 아닌 내가 지켜야 됩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밖에서 지켜야 됩니다. 우리가 형무소에 보진 않지만 사실 형무소에는 갇혀 있는 죄수 못지않게 죄수를 지키는 간수도 힘듭니다. 우리는 미움의 감옥 속에 내 남편을 집어 넣을 수도 있습니다. 내 자식을 집어 넣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밖에서 지켜야 됩니다. 이는 똑같이 고생하는 것이고, 똑같이 고통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한 생을 살기 쉽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큰 비극입니다.

 

테레사 수녀에게 한 사람이 찾아 왔습니다. 부부 간의 갈등으로 너무나 어려움을 많이 겪은 사람이었습니다. "수녀님,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하고 충고를 구했습니다. 그러자 테레사 수녀는 "기도하고 용서하십시오."라는 한 마디로 대답했습니다. 이 말은 폭력을 휘두르는 부모 밑에서 고생하는 자녀들이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물을 때 줄 수 있는 답변과 같을 것입니다. 시댁으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는 과부가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을 때 줄 수 있는 답변과 같을 것입니다. "기도하고 용서하십시오." 이 말은 품어주고 불쌍히 여기라는 말입니다. 가정에서 어려운 일이 많이 생기지만 가족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품어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밖에 다른 사람들도 품을 수 없습니다. 아무도 관용할 수 없습니다.

 

금년이 가기 전에 가정에서 사랑하는 자녀들, 아내, 남편, 부모, 형제들을 한번 둘러보십시오. 내가 용서하지 못하는 자가 있는지, 아직도 마음에 담을 쌓고 있는 자가 있는지, 아직도 미워하고 있는 자가 있는지 말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품지 못해 내 자신 지옥 같은 삶을 살면서 세월을 보내진 않았는지 한번 살펴보십시오. 만약 그렇다면 말씀대로 따르시기를 바랍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남편에게 내가 예수님을 모시고 살기 때문에 내 마음이 얼마나 넓은가를 보여줘야 합니다. 아내에게 보여주십시오. 자녀에게 보여주십시오. 나를 미워하는 가족들에게 그 넓은 마음을 보여주십시오. 그럴 때 우리가 살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교회 안에서, 가정 안에서 관용해야 된다는 사실을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끝으로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관용해야 합니다. 세상이 얼마나 악하고 거짓되고 더럽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 아픔과 손해의 대부분은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세상 사람들 때문에 당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으로 인해 우리는 너무나 많은 고통을 직간접적으로 받습니다.

 

정치를 잘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어 왔습니까? 경영을 잘못하는 기업인 때문에 우리의 삶의 터전이 무너져 가족들과 얼마나 어려운 삶을 이어왔습니까? 환경 파괴를 제 마음대로 하면서 자기 뱃속만 챙기는 모리배 같은 인간들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고 있습니까? 돈 없는 서민이야 말로 죽든지 살든지, 집을 구하든지 못 구하든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저 부동산 투기로 아파트나 토지 값을 천정부지로 솟구치게 만들어 자기 잇속만 챙깁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 집 하나 얻으려면 평생 일해도 얻을 수 없도록 만들어놓은 장본인들이 누구입니까?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 때문에 우리 모두 얼마나 해를 당하고 있습니까? 호화롭게 사치하면서 나랏돈이나 축 내고, 대신 국민들의 세금으로 메우려 하는 비양심적인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음주운전으로 교통 사고를 일으켜 애매하게 우리 가족 중 한 사람이 다쳐 평생 장애인으로서 슬픈 인생을 살도록 만드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책임 없이 아이들을 낳고는 제대로 키우지 못해서 그들이 나중에 사회악의 주범이 되도록 만드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그래서 피해보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세상 사람으로부터 너무나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사는 이상 우리는 그들을 향해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관용해야 합니다.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열심히 전도해서 하나님을 아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세상 사람들 앞에 하나님의 자녀임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가정에서, 교회에서, 세상에서 관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한 가지 비결이 있다고 가르쳐줍니다. "주께서 가까이 오시니라." 예수님의 재림을 생각하면 관용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 주님이 구름 타고 오실 것입니다.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계1:7) 그 예수님께서 임하시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서로 상처를 주고 받고, 손해 주고 받던 모든 인간 관계가 다 떠납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한 형제가 되어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그 나라의 영광이 너무나 화려하고, 그 나라의 영광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세상에서 받았던 모든 고통과 상처는 다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 날만 바라보면 어떤 사람도 용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 그날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라도 품어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대통령 후보들이 얼마나 열심히 뜁니다. 대통령의 영광을 생각하면서 그들은 밤낮없이 뜁니다. 그들은 대통령이 되는 꿈을 안고 살기 때문에 웬만한 중상모략을 다 들어도 얼굴빛 하나 바뀌지 않습니다. 많은 욕을 퍼먹어도 그들은 씩씩 웃으면서 다닙니다. 대통령이 되는 그 날을 바라보면서 다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심지어 얼굴에 달걀이 날라와도 씻으면서 씩 웃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대통령이 되는 것이 대단한 것이긴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대통령이 되는 것과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가 누릴 영광과 비교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날을 생각하면 다 참고 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좁아질 때마다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고 하시던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이 활짝 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정에서 답답한 일이 일어납니까? 어떤 사람이 미워집니까? 그럴 때마다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하시던 주님을 기대하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이 넓어질 것입니다. 누구든지 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장 눈 앞에 크게 보이는 일도 작은 일로 보일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세상 사람들 앞에 우리의 관용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와 같은 일에 절대 실패하지 않는 멋진 인생 살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 관용하라는 말씀을 생각하면서 주님 앞에 머리 숙였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마음처럼 넓은 마음을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것처럼 형제를 불쌍히 여김으로 누구든지 내 마음에 품을 수 있는 공간을 가질 수 있도록 축복해주시옵소서. 교회 안에서도 서로 관용하게 하시고, 가정에서도 서로 관용하게 하시고, 이 악한 세상에 나가서도 관용할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하나님, 우리가 더 넓은 마음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품기 위해 날마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고 약속하신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흐려지지 않도록 재림의 소망을 날마다 확실하게 해주시기를 기도하옵나이다. 그리하여 우리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긍휼과 사랑을 체험할 수 있도록 우리를 사용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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