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를 놓치기 쉬운 사람들 / 눅 17:26~37
우리 가운데 전도를 안 해본 분은 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개인으로든 그룹으로든 한두 번씩은 다 전도해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정에서도 안 믿는 식구들을 보면 자주 복음을 전하려고 애쓰는 줄 압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서 사람들로부터 자주 듣는 말이 있습니다. 나중에 믿겠다는 말입니다. 당장 믿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나중에 믿겠다고 미루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 믿는 일이 얼마나 긴박한 일인가를 잘 모릅니다. 아무리 진지하게 설명해주어도 무딘 반응을 보일 뿐입니다.
제가 수년 동안 마음에 두고 기도하는 태신자들이 있습니다. 대각성전도집회에 벌써 3번 이상 참석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들은 믿지 않습니다. 좀더 있다가 믿겠다는 것이 그들의 말입니다. 그래서 답답한 나머지 금년에는 아직 전도용 카드도 안 보내고 태신자 등록도 미루고 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이런 분들이 참 많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예수 믿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씀합니다. 구원이란 당장 믿고 받아야 하는 것이지 자꾸 뒤로 미루면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 고린도후서 6장 2절을 보면 아주 심각한 말씀이 나옵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내일이 아니고 지금입니다. 지금이 예수 믿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품에 안겨야 할 날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조급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13장 11절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지금은 자다가 깰 때입니다. 계속 누워 있을 때가 아닙니다. 시간만 보내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일어나야 할 때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굉장한 긴박성을 가지고 예수 믿는 사실을 다루고 계신데, 사람들은 그 반대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두 가지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 자꾸 미루기만 하면 결국에는 구원을 놓칠 수 있다고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그리고 한번 기회를 놓치면 그 종말이 얼마나 비참해지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노아 홍수요, 둘째는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입니다.
6장에 나오듯이 노아 홍수가 일어나기 전 상황은 이러했습니다. 그 당시 갑자기 인구가 급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동시에 성적으로도 문란해졌습니다. 사람들은 점점 포악해지고 가는 곳마다 폭력이 성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인간의 모습을 보시고는 사람 지으신 것을 탄식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것이 노아 홍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장 심판하지 않으시고 120년이라는 유예 기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노아라는 의인을 전도자로 파송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기간동안 노아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사람은 구원하고, 끝까지 하나님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물로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의 전도는 철저하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자기 식구 외에는 한 사람도 구원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당시에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기 맘대로 죄를 범하던 사람들은 한 명도 남김없이 다 물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소돔 고모라의 심판은 창세기 19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라는 두개의 작은 도시에 유례없이 성적 문란이 판을 치며 폭력이 난무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이를 지켜보신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 성을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나 금방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롯이라는 의인을 통해 그 성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할 수 있도록 수십 년 동안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롯의 식구 외에는 그를 통해 감화를 받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결국 그 성은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두 사건을 놓고 노아 시대나 소돔 고모라 시대에 보였던 반응과 같은 반응을 시대마다 사람들이 계속 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구원에 대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도 긴박하게 듣지 않을 것이라고 이 말씀을 통해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27절부터 29절 말씀을 잠깐 살펴 봅시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비가 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갔다고 말씀합니다. 물론 이것이 잘못됐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세상 일에만 몰입했을 뿐 하나님의 경고는 아주 우습게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장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야 할 일을 자꾸 미루면서 아무것도 아닌 일로 생각하다가 결국 망했다는 말입니다.
롯의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는 것이 잘못됐다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세상을 살면서 해야 될 일입니다. 그러나 롯이 소돔성을 빠져나가는 그날까지 사람들은 자기들 앞에 무엇이 다가오고 있는지를 몰랐습니다. 이런 일이 세상에서 자주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하여 한번 기회를 놓쳐버리면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되고 다시는 구원 받을 기회를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그때가 언제인지를 확실하게 알 수 없는 미스터리와 같은 두 사건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재림이고, 또 하나는 우리 각자의 죽음입니다. 이것은 미스터리입니다. 언제 우리에게 찾아올지 잘 모르지만 반드시 찾아 올 것입니다. 둘 중 어느 것이 먼저 올지 알 수 없지만, 일단 둘 중 하나가 오면 우리에겐 더 이상 기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를 믿지 않은 채 그 시간까지 미루고 거부한다면 절대로 구원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합니다. 성경도 이에 대해 자주 언급하면서 날마다 깨어 있으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사실 안 믿는 사람들에게 재림 이야기를 가지고 예수 믿으라고 권하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가 가까이 왔으니까 지금 꼭 예수 믿으세요. 오늘 안 믿으면 구원 받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아무리 진지하게 권해도 사람들을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재림 이야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교회가 시작되고 나서 1950년이 넘도록 숱하게 들어온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말만 무성할 뿐 아직도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1950년이 지나도록 이루어지지 않은 그 일을 가지고 새삼스럽게 사람들을 긴장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재림 이야기를 가지고는 사람들의 마음에 뭔가 깨우침을 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마치 노아 시대와 같습니다. 노아가 홍수가 임한다고 떠들어댔지만 10년, 30년, 50년이 지나도 홍수가 안 나는데 과연 사람들이 그 말에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오늘 예수님의 재림도 비슷한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을 잘 안 듣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꼭 알아둡시다. 재림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방심하는 사람들에게는 점점 기회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재림에 대비를 안 하면 안 할수록 그들이 구원 받지 못할 확률이 더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주님의 말씀처럼 생각지도 않은 때, 평안하다. 평안하다. 할 때, 밤에 도적이 뚫고 들어오듯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34절) 두 남자가 잠이 든 사이 갑자기 예수님이 재림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이미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잠을 자다가도 주님이 재림하자 구원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미루고 미루다가 준비를 안 했습니다. 그런데 잠자다가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결국 준비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버림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35절도 마찬가지 상황입니다.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임하셨습니다. 마침 한 사람은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 앞으로 인도함을 받았고, 다른 한 사람은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36절에는 없음이라고 나와 있지만, 어떤 사본에는 두 사람이 밭에 나가 일하는데 갑자기 주님이 재림하여 한 사람은 구원 받고 다른 한 사람은 버림받았다고 나옵니다.
우리가 이 말씀에서 중요한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밤에 잠 자지 않고 밖에 나와 하늘을 쳐다보면서 주여, 오늘 오시겠습니까? 내일 오시겠습니까? 하면서 기다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녁에는 자야 합니다. 모든 일을 제쳐 두고 주님 오시기만을 기다릴 순 없습니다. 주부는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가정 일을 열심히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직장인은 직장에 나가서 회사 일에 몰입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럴 때 주님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준비가 안된 사람은 결국 버림받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이렇게 버림받을 사람, 기회를 놓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의 가정에는 없습니까? 전도하면서 자꾸 다음에 믿겠다는 사람을 보면 주님이 재림하실 때 저 사람들이 어떻게 될까? 하고 걱정이 앞섭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상황이 벌어지겠습니까?
또 갑자기 찾아오는 개인의 죽음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봅시다. 죽음이란 나이나 순서대로 오지 않음을 이미 상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남의 일처럼 생각합니다. 우리 나라만 해도 날마다 암으로 죽는 사람이 20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또한 교통사고로 죽거나 중상을 당하는 사람이 하루에 1,200명이 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는 무관한 일로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입장입니다.
요즘은 나름대로 건강관리를 잘 하면 오래 살 수 있습니다. 또 가능한 한 위험한 일, 과로나 스트레스, 음주를 피하면 오래 살게 되어 있습니다. 가령 국가 원수가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국가 원수가 행차할 때면 경찰들의 호위를 받으며 가기 때문에 사고 날 확률은 거의 없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주의하면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김수경 집사님처럼 건강식품을 가지고 사업하시는 분을 보십시오. 가만히 옆에서 보면 날마다 건강 생식을 드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좋은가를 다니면서 강의하십니다. 그렇게만 하면 성인병이나 암에 걸릴 확률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또한 수십 년 전만해도 불치병으로 생명을 잃곤 했는데, 이제는 계속적인 의학의 발전으로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점점 사람들이 생명에 대해서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옛날에는 나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고 신앙고백 하던 사람도, 이제는 내가 생명의 주인인 것처럼 은근히 주인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자고 하면 내가 아직 몇 살까지는 살 수 있는데, 늙어서 힘이 없을 때 믿어야지. 하는 생각에 뒤로 미룹니다. 이런 분들이 우리 주변에 자꾸 많아집니다. 그러므로 평균 연령이 높으면 높을수록 전도하기가 무척 어려워질 것입니다. 동시에 기회를 놓쳐 영원히 구제할 수 없는 자리에 빠질 사람들도 많아질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현실을 보면서 가슴 아파해야 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예수 믿기를 거부하거나 미루는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정말 오래 참으신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악인에 대해서 오래 참으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경험상 악한 사람이 더 오래 삽니다. 작은 교회들을 가보면, 정말 교회 안에서 가시 노릇을 하고 교회가 부흥하지 못하도록 걸림돌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 이상하게도 건강하고 오래 삽니다. 목사들 세계에서도 저 사람이 목사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분들을 보면 건강하게 오래 삽니다. 그리고 세계 역사의 독재자들을 보면 대부분 70세가 넘도록 삽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런 자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고 오래 참으시기 때문입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롬2:4) 좀 어려운 말씀이지만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왜 너를 두고 오래 참고 계시는지 아느냐? 왜 불쌍히 여기고 기다리시는지 아느냐? 네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저의 가정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오랫동안 예수를 믿지 않아서 남은 식구들에게 늘 근심이 되셨던 분이 바로 저의 아버지였습니다. 어머니나 저, 동생들은 믿음이 좋지만 아버지는 아니십니다. 물론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 교회를 습관적으로 다니셨고, 결혼해서 믿는 가정을 이루었지만 정작 아버지는 믿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식사할 때 머리 숙여 기도는 하십니다. 가끔 교회에 나가 찬송가도 부르고 설교도 듣는 것 같습니다. 기도할 때는 눈을 떴다 감았다 하지만 기도는 하십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는 중생을 받지 못한 분이셨습니다. 50대 후반, 세상을 떠나기 1년 전까지도 안 믿으셨습니다. 따라서 가족들의 마음에 늘 근심이 되었습니다. 저러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면 어떻게 하나?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머님의 간절한 기도를 듣고 아버지를 불쌍히 여기신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 30년 전인 50대 후반에, 곧 돌아가시기 약 2년 전부터 병이 아주 심해졌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믿음 좋은 전도인을 아버지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매일 찾아와서 기도해주고 말씀을 들려주며 전도했습니다. 거기에서 저희 아버지가 깨지셨습니다. 가슴을 치면서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아왔던 것을 진정으로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바로 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 떠나실 때는 예수 믿는다는 사실을 확실히 하면서 숨을 거두셨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아버지를 통해 하나님께서 정말 오래 참으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거의 60년을 참으셨으니 얼마나 오래 참으셨습니까?
오늘도 하나님은 이렇게 참으십니다. 우리 생각에는 협박이라도 해서 안 믿는 사람을 믿게 해야 할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는 좀처럼 그런 방법을 쓰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두려워서 믿는 믿음이 아닌 자원하는 믿음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작년 9월 11일, 미국 뉴욕에 테러가 발생했을 때 한 타임지 기자가 이런 기사를 썼습니다. 갑자기 교회 출석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혈액 은행에는 수혈하겠다고 오는 자원봉사자들이 줄을 섰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가정 생활을 소홀히 하고 적당히 살던 사람들은 갑자기 부부 관계가 좋아졌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외적인 변화는 잠깐 계속되다가 그치고 말았습니다. 잠깐 정신차리는 것 같더니, 그 다음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공포를 주고 협박하는 방법으로 예수 믿도록 하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에게도 대부분 그런 버릇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거나 천천히 다가오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이 아무리 무서운 결과라 해도 긴장을 늦추는 약점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이주일 씨가 오랜 투병생활 끝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폐암에 걸려 보기에도 민망한 모습으로 광고에 나와 여러분, 담배는 독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담배로 인해 죽어가기에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에게 담배가 독이니 끊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면 손에 담배를 든 사람마다 담배를 집어 던지고 다시는 안 피울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담배 피웠다고 해서 당장 암에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암세포가 생기려면 10~40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정신을 안 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7월 달에는 우리나라 양담배 판매량이 사상 최고를 기록했는데, 20억 8천 7백만 개비를 수입했다고 합니다. 옆에서는 죽어가면서 담배가 독이라고 해도 듣지 않는 것입니다. 몇 십년 후에 일어날지도 모를 일인데 왜 지금부터 신경을 곤두세우냐는 식입니다. 사람들의 근성이 그렇습니다.
아마 신문에서 보셨을 것입니다. 일본 아사히초자재단에서 90개국에 있는 정부와 전문단체와의 협의 및 설문조사를 통해서 지구의 환경오염이 어느 정도 위험 수위에 있는지를 결론적으로 얻어 냈습니다. 지구환경의 악화정도를 나타내는 `환경위기시계`가 12시를 가리키게 되면 지구는 환경오염으로 파멸되고 맙니다. 그런데 몇 년 전만 해도 9시 전이었는데, 금년에는 9시 5분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9시부터는 매우 불안하다는 사인이 나오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금년에도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유럽, 남미 일부 지역에서 어려움을 당한바 있습니다. 겨울에는 어느 지역에서 고통을 당할지 모릅니다.
이처럼 지구가 점점 파괴되어 가는데 우리는 그다지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설마 하고 그냥 넘겨 버립니다. 우리 나라처럼 무감각한 신경을 가진 나라도 드물 것입니다. 그 정도로 호되게 당했으면 정부가 앞장서 대처하고, 국민들이 정신을 차려 환경을 지키고자 노력할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TV에 방송이 나오면 반짝하고 정신을 차렸다가, TV에서 잠잠하면 다같이 잠잠하고 잊어버리고 맙니다. 사람이란 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당장 예수님이 재림하시지 않기 때문에 그 마음이 담대해져서 예수 믿기를 거부하거나 미루면서 버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당장이라도 자신에게 죽음이 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남의 일처럼 생각하고 자꾸 기회를 미루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도올 김용옥 씨가 이것을 잘 지적했습니다. 달라이 라마와 대담을 한 뒤 돌아와서 최근에 했던 말입니다. 불교는 무신론이다. 불교는 과학이다. 저도 그 말에 동의합니다. 불교는 무신론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80%에 해당되는 사람이 불교 믿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창조자 되신 하나님을 모를 뿐만 아니라 경배하지 않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유명한 기독교 변증학자 C. S. 루이스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가 되는지를 분명하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 없는 삶,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은 남의 것을 어쩌다가 훔친 단순한 절도죄가 아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개선의 필요가 있는 불완전한 피조물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아야 하는 반역자다. 무기를 내려 놓고 항복하면서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 그 동안 잘못된 길을 걸어왔음을 깨닫고 삶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준비를 하는 것, 이것만이 그 사람이 멸망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예수 믿기를 거부하고 하나님 없는 삶을 사는 것은 단순한 죄가 아닙니다. 손에 무기를 들고 하나님을 향해 도전하는 반역죄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무서운 죄를 범하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 받으라고 하면 우습게 생각하고, 지금 당장 예수 믿어야 된다고 하면 피식 웃으면서 하루, 이틀 미루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가슴에 눈물을 담고 안타까워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아버지가 그런 분인가요? 여러분의 남편이 그런 분인가요? 여러분의 부인이 그런 분인가요? 아니면 여러분의 아들, 딸이 그런 분인가요? 이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우리 가슴에 눈물을 담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안타까움이 있어야 합니다.
찰스 웨슬레가 믿지 않는 영국 사람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은 유명한 찬송가가 있습니다. 바로 269장입니다. 웬일인가 내 형제여. Why not believe my brother? 원문에는 왜 믿지 않느냐로 되어 있습니다.. 웬일인가 내 형제여. 주 아니 믿다가 죄 값으로 지옥형벌 너도 받겠구나. 그 찬송가를 보면, 찰스의 마음에 뜨거운 눈물이 솟구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절규하는 가슴이 있어야 합니다. 미루는 자들을 방치하다가 진짜 그들을 영원히 놓치게 되면 우리도 절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안 믿겠다고 자꾸 미루는 남편의 비위를 맞추느라 계속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완전히 기회를 잃어버리고 당신 곁을 떠나게 될 때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때 남아 있는 부인의 마음에 어떤 고통이 임할 것 같습니까? 내 자신도 행복할 수가 없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천국에 가서도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정근모 장로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감동과 충격을 받았습니다. 전 과기처 장관을 지내셨던 정근모 박사님을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그 장로님은 전두환 정부 시절에 청와대 수석 경제 비서관을 하던 김재익 박사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김재익 박사는 예수를 안 믿었습니다. 정 장로님은 그 친구 때문에 늘 마음에 부담을 갖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한번 만나서 꼭 전도해야지. 그러던 어느 날 서로 만날 기회가 닿았습니다. 정 장로님이 김 박사, 오늘 내가 들려주고 싶은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데, 좀 신중하게 들어줬으면 좋겠어. 이렇게 서두를 꺼냈습니다. 그런데 정 장로님이 무슨 말을 할 것인지 미리 눈치를 챘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 말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계속 경제 이야기, 정치 이야기만 쏟아 놓았습니다. 그분은 한창 경제 사정이 어렵던 80년대 그 당시의 한국 경제를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을 지에 대해서만 생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 정 장로님은 더 이상 전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서두만 꺼내놓고는 말을 이어가지 못한 채 그만 시간을 다 보내버리고 헤어졌습니다. 그때 참 마음이 아팠다고 합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너무 바쁘니까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또 한번 기회가 생겼습니다. 정 장로님이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중국정부의 공식 초청을 받아 상하이에서 열리는 국제 원자력 협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소식을 알려줄 겸 해서 김재익 박사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서로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김재익 박사도 몇 일 후에는 대통령을 모시고 미얀마 순방을 가기로 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중국에 갈 이야기, 미얀마 순방을 갈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역시 전도할 기회만 살피다가 그날도 그렇게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정 장로님이 중국 상하이에 가서 협회에 참석하고 나온 어느 날, 뉴스를 통해 아웅산 폭파 테러 사건을 듣게 되었습니다. 조금 후 김재익 박사도 순직했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그의 기록을 보면 그 소식을 들은 후 호텔 방에서 마음을 찢으며 통곡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서둘러 귀국해서 영안실을 찾아갔습니다. 통한의 눈물을 흘리면서 고인의 영정을 쳐다보고 있는데, 마치 그 고인의 영정에서 자기 친구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여보게, 정 박사. 왜 내게 진작 그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어? 조금 일찍 나에게 말해주면 안 되었나? 왜 말해 주지 않았어? 하고 자기를 엄하게 나무라는 듯한 음성을 계속 들었다고 합니다.
우리 주변에도 잘못하면 이렇게 기회를 완전히 놓칠 위험에 있는 사람이 없습니까? 언제까지 그대로 둘 것입니까? 오늘 밤이라도 주님이 재림하신다면, 내일이라도 그 사람에게 죽음이 임한다면, 구원 받지 못한 책임을 누가 져야 합니까? 그 사람의 완악함이 문제라기 보다 우리의 침묵이 더 문제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자신을 믿지 마십시오. 전도할 때는 나를 믿으면 안됩니다. 자꾸 뒤로 미루면서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을 내가 무슨 재주로 설득시킬 수 있습니까? 무슨 재주로 그들의 영혼에 문을 열 수 있습니까? 나 자신을 보면은 입이 안 떨어집니다. 자신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입을 다물어 버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은 오늘도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오늘도 힘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오늘도 어두운 영혼을 꿰뚫고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그것을 믿고 전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사람들에겐 미련한 것처럼 보여도 우리가 담대하게 그 능력을 믿고 전하면 스스로 무기를 손에서 놓고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믿고 돌아왔던 3,000명처럼 형제여, 우리가 어찌할꼬? 하며 가슴을 치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복음의 능력을 믿읍시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언제 그에게 종말이 임할는지 모릅니다. 강원도에 수해를 당해서 하루 아침에 목숨을 잃은 200여 명의 사람들이 과연 자기가 내일 죽을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에겐 내일이 없습니다. 오늘만이 내 날입니다.
그러므로 가족 중 아직도 믿지 않는 분이 있다면 방심하지 마십시오. 예수를 믿도록 가슴에 눈물을 안고 기도하면서 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부르짖으면, 우리가 전하는 예수 한마디 때문에 그 어두운 영혼에 하늘 빛이 비치는 날이 올 줄 믿습니다. 우리를 통해서 이번 대각성전도집회 때에도 수많은 영혼들이 회개하고 돌아와서 그 손에 무기를 놓고 하나님께 두 손 들고 그분의 품에 안기는 아름다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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