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2)/ 마 5:6
오늘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지난 시간에 들은 말씀을 다시 상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배가 고파 죽어 가는 자가 빵 한 조각을 구걸하듯이, 목이 말라 죽어가는 자가 물 한 방울을 사모 하듯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살고 싶어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자에게 우리 하나님께서는 배부르게 되는 은혜를 주신다고 들었습니다. '배부르다'는 말은 만족, 평안, 기쁨, 등을 다 포함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 스도야말로 이 세상에 사셨던 분 중에서 가장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신 삶의 모범을 보여 주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에 주리고 목마릅니까?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갈증을 갖고 있습니까? 작은 예수로서 예수님을 점점 더 가까이 따라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꼭 실천해야 될 것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네 가지가 있다고 지난 시간에 말씀 드렸습니다.
먼저, 구원받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은혜 받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계속해서 세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순종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약간 부정적인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가끔 있습니다. 마음 한 구석에서 이런 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믿으면 그만이지, 꼭 순종하고 실천해야만 하는가? 어차피 완전하게 순종하지도 못할텐데 그것이 하나님께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므로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왜 자꾸 순종, 순종 하는가?' 이렇게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과 감정을 갖고 있는 분들이 계시는데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어느 신학자가 한국교회와 미국교회를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이와 비슷한 글을 써 놓은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가 보는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와 한국의 복음주의 교회가 갖고 있는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삶이 결여된 것입니다. 삶이 결여되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는 하는데 그대로 살지는 않는다는 말입 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배우기는 하는데 순종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순종 하지 않고 죄를 범하더라도 회개만 하면 금방 용서받는다고 하는 자기 나름대로의 자신감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순종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큰 치부요, 복음의 영광을 가리게 하는 주범 이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게 만드는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나친 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순종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은근히 자기 나름대로의 어떤 논리를 펴지 마십시오. 그것은 성령의 소리가 아닙니다. 마귀의 소리입니다. 결혼을 하면 자녀를 갖게 되지 않습니까? 아이가 태어날 때는 부모가 그 아이에게 요구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부모가 다 책임집니다. 책임을 지고 어려움과 고통을 다 감수하면서 정성을 다 쏟아 한 생명을 이 세상에 내보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자녀가 일단 가정에 태어나 내 자식이 되면, 그리고 그 애가 자라면서 조금씩 말귀도 알아듣고, 분별력도 생기고, 나름대로 철이 들기 시작 하면 그 때부터 그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엄마 아빠 말을 들어야 해.', '아빠 말 잘 들어야 사람이 된다.' 이것을 반드시 요구합니다. 만일 이런 요구를 하지 않는다면 부모가 아닙니다. 때에 따라서 순종하지 아니하면 매를 들어 호되게 다루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순종하게 하여 훌륭한 인물이 되도록 요구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 자녀로 삼으실 때 요구하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다 계획하 시어 나 같은 것을 알아 주셨고, 예수님이 오셔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으며, 성령이 오셔서 믿도록 마음을 움직여 주심 으로써 '예수님이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게 하시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거듭나서 하나님 앞에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은 믿음 밖에 없습니다. 그 믿음도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움직이심으로 믿게 하셨기 때문에 생긴 것이지, 우리가 잘 나서 믿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일단 예수 믿고 중생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 다음에는 요구하십니다. '순종하라.' 자기 자식이기 때문에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 성경 말씀이 가르쳐 주는 모든 하나님의 교훈에 순종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순종이나 삶을 과소평가하는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이 있다면 아직도 진리를 아는데 이르지 못한, 영적으로 미성숙한 자리에 있는 분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를 한번 반성해 보십시오.
나는 하나님 앞에 순종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면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까? 들은 것만큼 순종하려고 합니까? 배운 것만큼 살아 보려고 몸부림치는 갈증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정상입니다. 그러나 듣고 다 잊어 버리십니까? 심각한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 산상수훈을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을 다 하신 후에 내리신 결론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 두셔야 합니다. 산상수훈은 화려한 도덕률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강론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7장 26절에 보면 주님께서 마지막 으로 경고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5,6,7장을 통해 주님께서 산상수훈을 다 말씀하셨습니다. 앞에 있는 모든 무리들과 제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감탄했습니다. 감동도 받았습니다. '아, 좋은 말씀이다.'라고 모두가 긍정합니다. 예수님의 권세 있는 말씀 앞에 모두가 다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런 그들에게 경고하십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즉, 말씀대로 사는 순종이 따라오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어 놓은 사람과 같아서 나중에는 하나도 남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누구 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이 사람이 산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진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21절에서 더욱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핵심이 무엇입니까? 이 문제를 놓고 우리가 종종 혼란을 일으킵니다. 아마 카톨릭의 영향도 조금은 있는 것 같습니다. 카톨릭에서는 구원받기 위해 필요한 것이 '믿음+선행'이라고 가르 칩니다. 따라서 행함에 대한 강조가 많고, 선행을 위해 테레사 수녀같이 한 평생 거룩하게 성자처럼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선행을 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꼭 일치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어떤 공로를 세워서 하나님 앞에 인정받으려고 하는 몸부림이 개신교 보다는 훨씬 더 강합니다. 그 이유가 교리에 있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믿음만으로는 부족하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행함이 따라와야 된다고 보는 것이 카톨릭의 교리입니다. 이렇게 한 쪽으로 치우쳐 버린 교리 때문에 믿음 보다도 행함을 더 강조 하다가 카톨릭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자리로 가 버린 것입니다. 참으로 불행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것이 오늘날의 개신교입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믿음을 제자리에 갖다 놓았습니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다. 그렇다면 행함은 무엇인가? 구원 얻는 믿음의 열매다.'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구원 얻는데 행함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거룩하게 행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는 그것이 선이 될 수가 없습니다. 시커먼 검정이 아무리 자기가 흰 것처럼 행동해도 시커먼 것은 시커먼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는 데는 믿음 외에 다른 조건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 믿음으로 구원 얻었습니까? 그러면 그 믿음은 꼭 행함이라는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야고보서 2장 17절은 분명히 선언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아무리 구원받았다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떠들어도 삶이 따라오지 아니하면, 순종이 따라오지 아니하면 그 믿음은 엉터리라는 말입니다. 엉터리 믿음이라면 그 믿음 가지고 구원받을 수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2장 8-10절에는 이 믿음과 행함의 관계가 아주 명료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오직 구원은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만 얻는 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 자체도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따라 나오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셨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선한 일을 행하기 위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 얻었 습니까? 그 다음에는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둘을 따로 나누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병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면서 삶이 따라오지 않는 병입니다. 그 결과 국회 위원이 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제 구실을 못했습니다. 심지어 대통령이 되고 장관이 된 사람들도 제 구실을 못하고 다 사람들 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교회를 지도한다고 하는 목사들도 강단에 세워 놓으면 유창하게 설교는 잘 하지만, 나가서 하는 꼴을 보면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는 것이 너무나 많이 드러나기 때문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 하고자 하는 열정을 가슴 속에 갖고 있지 아니하면 그 믿음은 엉터리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비바람이 몰아치면 나는 구원받은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얼마나 신랄하게 비판하고 책망하고 저주 했습니까? 그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말만하고 행하지 아니한다.'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우리 모두가 아픈 마음을 가지고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사랑의교회도 그렇고, 오늘 한국교회도 그렇고. 우리 모두가 지금까지 듣고 배운 것만 실천 하려고 해도 더 이상 성경을 배우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너무 많이 듣고, 너무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대로만 살면 더 이상 성경을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고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못박았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주님이 언제 믿음만을 강조하시고 행함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으셨습니까? 기독교는 그저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만약에 그런 인상을 주는 설교를 들으셨다면 그것은 믿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한 말이지, 행함을 과소 평가하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안에는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과거하 고는 다릅니다. 어거스틴이 이 사실을 잘 표현했습니다. '예수를 믿기 전, 곧 성령을 우리 마음에 모시기 전에는 우리는 죄 짓지 아니할 수 없는 자였다. 다시 말하면 순종할 수가 없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성령을 모시고 살기 때문에 죄 짓지 않을 수 있는 자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순종할 수 있는 자가 되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심으로 이제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살고 우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하나의 갈증처럼 우리 마음에 남게 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그런 갈증을 일으키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만, 성령을 모시지 않고 육에 속한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왜 기쁨이 없는지 아십니까? 순종이 따라가지 않아서 그렇습 니다. 왜 우리가 성령 충만하지 못합니까? 요즘처럼 훌륭한 목사님들의 설교를 밤낮 으로 들을 수 있는 시대에 살면서, 모든 면이 잘 갖추어진 교회에 다니고 양육을 받으면서 왜 우리가 성령충만하지 못하며 능력 있는 삶을 살지 못할까요? 그 배후의 원인을 찾아 들어가 보면 순종이 따라오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순종하고자 하는 자세가 갖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풍성한 은혜를 주실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순종도 하지 않는데 가슴이 뜨겁다면 그것은 자기 혼자 들떠서 그런 것이지 성령의 감동은 아닌 것입니다.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고 나가면서 가슴이 후끈후끈하여 '할렐루야, 할렐루야!' 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밉고 미운 시어머니가 눈에 탁 들어오자마자 또 감정이 복받쳐 오르고, 미움이 일어나십니까? '네 몸과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도무지 안중에 없습니까? 그래서 내 감정대로 반응하고, 감정대로 행동했습니까?
그렇다면 새벽기도에 가서 받은 은혜는 다 헛것입니다. 다 쓸 데 없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간절함을 가지고 있다 해도 완전하게 순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주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가지고 살면 하나님께서 배부르게 하시는 은혜를 풍성하게 주시는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세상에 보내신 이유가 잃은 양을 찾으라는 것임을 알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는 것이 주님의 그 간절한 마음인 것입니다. 수가성 여인, 창녀를 구원하고 나서 얼마나 주님의 마음이 기쁘셨던지, 제자들이 점심 드시라 고 갖다 드린 음식도 다 잊어버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 '내가 지금 저 여인을 구원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 하실까? 그러므로 나도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될 만큼 기쁘고 만족스럽다.' 벌써 예수님의 배가 부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놓고 공포와 싸우시면서 겟세 마네 동산에서 피눈물을 쏟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결정하셨습니다. '비록 무서운 길이 지만, 하나님께서 이 길을 가라고 하시니 나는 순종하리라. 십자가를 지리라.' 이렇게 결심하고 눈을 뜨시자 하늘에서부터 천사가 내려와 예수님에게 새 힘을 공급 했다고 했습니다.
주님 앞에 순종하기를 원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새 힘을 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하직하면서 주님이 유명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지 아니하노라.' 예수님의 마음에 평안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일치 하는 삶을 살기로 결단하고 순종하고 계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마음에 평안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움직일 수 없고, 아무도 흔들 수 없는 평안을 그 마음에 주셨습니다. '내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때를 따라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하시니 배부른 것입니다. 때를 따라 하나님께서 신비스럽게 나에게 새 힘을 공급해 주시고 능력을 주시니 배부른 것입니다. 상황은 절대 평안할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마음껏 엄마 품에서 젖을 먹는 아이처럼 만족스럽고 평안하고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배부름입니다.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은혜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이런 은혜를 받으면서 세상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네번째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나라를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 님의 나라가 무엇입니까? 아직도 예수 믿지 아니하는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어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서 구원받는 것이 완성되는 것을 일컬어서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나라는 지금도 점점 완성되어 가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뜻을 한 가지로 요약하라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좀더 좁은 의미로 말하면 사람들을 구원해서 자기 자녀 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하나님의 꿈입니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자나깨나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꿈을 갖고 삽니다. 그리고 그 나라가 임하도록 하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오늘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나의 젊음을 어떻게 준비하고 한 생을 보내야 할 것인가? 비록 지금 나이가 들었지만 남은 여생을 어떻게 마무리 할 것인가?'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입니다. 6장 3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사랑하는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모든 것'은 먹고 마시는 문제요, 세상 사람들이 가장 앞세우는 문제이며, 날마다 눈뜨고 하루를 시작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최우선의 과제 입니다. 과거에 풍족하게 살지 못하던 때 인사가 어떠했습니까? 눈만 뜨고 나면 '아침 먹었나요?' 또 하루를 보내고 저녁에 서로 만나면 '저녁 먹었나요?'가 인사였습니다. 항상 '먹었나? 먹었나?'가 인사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만큼 절박한 문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굶는 것만큼 무서운 것이 없지 않습니까? 너무나 배가 고프게 하루하루를 살았기에 '먹었나? 먹었나?'가 인사였고, 그래서 먹었다고 하면 그 사람은 참 복이 많은 사람이고, 못 먹었다고 하면 그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는 세상이 조금 살 만해졌기 때문에 만날 때마다 '아침 먹었나?'고 하면 오히려 모욕처럼 들릴 것입니다. 세상이 그만큼 좋아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세상 사람들의 최고의 관심사는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더 잘 먹고 더 많이 먹을까?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먹고 마시면서 즐길까? 그래서 건강해서 오래 살까?' 이것이 최고의 관심사입니다.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나라만큼 식당문화가 발달한 나라가 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온천지가 먹자판입니다. 식당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관광을 갔다 하면 먹자 관광이 아닙니까? 해외관광을 가면 그 나라의 여러 가지 문화를 돌아본다든지, 그 나라의 전통을 공부한다든지, 그 나라 사람들의 여러 가지 좋은 점을 찾아보려고 한다든지 하는 고상한 관광은 거의 없습니다.
관광을 그렇게 하는 사람은 열에 한 사람도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은 어떤 관광입니까? '먹자 관광'입니다. '어디 맛있는 것이 없나? 몸에 좋은 것이 없나?' 하면서 뱀도 잡아먹고 곰 발바닥이 있으면 값을 묻지 않고 사 가지고 들어오기도 합니다. 온통 먹자판이요, 즐기자 판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리나라에 10마리도 안 남았다는 사향노루를 밀렵꾼에게 청탁하여 3천만원에 사들여서 고아 먹은 사람의 심리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관심사가 무엇입니까? 잘 먹고 건강하고 오래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빼고 나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천대를 받아도 좋다. 120살까지만 살자.' 이것이 세상 사람입니다. 주님도 그것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사람은 먹고 마시는 것을 앞세우지만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를 앞세워라. 너희의 최우선 순위는 하나님의 나라요, 그의 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밤이고 낮이고 너희들은 그것을 앞세워라. 먹는 것 보다 앞세워라. 마시는 것 보다 앞세워라. 배고플 때도 그것을 앞세워라. 고통 당할 때도 그것을 앞세워라. 심지어 생명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에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을 앞세워라.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의 나라를 갈망하고 그 나라를 앞세우면 세상 사람들이 걱정하고 앞세우는 먹고 마시는 문제를 내가 알아서 다 처리해 주겠다.' 이것이 주님의 약속입니다. 우리가 누구인가를 다시 한번 깊이 인식합시다. 우리는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것만큼 우리의 가슴을 부풀게 하는 꿈이 없습니다. 따라서 내가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내가 성공한 사람이든지 실패한 사람이든지, 내가 청년이든지 노년이든지, 내가 성직자든지 평신도든지 가릴 것 없이, 여자든지 남자든지 가릴 것 없이, 어떠한 형편에 있더라도 우리의 관심사, 우리의 최우선 순위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안 믿는 사람을 전도해야 하고, 그 일을 위해서 교회생활을 열심히 해야 하며, 그 나라가 완성되기 위해서 내게 있는 것을 하나님 앞에 기꺼이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몸부림치는 자를 일컬어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윌리엄 바클리가 좋은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 생을 살면서 무엇을 성취하였는가, 어떻게 성공을 하였는가를 놓고 판단하시기보다는 우리가 평소에 어떤 꿈을 가지고 세상을 살았는가로 우리를 판단하신다.' 옳은 말이 아닙니까? 세상에 왔다가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성공했다고 하는 그 자체도 지나고 보면 다 별 볼 일 없는 것이 아닙니까? 다음 세대가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습니다. 아무리 비석을 세우고 야단법석을 해도 2,30년이 지나고 나면 그것이 그것입니다. 성공이나 성공하지 못한 것이나 나중에는 똑 같은 길을 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성공을 했는가, 세상에서 어느 정도 성취를 했는가에 따라 판단하시지 않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판단하십니까? '세상을 살 때, 네 마음에 꿈이 무엇이었는가?' 그것을 가지고 우리의 삶을 평가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 저의 꿈이었습니다. 그것이 저의 소원이요, 최우선 순위의 과제 였습니다.' 아마 우리가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칭찬하실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 된 종아' 여러분의 마음에 있는 꿈은 무엇입니까? 하늘을 한번 보십시오. 카메라로 저 북쪽에 있는 북극성을 중심에 놓고 밤새도록 셔터를 열어 놓고 기다려 보십시오.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북극성은 절대로 바뀌지 않습니다. 위치 변동이 없습니다. 그러나 케시오피아나 북두칠성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밤새 한 바퀴를 돕니다. 그래서 필름 위에는 케시오피아나 북두칠성이 한 바퀴 돈 자국이 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축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주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가 임하는 것이 우리의 꿈입니다. 이것은 변동이 없습니다. 이것을 축으로 놓고 우리의 생활이 항상 회전하는 것입니다. 남자나 여자나 빈부 귀천을 막론하고 매일 똑같은 생활을 반복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축은 하나님 나라이며 이런 삶을 사는 자를 일컬어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가슴에 있는 꿈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가슴에 있는 갈증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가슴의 최우선 순위가 무엇입니까? 사실 저나 여러분이 다 인정하는 것이지만 세상에 무슨 소망이 있습니까? 우리가 이 사회를 좀더 살기 좋은 사회로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이 나라를 좀더 자손들에게 자랑스럽게 넘겨주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 믿도록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임할수록 이 사회는 영향을 받게 되고 이 사회에 여러 가지 병이 치유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정치계가 달라지고 경제계가 달라지고 교육계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아지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저질 선거판을 한번 보십시오. 세금을 떼먹고 사는 사람들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수입을 놓고 보면 다른 사람과 비교가 안 될 만큼 고수입을 벌어들이는 사람들이 세금도 안 내고 살면서 뻔뻔스럽게 국회위원을 하겠다고 나섭니까? 잘 살고, 공부 많이 하고, 사회적으로 내로라 하는 집안은 웬 디스크 환자가 그렇게 많은지, 왜 군대는 그렇게들 안 가는지, 참 희한한 세상입니다.
우리나라가 아직도 어떤 면에서는 저소득 국가요, 저개발 국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의식 자체가 너무나 뒤떨 어졌습니다. 강남역을 지나가다가 전자 오락게임이 한참 요란한 가게 앞에 제가 저도 모르게 멈추어 섰습니다. 중학교 3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여학생 두 명이 게임기 앞에 서서 게임을 하는데, 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자총 이었나 봅니다. 바로 앞 전자판에 무엇인가 나오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니 사람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땅' 하고 총을 쏘자 그 사람이 피를 팍 튀기면서 죽는 것이었습니다. 미동도 하지 않고 중학교 3학년 여학생이 치마 입고 서서 전자총을 어깨에 매고 십분 정도 때려잡는데 한 100명은 죽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 게임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백발백중입니다. 전문가입니다. 나왔다 하면 피를 팍 쏟고 죽습니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저 딸아이들이 저런 식으로 자라서 나중에 무엇이 될까? 저 아이들이 엄마가 되고, 사회에서 어른이 되어 이 사회를 주도하게 될 때 얼마나 인간성이 사나워지고 잔인해질까?' 하는 생각이 들자 소름이 끼쳤습니다. 인간성이 무섭게 파괴되어 가고, 자연이 파괴되어 가고, 예수님이 재림하실 날은 점점 다가오는 이 마당에 우리의 최고의 관심사와 꿈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주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여야 합니다. 그 나라가 임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밤낮 꿈을 꾸고 갈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대각성 전도사역을 왜 합니까? 그것을 왜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위해서는 전도해야 되기 때문에 대각성 전도사역을 하고 '좋은 이웃되기 위한 캠페인'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보에 '1.1.9'라고 하는 재미있는 구호가 나옵니다. 한 사람이 한 가정을 구원합시다.
그래서 한 사람, 한 가정, 구원의 앞 글자를 따서 '1.1.9'가 나왔습니다. 우리가 이런 꿈을 가지고 매일매일 하루를 산다면 우리 이웃에 하나님의 나라가 날마다 임하지 않겠습 니까? 우리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가 전도해서 다른 교회 다 보내면 됩니다. 다른 교회로 보내고 다른 교회도 부흥시키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꿈입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마치 물 한 방울을 마시기 위해서 목말라 하는 사람처럼 갈증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삶의 자세입니다. 오는 7월 2일인가 3일인가 우리 교회에 와서 간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그 때 와서 꼭 들으시기 바랍니다. 과천 교회 김기동 집사님의 그 간증 중에 제 마음을 뜨겁게 하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분은 큰 회사를 2개 경영하는 사장입니다. 아침마다 자동차에 타서 시동을 걸 때 그는 습관처럼 이런 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 오늘도 믿기로 작정한 사람을 만나게 해 주세요. 하나님 믿기로 작정한 사람 만나서 전도하게 해 주세요.' 그의 말대로 하면 이렇습니다. '익은 고구마를 만나게 해주세요.' 이런 식으로 꼭 기도하고 그 다음에 하루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관심사는 전도, 그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나라, 이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느 날 역시 같은 기도를 하고 직장으로 출근을 하는데 빨간 신호등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잠시 기다리고 서 있는데 뒤에서 '꽝' 하고 자기 차를 받았습니다. 내려서 보았습니다. 그러자 뒤 차 기사가 나와서 '전적으로 제가 잘못한 것입니다.'라고 사과를 하는데 보니 범퍼가 반 이상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아마 하나님께서 오늘도 전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느라고 이런 사고가 났구나.'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사고를 낸 사람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범퍼라는 것은 받으라고 달아 놓은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말이 금방 나온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랬더니 상대방이 너무나 놀라서 명함,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이 세 가지를 내 놓고 '어느 것이든 가지고 가십시오. 그리고 제가 모든 것을 배상해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락하기로 하고 회사로 왔답니다.
점심때가 가까워져서 전화를 했습니다. 그 견적을 내 보니 한 100만원 정도 들어갈 피해를 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전화를 했습니다. '네, 아침에 받친 사람인데요. 수리를 하려면 돈이 좀 들겠지만 저는 수리 안 하고 그대로 끌고 다니겠습니다. 그 대신 오늘 점심이나 한끼 사 주십시오.' 그래서 만났습니다. 그 분은 모 외국회사 부사장이 었습니다. 김 집사가 한 시간 동안 자기 간증을 겸해서 예수 믿으라고 전도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후에 그 상대방이 자기도 미국에 있을 때 교회를 몇 년 다녔지만 지금은 다니지 않고 있다고 하더랍니다. '범퍼는 받으라고 달아 놓았다는 말이라든지, 점심이나 사달라고 하는 말을 듣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까 예수 믿기 때문에 그랬군요.' 이렇게 해서 그 부사장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김 집사가 하고 있는 사업 중에 하나가 잘 안 되고 있었습니다. 아주 어려운 사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그 부사장이라는 사람이 이리 저리 도움을 주어서 지금은 그 사업이 불티나는 사업으로 바뀌었습니다. 김 집사가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앞세우고 살았더니 내 회사를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일으켜 주셨습니다.' 너희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세상 사람이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 내가 책임져 주겠다고 주님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바로 이 김 집사와 같은 삶입니다. 우리의 삶의 초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무엇을 놓고 갈증을 느낍니까? 무엇을 놓고 배고픔을 느낍니까? 무엇을 놓고 아침 저녁 꿈을 꿉니까?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 나라의 꿈을 주시고 열정을 주시고 갈증을 주시고 배고픔을 주셔서 우리의 삶 전부가 그것을 중심으로 하루하루 이어지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기쁨으로 찬양 127장에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이사야가 이사야서 11장에서 그린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요, 꿈입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 사막에 꽃이 피어 향내 내리라/ 주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가 되면은 사막이 꽃동산 되리/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어린이들 함께 뒹구는/ 참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사막에 숲이 우거지리라/ 사막에 예쁜 새들 노래하리라/ 주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가 되면은/ 사막이 낙원 되리라/ 독사 굴에 어린이가 손 넣고 장난쳐도 물지 않는'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는 그 나라, 그 나라가 우리의 꿈이요, 우리의 갈증이요, 우리의 배고픔입니다.
그 나라가 오기 전에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과 기쁨과 평안은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지난 시간에 들은 말씀을 다시 상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배가 고파 죽어 가는 자가 빵 한 조각을 구걸하듯이, 목이 말라 죽어가는 자가 물 한 방울을 사모 하듯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살고 싶어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자에게 우리 하나님께서는 배부르게 되는 은혜를 주신다고 들었습니다. '배부르다'는 말은 만족, 평안, 기쁨, 등을 다 포함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 스도야말로 이 세상에 사셨던 분 중에서 가장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신 삶의 모범을 보여 주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에 주리고 목마릅니까?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갈증을 갖고 있습니까? 작은 예수로서 예수님을 점점 더 가까이 따라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꼭 실천해야 될 것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네 가지가 있다고 지난 시간에 말씀 드렸습니다.
먼저, 구원받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은혜 받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계속해서 세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순종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약간 부정적인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가끔 있습니다. 마음 한 구석에서 이런 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믿으면 그만이지, 꼭 순종하고 실천해야만 하는가? 어차피 완전하게 순종하지도 못할텐데 그것이 하나님께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므로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왜 자꾸 순종, 순종 하는가?' 이렇게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과 감정을 갖고 있는 분들이 계시는데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어느 신학자가 한국교회와 미국교회를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이와 비슷한 글을 써 놓은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가 보는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와 한국의 복음주의 교회가 갖고 있는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삶이 결여된 것입니다. 삶이 결여되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는 하는데 그대로 살지는 않는다는 말입 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배우기는 하는데 순종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순종 하지 않고 죄를 범하더라도 회개만 하면 금방 용서받는다고 하는 자기 나름대로의 자신감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순종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큰 치부요, 복음의 영광을 가리게 하는 주범 이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게 만드는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나친 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순종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은근히 자기 나름대로의 어떤 논리를 펴지 마십시오. 그것은 성령의 소리가 아닙니다. 마귀의 소리입니다. 결혼을 하면 자녀를 갖게 되지 않습니까? 아이가 태어날 때는 부모가 그 아이에게 요구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부모가 다 책임집니다. 책임을 지고 어려움과 고통을 다 감수하면서 정성을 다 쏟아 한 생명을 이 세상에 내보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자녀가 일단 가정에 태어나 내 자식이 되면, 그리고 그 애가 자라면서 조금씩 말귀도 알아듣고, 분별력도 생기고, 나름대로 철이 들기 시작 하면 그 때부터 그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엄마 아빠 말을 들어야 해.', '아빠 말 잘 들어야 사람이 된다.' 이것을 반드시 요구합니다. 만일 이런 요구를 하지 않는다면 부모가 아닙니다. 때에 따라서 순종하지 아니하면 매를 들어 호되게 다루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순종하게 하여 훌륭한 인물이 되도록 요구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 자녀로 삼으실 때 요구하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다 계획하 시어 나 같은 것을 알아 주셨고, 예수님이 오셔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으며, 성령이 오셔서 믿도록 마음을 움직여 주심 으로써 '예수님이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게 하시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거듭나서 하나님 앞에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은 믿음 밖에 없습니다. 그 믿음도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움직이심으로 믿게 하셨기 때문에 생긴 것이지, 우리가 잘 나서 믿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일단 예수 믿고 중생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 다음에는 요구하십니다. '순종하라.' 자기 자식이기 때문에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 성경 말씀이 가르쳐 주는 모든 하나님의 교훈에 순종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순종이나 삶을 과소평가하는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이 있다면 아직도 진리를 아는데 이르지 못한, 영적으로 미성숙한 자리에 있는 분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를 한번 반성해 보십시오.
나는 하나님 앞에 순종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면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까? 들은 것만큼 순종하려고 합니까? 배운 것만큼 살아 보려고 몸부림치는 갈증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정상입니다. 그러나 듣고 다 잊어 버리십니까? 심각한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 산상수훈을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을 다 하신 후에 내리신 결론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 두셔야 합니다. 산상수훈은 화려한 도덕률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강론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7장 26절에 보면 주님께서 마지막 으로 경고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5,6,7장을 통해 주님께서 산상수훈을 다 말씀하셨습니다. 앞에 있는 모든 무리들과 제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감탄했습니다. 감동도 받았습니다. '아, 좋은 말씀이다.'라고 모두가 긍정합니다. 예수님의 권세 있는 말씀 앞에 모두가 다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런 그들에게 경고하십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즉, 말씀대로 사는 순종이 따라오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어 놓은 사람과 같아서 나중에는 하나도 남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누구 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이 사람이 산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진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21절에서 더욱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핵심이 무엇입니까? 이 문제를 놓고 우리가 종종 혼란을 일으킵니다. 아마 카톨릭의 영향도 조금은 있는 것 같습니다. 카톨릭에서는 구원받기 위해 필요한 것이 '믿음+선행'이라고 가르 칩니다. 따라서 행함에 대한 강조가 많고, 선행을 위해 테레사 수녀같이 한 평생 거룩하게 성자처럼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선행을 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꼭 일치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어떤 공로를 세워서 하나님 앞에 인정받으려고 하는 몸부림이 개신교 보다는 훨씬 더 강합니다. 그 이유가 교리에 있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믿음만으로는 부족하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행함이 따라와야 된다고 보는 것이 카톨릭의 교리입니다. 이렇게 한 쪽으로 치우쳐 버린 교리 때문에 믿음 보다도 행함을 더 강조 하다가 카톨릭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자리로 가 버린 것입니다. 참으로 불행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것이 오늘날의 개신교입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믿음을 제자리에 갖다 놓았습니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다. 그렇다면 행함은 무엇인가? 구원 얻는 믿음의 열매다.'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구원 얻는데 행함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거룩하게 행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는 그것이 선이 될 수가 없습니다. 시커먼 검정이 아무리 자기가 흰 것처럼 행동해도 시커먼 것은 시커먼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는 데는 믿음 외에 다른 조건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 믿음으로 구원 얻었습니까? 그러면 그 믿음은 꼭 행함이라는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야고보서 2장 17절은 분명히 선언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아무리 구원받았다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떠들어도 삶이 따라오지 아니하면, 순종이 따라오지 아니하면 그 믿음은 엉터리라는 말입니다. 엉터리 믿음이라면 그 믿음 가지고 구원받을 수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2장 8-10절에는 이 믿음과 행함의 관계가 아주 명료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오직 구원은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만 얻는 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 자체도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따라 나오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셨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선한 일을 행하기 위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 얻었 습니까? 그 다음에는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둘을 따로 나누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병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면서 삶이 따라오지 않는 병입니다. 그 결과 국회 위원이 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제 구실을 못했습니다. 심지어 대통령이 되고 장관이 된 사람들도 제 구실을 못하고 다 사람들 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교회를 지도한다고 하는 목사들도 강단에 세워 놓으면 유창하게 설교는 잘 하지만, 나가서 하는 꼴을 보면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는 것이 너무나 많이 드러나기 때문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 하고자 하는 열정을 가슴 속에 갖고 있지 아니하면 그 믿음은 엉터리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비바람이 몰아치면 나는 구원받은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얼마나 신랄하게 비판하고 책망하고 저주 했습니까? 그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말만하고 행하지 아니한다.'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우리 모두가 아픈 마음을 가지고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사랑의교회도 그렇고, 오늘 한국교회도 그렇고. 우리 모두가 지금까지 듣고 배운 것만 실천 하려고 해도 더 이상 성경을 배우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너무 많이 듣고, 너무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대로만 살면 더 이상 성경을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고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못박았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주님이 언제 믿음만을 강조하시고 행함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으셨습니까? 기독교는 그저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만약에 그런 인상을 주는 설교를 들으셨다면 그것은 믿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한 말이지, 행함을 과소 평가하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안에는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과거하 고는 다릅니다. 어거스틴이 이 사실을 잘 표현했습니다. '예수를 믿기 전, 곧 성령을 우리 마음에 모시기 전에는 우리는 죄 짓지 아니할 수 없는 자였다. 다시 말하면 순종할 수가 없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성령을 모시고 살기 때문에 죄 짓지 않을 수 있는 자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순종할 수 있는 자가 되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심으로 이제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살고 우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하나의 갈증처럼 우리 마음에 남게 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그런 갈증을 일으키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만, 성령을 모시지 않고 육에 속한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왜 기쁨이 없는지 아십니까? 순종이 따라가지 않아서 그렇습 니다. 왜 우리가 성령 충만하지 못합니까? 요즘처럼 훌륭한 목사님들의 설교를 밤낮 으로 들을 수 있는 시대에 살면서, 모든 면이 잘 갖추어진 교회에 다니고 양육을 받으면서 왜 우리가 성령충만하지 못하며 능력 있는 삶을 살지 못할까요? 그 배후의 원인을 찾아 들어가 보면 순종이 따라오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순종하고자 하는 자세가 갖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풍성한 은혜를 주실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순종도 하지 않는데 가슴이 뜨겁다면 그것은 자기 혼자 들떠서 그런 것이지 성령의 감동은 아닌 것입니다.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고 나가면서 가슴이 후끈후끈하여 '할렐루야, 할렐루야!' 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밉고 미운 시어머니가 눈에 탁 들어오자마자 또 감정이 복받쳐 오르고, 미움이 일어나십니까? '네 몸과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도무지 안중에 없습니까? 그래서 내 감정대로 반응하고, 감정대로 행동했습니까?
그렇다면 새벽기도에 가서 받은 은혜는 다 헛것입니다. 다 쓸 데 없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간절함을 가지고 있다 해도 완전하게 순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주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가지고 살면 하나님께서 배부르게 하시는 은혜를 풍성하게 주시는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세상에 보내신 이유가 잃은 양을 찾으라는 것임을 알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는 것이 주님의 그 간절한 마음인 것입니다. 수가성 여인, 창녀를 구원하고 나서 얼마나 주님의 마음이 기쁘셨던지, 제자들이 점심 드시라 고 갖다 드린 음식도 다 잊어버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 '내가 지금 저 여인을 구원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 하실까? 그러므로 나도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될 만큼 기쁘고 만족스럽다.' 벌써 예수님의 배가 부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놓고 공포와 싸우시면서 겟세 마네 동산에서 피눈물을 쏟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결정하셨습니다. '비록 무서운 길이 지만, 하나님께서 이 길을 가라고 하시니 나는 순종하리라. 십자가를 지리라.' 이렇게 결심하고 눈을 뜨시자 하늘에서부터 천사가 내려와 예수님에게 새 힘을 공급 했다고 했습니다.
주님 앞에 순종하기를 원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새 힘을 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하직하면서 주님이 유명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지 아니하노라.' 예수님의 마음에 평안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일치 하는 삶을 살기로 결단하고 순종하고 계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마음에 평안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움직일 수 없고, 아무도 흔들 수 없는 평안을 그 마음에 주셨습니다. '내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때를 따라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하시니 배부른 것입니다. 때를 따라 하나님께서 신비스럽게 나에게 새 힘을 공급해 주시고 능력을 주시니 배부른 것입니다. 상황은 절대 평안할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마음껏 엄마 품에서 젖을 먹는 아이처럼 만족스럽고 평안하고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배부름입니다.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은혜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이런 은혜를 받으면서 세상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네번째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나라를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 님의 나라가 무엇입니까? 아직도 예수 믿지 아니하는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어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서 구원받는 것이 완성되는 것을 일컬어서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나라는 지금도 점점 완성되어 가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뜻을 한 가지로 요약하라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좀더 좁은 의미로 말하면 사람들을 구원해서 자기 자녀 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하나님의 꿈입니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자나깨나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꿈을 갖고 삽니다. 그리고 그 나라가 임하도록 하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오늘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나의 젊음을 어떻게 준비하고 한 생을 보내야 할 것인가? 비록 지금 나이가 들었지만 남은 여생을 어떻게 마무리 할 것인가?'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입니다. 6장 3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사랑하는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모든 것'은 먹고 마시는 문제요, 세상 사람들이 가장 앞세우는 문제이며, 날마다 눈뜨고 하루를 시작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최우선의 과제 입니다. 과거에 풍족하게 살지 못하던 때 인사가 어떠했습니까? 눈만 뜨고 나면 '아침 먹었나요?' 또 하루를 보내고 저녁에 서로 만나면 '저녁 먹었나요?'가 인사였습니다. 항상 '먹었나? 먹었나?'가 인사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만큼 절박한 문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굶는 것만큼 무서운 것이 없지 않습니까? 너무나 배가 고프게 하루하루를 살았기에 '먹었나? 먹었나?'가 인사였고, 그래서 먹었다고 하면 그 사람은 참 복이 많은 사람이고, 못 먹었다고 하면 그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는 세상이 조금 살 만해졌기 때문에 만날 때마다 '아침 먹었나?'고 하면 오히려 모욕처럼 들릴 것입니다. 세상이 그만큼 좋아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세상 사람들의 최고의 관심사는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더 잘 먹고 더 많이 먹을까?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먹고 마시면서 즐길까? 그래서 건강해서 오래 살까?' 이것이 최고의 관심사입니다.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나라만큼 식당문화가 발달한 나라가 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온천지가 먹자판입니다. 식당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관광을 갔다 하면 먹자 관광이 아닙니까? 해외관광을 가면 그 나라의 여러 가지 문화를 돌아본다든지, 그 나라의 전통을 공부한다든지, 그 나라 사람들의 여러 가지 좋은 점을 찾아보려고 한다든지 하는 고상한 관광은 거의 없습니다.
관광을 그렇게 하는 사람은 열에 한 사람도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은 어떤 관광입니까? '먹자 관광'입니다. '어디 맛있는 것이 없나? 몸에 좋은 것이 없나?' 하면서 뱀도 잡아먹고 곰 발바닥이 있으면 값을 묻지 않고 사 가지고 들어오기도 합니다. 온통 먹자판이요, 즐기자 판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리나라에 10마리도 안 남았다는 사향노루를 밀렵꾼에게 청탁하여 3천만원에 사들여서 고아 먹은 사람의 심리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관심사가 무엇입니까? 잘 먹고 건강하고 오래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빼고 나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천대를 받아도 좋다. 120살까지만 살자.' 이것이 세상 사람입니다. 주님도 그것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사람은 먹고 마시는 것을 앞세우지만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를 앞세워라. 너희의 최우선 순위는 하나님의 나라요, 그의 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밤이고 낮이고 너희들은 그것을 앞세워라. 먹는 것 보다 앞세워라. 마시는 것 보다 앞세워라. 배고플 때도 그것을 앞세워라. 고통 당할 때도 그것을 앞세워라. 심지어 생명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에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을 앞세워라.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의 나라를 갈망하고 그 나라를 앞세우면 세상 사람들이 걱정하고 앞세우는 먹고 마시는 문제를 내가 알아서 다 처리해 주겠다.' 이것이 주님의 약속입니다. 우리가 누구인가를 다시 한번 깊이 인식합시다. 우리는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것만큼 우리의 가슴을 부풀게 하는 꿈이 없습니다. 따라서 내가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내가 성공한 사람이든지 실패한 사람이든지, 내가 청년이든지 노년이든지, 내가 성직자든지 평신도든지 가릴 것 없이, 여자든지 남자든지 가릴 것 없이, 어떠한 형편에 있더라도 우리의 관심사, 우리의 최우선 순위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안 믿는 사람을 전도해야 하고, 그 일을 위해서 교회생활을 열심히 해야 하며, 그 나라가 완성되기 위해서 내게 있는 것을 하나님 앞에 기꺼이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몸부림치는 자를 일컬어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윌리엄 바클리가 좋은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 생을 살면서 무엇을 성취하였는가, 어떻게 성공을 하였는가를 놓고 판단하시기보다는 우리가 평소에 어떤 꿈을 가지고 세상을 살았는가로 우리를 판단하신다.' 옳은 말이 아닙니까? 세상에 왔다가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성공했다고 하는 그 자체도 지나고 보면 다 별 볼 일 없는 것이 아닙니까? 다음 세대가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습니다. 아무리 비석을 세우고 야단법석을 해도 2,30년이 지나고 나면 그것이 그것입니다. 성공이나 성공하지 못한 것이나 나중에는 똑 같은 길을 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성공을 했는가, 세상에서 어느 정도 성취를 했는가에 따라 판단하시지 않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판단하십니까? '세상을 살 때, 네 마음에 꿈이 무엇이었는가?' 그것을 가지고 우리의 삶을 평가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 저의 꿈이었습니다. 그것이 저의 소원이요, 최우선 순위의 과제 였습니다.' 아마 우리가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칭찬하실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 된 종아' 여러분의 마음에 있는 꿈은 무엇입니까? 하늘을 한번 보십시오. 카메라로 저 북쪽에 있는 북극성을 중심에 놓고 밤새도록 셔터를 열어 놓고 기다려 보십시오.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북극성은 절대로 바뀌지 않습니다. 위치 변동이 없습니다. 그러나 케시오피아나 북두칠성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밤새 한 바퀴를 돕니다. 그래서 필름 위에는 케시오피아나 북두칠성이 한 바퀴 돈 자국이 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축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주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가 임하는 것이 우리의 꿈입니다. 이것은 변동이 없습니다. 이것을 축으로 놓고 우리의 생활이 항상 회전하는 것입니다. 남자나 여자나 빈부 귀천을 막론하고 매일 똑같은 생활을 반복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축은 하나님 나라이며 이런 삶을 사는 자를 일컬어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가슴에 있는 꿈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가슴에 있는 갈증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가슴의 최우선 순위가 무엇입니까? 사실 저나 여러분이 다 인정하는 것이지만 세상에 무슨 소망이 있습니까? 우리가 이 사회를 좀더 살기 좋은 사회로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이 나라를 좀더 자손들에게 자랑스럽게 넘겨주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 믿도록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임할수록 이 사회는 영향을 받게 되고 이 사회에 여러 가지 병이 치유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정치계가 달라지고 경제계가 달라지고 교육계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아지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저질 선거판을 한번 보십시오. 세금을 떼먹고 사는 사람들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수입을 놓고 보면 다른 사람과 비교가 안 될 만큼 고수입을 벌어들이는 사람들이 세금도 안 내고 살면서 뻔뻔스럽게 국회위원을 하겠다고 나섭니까? 잘 살고, 공부 많이 하고, 사회적으로 내로라 하는 집안은 웬 디스크 환자가 그렇게 많은지, 왜 군대는 그렇게들 안 가는지, 참 희한한 세상입니다.
우리나라가 아직도 어떤 면에서는 저소득 국가요, 저개발 국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의식 자체가 너무나 뒤떨 어졌습니다. 강남역을 지나가다가 전자 오락게임이 한참 요란한 가게 앞에 제가 저도 모르게 멈추어 섰습니다. 중학교 3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여학생 두 명이 게임기 앞에 서서 게임을 하는데, 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자총 이었나 봅니다. 바로 앞 전자판에 무엇인가 나오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니 사람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땅' 하고 총을 쏘자 그 사람이 피를 팍 튀기면서 죽는 것이었습니다. 미동도 하지 않고 중학교 3학년 여학생이 치마 입고 서서 전자총을 어깨에 매고 십분 정도 때려잡는데 한 100명은 죽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 게임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백발백중입니다. 전문가입니다. 나왔다 하면 피를 팍 쏟고 죽습니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저 딸아이들이 저런 식으로 자라서 나중에 무엇이 될까? 저 아이들이 엄마가 되고, 사회에서 어른이 되어 이 사회를 주도하게 될 때 얼마나 인간성이 사나워지고 잔인해질까?' 하는 생각이 들자 소름이 끼쳤습니다. 인간성이 무섭게 파괴되어 가고, 자연이 파괴되어 가고, 예수님이 재림하실 날은 점점 다가오는 이 마당에 우리의 최고의 관심사와 꿈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주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여야 합니다. 그 나라가 임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밤낮 꿈을 꾸고 갈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대각성 전도사역을 왜 합니까? 그것을 왜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위해서는 전도해야 되기 때문에 대각성 전도사역을 하고 '좋은 이웃되기 위한 캠페인'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보에 '1.1.9'라고 하는 재미있는 구호가 나옵니다. 한 사람이 한 가정을 구원합시다.
그래서 한 사람, 한 가정, 구원의 앞 글자를 따서 '1.1.9'가 나왔습니다. 우리가 이런 꿈을 가지고 매일매일 하루를 산다면 우리 이웃에 하나님의 나라가 날마다 임하지 않겠습 니까? 우리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가 전도해서 다른 교회 다 보내면 됩니다. 다른 교회로 보내고 다른 교회도 부흥시키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꿈입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마치 물 한 방울을 마시기 위해서 목말라 하는 사람처럼 갈증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삶의 자세입니다. 오는 7월 2일인가 3일인가 우리 교회에 와서 간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그 때 와서 꼭 들으시기 바랍니다. 과천 교회 김기동 집사님의 그 간증 중에 제 마음을 뜨겁게 하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분은 큰 회사를 2개 경영하는 사장입니다. 아침마다 자동차에 타서 시동을 걸 때 그는 습관처럼 이런 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 오늘도 믿기로 작정한 사람을 만나게 해 주세요. 하나님 믿기로 작정한 사람 만나서 전도하게 해 주세요.' 그의 말대로 하면 이렇습니다. '익은 고구마를 만나게 해주세요.' 이런 식으로 꼭 기도하고 그 다음에 하루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관심사는 전도, 그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나라, 이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느 날 역시 같은 기도를 하고 직장으로 출근을 하는데 빨간 신호등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잠시 기다리고 서 있는데 뒤에서 '꽝' 하고 자기 차를 받았습니다. 내려서 보았습니다. 그러자 뒤 차 기사가 나와서 '전적으로 제가 잘못한 것입니다.'라고 사과를 하는데 보니 범퍼가 반 이상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아마 하나님께서 오늘도 전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느라고 이런 사고가 났구나.'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사고를 낸 사람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범퍼라는 것은 받으라고 달아 놓은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말이 금방 나온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랬더니 상대방이 너무나 놀라서 명함,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이 세 가지를 내 놓고 '어느 것이든 가지고 가십시오. 그리고 제가 모든 것을 배상해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락하기로 하고 회사로 왔답니다.
점심때가 가까워져서 전화를 했습니다. 그 견적을 내 보니 한 100만원 정도 들어갈 피해를 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전화를 했습니다. '네, 아침에 받친 사람인데요. 수리를 하려면 돈이 좀 들겠지만 저는 수리 안 하고 그대로 끌고 다니겠습니다. 그 대신 오늘 점심이나 한끼 사 주십시오.' 그래서 만났습니다. 그 분은 모 외국회사 부사장이 었습니다. 김 집사가 한 시간 동안 자기 간증을 겸해서 예수 믿으라고 전도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후에 그 상대방이 자기도 미국에 있을 때 교회를 몇 년 다녔지만 지금은 다니지 않고 있다고 하더랍니다. '범퍼는 받으라고 달아 놓았다는 말이라든지, 점심이나 사달라고 하는 말을 듣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까 예수 믿기 때문에 그랬군요.' 이렇게 해서 그 부사장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김 집사가 하고 있는 사업 중에 하나가 잘 안 되고 있었습니다. 아주 어려운 사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그 부사장이라는 사람이 이리 저리 도움을 주어서 지금은 그 사업이 불티나는 사업으로 바뀌었습니다. 김 집사가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앞세우고 살았더니 내 회사를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일으켜 주셨습니다.' 너희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세상 사람이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 내가 책임져 주겠다고 주님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바로 이 김 집사와 같은 삶입니다. 우리의 삶의 초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무엇을 놓고 갈증을 느낍니까? 무엇을 놓고 배고픔을 느낍니까? 무엇을 놓고 아침 저녁 꿈을 꿉니까?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 나라의 꿈을 주시고 열정을 주시고 갈증을 주시고 배고픔을 주셔서 우리의 삶 전부가 그것을 중심으로 하루하루 이어지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기쁨으로 찬양 127장에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이사야가 이사야서 11장에서 그린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요, 꿈입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 사막에 꽃이 피어 향내 내리라/ 주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가 되면은 사막이 꽃동산 되리/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어린이들 함께 뒹구는/ 참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사막에 숲이 우거지리라/ 사막에 예쁜 새들 노래하리라/ 주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가 되면은/ 사막이 낙원 되리라/ 독사 굴에 어린이가 손 넣고 장난쳐도 물지 않는'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는 그 나라, 그 나라가 우리의 꿈이요, 우리의 갈증이요, 우리의 배고픔입니다.
그 나라가 오기 전에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과 기쁨과 평안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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