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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각성이 필요한 때다 / 롬 13:11~14

by 【고동엽】 2021. 12. 23.

지금은 각성이 필요한 때다 / 로마서 13:11~14




세상을 살다 보면 가끔 정신이 번쩍 드는 때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매년 한번씩 겪는 연말의 충격이 아닌가 합니다. 한 장 남은 달력을 쳐다보면서 또는 이제 하루 남은 한 해를 생각하면서 '벌써 세월이 이렇게 지나갔구나! 내 나이가 벌써 몇 살이지? 정말 너무 빠르다.' 하는 독백을 마음 속에 주고 받으며 충격을 받는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긴 합니다.


시인 이해인이 쓴 시구 가운데 마음에 감동을 일으키는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12월만 남아 있는 한 장의 달력에서 나뭇잎처럼 우수수 떨어져 나가는 시간의 소리들은 쓸쓸하면서도 그립고 애틋한 여운을 남깁니다.' 이 말에 연말이 되면 누구나 공감을 할 수 있는 어떤 감정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말을 맞아 우리는 다시금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호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한 해를 보내고, 새 해를 맞는 시점에서 내가 그 동안 잘 살았는지, 영적으론 건강한지, 혹 하나님 앞에 부끄럽진 않은지, 취해야 될 것과 버려야 될 것이 무엇인지 돌이켜 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11절 말씀을 보면,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우선 여기에 직접적인 메시지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본문 자체가 전해주는 메시지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기는 영적으로 말하면 한밤중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온통 자기 자신, 돈, 쾌락에만 쏠린 한밤중의 상태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어떻게 하면 많이 쌓느냐, 어떻게 하면 많이 즐기느냐.'가 사람들의 마음을 온통 사로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13절에 보면 영적으로 한밤중에 사는 사람들이 범하는 죄와 그들이 추구하는 나쁜 것들을 6가지나 지적하고 있습니다.


먼저 방탕입니다. 방탕은 글자 그대로 밤거리를 난장판으로 만드는 추태를 말합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이 어떤 모습인지 잘 압니다. 바로 술 취하는 것입니다. 이런 술 취함은 오늘 우리 한국 사회에서는 치유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의 병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성이나 나이에 관계없이 모두가 술판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양주를 수입하는 국가'라는 악명 높은 별명을 얻은 지도 이미 오래 전입니다. 술 취하는 것을 이해하거나 동정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끊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술을 끊지 못하고 점점 취해 만 갑니다.


그 다음은 음란입니다. 음란은 금지된 침상에 오르는 악한 행위를 가리킵니다. 오늘 우리 사회를 보십시오. 10대라고 거룩합니까? 10대, 30대, 50대 구별이 없습니다. 얼마나 더럽고 악한 짓을 공공연히 하는지 모릅니다. 배웠든 안 배웠든 상관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하나같이 음란에 눈이 충혈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호색이란 얼굴에 철판을 깔고 사는 사람들의 파렴치한 행동을 가리킵니다. 요즘 TV에서 신물 나게 보는 얼굴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호색입니다.


이런 죄악들이 공공연히 저질러지고 있는 세상을 일컬어 하나님께서는 밤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죄악의 밤은 깊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밤이 깊을수록 여명의 빛이 뒤따라 옵니다. 이것은 영적인 진리에도 그대로 통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었을 때보다 가까이 왔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 말은 밤이 깊으면 깊을수록 구원은 더 가까이 다가온다는 말입니다.


요즘 신문 보도 기사를 보면 경찰들이 주로 새벽 3시에 음주운전 단속을 나간다고 합니다. 그 때쯤 술 취한 사람들이 귀가하려고 밖으로 쏟아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왜 새벽 3시 이후에 난장판이 벌어집니까? 새벽이 가까이 오기 때문입니다. 밤이 깊으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까이 옵니다. 우리에게 이런 어두운 밤을 보내는 아픔이 있지만, 그 반면에 구원이 다가옵니다.


그러면 이 구원에 대해서 다시 한번 확실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 시점에서 구원을 말할 때는 "이미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를 믿고 중생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확신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확신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오늘 밤이라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예, 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또 현재 시점에서 "우리는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중생은 받았지만 궁극적인 구원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최종적인 구원을 향해 가고 있는 노상에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구원을 받은, 또 받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미래의 시점에서 "우리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미래에 있습니다. 이 구원은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완성됩니다. 그리고 재림과 함께 우리에게 나타날 엄청난 영화를 가리킵니다. 그분이 재림하실 때 우리의 썩을 몸이 썩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몸으로 다시 갈아 입게 됩니다. 그래서 신령한 몸으로 바뀝니다. 동시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과 더불어 영원토록 사는 축복의 새 시대가 열리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구원은 예수님의 구원을 가리킵니다. 동시에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하나님 나라로 새 몸을 입고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 엄청나고도 황홀한 영화가 지금 우리 앞에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이렇게 어둡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아무리 어두워도 결국 이 어두움이 우리의 구원을 빨리 단축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 정욕의 잠을 자는 사람이 없을 것으로 믿습니다. 방탕하고, 술 취하고, 음란하고, 호색하고, 시기하고, 쟁투하면서 정신 없이 밤거리를 헤매는 인생을 사는 자는 하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이 있습니다. 바울이 쓴 편지의 수신자는 술 먹고 비틀거리는 세상 사람이 아닌 예수 잘 믿는다고 소문난 로마 교인이었습니다. 그들을 향해 지금은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곧 교회를 다니는 우리에게 하는 말이나 다름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깊은 정욕의 잠에 빠진 자는 없을지라도, 이 어두운 밤의 영향을 받아 모호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에 주는 경고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로 옷을 입은 사람이어야 하는데, 어떻게 보면 정욕의 옷을 입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옷을 입었는지, 정욕의 옷을 입었는지, 깊은 잠을 자는 사람인지, 조는 사람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운 이중생활을 할 수 있으므로 바울이 이 말씀을 성도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정욕적인 생활을 하지 않아."라며 나와 관계없는 말씀으로 보지 말고, 혹시 나도 세상의 영향을 받아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정욕의 잠을 자고 있진 않은지 한번 돌아봐야 합니다.


제가 어릴 때 우리나라가 얼마나 가난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옷이 없어서 주일날 이상한 차림으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가령 양복 저고리에 한복 바지를 받쳐 입고 나오는 것입니다. 요즘 같으면 그런 사람을 정신이 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그런 것을 자연스럽게 봤습니다. 양복 바지에 한복 저고리를 입고 나오는 사람은 드물었지만 한복 바지에 양복 저고리를 입고 나오는 사람은 가끔 있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어정쩡하면 안됩니다. 한복이면 한복이고, 양복이면 양복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으면 그리스도 사람답게, 정욕으로 옷을 입었으면 아예 세상 사람답게 생활해야지 이것도 저것도 아닌 모습으로 신앙생활하면 안 됨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1장 3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똑같은 경고를 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여기에서 '너희'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말합니다. 또한 예수 믿는 우리 모두를 향해 하시는 말씀입니다. 말세를 놓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어두운 밤이 짙어가는 시간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이 뜻밖에 임할 수 있으므로 "술 취하지 말라. 방탕하지 말라. 염려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세상적으로 재미있게 사는데 마음이 자꾸 끌려갑니까? 돈을 쌓는데 신경을 곤두세웁니까? 그렇다면 굉장히 위험합니다. 주일날 교회 와서 예배는 드릴지 몰라도 잘못하면 잠을 자거나 졸 수 있습니다. 정욕의 옷을 입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자신을 돌아봅시다. 만에 하나라도 나에게 이런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스스로 자신을 흔들어 깨우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그럴 때 비로소 우리가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주님만 사랑합니까? 주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주님을 위해 헌신하려는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들입니다. 내가 어느 쪽에 해당하는지 자신들을 돌아보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본문이 주는 직접적인 메시지입니다.


두 번째로 이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간접적인 메시지를 생각하려고 합니다. 간접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 본문의 원래 뜻은 아니지만 본문을 읽으면서 연상되는 여러 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진리가 있습니다.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 말씀을 마음에 묵상하면서 연달아 깨닫게 되는 진리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것을 일컬어서 저는 간접적인 메시지라고 합니다.


지난 한해 동안 평범하게 반복하면서 보낸 365일을 돌아봅시다. 아쉬움이나 후회가 없었는지 한번 돌이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는 사람처럼 한 해를 보냈는지, 혹은 깨어있는 사람처럼 한 해를 보냈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런 각성은 소망있는 미래를 꽃피우기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세네 가지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얼마나 성실하게 살았는지를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즉 매일 매일 최선을 다해 인생을 살았는지 한 해를 돌아보자는 말입니다. 인생이란 생각보다 짧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이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욥기서 14장 1, 2절을 보면 얼마나 실감나게 이 사실을 묘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 그 발생함이 꽃과 같아서 쇠하여지고 그림자같이 신속하여서 머물지 아니하거늘.' 이와 같이 인생을 세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짧다. 빠르다. 괴롭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인생을 잠깐 살다 가면서 '세월아, 네 월아' 하며 적당히 살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스위스에 있는 한 유식한 노인이 컴퓨터를 가지고 자신의 인생 80년을 분석해 봤다고 합니다. 그러자 80년 가운데 잠자는데 26년, 먹고 마시고 식사하는 데 6년, 사람을 기다리며 약속을 지키는 데 5년, 그리고 직장에서 일하는 데 21년을 보낸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소하게 들어가는 시간들을 계산하고 나자 실제로 '내 시간이다. 정말 가치 있고 보람되게 보냈다.'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은 80년 가운데 2년이나 2일도 아닌 46시간 밖에 안 남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빠르고 짧은 인생이기에 우리가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사람은 나이에 따라서 관심사와 집중하는 일이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논어라는 책을 성경처럼 읽진 않지만 그 책도 성인이 쓴 지혜의 글이기에 가끔 들어야 될 말씀들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10대 중반부터는 '지학'(志學)이라 하여 학문에 뜻을 두고 살아야 된다고 합니다. 20대가 되면 '약관'(弱冠)이라고 하는데 어른으로서 첫발을 내딛는 시기이므로 인생의 목표를 세우는 데 집중해야 된다고 합니다. 30대는 '이립'(而立)이라 하여 자기 전문영역에 기초를 열심히 닦아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되려는 꿈을 가져야 된다고 합니다. 40대는 '불혹'(不惑)이라 해서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세상 일에 흔들리지 않는 나이가 됩니다. 이때는 자기 얼굴을 책임질 수가 있는 프로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얼굴 값을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50대는 '지천명'(知天命)이라 해서 하늘의 뜻을 아는 나이로 전체를 꿰뚫는 통찰력을 가지고 모든 상황을 통합, 조정할 수 있는 넓은 시야를 지닌 사람이 되어야 된다고 합니다. 60대는 '이순'(耳順)이라고 하여 모든 면에서 원숙한 자리에 이른다는 말입니다. 이 때는 자기를 이을 후배를 양성하고 세우며,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데 전력을 쏟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지혜라고 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나이에 따라서, 인생의 계절에 따라서 자기가 성실하게 살아야 할 이유와 목표가 있는 법입니다. 적당히 넘기면서 보낼 수 있는 그런 인생이 아닙니다. 시간은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입니다. 따라서 낭비하는 것 자체를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번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잘못된 일에 많은 시간을 쏟아 붓는 어리석은 나날을 지난 한해 동안 보내면서 살진 않았는지, 무엇인가 가치 있는 일을 이룰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아니 지난 한해 동안 자신의 삶을 쓰레기통의 휴지처럼 아무렇게나 구겨 버리진 않았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해가 가기 전에 하나님 앞에 잘못을 고백하고, 다시는 이런 바보 같은 인생을 살지 않겠다고 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자다가 깨는 각성인 것입니다. 이런 각성이 없이 새해를 맞는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둘째로 얼마나 감사하며 살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감사할 것들을 무심코 넘길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감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평하는 일이 많습니다. 감사는 크고 화려한 무엇에만 해당되고, 작고 평범한 것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당연하거나 평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에 대해서 감사하는 습관을 지니고 지난 한 해를 살았더라면 훨씬 더 건강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지난 주쯤 소망관 지하에 있는 사랑의교회 중보기도실에 가봤습니다. 그곳은 갈 때마다 은혜가 넘칩니다. 왜냐하면 중보기도하는 방마다 낮이고, 밤이고 기도하는 분들이 끊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침 제가 방문했을 때 2층에 빈 방들이 몇 개 있었습니다. 그래서 열쇠를 얻어 그 방에 들어가 봤습니다. 한 시간 가까이 앉아 있는데, 중보기도에 대한 가이드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중보기도 내용들이 환자를 위한 기도, 교회의 담임 목사와 교역자를 위한 기도, 그 밖에 특별기도, 긴급기도 등 기도해야 될 카드들이 항목마다 분류되어 놓여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환자를 위한 기도카드를 손에 들었는데 묵직했습니다. 곧 아픈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것만 가지고 기도해도 한 시간은 걸릴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있는 기도를 보면서 새삼스럽게 느낀 것이 있습니다. 어느 자매가 내놓은 기도 제목입니다. "저는 변비가 너무 심해서 화장실에 들어가서 어떤 때는 두 시간 동안 씨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마음대로 안 되서 고통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 기도제목을 읽으면서 뭔가 강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정말로 화장실에 들어가서 감사할 것이 한두 가지겠는가?' 이런 자매를 생각하면 감사할 일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든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감사하지 않습니다. 화장실에 앉아서도 불평하는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시간을 보낼 때가 많습니다. 당연한 것 중 한 가지라도 감사하면 내 삶이 바뀔 수 있을텐데, 그렇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령합니다.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가 나란히 나옵니다. 그 이유는 이 세 가지가 서로 맞물려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것 하나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자의 마음 속에서 기쁨이 나오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의 원천이 됩니다. 감사하면 그 마음에 기쁨이 솟아오르게 됩니다. 그러면 모든 은혜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 줄 알게 되어, 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은 같이 따라 다닙니다.


우리가 이 말씀대로 살았더라면 지난 한해 동안 얼마나 풍요로운 삶을 살았을까요? 작고 하찮아 보이는 하나 하나에, 당연하게 여겨지는 하나 하나에 감사의 리본을 다는 사람의 풍요로움을 누가 앗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의 소박한 기쁨을 누가 방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행복을 누가 짓밟을 수 있겠습니까?


성탄을 앞두고 참 감동적인 선물을 하나 받았습니다. 우리 교회 어느 집사님이 보낸 선물입니다. 그분에겐 미안하지만, 제가 받은 감동이 있어서 익명으로 이렇게 인용을 합니다. 보통 목사에게 선물을 보낼 때면 정성을 쏟아, 어떤 때는 좀 비싼 것을 선물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렇다고 선물이 무수히 들어온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가끔 목사가 생각나서 보내는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선물을 보냅니다.


그런데 이 자매가 보낸 선물은 특이했습니다. 손수 정성을 다해 만든 쿠키를 종이 바구니에 담아 카드 하나를 끼워 보낸 것입니다. 그 쿠키 만드는 데 돈이 얼마나 들겠습니까? 그 소박한 선물을 받아 들고는 전혀 새로운 감동을 느꼈습니다. '이건 뭔가 있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카드를 열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목사님, 감사한 마음을 담아서 작은 정성을 드립니다. 저희 가정은 13평 짜리 아파트에 전세로 살고 있지만, 늘 마음이 천국이랍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 글을 읽는 순간, '야, 이 자매는 정말 사소한 것을 놓고 감사할 줄 아는 자매이구나! 아무것도 아닌 것, 남이 불평할 수 있는 것들은 들고 하나님 앞에 감사할 줄 아는 자매구나! 그러니까 13평 아파트에도 감사하고, 그 감사가 넘쳐 기쁨이 충만하니까 천국을 이룬다고 하는 말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구나!' 이렇게 생각하자 그 자매의 모습이 제 눈에 자꾸 떠올랐습니다. 물론 얼굴은 잘 모르지만 얼마나 그 자매가 아름답게 보였는지 모릅니다. 감사하는 자의 마음에는 이와 같이 환경을 초월한 행복이 있습니다.


지난 한해 동안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봅시다. 기쁘고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던 나날인데 감사가 부족해서 무심하거나 어둡게, 또는 불평불만을 가지고 보내진 않았습니까? 만일 그런 날들이 있었다면 다시 한번 각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다시는 이렇게 바보스러운 인생을 살지 않겠다.'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감사하는 자만이 누리는 행복가운데 살지 못하고 환경의 노예가 되어 비참해지는 사례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 바보 같은 인생 을 다시는 살지 않겠다고 각오를 새롭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 번째로는 얼마나 남을 위해 살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성실하고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았다고 해도, 자기만을 위해서 살았다면 그것은 의미를 잃어버린 텅 빈 인생입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십시오. 우리가 남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는 삶이어야만 의미 있고 보람된 알찬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아야 짧은 인생을 길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만을 위해, 나만을 생각하면서 살면 그것은 텅 빈 인생입니다. 우리가 그런 인생을 살지는 않았는지 조용히 성령의 조명 아래서 우리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남을 위해 사는 삶을 살면, 나도 행복해지고 나를 보는 다른 사람도 행복해지는 법입니다.


미국 하버드 의대에서 보고서를 내면서 신조어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곧 '테레사 효과'라는 말입니다. 인도의 성녀, 테레사 수녀에 대해서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하버드 의대에서 테레사 수녀의 헌신적인 봉사 활동을 전부 연구하던 중 이 말이 생겼는데, 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테레사 수녀처럼 남을 위해 헌신적으로 사는 사람을 보면, 그리고 그런 사람을 생각하면 자기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까지도 착해지려는 마음이 몸에도 영향을 주어 신체 내에서 바이러스와 싸우는 면역 물질인 IGA가 많이 분비된다고 합니다. 곧 테레사 수녀처럼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을 생각만해도 내가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보기만 해도 내 마음이 착해지고 그것이 몸에 영향을 주어 면역체가 생겨남으로 건강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테레사 효과입니다.


최근에 저도 이런 테레사 효과를 실제로 경험했습니다. 그 사람만 생각하면 '저런 사람이 있다니 인생 살 만하다. 정말 살맛이 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 그런 생각을 하면 제 마음도 착해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비록 그 사람만큼 살지는 못해도 그렇게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마음이 우러나는 것입니다. 자연히 그것이 제 몸에도 영향을 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테레사 효과라는 것입니다.


아마 다음 기사를 신문에서 보셨을 것입니다. 저는 그 기사에 너무 감동을 받은 나머지 그 기사를 성경의 뒤쪽에 끼워 넣고 스티커로 붙여 놓았습니다. 성경을 펼 때마다 그 사람의 기사와 가족들이 활짝 웃고 찍은 사진이 나옵니다.


충남 공주 어느 파출소에서 근무하는 이훈규 경장이라는 분의 이야기입니다. 지위가 경장이니 박봉에 얼마나 어려운 생활을 하겠습니까? 그것도 20평 남짓한 작은 주택에 장인장모와 자기 부부와 다섯 살 난 쌍둥이, 그리고 갓 태어난 아들, 이렇게 일곱 식구가 산다고 합니다. 저도 그런 생활을 살아봤기 때문에 얼마나 여유가 없을지는 다 압니다.


그런데 한번은 이 순경이 어느 집을 찾았나 봅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나이의 남매가 사는 집인데, 부모는 도망가버리고 없었습니다. 조사해 보았더니 호적도 되어 있지 않은 아이들이었습니다. 부모도 없이 살면서 남의 집을 다니면서 훔쳐먹다가 이제 소문이 난 것입니다. 순경이 가서 보니 그 날 따라 찬물에 라면을 불려서 먹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비참한지 가서 말도 한마디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돌아와서 아내를 붙들고 이렇게 말했답니다. "그 아이들 너무나 불쌍한데,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와서 키웁시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아내가 펄쩍 뛰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내가 남편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자꾸 마음이 캥긴 나머지 남편이 출근한 다음 직접 그 아이들이 사는 집으로 가봤답니다. 가서는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오면서 내내 울었답니다. 그리고는 퇴근한 남편을 붙들고 그 아이들을 데리고 오자고 합의했습니다. 데리고 와서는 호적도 따로 만들고, 생활 보호 대상자로 지정받아 매달 받는 생활 보조금 26만원을 남매의 이름으로 통장에 저금을 하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두 아이를 데리고 산 지가 6년이나 됐다고 합니다. 이제 그 아이들이 벌써 중학생이 됐습니다. 그 아이들과 함께 찍은 가족 사진을 보면서 제 자신이 테레사 효과를 맛본 겁니다. '목사보다 낫다. 목사보다 열 배 낫다. 그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인지 안 믿는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정말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 신나는 이야기이다. 정말 살맛 나는 이야기다.' 이렇게 남을 위해 사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잊지 않기 위해 그 기사를 성경 속에 끼워 놓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끔 교회 안에서 믿음은 좋아 보이는데 너무나 이기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내 가정, 내 자식, 내가 편안하게 사는 것 밖에 모릅니다. 기도를 해도 자기만을 위한 기도로 그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삶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3절의 말씀입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특징은 예수님을 본받아서 남을 위해 살려고 하는 애틋한 마음을 가진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나 자신만을 생각하던 감옥에서 자유하게 됩니다. 그리고 남을 위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하루 하루를 사는 것이 정상입니다. 이를 위해 여러분들이 헌금하는 것입니다. 드려진 헌금 가운데 상당 부분이 남을 위해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이미 남을 위한 삶에 동참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좀더 우리 마음을 나 중심에서 다른 사람 중심으로 바꾸어 놓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 보십시오. 얼마만큼 남을 위해서, 그리고 남을 위하려는 마음가짐으로 하루 하루를 보내며 알찬 삶을 살았습니까? 만약 그러지 못했다면 이 시간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감동하셔서 다시는 그런 어리석은 생활, 텅 빈 인생을 살지 않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하길 바랍니다. 이것이 자다가 깨는 자의 삶입니다. 새해를 앞두고 우리 모두 이와 같은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정욕의 잠을 자서는 안됩니다. 깨어야 합니다. 그리고 연말을 맞아 우리 삶을 한번 돌아봅시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치고 다시 각성합시다. 얼마나 성실하게 살았습니까? 얼마나 감사하며 살았습니까? 얼마나 남을 위해 살았습니까? 이 사실을 하나 하나를 점검하면서 우리 자신에게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깨어나야 합니다. 다시는 그런 삶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새롭게 각오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와 같은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하십시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연말을 맞아 우리 모두가 다시 한번 자기를 돌아 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을 주신 것 감사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이 어두운 밤과 같은 세상을 살면서 세상 사람들처럼 정욕의 옷을 입고 잠을 자진 않는지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또는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정욕의 옷을 입으면서 이중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이 아닌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주여, 우리 자신이 얼마나 성실하게 살았고, 얼마나 감사하며 살았고, 얼마나 남을 위해 살았는지 한해 동안 돌아보면서 조금이라도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주님 앞에 회개하고, 다시는 좋지 못한 삶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새로운 각오를 할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원합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각오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소생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주여, 그리하여 우리 모두 자다가 깬 사람처럼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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